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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겐 IRA가 더욱 아픈 이유

 

"물이 들어와서 열심히 노를 젓는데, 누군가 갑자기 그 노를 뺏어간 기분"

 

한 완성차 업계 관계자가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을 두고 한 말이다. 한국산 전기차가 세계 시장에서 잇따라 호평받는 와중에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다.

 

한국 전기차가 얼마나 좋은 평을 많이 받았는지는 전기차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독자분들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아이오닉5가 들어 올린 트로피만 수십 개다. 세계적인 자동차 매거진의 비교 평가에서도 상위권을 휩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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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오닉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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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6

출처-<현대자동차그룹>

 

기아 EV6는 아시아 자동차 브랜드 최초로 이탈리아 자동차 박물관 영구 소장 컬렉션에 지정되는 등 한 마디로 ‘레전드’를 찍었다. 오죽하면 일론 머스크가 "현대차(그룹)가 잘해주고 있다"는 트윗까지 남겼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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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전기차 시장 2위에 오른 현대자동차를

트위터에서 언급한 일론 머스크

 

잘 나가고 있던 상황이다 보니, 현기차(현대와 기아) 입장에서 인플레 감축법은 더욱 아프다. 많은 사람들은 '당장 미국에서 전기차를 만들지 않으면 보조금이 나오지 않는다' 정도로 이해하고 있지만, 이 문제는 생각보다 복잡하다. 전기차 생산 체계를 뒤집어엎어야 한다는 말이 나오니, 말 다 한 셈이다. 

 

현대차 그룹은 물론 한국 자동차 산업 전반의 위기다. 

 

이건 국가적인 자존심 문제와도 이어진다. 엔진의 시대가 저물고 있는 지금은 크게 보자면, 한국차와 독일차, 미국차, 일본차, 중국차 모두 동일한 출발선에 서서 다시 경쟁하고 있는 시점이다. 이 경쟁에서는 모두가 처음인지라 공정한 경쟁이 이뤄지고 있는데, 모처럼 승기를 잡은 한국차 입장에서 IRA로 인해 일본차에게 추격을 허용 당하게 생겼다. 

 

"정부는 도대체 뭘 했는가“

 

라는 목소리가 자동차 업계 안팎에서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그래서 자동차 업계를 패닉에 빠트린 이 IRA라는 게 뭔지, 구체적으로는 어떤 문제가 있으며, 왜 콕 집어 일본차가 승기를 잡게 생겼는지 디벼보려 한다. 

 

 

미국의 기존 보조금 제도 : 기회를 잡았던 현기차

 

우선 인플레이션 감축법을 설명하기에 앞서, 원래 미국의 전기차 보조금 제도는 어땠는지부터 살펴보자.

 

그간 미국의 전기차 보조금 제도는 쿼터제로 시행됐다. 브랜드마다 20만 대 규모의 쿼터를 설정하고, 대당 7,500 달러(환율이 올라서 약 1,000만 원)씩 보조금을 지급하는 내용이 핵심이다. 이 쿼터를 채우고 나면 향후 6개월간 판매되는 차량에 보조금의 50%를 지급하고, 그 이후 6개월간은 깎인 보조금의 50%를, 이후에는 보조금 지급을 중단하는 일몰제도 포함되어있다.

 

즉, 전기차 20만 대까지는 현대차도, 기아차도, 테슬라도 공평하게 1,000만 원씩의 보조금을 주고, 쿼터를 다 채운 뒤의 6개월간은 500만 원, 이후 6개월간은 250만 원, 또 6개월이 지나면 보조금 지급을 중단하는 제도다. 

 

이 제도는 2009년에 도입되었다. 이 제도에서 가장 큰 이익을 봤던 건 테슬라다. 출범 이후 별다른 존재감이 없던 회사였지만, 2016년 출시된 모델3에 힘입어 빠르게 보조금을 소진했다. 모델3 인도가 시작된 게 2017년인데, 보조금 쿼터가 소진된 게 2019년이니, 20만 대를 파는 데 불과 2년밖에 걸리지 않은 셈이다. 뒤이어 20만 대 쿼터를 달성한 건 GM이다. 2016년 볼트 EV를 출시했고, 2020년 쿼터를 꽉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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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슬라 모델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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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트EV

 

여기서 현기차에게 기회가 왔다.

 

미국 내 전기차 시장에서 1·2위를 다투고 있는 테슬라와 GM이 전기차 보조금을 다 소진했다는 건 현기차를 포함한 경쟁사들에게 기회였다. 경쟁사들은 아직 20만 대를 다 채우지 못했으니, 보조금을 온전히 다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경쟁사들 중에서도 상당한 수혜를 입은 브랜드가 바로 ‘현기차’다. 2021년부터 현대차 아이오닉5, 기아 EV6를 앞세워 미국에 진입했고, 매달 판매 증가세를 이어 나갔다. 

 

지난 8월 현기차의 미국 내 전기차 판매량은 4,078대로 역대 최고 수준이었다. 올해 1월부터 8개월 동안 세자릿수 증가세를 기록했다. 기아 EV6도 매월 판매량을 경신하고 있었다. 지난 5월 투입된 제네시스 GV60도 순항하고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현기차는 상반기 미국 전기차 시장에서 테슬라에 이은 2위 자리에 올랐다. (8월 16일부터 시행된 IRA의 영향으로 9월 현기차의 미국 내 전기차 판매량은 3,533대로 전 월에 비해 13%가 감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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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네시스 첫 전용 전기차 GV60 

출처-<제네시스>

 

현기차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기존 보조금 제도는 후발 주자들도 전기차 시장에서 경쟁자를 빠르게 추격할 수 있는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우위를 점하고 있었던 미국 자동차 업체들에게는 결코 반길만한 제도가 아니었다.  

 

 

IRA : 우리에겐 현기차뿐 아니라 모든 게 걱정이다

 

이제 인플레이션 감축법. IRA가 무엇인지 살펴보자. 많이들 알려져 있듯 IRA는 ‘MADE IN USA’ 전기차에만 보조금을 주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겉만 봐선 이게 트럼프 행정부 시절에 추진된 'BUY AMERICAN' 정책처럼 보이지만, 디테일은 더 강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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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현지시각 8월 16일 IRA 법안에 최종 서명하는 바이든

 

1. 당장 2023년부터 20만 대 쿼터제가 폐지되고, 미국에서 생산되는 전기차에만 보조금이 지급된다.

 

2. 세단은 5만 5,000달러 미만, SUV와 픽업트럭은 8만 달러 미만이어야 보조금을 받을 수 있다.

 

3. 2024년부터는 미국, 또는 미국과 FTA를 체결한 국가에서만 배터리 원자재를 수급받아야 한다.

 

4. 배터리는 물론 주요 부품도 미국에서 조립해야 보조금을 지급한다. 

 

미국이 의도했든 아니든 이 법은 현기차에 직격탄을 날렸다. 현기차가 미국에 팔고 있는 전기차 중 미국에서 생산되고 있는 차량은 단 한대도 없기 때문이다. 

 

아이오닉5, GV60, G80e는 울산에서, EV6와 니로는 화성(일론 머스크가 가려는 그 화성이 아니다)에서, 아이오닉6는 아산에서, 쏘울은 광주에서 만들고 있다. 당장 올해 말부터 앨라배마에서 GV70 전기차가 양산되지만, 단 한 종류만 생산되는 것이다 보니 의미 있는 성과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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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V70

출처-<현대자동차그룹>

 

바이든(혹은 날리면) 대통령이 방한했을 당시 정의선 회장이 발표한 전기차 전용 공장 설립 계획도 아직은 먼 이야기다. 현대차가 목표한 미국 내 전기차 생산 시설 가동 시점은 2025년이다. 즉, 김어준 총수의 모든 털을 싹 밀고 다시 원상태로 자라나는 시간이 훨씬 더 빠르단 거다. 

 

IRA가 시행되고도 2-3년간은 손가락만 빨고 있어야 하는 상황인 셈이다. 설상가상으로, 기아는 심지어 미국에 전기차 전용 공장을 지을 계획조차 없다. 

 

주요 생산 시설을 옮기기 위해선 노조와의 협의가 필수적이기 때문에, 생산지를 미국으로 옮기거나, 기존 생산 라인을 개조하는 것도 쉬운 게 아니다. 

 

노조가 흔쾌히 동의했다 하더라도, 생산라인을 대대적으로 개편하는 일은 통상 1년 가량의 시간이 필요하다. 심지어는 내연기관도 아닌 전기차 생산 시설이라면 공정은 더욱 복잡해진다. 

 

자동차 업계에서 누군가 나서서 공개적인 발언을 하고 있진 않지만, 우리나라 자동차 업체 전반에 걸쳐 막대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당장의 걱정은 한국지엠이다. 부평공장에서 생산되던 아베오, 트랙스, 트레일블레이저, 말리부가 단종되며 가동률은 50% 미만으로 떨어진지 오래다. 이렇다 보니 일감 확보를 위해 전기차 생산을 요구하고 있지만, IRA로 한국지엠이 전기차를 배정받을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워졌다. 군산공장을 폐쇄하기로 한 결정이 일감 때문이었다는 점을 복기시켜보면 아찔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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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뉴스1> 링크

 

르노코리아자동차(전 르노삼성자동차)도 장기적으로는 고민거리가 생겼다. 이들은 중국의 지리자동차와 파트너십을 체결하고, 부산공장에서 차세대 하이브리드 모델을 생산하는 '오로라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 상황이다. 지리가 르노코리아를 발판 삼아 미국으로 전기차를 내보낼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었지만, 이 또한 없던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쌍용자동차라고 영향이 없을까. 쌍용차는 중국의 BYD와 전기차 배터리를 공동 개발하기로 했다. BYD의 배터리가 탑재된 전기차라면 IRA의 여파를 받을 게 자명하다. 

 

 

기회를 잡은 일본

 

기회를 잡은 건 일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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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으로 자동차 판매량 1위 기업은 토요타지만, 전기차 시장에서 일본 기업들은 뒤처져 있다. 그래서 IRA가 일본 기업에겐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본 기업은 마땅히 판매하고 있는 차가 없다 보니 영향을 받고 자시고 할 게 없다. 처음부터 IRA에 맞춰 미국 현지에 전기차 생산 체계를 구축할 수 있는 '제로 베이스'의 환경인 것이다. 

 

관련 움직임은 이미 본격화됐다. 닛산은 미국 현지에 전기차 생산시설을 이미 갖고 있고, 혼다는 GM과 함께 전기차 공동 생산에 나서기로 했다. 토요타도 수조 원대의 배터리 공장 설립 계획을 발표해 전기차 전환을 준비하고 있다. 

 

또 일본 기업들은 자신들에게 '독소 조항'일 수 있는 IRA 일부 내용도 면제받는 데 성공했다. IRA 통과 전 일본 정부가 로비를 통해 일본 기업이 반대했던 '노조가 있는 기업이 만든 전기차에 보조금을 추가로 지급하겠다'는 조항을 지웠다. 기다렸다는 듯 일본 자동차 업계의 투자가 이어지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무책임한 정부

 

이렇다 보니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계에서는 미국에게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다. 현대차그룹이 무려 13조 원대의 선물 보따리를 풀었지만, 돌아온 것은 미국의 자국 이기주의뿐이었다. 한·미 동맹이 "경제안보 동맹으로 확장됐다"고 강조한 윤석열 대통령의 자평은 공허한 메아리가 됐다.  

 

정치권이 잇따라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지만, 뚜렷한 해법 하나 나오는 것 없다. 정부의 고위급 실무진들이나 국회의원들이 잇따라 미국 정부를 방문하여 가지고 돌아온 결론은 "미국 측이 우리 대표단의 의견을 경청했다" 정도다. 돌아오는 답변이라고 해 봐야 "한국의 분노를 잘 알고 있다" 같은 빈말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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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초 회담(?)에서도 얻어낸 건 없었다. 얼마 전 윤 대통령과 방한한 카멜라 해리스 부통령과의 만남에서도 나온 건 역시 “IRA 집행 시 우려 해소 방안을 잘 챙겨보겠다”라는 역시 공허한 말뿐이었다. 

 

결과적으로 '미국 내 일자리와 천문학적인 투자를 얻어낸' 바이든(혹은 날리면) 대통령과 미국 민주당의 선거만 지원해준 꼴이다.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IRA를 막을 순 없었겠지만, 우리나라의 손해를 최소화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대선 이후 문재인 정부의 외교부는 윤석열 당시 대통령 당선인 인수위원회에 IRA의 모법(母法)인 ‘더 나은 재건법안(BBB)’에 대해 보고를 했었다. 또 지난 8월 초 낸시 펠로시 미 하원의장 방한 당시 주미 한국대사관에서 IRA의 핵심 내용을 대통령실과 정부 부처에 보고했다. 모두 8월 7일 미 의회에서 통과되기 전, 8월 16일 바이든 대통령이 IRA에 서명하기 전에 일어났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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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뉴스토마토> 링크

 

미국은 IRA를 시행하기 한 달 전인 7월에 '미국의 보조금을 받는 반도체 업체는 중국에 신규 투자를 할 수 없다'는 반도체 법을 의회에서 통과시켰다. 세부 내용은 다르지만, 큰 맥락에서 우리의 주요 산업이 탈중국을 요구받는다는 건 동일한 법이다.

 

국가 기간산업에 피해가 우려되는 법이 제정됐다면, 추가 피해가 예상되는 산업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하는 게 그렇게 윤 대통령이 말했던 '공정과 상식'의 ‘상식’ 아닌가. 그러나 윤석열 정부는 반도체 법 이후 불과 한 달 뒤에 통과된 IRA에도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미국의 이런 움직임을 몰랐다면 무능한 것이지만, 여러 언론의 보도를 보면 윤석열 정부는 이미 관련 보고를 받았다. 방관했던 것이고 무책임했던 것이다. 

 

IRA 이후의 대응도 답답했다. IRA가 미 의회에서 통과되자마자 산업계와 언론은 큰 우려를 표명했지만, 산업통상자원부의 공식 발표는 3일이나 지난 8월 10일이었다. 업계와 긴급 간담회를 가진 것도 4일 만인 8월 11일이다. 최근 언론과 민주당에서 정부의 늦장 대응을 지적하자 이창양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4일 있었던 국정감사와 업무보고에서 이렇게 답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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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양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IRA 법 초기 대응 안 늦었다.“

 

“외국 언론은 한국이 가장 빠르고 독일, 일본 순이라고 말한다.”

 

“일본이나 독일, EU 등의 국가 대응과 비교하면 인지 시점, 대응 강도, 수준, 시기 등 우리가 전반적으로 앞서고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빠르고, 강한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다.”

 

“IRA 법은 지난 미국 순방 기간에 상무장관과 의원들을 만나 우리 기업에 대한 차별 반대입장을 강력하게 전달하고 미국 측으로부터 많은 공감대를 이끌어내는 성과도 있었다.”

 

이에 윤 대통령이 자주 사용하는 '고품격' 단어를 빌어 한마디 하고 싶은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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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딴지만평>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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