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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노르웨이의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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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민음사>

 

 

고도성장만이 있던 60년대 일본

 

지금과는 다르게 일본도 에너지가 넘치던 시절이 있었다. 1960년대부터 일본은 고도성장의 길로 들어섰다. 1960년 일본의 GDP는 전 세계 국민총생산의 2.8%에 불과했지만,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이미 세계 5, 6위권의 경제대국이 되었고 1969년에는 당시 소련을 제외한 서방세계에서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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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도쿄

 

빛은 어둠과 함께 존재한다. 고도성장이 주는 넘치는 에너지 이면에는 숨죽인 개인들이 있었다. 오직 회사와 국가만이 존재하는 사회였다. ‘잃어버린 나’가 있었고 ‘끊어진 관계’가 있었다. 청년들은 격렬하게 일본식 자본주의에 저항했으나 결과는 ‘변절과 실패’였다. 1969년 ‘와타나베’는 스무 살이었다. 

 

그리고 1986년 현재, 두꺼운 비구름을 뚫고 함부르크 공항에 착륙하려는 보잉 747기의 좌석에는 서른일곱 살의 와타나베가 앉아 있었다. 착륙 직전의 기내 스피커에서는 ‘비틀즈’의 ‘노르웨이의 숲(norwegian wood)’이 흘러나왔고 음악은 와타나베를 다시 스무 살의 시절로 돌아가게 했다.

 

 

그 멜로디는 늘 그랬듯 나를 혼란에 빠뜨렸다. 아니, 그 어느 때보다 격렬하게 마구 뒤흔들어 놓았다.

 

비틀즈 – 노르웨이의 숲

 

그 음악이 와타나베의 잃어버린 시간과 죽거나 떠나간 사람들을 떠올리게 했다. 이제 그가 다시는 경험하지 못할 추억 속의 시간들이 되살아났다. 그 시간 속에서 와타나베는 초원 속에 나오코와 함께 있었다. 비가 먼지를 깨끗이 씻어낸 후의 선명한 초원이었다. 10월의 청량한 바람 속에 갈대꽃이 흔들리고 있었고 와타나베는 작고 차가운 ‘나오코’의 손을 쥐고 있었다.

 

그때 나오코는 와타나베에게 자기를 좋아하냐고 물었다. 와타나베는 망설임 없이 물론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나오코는 자신의 부탁을 들어달라고 했다.

 

“나를 언제까지나 잊지 마. 내가 여기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 줘.”

 

함부르크 공항에서 와타나베는 이미 희미해져 버린, 희미해져 가는 기억들을 떠올리려고 애썼다.  

 

 

17살의 우리 셋

 

그런 탓에 기즈키는 나를 데리고 더블 데이트 하는 걸 포기하고 셋이서 어딘가로 놀러 가거나 이야기하거나 했다. 기즈키와 나오코와 나, 셋이서. 생각해보면 참 이상한 일이지만, 결과적으로 그게 가장 편했고 모든 게 매끄러웠다.

 

고등학생 와타나베에게 ‘기즈키’는 유일한 친구였다. 기즈키에게는 어린 시절 소꿉친구이자 현재 여자친구인 ‘나오코’가 있었다. 여자친구가 없는 와타나베를 위해 셋은 늘 함께 다녔다. 기즈키는 와타나베가 소외감을 느끼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했다. 셋의 만남은, 기즈키가 사회자이고 와타나베는 게스트이며 나오코는 어시스턴트의 역할을 하는 재미있는 토크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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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상실의 시대' (노르웨이의 숲)

 

가끔씩 기즈키가 자리를 비워 단 둘만 있게 되면 와타나베는 어색했다. 그는 나오코와 매끄럽게 대화를 이어 가지 못했다. 와타나베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어린애처럼 그냥 물을 마시거나 테이블 위에 놓인 것들을 괜히 만지작거렸다. 이럴 때면 항상 와타나베는 기즈키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셋은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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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셋의 행복은 곧 끝났다. 기즈키가 와타나베와 당구를 친 날이었다. 평소와는 다르게 기즈키는 내리 세 게임을 모두 이겨버렸다. 그리고 그날 밤 기즈키는 자기 집의 차고에서 자살했다. 

 

모든 창틈을 테이프로 바르고 혼다 N360의 배기 파이프에 호스를 연결하여 시동을 걸었다. 그의 부모님이 발견했을 때, 이미 기즈키는 죽은 후였다. 유서도 없이 기즈키는 그렇게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끝냈다.

 

죽음은 삶의 대극이 아니라 그 일부로 존재한다.

 

그날 이후 열일곱 소년, 와타나베의 삶은 바뀌었다. 소년의 삶 한가운데에서 모든 것이 죽음을 중심으로 회전했다. 기즈키의 죽음과는 별도로 시간은 계속 흘렀다. 와타나베와 나오코는 대학생이 되었고 스무 살이 되었다. 오직 기즈키만이 열일곱 살이었다.

 

그녀는 스무 살이 되었다. 그리고 가을이면 나도 스무 살이다. 죽은 자만이 영원히 열일곱이었다.

 

 

다시 만난 그녀와 오르가슴

 

일요일이 되면 죽은 친구의 여자 친구와 데이트를 했다. 도대체 지금 내가 무엇을 하는지, 무엇을 하려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대학생이 되어 기숙사 생활을 시작한 와타나베는 우연히 나오코를 다시 만났다. 기즈키의 장례식 이후 처음으로 다시 보게 된 것이다. 주오선 전철이었다. 일 년 만에 다시 만난 나오코는 몰라보게 여의어 있었고 와타나베의 기억 속 모습보다 훨씬 더 예뻤다.

 

둘 다 특별한 볼일이 없이 탄 전철이었다. 나오코가 요쓰야 역에서 내리자고 했을 때 와타나베는 아무 생각 없이 따라 내렸다. 별로 할 말도 없었다. 나오코가 앞에서 걸었고 와타나베는 그 뒤를 따랐다. 나오코의 등과 검고 긴 머리카락이 보였고 그녀가 고개를 살짝 돌리면 조그맣고 하얀 귀가 보였다.

 

둘은 한참을 걷다 메밀국수 집에 들어갔다. 별로 중요하지도 않았고 따라서 기억나지도 않는 대화를 했다. 그때 나오코는 와타나베에게 “우리 또 만날 수 있을까?” 물었다. 와타나베는 나오코 팔에 있는 솜털들이 전등 불빛에 금빛으로 예쁘게 물드는 것을 보며 그러자고 했다.

 

그날 이후 와타나베는 일요일마다 나오코와 데이트를 했다. 와타나베는 데이트라는 말을 쓰고 싶지 않았지만, 그 말 외에는 적당한 표현이 없었다. 둘은 만나면 걸었다. 항상 나오코가 앞장서 걸었고, 와타나베는 그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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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끝나갈 무렵, 차가운 바람이 불 때 나오코가 와타나베의 팔에 몸을 기댔다. 와타나베는 나오코의 숨결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겨울이 되면서 나오코의 눈은 점점 더 투명해지는 듯했다.

 

그날은 나오코의 스무 살 생일이었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오코의 방에서 둘은 와타나베가 사 온 케잌을 마주하고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레코드를 틀었다. 음악이 흘렀다. 시간은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나오코는 무언가 자꾸 말을 하려고 했으나 오래 가지는 못했다.

 

갑자기 나오코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곧이어 그녀는 웅크린 채 토해내듯 울기 시작했다. 와타나베가 손을 뻗어 무의식적으로 나오코를 안았다. 그의 셔츠가 나오코의 눈물로 흠뻑 젖었다. 둘은 옷을 벗었다. 옳은 행동인지는 몰라도 그것 말고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녀는 흥분한 상태였고, 혼란에 빠졌고, 나를 통해 그것을 가라앉히고 싶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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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코는 심하게 아파했다. 와타나베의 예상과 달리 나오코는 기즈키와 자지 않았다. 와타나베는 천천히 움직였다. 그리고 오랫동안 시간을 들여 사정했다. 그때 나오코는 와타나베의 몸을 꼭 끌어안고 소리를 질렀다.

 

내가 지금까지 들어 보았던 오르가슴 소리 가운데에서 가장 애달팠다.

 

와타나베는 왜 기즈키와 자지 않았냐고 물었다가 바로 후회했다. 나오코가 다시 울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와타나베는 이불에 그녀를 따뜻하게 눕혔다. 그리고 창밖에 내리는 비를 보며 담배를 피웠다. 그날 이후 나오코는 자취를 감췄다. 와타나베는 외로웠다. 그리고 기즈키의 죽음이 자꾸 떠 올랐다.

 

 

‘나오코’에게 ‘기즈키’란

 

만일 나와 네가 아주 정상적이고 평범한 상황에서 만나 서로에게 호감을 느꼈다면 도대체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내가 정상적이고 너도 정상적이고. 그리고 기즈키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와타나베는 넉 달 만에 온 나오코의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새벽 첫차를 타고 교토에 도착했다. 나오코를 면회하기 위해서였다. 나오코는 교토의 깊은 산 속에 있는 요양원 ‘아미사’에 있었다. 와타나베를 맞이해 준 것은 ‘레이코’ 씨였다. 그녀는 요양원의 음악선생이자 환자였고, 나오코의 룸메이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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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안내에 따라 와타나베는 소파에 앉아 잠시 눈을 감았다. 전날 제대로 자지 못하고 첫차를 탔다. 피로했다. 불현듯 기즈키와 오토바이를 타던 날이 떠올랐다. 기즈키의 가죽점퍼 냄새가 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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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떴을 때, 바로 눈앞에 나오코가 있었다. 혹시나 자신의 기억이 자아낸 이미지가 아닐까 했으나 그것은 진짜 나오코였다. 나오코는 엷은 색깔로 드러난 먼 풍경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오코가 옆에 앉아 몸을 기댔다. 마치 와타나베의 체온을 확인이라도 하는 듯했다. 와타나베는 가만히 있었다. 가슴이 조금 뜨거워졌다.

 

교토의 깊은 산 속, 아미사에 밤이 왔다. 달빛이 너무 밝아 불을 켤 필요도 없었다. 와타나베와 나오코, 그리고 레이코 씨 셋은 촛불을 켜고 둘러앉았다. 와인이 있었고 기타가 있었다. 나오코는 레이코 씨에게 ‘노르웨이의 숲’을 연주해 달라고 했다. 그녀의 연주에는 마음이 담겨 있었고 셋은 음악에 빠져들었다. 와타나베는 더욱 아름다워진 나오코의 모습에 마음이 뒤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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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해. 너한테 상처 줄 생각은 아니지만, 다만 이것만은 알아줘. 기즈키와 나는 정말로 특별한 관계였다는 거.

 

나오코는 와타나베의 머리를 풀어 다듬으며 머리핀을 꽂아주었다. 그리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 

 

“내가 초경을 한 그날, 그 앨 찾아가 엉엉 울었어. 어쨌든 우린 그런 관계였어. 그래서 그 애가 세상을 떠난 다음에는 도대체 어떤 식으로 사람을 대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던 거야. 사람을 사랑한다는 게 도대체 무엇인지도.”

 

나오코는 다시 몸을 떨며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점점 더 격하게 울었다. 숨을 헐떡이며 울었다. 레이코 씨가 나오코의 등에 손을 대고 상냥하게 쓰다듬었다. 그러자 나오코는 마치 아기처럼 레이코 씨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었다. 

 

와타나베는 나오코와 레이코 씨의 배웅을 받으며 아미사를 나섰다. ‘또 보러 올게’라 말하는 와타나베에게 나오코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모퉁이를 돌아 사라졌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 때문에 모든 풍광이 선명해 보였다. 와타나베는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갔다. 몇 번씩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중력이 다른 행성에 온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래, 이게 바로 바깥 세계인 거야, 하는 생각과 함께 슬픔이 밀려 왔다.

 

 

‘기즈키’를 대신할 수 없었던 ‘와타나베’

 

언젠가 나오코는 와타나베에게 들판의 우물에 대해 말했었다. 그날 이후 와타나베가 떠올린 초원에는 항상 나오코와 더불어 우물이 있었다. 그 우물이 실제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나오코가 만든 이미지인지는 불분명했다. 그러나 우물은 와타나베의 머릿속에 떨어져 나갈 수 없는 한 부분으로 굳게 자리 잡았다.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그 구멍이 무서울 정도로 깊다는 것뿐이다.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깊다. 그리고 구멍 안에는 암흑이(세상의 모든 암흑을 졸여 놓은 듯한 짙은 암흑이) 가득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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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코는 그 우물을 몹시 두려워했다. 그 구멍 속에는 기즈키가 있었다. 나오코, 내 손을 잡아. 그럴 때마다 와타나베는 말했다. 와타나베를 바라보는 나오코의 눈동자에는 검고 무거운 액체가 이상한 도형을 그리며 소용돌이쳤다. 와타나베는 나오코의 눈동자를 보며 심장이 멎을 것 같은 아름다움을 느꼈다.

 

와타나베는 유일한 친구인 기즈키가 죽었을 때, 한 가지를 배웠다. 그것은 죽음과 삶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오히려 죽음은 삶 속에 잠겨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이 와타나베에게 체념을 가르쳤다. 

 

와타나베가 또 한 번 아미사를 다녀온 후였다. 나오코가 자살했다.

 

도무지 그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그녀의 관 뚜껑에 못 박는 소리까지 들었는데도, 그녀가 무(無)로 변해 버렸다는 사실을 나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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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타나베는 나오코의 장례식을 마치고 배낭을 쌌다. 신주쿠역에서 아무 열차나 처음 눈에 들어오는 열차를 탔다. 아무 데서나 침낭을 펴고 잤다. 묘지 옆에서도 잤고, 파출소에서도 잤다. 언젠가는 해안가를 걸었다. 해변에 모닥불을 지피고 파도 소리를 들으며 술을 마셨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은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치유되지 않았다. 와타나베는 자신 스스로를 더럽혀진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와타나베의 기억 대부분은 산자가 아니라 죽은 자에 이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기억의 마지막에는 기즈키가 있었다. 한 달의 방랑과 노숙도 전혀 소용이 없었다. 결국 나오코는 기즈키의 여자였고, 어떻게든 나오코와 새로운 삶을 만들어보려 했던 와타나베의 노력은 소용이 없었던 것이었다.

 

기즈키. 나오코를 너한테 줄게. 나오코는 너를 선택한 거야. 그녀의 마음처럼 어두운 숲 안쪽에서 나오코는 목을 맸어.

 

 

작별, 그리고 새로운 방황의 시작

 

그때 나오코가 갑자기 네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어. 와타나베와 했던 섹스 이야기. 그걸 아주 자세하게 이야기하는 거야.

 

나오코의 마지막 유품들을 갖고 레이코 씨가 와타나베를 찾아 왔다. 레이코 씨는 자신이 본 나오코의 최후를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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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코는 자신이 젖지 않는 여자라고 했다. 그래서 기즈키와 섹스를 하지 못했다고 했다. 자신의 스무 번째 생일날, 혼란과 흥분에 우연히 젖었고, 그래서 와타나베와 섹스를 했다고 말했다. 그런 나오코에게 레이코 씨는 차츰 나이를 먹으며 좋아질 것이니 와타나베와 새로운 삶을 살아보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오코는 고개를 저었다고 했다.

 

레이코 씨. 난 그냥 다시는 아무도 내 안에 들어오게 하기 싫을 뿐이야. 이젠 누구에게도 흐트러진 모습 보이기 싫을 뿐이야.

 

레이코 씨의 말에 따르면 나오코는 이 말을 마치고 자신을 안아달라고 말했고 곧 깊은 잠에 빠졌다고 했다. 그리고 레이코 씨가 새벽 6시에 눈을 떠 보니 곁에 나오코가 없었다고 했다. 책상 위에는 자신의 옷을 모두 레이코 씨에게 주라는 메모가 있었고, 다섯 시간 후 숲속에서 목을 맨 나오코의 시체를 찾았다고 했다. 나오코는 미리 로프까지 준비해 놓았던 것이었다.

 

레이코 씨와 와타나베는 함께 술을 마셨다. 그리고 나오코의 그 쓸쓸했던 장례식에 대해 말했고 레이코 씨는 기타를 쳤다. ‘노르웨이의 숲’이었다. 이제는 나오코를 보내줘야 할 때였다. 나오코의 넋을 위로하고 그녀가 마음 편히 떠나도록 해 줘야 하는 것이었다. 커튼을 닫은 어두운 방 안에서 레이코 씨와 와타나베는 옷을 벗었다.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이 서로 끌어안고 서로의 몸을 갈구했다. 둘은 모든 것을 비워 냈다.

 

결국 그날 밤 우리는 네 번을 했다. 네 번 한 다음 레이코 씨는 내 팔에 안겨 눈을 감고 깊은 한숨을 내쉬며 몇 번이나 몸을 바르르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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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레이코 씨는 기차를 타고 떠났다. 어디를 가든 나오코와 와타나베를 기억하겠다고 했다. 레이코 씨와 헤어진 후 와타나베는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했던 ‘미도리’를 떠올렸다. 그는 미도리에게 전화를 했다. 처음부터 새롭게 시작하고 싶다고 말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온 세상의 가느다란 빗줄기가 온 세상의 잔디밭 위에 내리는 듯한 침묵이었다. 침묵 뒤, 수화기에서 미도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 어디에 있냐고 했다. 와타나베는 수화기를 든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어디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지?

 

 

섹스가 외로운 인생을 치유할 수 있는가

 

우리는 모두 체제의 산물입니다. 인간인 이상 체제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의식주, 문화, 이념, 세계관 등 모두가 사회화의 과정과 이후의 삶을 통해 체제가 우리에게 주입한 것일 터이니까요. 자본주의 체제는 인간 사이의 정을 자본(돈)으로 대체했습니다. ‘진정한 관계’는 얇게 남아 바스락거립니다. 손이라도 대면 부서질 것처럼 말입니다. 나오코, 기즈키, 와타나베, 레이코, 하나같이 외로움에 몸부림치며 진정한 관계를 갈구하는 인물들입니다. 이 소설은 1960년대 말 일본 자본주의의 고도 성장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21세기 자본주의 사회는 곧 대중 사회입니다. 사람이 넘치는 사회이고 사람이 가장 흔한 사회입니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들 속에서 진심을 나누고 서로를 위로하며 어려움을 함께 할 ‘내사람’은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이 ‘현대인의 고독’이고 ‘인간 소외’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외롭습니다. 부서진 관계가 주는 상실감이 그 외로움의 원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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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오마이뉴스>

 

외로운 인생을 치유하고 싶습니다. 끊어진 관계를 복원하고 싶습니다. 너무 힘들어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때, 손을 내밀면 그 손을 따뜻하게 잡아줄 단 한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내 편에 서서 세상과 나를 이어줄 그런 사람 말입니다. 

 

나오코에게는 기즈키가 그런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기즈키가 죽었을 때, 유일하게 그 상실감과 아픔을 공유한 와타나베에게 손을 내밀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오코는 와타나베와 처음이자 마지막 섹스를 나누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섹스 후에도 나오코의 아픔은 치유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기즈키는 기즈키일 뿐이었고 잃어버린 기즈키의 자리는 오직 기즈키만이 채울 수 있다는 사실 앞에서 절망했을 것입니다. 누구도 그를 대신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것입니다. 

 

“남녀의 성생활은 이 사람을 떠나지 못하게 하며 자신의 품속에 잡아 두려는 상실(喪失)의 불안함이다.”    

           

 -프란체스코 알베로니 (이탈리아의 사회학자)-

 

나오코처럼 외로운 사람들은 살을 맞대고 싶어 합니다. 자신에 대한 타인의 사랑을 몸으로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스킨쉽을 하고 섹스를 합니다. 그러나 그 행위가 상실의 외로움을 채워줄지는 장담하지 못합니다. 지금 내 옆에 누워있는, 좀 전까지 사랑을 나누었던 사람이 진실한 ‘내사람’인지 확신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어떨 때는 섹스 후가 더 외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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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마저 외로운 인생을 구원할 수 없다면, 무엇이 그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을까요. 끊어진 관계가 주는 상실의 아픔은 무엇으로 메울 수 있을까요.

 

이것만은 믿어 줬으면 해. 넌 내게 상처를 주지 않았어.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거든. 난 그렇게 생각해.

 

요양원에서 나오코가 와타나베에게 보낸 편지 속 한 구절입니다. 무엇이 내 인생을 외롭게 하지 않을 수 있는지 명쾌하게 답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어렴풋이 떠오르는 한 가지는 있습니다. 그것은 관계의 상실을 불러오는 모든 상처들은 결국 자신이 출발점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상처를 치료하고 관계를 복원하는 것도 ‘나’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나오코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나오코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본 글의 와타나베는 서른일곱 살이 되어서도 여전히 방황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그가 얼마나 더 많은 여자들과 잤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역시 상실의 아픔이 준 고독과 외로움을 극복하지 못했다는 것은 느낄 수 있습니다. 상실의 아픔을 채워 줄 진정한 관계의 복원, 외로운 내 인생을 치유해 줄 그것. 그것을 찾기 위해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열아홉 번째 인생탐구는 질문만을 남기며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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