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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에서 세종대왕을 칭하거나 그분의 행적을 묘사할 때 존대법을 쓰지 않았다. 나름 객관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이었는데 가장 존경하는 분을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 한 줄 한 줄 쓸 때마다 어색해서 혼났다. 그래서 이번 글부터는 마음 가는 대로 손 가는 대로 존대하려고 한다.

 

1. 아인슈타인은 되고 세종대왕은 안 되고

 

역사상 물리학을 밑바닥부터 뒤집은 사람을 한 명 꼽으라면 가장 표를 많이 받을 사람은 아인슈타인이다. 상대성 이론을 정확히 몰라도 아인슈타인이 천재냐고 물으면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인다. 가끔 아주 가끔, 창조과학 같은 사이비 유사 과학을 하는 이들이 아인슈타인은 틀렸다고 하는 건 들어 봤지만 일반 대중도, 학자도 그의 천재성을 인정하며 누군가의 것을 베꼈다고 말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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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이 특수상대성 이론을 만들 때, 선배 물리학자인 로렌츠가 만든 변환식을 사용했다고, 아인슈타인이 로렌츠를 모방했다거나 베꼈다고 말하지 않는다. 자신에게서 시작된 양자역학을 가장 혹독하게 비판한 인물이 아인슈타인이다. 그가 그랬다고 과학자 아인슈타인의 위상과 그의 업적을 아무도 훼손하지 않는다. 그런 이야기들은 오히려 사람들 사이에서 아인슈타인의 인간적 면모를 돋보이게 하는 훈훈한 일화로 나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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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세종대왕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일단 훈민정음을 세종대왕께서 손수 만드셨다는 것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어떻게든 깎아내리려 하는 시도가 너무 많다. 한때 인터넷 각종 포탈, 어학사전과 백과사전, 심지어 학술단체에서 만든 전문적인 사이트까지 훈민정음 공동 창제설이 실려 있었다. 다행히 헌신적인 학자들이 있어 지금은 많이 수정되었지만 여전히 제법 남아 있다. 학계도 별반 다르지 않다. 공동 창제설이 세종대왕 친제설에 맞먹는 힘을 갖고 계속 싸움 중이다.

 

이런 상황이 훈민정음(한글)에는 기원이 있고 세종대왕이 용케 찾아 모방해서 만들었다고 우기는 사람이 계속 생기게 만든다. 과학자로서 세종대왕의 천재성이 아인슈타인보다는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 아인슈타인과는 달리 세종대왕이 구시대의 과학 정신을 전복하고 새로운 과학 정신을 세운 정도는 아니라고 간주한다.

 

이번 글에서는 오직 ‘과학’과 ‘과학자’라는 관점에서 세종대왕의 천재성을 부각하려 한다. 사회·문화·정치적 영향을 고려하다 보면 세종대왕의 이런 면모가 가려지고 막연해지는 까닭이다. 그는 구시대 음성학 기반을 송두리째 뒤집고 첨단 관측 장비로 무장한 현대 음성학도 따라가는, 음성학의 새 지평을 열었다. 세종대왕이 아인슈타인에 필적하는 과학자임을 보이고, 동시에 진정한 보수주의자 또는 국수주의자의 모범이 어떤 것인지를 제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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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TBS>

 

2. 혼자 만든 글자, 훈민정음

 

아인슈타인이 특허청 사무실에 틀어박혀 혼자 특수상대성 이론을 만들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지만, 세종대왕께서 혼자 훈민정음을 만드셨다고 하면 아니라고 하는 사람들이 제법 된다. 글자 만드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라 훈민정음은 가족, 집현전 학사 혹은 승려들과 공동으로 만든 게 틀림없다는 것이다. 상대성 이론이나 훈민정음이나 이론의 난이도로 따지면 막상막하다.

 

아인슈타인이 일반 상대성 이론을 완성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어림잡아 10년이 넘는다. 결론부터 말하면, 아인슈타인이 혼자 뚝딱뚝딱 상대성 이론을 만들었던 것처럼 훈민정음도 세종대왕 혼자 만드신 역사상 손에 꼽히는 최고의 과학적 성과다. 현재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모든 사료는 한결같이 훈민정음이 세종대왕께서 손수 만드신 것이라고 증언할 뿐, 공동 창제설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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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대(輪對) : 조선 시대에, 백관(百官)이 차례로 

임금에게 정치에 관한 의견을 아뢰던 일.

구언(求言) : 임금이 신하의 바른말을 널리 구함

 

설사 1443년 훈민정음이 완성되기 전까지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한 사람들이 있다 하더라도 그들은 단순 조력자일 가능성이 높다. 훈민정음 창제에 필요한 결정적 지식을 습득하고 연구를 수행하며 이론 체계를 구축한 것은 오롯이 세종대왕께서 혼자 하셨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 지난 글에서 인용했던 훈민정음 반대파 최만리의 상소 내용도 이를 방증한다.

 

"여러 사람의 의견을 두루 청취하지도 않으시고, 갑자기 관리 10여 명을 불러 가르치고 익히게 하시고, 또 옛사람이 완성한 운서(韻書)를 쉽게 뜯어고치고, 근본도 없는 언문임에도 마치 대단한 것처럼 이리저리 말을 짜맞추고, 그것도 모자라 인쇄해서 전국으로 퍼뜨리려 하시니 도대체 후세에게 무슨 말씀을 듣고 싶으신 건가요?(세종실록 26년 2월 20일 기사, 필자 역)1)"

 

세종 25년(1443년)에 훈민정음을 완성하자 세종대왕께서 집현전 학사들에게 훈민정음을 가르치고 익히게 하셨다는 것이다. 달리 해석할 여지가 없다. 공동 작업으로 훈민정음을 만들었다면 작업에 참여했던 이들도 세종대왕만큼이나 훈민정음에 숙련되어 있었을 것이다. 굳이 가르치고 익히게 하는 수고가 필요 없다. 집현전 학사들 중에 조력자가 있었다고 해도 훈민정음의 정수를 함께 만든 조력자라기보다 세종대왕의 지시에 따라 실험하고 정보를 수집한 보조 연구원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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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현전 학자들도 반대했던 훈민정음 창제

출처-<임용한(역사학자)의 라이벌>

 

최만리의 상소 내용은 다른 한편, 세종대왕께서 시대를 앞서 현대 과학자들과 같은 연구 자세를 가졌다는 것도 보여준다. 집현전 학사들에게 훈민정음을 가르치고 익히게 한 다음, 운서를 고치시려 했다는 말은 세종대왕께서 이론적으로 완성된 훈민정음을 실제 우리 말소리뿐만 아니라 당시 조선에서 사용하던 중국 한자의 소리에 적용하여 실증적으로 분석하고 이론의 정합성을 확인하려 하셨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과학자로서 정직하고 엄밀한 자세는 훈민정음으로 당시 한자 소리를 분석하고 정리한 동국정운(東國正韻) 서문을 쓴 신숙주의 증언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을 기반으로 동국정운을 만들고자 차출한 집현전 학사들과 신하들에게 자료 분석·관찰과 정보 수집·연구 과제를 내주었다. 그 결과를 확인하여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셨다고 한다.2)

 

신숙주의 증언은 세종대왕은 조선 최고 지성이었던 집현전 학사들이 의지했던 가장 뛰어난 학자였고, 학문적 판단의 최종 권위자셨음을 보여 준다. 더구나 세종대왕께서는 거짓말하는 걸 질색하던 분이셨다. 이런 세종대왕이셨으니 자신이 직접 만드신(친제; 親制) 글자가 아니라면 분명히 아니라는 공식적인 기록이 남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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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에 있는 수정전으로,

같은 자리에 집현전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출처-<링크>

 

3. 어떻게 한글을 혼자 만들 수 있지?

 

아인슈타인 같은 이론물리학자들은 골방에 틀어박혀 수없이 쏟아지는 논문들을 무섭게 읽어 나가며 천재적인 상상력만으로도 독창적인 이론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훈민정음처럼 사람의 말소리를 이론적으로 체계화하고 문자로 만드는 것은 사람들의 음성을 실제로 듣고 분석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말소리의 구체적 사례들을 수집하고 분석하는 귀납적 연구가 필연적으로 따라야 한다. 이 때문에 공동 창제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구중궁궐에 갇혀 살던 세종대왕께서 손수 훈민정음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했을 거로 생각한다.

 

세상과 단절된 궁궐에 갇혀 계셨던 세종대왕이 혼자 조선 팔도의 다양한 말소리와 한자의 소리까지 풍부하게 경험하기란 어려웠을 것이고, 다른 사람들의 조력이 없었다면 훈민정음을 만드시는 것은 불가능했을 거라고 짐작할 테다. 언뜻 생각하면 그럴 것 같다. 하지만 아주 잠시, 손톱만큼의 인내를 발동해서 생각을 해보면 이런 주장의 설득력은 눈 녹듯이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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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와 그 수하들

출처-<한글학자 김슬옹 박사 자료>

 

세종대왕께서 갇혀 있었다는 그 구중궁궐은 조선 팔도의 온갖 사투리를 구사하던 양반·평민·노예들이 모여들던 장소였다. 굳이 전국을 돌아다니며 말소리를 듣지 않아도 사회 각 계급이 사용하는 말소리 정보가 항상 차고 넘치는 곳이 궁궐이었다. 훈민정음을 만들기 위한 음성학 이론을 만들기에 충분한 정보가 모이는, 조선에서 하나밖에 없는 데이터베이스였다. ‘구중궁궐’이 뿜어대는 음산하고 폐쇄적인 선입견 때문에 우린 궁궐의 이런 면을 쉽게 간과한다.

 

게다가 세종대왕께서는 소리 연구에 필수적인 절대 음감과 매우 예민한 청각을 갖고 계셨다. 세종 31년 12월 11일 자 세종실록에는 박연이 편경(編磬, 아악기의 하나로, 두 층의 걸이가 있는 틀에 한 층마다 두께에 따라 서로 다른 여덟 개씩의 경쇠를 매어 달고 치는 타악기)을 만든 뒤 세종대왕의 점검을 받은 기사가 실려 있다. 세종대왕께서 편경을 쳐 보시더니 이칙(동양 음악에서 십이율의 아홉째 음)이 조금 높다며 해당 옥경을 조금 깎아 소리를 맞추라고 처방을 내리셨다. 박연이 확인해 보니 세종대왕께서 지적한 옥경에 제대로 다듬어지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세종대왕께서 지시한 대로 옥경을 조금 깎아내니 소리를 맞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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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세종대왕릉 트위터>

 

박연은 당대에 왕실 음악 사업 대부분을 책임졌던 권위자이자 실력자였다. 그런 사람이 찾아내지 못한 악기의 미묘한 음차를 세종대왕께서 지적하시고 바른 처방까지 내리신 것이다. 옥경을 세종대왕께 선보이기 전에 박연도 악기를 제대로 연주할 수 있는지 시연했을 터이다. 안타깝게 박연은 그 미묘한 음차를 감지하지 못했던 것 같다.

 

이렇게 세종대왕은 음성학을 연구하기에 꼭 필요한 개인적 자질, 절대 음감과 예민한 청각도 갖춘 분이셨다. 그런 분께 궁궐은 세상과 벽을 쌓는 ‘구중궁궐’이 아니라 음성학을 제대로 연구할 수 있는 최적의 연구소였을 것이다. 일반인들은 접근도 못 할 세상의 온갖 정보를 모은 데이터베이스가 있고, 조선에서 똑똑하다는 사람들은 죄다 모이며, 심지어 조선에서 가장 많은 자본이 모이는 곳이다. 이런 면에서 조선의 궁궐은 돈·정보·인재가 모이는 지금의 구글이나 애플 캠퍼스와 전혀 다르지 않다.

 

현대인의 눈으로도 보아도 세종대왕께서는 연구와 실험을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연구자의 위치에 계셨다. 쥐꼬리만 한 연구비 때문에 관공서와 기업이 발주하는 온갖 사업들을 따내려 동분서주하는 현대 과학자들에겐 부럽기만 한 꿈같은 이야기다. 이쯤 되면 과학자 또는 연구자로서 환경·조건·재능을 모두 갖춘 세종대왕께서 한글을 혼자 만들지 못하셨을 거로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어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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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명나라를 의식한 비밀 사업이라 기록이 없다?

 

혹자는 훈민정음이 완성되기 전까지 훈민정음 창제와 관련된 기록이 없는 것은 명나라 눈치를 보았기 때문이라 주장한다. 

 

공동 창제설을 주장하거나 일부 조선 역사를 공부하는 전문가들은 명나라를 의식해서 세종대왕이 매우 조심스럽게 훈민정음 창제 사업을 진행했기 때문에 기록이 없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집현전 학사인 최만리조차 몰랐을 정도로 보안에 철저했다는 것이다. 특히 대중강연에서는 이런 주장이 거의 정설에 가깝다. 과연 이런 주장은 사실에 부합할까?

 

훈민정음과 더불어 대중강연에서 철통 보안을 했던 다른 예로 자주 거론하는 사업이 있다. 조선만의 역법(달력을 만드는 방법)인 칠정산(七政算)을 만들었던 사업이다. 그전까지 조선은 명나라의 역법을 수입해 썼다. 명나라는 아주 엄격하게 역법을 관리했다. 명나라 안에서 조정이 만든 공식적인 달력 외에 사사로운 방법으로 달력 만드는 것을 금지했다. 이를 어기면 꽤나 무거운 벌을 주었다. 명나라가 이렇게 한 건, 중국처럼 넓은 나라를 일사불란하게 통치하려면 시간을 표준화하고 천문 정보를 독점적으로 관리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3) 진나라 진시황이 처음으로 중국을 통일하며 도량형·음운·문자를 표준화했던 것과 맥을 같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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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EBS>

 

명나라는 같은 원칙을 중국의 영향 아래 있었던 주변 국가들에도 적용했다. 달력은 제공했지만 달력을 만드는 방법은 절대 가르쳐주지 않았다. 명나라의 국가 기밀이었다. 그렇다고 주변 국가가 자력으로 달력 만드는 것을 사사건건 참견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명나라가 다른 나라를 꼼꼼하게 감시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인지, 위치에 따라 달라지는 시간을 정확히 계산하지 못하면 농업을 기반한 한 나라의 생산력에 큰 구멍이 생긴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명나라는 조선이 자신만의 역법을 만드는 것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명나라도, 그다음 청나라도 조선이 조선만의 역법 만드는 것을 문제 삼은 적은 없었다. 이것은 조선의 철통같은 보안 때문이 아니라 명나라나 청나라가 정말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세종대왕 당시의 조선도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세종실록을 보면 세종대왕께서는 조선만의 역법과 달력을 만들기 위해 공개적으로 신하들에게 역법을 연구하라고 지시하셨다. 역법 연구를 시작하라 지시하신 뒤에는 추가 지시도 하시고, 연구 진척 정도도 물으셨다고 세종실록은 전한다. 역법에 대한 기사 중에 명나라에 들키면 안 되니까 은밀하게 수행하라는 내용은 없다. 역법을 만들려면 산법에 능통한 사람이 필요하니 중국말과 한자에 능통한 사람을 보내 산법을 배워 오라는 지시까지 하신다(세종실록 세종 13년 3월 2일). 그렇게 공개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칠정산이고 칠정산으로 만든 달력, 칠정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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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정산의 칠은 해·달·화성·수성·목성·금성·토성

7가지의 행성과 7개의 요일을 나타낸다

 

세종대왕께서 역법의 기본은 산법이라고 말씀하셨다는 기록은 세종대왕께서 과학자로서 놀라운 안목도 갖추고 계셨다는 것을 보여 준다. 명나라가 달력 만드는 방법을 철저히 비밀에 부쳤지만 세종대왕께서는 그 핵심은 산법, 즉 수학에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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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하지만 이 모든 과정은 조정안에서 공개적으로 이루어졌다. 예조에서 칠정산을 더욱 정확하게 적용해보자는 의견을 세종대왕께 건의하기도 했다(세종실록 세종 25년 7월 6일 기사). 막상 칠정산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이렇게 공개적인데 대중강연 연사들이 역법 만드는 것을 매우 은밀했던 기밀 사업으로 포장함은 매우 이상한 일이다.

 

그렇게 포장하는 데에는 집히는 구석이 있긴 하다. 임진왜란 때 왕이었던 선조의 탓이다. 선조는 칠정산을 선조 31년(1598년), 사용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선조는 명나라 사신이 혹시라도 조선이 조선만의 역법을 사용하는 것을 알게 될까 벌벌 떨었다. 명나라의 달력보다 정확했던 조선의 달력을 지레 겁먹어 포기한 것이다. 겁보이자 쫄보인 선조의 성정과 왜의 침입을 막기 위해 명나라 도움이 절실했던 당시 상황이 만든 합작품으로 보인다. 아마 선조의 이런 행각이 후대 연구자들에게 조선에서 역법을 만드는 것이 매우 은밀한 사업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게 했을 듯하다. 

 

이때를 빼면 조선은 꾸준히 자신만의 역법을 만들려고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역법 개정과 달력 편찬 사업은 정조까지 이어진다. 요새 사주보는 사람들이 사주를 뽑을 때 쓰는 ‘만세력(萬歲曆, 조선 정조 6년[1782]에 편찬한 역서)’이 그것이다. 조선만의 달력을 만드는 것이 대중강연 연사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아주 은밀한 비밀 사업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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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 맞는 역법을 만든다는 것은 상당한 시간과 수고가 드는, 정말 힘든 일이다. 모든 연구가 그렇듯, 결과를 장담할 수 없고 잘못 만들어지면 왕조의 권위를 흔들고 농업을 기반으로 한 나라 살림에 큰 타격을 줄 수 있는 매우 위험한 일이다. 그런데도 세종대왕께서 조선만의 역법을 만들려고 했던 것은 깊은 애민 정신과 함께 학자로서 가졌던 지적 호기심, 자존감 그리고 성취욕이 있었던 까닭이라 여긴다. 훈민정음 창제도 마찬가지다. 칠정산처럼 전혀 비밀스럽게 만들어지지 않았다.

 

5. 조선시대 시험 출제 범위였던 훈민정음

 

훈민정음 창제 과정이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명나라의 눈치를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앞서 설명한 것처럼 세종대왕이 혼자 연구하고 혼자 이론을 세우고 혼자 훈민정음을 만들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정말 명나라의 눈치를 봤다면 훈민정음으로 작성된 언해본의 확장판이 만들어졌지 깡그리 한문으로 작성된 훈민정음해례본이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세종대왕께서 훈민정음해례본을 한문으로 작성해서 반포하신 이유는 한자와 더불어 언문인4) 훈민정음을 조선의 공식 문자 혹은 그에 버금가는 지위의 문자로 삼으려 하셨기 때문이다. 훈민정음해례본이 반포된 이후, 세종대왕께서는 관료들을 선발하는 시험에 훈민정음을 시험과목으로 채택한다.5) 세종대왕께서 훈민정음의 뜻과 원칙을 숙지하지 못했더라도 훈민정음을 읽고 쓸 줄 알면 뽑으라고 지시했다. 시험을 준비하려면 교재가 필요했을 것이다. 훈민정음해례본을 발간한 데에는 이럴 때 교재로 쓰려는 목적도 염두에 두었으리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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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서울시>

 

훈민정음을 시험과목으로 채택했는데도 훈민정음 창제 당시 최만리가 올렸던 것과 같은 반대 상소가 전혀 올라오지 않았다는 점도 훈민정음 창제가 비밀 사업은 아니었다는 점을 뒷받침한다. 정말 명나라가 문제였다면 최만리의 반대 상소 이후에도 훈민정음에 대해 신하들의 반대 상소가 빗발쳤을 것이다. 시험 과목으로 채택한 데에 대해서도 엄청난 반대 상소가 올라왔을 것이다.

 

현대의 잣대로도 세종대왕께서 과학자 혹은 연구자로서 전혀 손색이 없는 환경과 지위에 계셨던 분이다. 어쩌면 600여 년에 가까운 시간 간극과 ‘왕’이라는 정치적 지위가 주는 인상 때문에 갖게 되는 우리의 얄팍한 선입견이 천재 과학자이자 주도적 연구자 세종대왕의 면모를 퇴색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거기다 세종대왕의 애민 정신을 돋보이게 하려고 사실을 조금 더 극적으로 각색하는 대중 연사들의 말초적인 화법도 천재 과학자 세종대왕의 참모습을 가리는 데 일조하고 있다.

 

 <계속>

 

 


주)

1) 지난 글에서는 최만리가 조장한 분위기를 전달하려고 필자는 무지 가볍게 "아니 우리 몰래, 갑자기 맘에 맞는 집현전 애송이들 열댓 명하고 쿵짝이 맞아 가르치고 익히게 하고……’로 번역했다.

 

2) 공손히 생각건대 우리 주상 전하께옵서 유교를 숭상하시고 도를 소중히 여기시며, 문학을 힘쓰고 교화를 일으킴에 그 지극함을 쓰지 않는 바가 없사온데, 만기를 살피시는 여가에 이일에 생각을 두시와, 이에 신 신숙주와 수 집현전 직제학 신 최항, 수 직집현전 신 성삼문, 신 박팽년, 수 집현전 교리 신 이개, 수 이조정랑 신 강희안, 수 병조 정랑 신 이현로, 수 승문원 교리 신 조변안, 승문원 부교리 신 김증에게 명하시와 세속의 습관을 두루 채집하고 전해 오는 문적을 널리 상고하여, 널리 쓰이는 음에 기본을 두고 옛 음운의 반절법에 맞추어서 자모의 칠음과 청탁과 사성을 근원의 위세한 것까지 연구하지 아니함이 없이 하여 옳은 길로 바로잡게 하셨사온데, 신들이 재주와 학식이 얕고 짧으며 학문 공부가 좁고 비루하매, 뜻을 받들기에 미달하와 매번 지시하심과 돌보심을 번거로이 하게 되겠삽기에(국사편찬위원회 역, 동국정운 신숙주 서문)

 

3) 역법은 농업 기반의 사회에서 생산에 필수적인 요소인 절기 추산뿐만 아니라 나라의 운명을 예측하는 ‘천문’을 읽어내는 근거로 사용되었다. 이런 이유로 중국에서는 당나라 때부터 역법을 독점적으로 소유하고 행사하기 위해 역법을 사사로이 다루는 것을 금지하는 법 조항 명문화했다. 당나라의 ‘당률’이나 명나라의 ‘대명률’에서 법조문을 확인할 수 있다.

 

4) 세종대왕도 사용했던 훈민정음의 딴 이름. 언문이라는 용어가 훈민정음을 비하하는 의미라는 이야기가 있다. 실상 세종대왕도 사용했던 용어다. 비하의 의미보다는 일상에서 쓰이는 조선어를 기록할 수 있는 문자 정도로 이해하는 게 당시의 용례에 더 가까워 보인다.

 

5) 훈민정음해례본이 반포된 이후, 세종 28년과 29년의 이과(상급 행정 서무관리직을 뽑는 시험)에 훈민정음 실력을 평가했다. 훈민정음의 뜻과 원칙을 이해하지 못해도 읽고 쓸 줄 알면 뽑으라고 교시했다. 今後吏科及吏典取才時, 訓民正音, 竝令試取。 雖不通義理, 能合字者取之(세종 28년 12월 26일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