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한 팀에서 20년 넘게 주전으로 활약하다 은퇴하는 프로야구 선수가 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입단했다면 마흔 살이 넘어서까지 현역 선수 생활을 한 셈이다. 그것만으로 그가 얼마나 롱런한 선수였는지, 얼마나 자기관리에 열심이었는지 알 수 있다. 다른 선수들은 대부분 은퇴하고도 남을 나이까지 현역으로, 게다가 주전 자리를 지켰다는 것은 그가 그만큼 오랜 세월 녹슬지도 않고 쓰임 있는 선수였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시즌 MVP 같은 상을 받지는 못했지만 이 선수는 수차례 팀이 우승하는 데에 크게 기여했고 개인 성적은 늘 리그 상위권을 지켰다. 은퇴 전 마지막 시즌에는 주장을 맡아 팀을 이끌어 다시 한번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고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선동열이나 이승엽 같은 선수는 아니었어도 구단에서 영구결번 정도는 충분히 해줄 수 있는, 마땅히 해줘야 하는 프랜차이즈 스타랄까.

 

며칠 전 이대호 선수의 은퇴식을 TV로 보다가 문득 정치인 이해찬을 야구 선수에 비유하자면 어떤 모습일까 제멋대로 공상의 나래를 펼쳐봤다.

 

이해찬.jpg

출처-<이해찬 블로그>

 

이해찬 회고록이 나왔다. 560페이지가 넘는 분량이다. 가뜩이나 종이책 안 팔리는 시대에 300페이지 넘는 책도 너무 두껍다는 불평을 듣기 십상인데 560페이지가 넘어가는 정치인, 그것도 은퇴한 정치인의 회고록이라니. 보통 이런 책이라면 그저 출간의 의의를 둔, 지지자들 가운데 일부가 소장용으로 구입하는 관상용 서적 신세를 면하기 어렵다. 보통이라면.

 

그런데 이해찬은 보통이 아니니까. 함 읽어봤다.

 

1. 회고록이 아니라 역사서

 

이해찬은 민주화 운동 세대의 민주당계 정치인 대부분이 그랬듯 ‘학생운동-직업운동가-정치인’ 루트를 밟았다. 1971년에 입학한 서울대를 그만두고(!) 재수를 택해서 1972년 서울대에 입학한(!) 이해찬은 그해 10월에 유신이 선포되자 학생 운동에 뛰어든다(학생들이 데모도 안 하고 고향에 내려간 거냐는 아버지의 질책으로 운동을 시작한 특이한 케이스다). 정치인 이해찬의 시작을 1972년으로 잡고 은퇴 시점을 2020년 더불어민주당 당 대표 임기 종료로 잡는다면 50년에 가까운 시간이다. 1972년부터 1988년까지 학생·재야 운동가로 두 번의 옥고를 치르며 그야말로 살벌한 고문을 겪었던 이해찬(고문실에서 늘어진 그를 본 누군가에 의해 ‘이해찬이 고문으로 죽었다’는 소문까지 돌았다고)은 1988년 평화민주당에 입당하며 본격 직업 정치인의 세계에 뛰어들었다.

 

이해찬_눈물_김근태.jpg

민주화 운동 동지였던 김근태 전 의장의

빈소에서 오열하는 이해찬

 

정치인 이해찬의 이력을 간단하게 읊어보겠다. 1988년 13대부터 2016년 20대 국회의원 선거까지 8번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에서 이해찬은 지역구 후보로 일곱 번 출마해 모두 당선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운다(2008년 선거는 불출마). 그리고 민주당계 정당이 대통령 직선제에서 승리한 세 번(김대중·노무현·문재인 정부)의 선거에서 모두 핵심 역할을 수행했다. 7선 국회의원에 장관, 국무총리, 여당 대표까지 해봤으니 이쯤 되면 대통령 당선 빼고는 정치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영광은 다 누렸다고 말해도 과장이 아니라 하겠다.

 

평화민주당 입당 후 2020년 사실상 정계 은퇴까지 정치인 타이틀을 유지한 기간만 33년은 그냥 33년이 아니다. 낙선으로 원내 진출에 실패해 겉돌거나 변변한 자리 하나 맡지 못하고 흘려보낸 세월 같은 거 없이 정치판 무대 중앙에서 옹골지게 채운 33년인 거다.

 

DkkHT_JU0AAeHZ7.jpg

88년 13대 초선의원 시절 노동위 3총사.

노무현·이해찬·이상수

 

그러다 보니 학생운동 시절부터 2020년 당 대표 선거에 이르기까지 회고록에 등장하는 모든 이야기가 곧 대한민국 민주화 운동과 민주당계 정당의 역사 그 자체라 해도 좋다. 그것도 어디 누구한테 주워듣거나 건너 들은 이야기가 아니라 그냥 본인이 겪은 이야기가 대부분. 앞서 말했듯 정치하는 내내 무대 중앙을 벗어나 본 적이 없는 몸이라 ‘에이 이 양반 거참 썰을 실감 나게 푸시네’하고 가벼이 넘길 수가 없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를 보면 주인공이 미국 역사의 중요한 장면에 다 등장하지 않나. 이해찬은 민주당판 포레스트 검프다(굵직한 선거와 국내 정치 이슈는 접어두고 남북정상회담만 놓고 보더라도 1차 남북정상회담 때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악수했던 사람이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 특사로 남북정상회담을 성사했고 문재인 대통령의 남북정상회담 때에는 당 대표 자격으로 방북해 김정은 위원장을 만났다).

 

회고록이 아니라 역사서라는 말이 이제 실감 나시는지.

 

"2년 가까이 준비하고 구술한 이야기를 책 한 권에 모아 놓고 나니, 참으로 그리운 사람들의 이야기, 그 시대를 함께 살아왔고 지금을 함께 사는 분들의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중략) 제가 그분들의 이야기를 한 것인지, 그분들이 제 입을 빌려 이야기를 하신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이해찬의 회고록이라는 형식을 빌려 함께 살아온 모든 분들의 이야기가 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 <이해찬 회고록> 서문에서 발췌

 

2. 회고록이 아니라 교양서

 

어떻게 30년 넘는 세월 동안 무대 중심을 지킬 수 있었을까. 프로야구 선수로 치면 꽤나 롱런한 선수가 심지어 선수 생활 내내 주전으로 뛰면서 성적까지 좋았다는 얘긴데, 일단 실력이 좋아야겠고 사고를 치지 않아야 하며 불의의 부상을 당하는 일도 없어야 가능한 얘기다.

 

정치인 이해찬을 수식하는 대표적인 단어가 ‘전략가’, ‘정책통’, ‘기획통’이다. 일을 잘하면서 당에서도 쓰임새가 많았다는 말이다. 본인 국회의원 선거 다 이긴 거로 더 이상의 설명은 생략해도 무방하겠으나 나아가 김대중·노무현·문재인 후보가 당선된 대선에서 그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도 봐야 한다. 선거가 전쟁이라면 이해찬은 민주당계 정당에서 가장 뛰어난 장수이자 책략가였다. 공무와 당무에도 밝아서 전시(선거)가 아닐 때는 여러 공직과 당직을 두루 맡았다. 심지어 잘했다.

 

사고를 치지 않았다. 돌이킬 수 없는 오판으로 당 지지자들에게 상처를 주거나 당에 폐를 끼쳤다면 이렇게 한 팀에서 롱런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해찬이 잠시나마 당을 떠날 때에는 지지자들이 고개를 끄덕일 만한 명분이 있었다. 그중 한 번이 2016년 총선을 앞두고 김종인 비대위 체제에서 컷오프되자 무소속으로 출마한 일이다. 복당 후 그는 더불어민주당 당 대표에 선출된다. 이해찬 탈당에 대한 당원들의 판단은 그랬다.

 

NISI20180804_0014344479.jpg

 

공직자로서도 사고를 치지 않았기에 오래 뛸 수 있었다. 33년 가운데 어느 한순간이라도 뇌물, 비리에 엮였다면 불명예 은퇴를 당하거나 구석자리로 쫓겨났을 게다.

 

불의의 부상을 당하지 않았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을 돌이켜보자.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 뭐라도 했던 인사들은 빠짐없이 먼지 한 톨 남지 않게 탈탈 털렸다. 이 과정에서 다소 억울하게 구속되고 재판에서 유죄를 선고 받은 인사들이 적지 않다. 이해찬은 여기에서도 살아남았다.

 

무슨 이해찬양가라도 부를 셈으로 이런 이야기들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 게 아니다. 앞서 말한 것들은 모두 해석이 아닌 사실에 기반한다. 오랜 세월 계속해서 선거에서 이겼고, 공직에 있었고, 당무를 맡으면서도 법을 어겨 처벌받지 않은 건 해석이나 평가가 아니라 사실이다.

 

민주당 지지자나 당원이라면 충분히 좋은 본보기로 삼을 만하다. 앞으로도 민주당에는 이런 인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당을 저버리지 않고, 일 잘하고, 잘 싸우고, 사고 치지 않는. 이해찬 회고록은 정당인 이해찬은 물론 그와 함께 일하거나 싸운 이들의 행적을 담고 있다. 당을 위한답시고 나라를 위한답시고 욕망을 좇아갔던 사람, 일을 못 해서 그르친 사람, 능력은 있지만 사람들을 설득하지 못해 좌절했던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우리 또한 곱씹어보게 된다. 내가 지지하는 당에 필요한 인물은 어떤 모습인지, 어디까지가 유연한 접근이고 어디부터가 변심인지.

 

워낙 일을 많이, 오래 한 사람의 회고라서 그런지 일에 대한 이야기도 볼만한 것들이 많다. 김대중·노무현·문재인 정부 정책에 대한 평가와 반성에 대한 부분은 특히 그렇다. 정책 수립과 갈등 조율, 실행에 대한 과정을 들여다보는 재미와 의미도 좋다.

 

image_2769712971532484936576.jpg

출처-<젠틀재인>

 

특별히 하나 더 소개하고 싶은 대목은 ‘민주적 국민정당 건설’에 대한 부분이다. 이해찬 스스로 말하길 자신의 첫 번째 꿈은 민주화였고 두 번째 꿈은 민주적 국민정당 건설이라고 한다. 그 가운데 민주적 국민정당 건설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90년대까지는 민주당조차 총재의 권한이 무소불위였고 비례대표 공천헌금으로 당이 운영되는 정당이었다. 지금의 민주당은 그때와 전혀 다른 모습이지만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많다. 이해찬은 딱 여기까지 만들어 놓고 자리에서 내려왔다. 플랫폼 정당, 온라인 당원 가입이 가능한 정당이 된 민주당이 더 민주적인 정당이 되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이미 최근 당 대표, 최고위원 경선을 통해 논의는 촉발되었다. 이를테면 당원 모두의 표는 경중의 차이 없이 똑같은 한 표가 되어야 한다는 식으로...)이쯤 되면 이해찬 회고록은 당원과 당 지지자들의 교양서라 할 만하다.

 

"직업으로서의 정치는 열정과 책임감, 그리고 균형이 중요해요. 직업으로서의 학문은 열정과 책임감과 객관성이 중요하지. 재야 운동은 열정과 책임감과 희생이 필요해요. 핵심이 달라. 정치는 균형, 학문은 객관성, 재야 운동은 희생·헌신이지"

- <이해찬 회고록> p.205

 

"나는 뭐 일의 관점에서만 보니까. 김한길, 안철수가 당에 왔을 때, 당 사람들에게 일절 비판하지 못하도록 했어요. 잘못할 줄은 알았지만 갈등의 불씨가 되니까. 처음에는 타고난 내 배포인 줄 알았어요. 근데 아니야. 과학적 사고의 결과 같아요. 객관적인 조건을 보고 판단하는 거지."

<이해찬 회고록> p.553

 

3. 회고록이 아니라 위로

 

특정 정당과 정치인을 극명하게 선과 악으로 보려고 하지는 않는다. 물론 그게 쉽지는 않다. 선악의 관점이 아니라 정당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윤석열 정부 5년이 못 견디게 괴로운 사람들이 많다. 정치에 대한 관심이 많고 지지하는 정당이나 후보에 대한 마음이 클수록 다음 대선을 기다리는 마음이 고되고 아플 수 있다. 당장 졌다는 괴로움만 해도 이만한데 심지어 당선된 상대 후보가 하는 꼴이 영 마음에 들지 않으면 괴로움 수치가 갑절이 되는 것도 당연하다.

 

560페이지 넘는 정치인 회고록 따위를 읽는 독자라면 매우 높은 확률로 정치에 몹시 관심이 많은 민주당 지지자일 것이고 굉장히 높은 확률로 매우 고되고 아픈 나날을 보내고 있을 게다.

 

다운로드.jpg

 

대한민국의 민주화는 얼마나 처절한 싸움과 패배를 거듭한 끝에 이루어졌는가. 세 번의 대선 승리가 있기까지 어떤 위기와 좌절을 숱하게 겪어냈는가. 그의 회고록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레 되새겨진다. 지금 시간이 위기라면 큰 위기이겠지만 이 또한 충분히 견뎌내고 극복할 힘이 우리에게 있지 않은가. 회고록을 통해 이해찬은 그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정치도 민주화운동의 연장에서 시작했어요. 민주적 정당을 만드는 것이 목표였지. 아직 걱정스러운 바도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발전을 해 온 것 같아요. 이제 DJ가 하신 말씀을 조금 느낍니다. 인생은 아름답고 역사는 발전한다. (중략) 운동을 하면서 실패는 해도 좌절하지는 않잖아요. 정치를 하다 보면 목표대로 성취하지 못할 때가 있어요. 못한 것은 또 하면 돼요. 실패가 아니에요."

<이해찬 회고록> p.554

 

못한 것은 또 하면 된다. 실패가 아니다.

 

이해찬 회고록은 그래서 위로다.

 

김대중_대통령.png이해찬 (1).jpg

1980년 김대중내란음모사건으로

군사재판을 받는 김대중 대통령과 이해찬

 

4. 정치인 회고록이 재미있어도 되나

 

이렇게 쓰고 보니 이런 내용과 미덕에 560페이지면 제법 ‘분량대 성능비’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최민희 의원이 묻고 이해찬 대표가 답하는 인터뷰 형식으로 구성된 회고록이라 술술 잘 읽히는 점도 한몫한다. 아무래도 문어체보다는 구어체가 읽기 편하다.

 

전반적인 책 내용이 관념적인 주장과 해석이 아닌 인물과 사건 중심으로 채워져 있어 대하드라마를 보는 기분으로 재미있게 읽었다. 정치인 회고록을 제대로 읽은 적도 몇 번 없지만 이 정도로 재미있을 수가 있나 싶다. 이렇게 말해도 압도적인 두께와 무게감에 책을 사서 소장하는 정도가 최선인 분들이 많을 줄 알겠으나 그럼에도 한 번쯤 꼭 시도해보길 강력하게 권하는 바다.

 

FdZchobaAAAJjAm (1).jpg

 

마지막으로.

정치인 이해찬이 만약 프로야구 선수라면

그는 마땅히 영구결번되어야 한다.

그렇게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