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필자 주 

 

1) 지난 편과 마찬가지로 세종대왕께는 계속 존대를 사용한다. 세종대왕을 존경하는 필자의 마음이 만드는 글 길이라 그대로 두기로 했다.

 

2) 필요한 근거나 설명인데 본문에 싣자니 글이 길어지고 맥도 끊겨 각주를 달았다. 각주는 굳이 읽지 않아도 된다(마음은 읽어 주길 바라지만..).

 

 

훈민정음(한글)이 왜 음성학의 양자역학인가. 질문의 답은 훈민정음의 완벽한 자음(子音)과 모음(母音) 분리에 있다. 우리는 한글을 쓰는 통에 자음과 모음 분리를 당연하게 여긴다. 그런데 자음과 모음을 분리하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자음과 모음을 완벽하게 분리한 문자는 세상에 한글뿐이다. 페니키아 라틴 계열 문자들이 자음과 모음을 지녔지만 한글에 비추어 보면 여전히 자음에 모음 성분이, 모음에 자음 성분이 섞여 있다.

 

이 글은 훈민정음의 자음과 모음 분리와 그 의미에 관한 이야기다. 

 

1. 자음 따로, 모음 따로?

 

현대 음성학도 사람의 말소리는 자음과 모음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본다.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말소리가 자음과 모음의 두 성분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가능한 한 구분해 쓰려고 했다. 이렇게 구분해서 쓰려는 경향은 소리글자(=표음문자)인 페니키아 계열의 알파벳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영어나 유럽의 알파벳에서 보듯, 페니키아계 알파벳은 자음과 모음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국인들도 뜻-소리글자인 한자의 소리를 나누어 이해하려 했으나 하나의 글자에 여러 음소가 섞여 있는 탓에 소리글자처럼 자음과 모음으로 잘 나눌 수 없었다. 글자 소릿값 전달이 필요할 때 곤란을 겪던 그들은 궁여지책으로 중국어 글자의 초성은 성모(聲母), 중성과 종성은 운모(韻母)로 나누는 반절법(反切法)을 도입했다. 예를 들어 紅(홍)의 소릿값 전달은 '胡籠(호롱)' 두 한자를 이용했다. 반절상자 胡(ho)는 성모 h음을, 반절하자 籠(long)은 운모 ong음과 성조를 표시하여, 紅의 음 hong을 도출했다. 그러나 이렇게 나눈 성모와 운모에는 자음과 모음 성분이 뒤섞인다. 

 

페니키아 계열의 우리가 알고 있는 소리글자들도 자음과 모음이 완벽하게 분리되어 있지 않다. 오랜 시간 관습적으로 써온 문자와 거기에 배정된 소리에서 자음과 모음을 분리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어를 봐도 이런 문제를 쉽게 포착한다. ‘때리다’는 뜻을 지닌 ‘strike’의 발음기호는 /straik/다. ‘s’와 ‘t’ 뒤에 모음이 존재하지 않지만 영어를 쓰는 사람이면 두 글자를 무리 없이 읽을 수 있다. 이 발음을 한글로 표기하면 ‘스’와 ‘트’가 된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에게 ‘ㅅ’과 ‘ㅌ’만 적어 놓고 읽으라고 하면 읽지 못한다.1) 훈민정음의 자음을 모음 성분을 완전히 들어낸 순자음소로 추출했기 때문에 자음만 따로 읽지 못한다.2)

 

o5lz2cq54f53y360893q.jpg

자음과 모음 분리 덕에 

한국인이 겪는 (버그) 경험

 

2. 스트라이크 vs 스뜨라이크

 

한때 베스트셀러였던 영어 회화책이 있었다. 재미 교포가 쓴 영어 회화책인데 그 책에서 가장 흥미롭고 재미있었던 부분은 영어 발음을 한글로 표기한 대목이다. 이 책의 표기법에 따르면 ‘strike’는 ‘스트라이크’가 아니라 ‘스뜨라이크’이다. 그 책의 저자가 이렇게 표기한 것은 무성 자음으로 분류한 영어의 ‘s’ 뒤에 무성 자음이 따라오면 조금 된소리로 발음되는 것을 포착하고 좀 더 정확히 표기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strike’의 원어민 발음을 들으면 ‘스트라이크’로 들리지 않고 ‘스뜨라이크’에 가깝게 들린다. 사실 ‘트’와 ‘뜨’의 중간 정도 되는 발음인데 ‘트’보다는 ‘뜨’에 더 가깝게 들린다. 그런데 이보다 더 가깝게 발음할 수 있도록 한글로 표기하는 방법이 있다.

 

‘슫트라이크’로 표기하면 원어민의 발음에 더 가까워진다. 물론 ‘s’와 ‘t’ 발음만 볼 때 그렇다는 소리다. ‘슫’의 ‘ㄷ’ 이 뒤에 오는 ‘트’의 초성 ‘ㅌ’을 조금 된소리(경음)로 발음하게 만든다. 미끄러진다는 뜻의 ‘slide’도 마찬가지다. 이 단어의 한글 외래어 표기법은 '슬라이드'다. 그런데 이 표기를 ‘슫라이드’라고 해야 발음 /slaid/에 더 가깝다(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끊어 읽으면 안 된다. 한글 단어 읽듯이 자연스럽게 읽어야 한다). 혓소리인 ‘ㄷ’이 가볍게 되어 반혓소리인 ‘ㄹ’에 가깝게 발음되기 때문이다(이는 훈민정음해례본의 종성해에서 이미 설명해 놓은 바 있다.3) 600년 전 사람들도 종성에 오는 ‘ㄷ’을 ‘ㄹ’로 부드럽게 발음했다는 것이다).

 

‘strike’와 ‘slide’ 발음을 한글로 표기하며 장황하게 설명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현대 음성학이 순수한 자음으로 분류한 ‘s’를 세종대왕께서 정립한 음성학으로는 순수한 자음이 아니라, 모음과 받침 자음의 소리까지 포함한 것으로 분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4) 영어에서 기본 모음은 ‘a·e·i·o·u’가 전부다. 더구나 a, e는 단모음도 아니고 이중모음이다. 훈민정음의 ‘ㅡ’에 해당하는 소리를 지닌 모음 글자는 영어 알파벳에 없다. 

 

‘s’를 훈민정음으로 표기하면 ‘ㅡ’에 해당하는 모음 음가를 포함한 것으로 분석된다. 하지만 영어 알파벳에는 ‘ㅡ’에 해당하는 모음 글자가 없어 오랫동안 관습적으로 ‘s’를 모음 없이 읽어 온 것으로 보인다.5)

 

현대 음성학조차 철저하게 모음 요소를 분리하지 못한 것은 현대 음성학이 라틴 계열 문자를 쓰는 서구 유럽에서 시작되었고 이 때문에 모음이 섞여 있는 자음도 그냥 음소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다른 영어의 자음도 ‘s’처럼 모음 없이 쓰고 읽을 수 있다. 이렇듯 세종대왕께서 오직 예민한 청각에 의지해, 현대 음성학도 최근 들어서야 이론화한 사람의 말소리를 과학적 구조로 분석해 내셨다는 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이 정도로 놀라서는 안 된다. 더 놀랄 일이 남았다.

 

3. 우주 vs 우주

 

3.jpg

4.png

신비하고 환상적인 사진은 우주 망원경인 제임스 웹이 얼마 전 촬영한 우주의 모습이다. 아래 딱딱하고 건조하기 이를 데 없는 표는 졸면서 고등학교 화학 시간을 보낸 사람도 희미하게 기억에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주기율표다. 전혀 달라 보이는 이 사진과 표는 정확히 같은 대상, 우주를 보여준다.

 

제임스 웹이 찍은 사진이 마치 무한히 큰 우주를 보여주는 것 같지만 이 사진의 우주는 우주의 한 귀퉁이, 그 귀퉁이의 귀퉁이, 그 귀퉁이의 귀퉁이…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 사각형 몇십 개를 대충 쌓아 만든 듯한 아래 주기율표는 우주 자체다. 아래 주기율표 한 장으로 우리가 살고 있고 눈으로 보는 전 우주를 설명할 수 있다.

 

세종대왕께서 만드신 훈민정음은 정확히 음성학의 주기율표다. 이 말은 아인슈타인이 자신에게서 시작된 양자역학을 거부한 것과는 달리, 세종대왕께서 스스로 양자 도약까지 하셨다는 소리다.

 

4. 소리의 가장 작은 단위를 찾아

 

러시아 화학자인 드미트리 멘델레예프가 처음 주기율표를 만들 당시에는 원자가 물질의 가장 작은 단위라고 여기고 원소(元素)라고 이름을 붙였다. 하지만 양자 역학이 등장하고 인류의 계산 능력과 관찰 역량이 커지자 원자가 물질의 기본 단위가 아님이 밝혀졌다. 물론 사람이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물질의 성격은 주기율표의 원자들이 지닌 성질에서 비롯되는 것이지만 양자 역학은 물질의 기본 단위를 그보다 더 작은 쿼크 단위까지 밝혀냈다.6) 그리고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여러 미시적 힘의 작용이 이제는 해·달·별처럼 우리 눈에 보이는 거시적 우주까지 설명하는 수준에 이르렀다.7)

 

이렇게 큰 것을 더는 나눌 수 없을 때까지 나누어 기본 단위를 찾는 것을 ‘환원주의(reductionism)’라고 한다. 인간의 생각을 다루는 철학에서는 ‘환원주의’에 대한 격한 논쟁이 있지만 물질과 물질이 빚어내는 현상을 다루는 현대 자연 과학은 기본적으로 환원주의가 이론의 틀이 된다.

 

훈민정음을 만들고자 세종대왕께서 정립하신 음성학은 현대 자연 과학에서나 쓰일 법한 수준의 환원주의가 적용되어 만들어진 이론이다. 한마디로 음성학에 있어서는 양자 역학에 비유할 만한, 현대 음성학의 이론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첨단 이론이다. 부족한 것이 있다면 이미 설명한 바 있지만 산 사람의 몸속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기계가 없었다는 것뿐이다.

 

5. 옜다, 음성학의 양자역학

 

5.jpg

 

위의 표는 국제음성기호(IPA; International Phonetic Alphabet) 자음 일람표인데 한마디로 현대 음성학의 주기율표다. 자음 낱자 하나하나를 원소처럼 자음의 가장 작은 단위인 자음소로 취급한다.8)

 

표의 첫 행은 발성을 만드는 부위의 해부학적 분류로 훈민정음의 5음 부위를 좀 더 세밀하게 나누고 있다. 국제음성기호도 구강 내 구조들을 기준으로 하지 않으면 발성을 분류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IPA 표의 왼쪽 첫째 열은 발성할 때 발성 부위의 물리적 운동을 기술하는 방법으로 자음들을 분류했다. 혀를 찬다(탄설음), 막는다(폐쇄음), 코로 날숨을 내보낸다(비음) 등 운동을 묘사하는 용어들인데 너무 직관적인 서술에 치우쳐 있어 과학적인 용어라는 인상이 잘 들지 않는다. 여하튼 이 표는 원소의 주기율표처럼 현대 음성학이 2019년에 내놓은 최첨단 표다.

 

6.png

 

위의 표는 훈민정음을 필자가 국제음성기호 표처럼 정리한 것이다. 한자들이 섞여 있어 좀 예스러워 보이지만 구조는 같다. 첫 행은 발성 부위별로 나눈 것이고 왼쪽 첫째 열의 용어 불청불탁(不淸不濁)·전청(全淸)·차청(次淸)·전탁(全濁)들은 요즘 용어로 바꾸면 파동 수(Hz)와 세기(dB)가 된다.

 

성도9)를 흐르는 날숨의 세기와 마찰 강도를 당시의 음운 용어와 음악 용어를 빌어 표시한 것이다.10) 불청불탁에서 전탁으로 가면서 세기와 강도가 세지고 반대로 음은 낮아진다.

 

어느 것이 더 첨단인지 판단하기 어려울 만큼 600년 전에 만든 훈민정음 자음의 분류체계는 결코 현대 음성학에 뒤지지 않는다. 이미 영어 자음에서 설명한 것처럼 국제음성기호에서 분류하고 있는 자음들은 기본적으로 모음 성분을 지니고 있다.

 

한국인들에게 이 자음들이 지닌 모음 성분들을 맨 귀로도 대충 구분할 수 있다. 아마도 이것은 더욱 순수한 음소들로 이루어진 표기체계 한글로 언어 훈련을 받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현대 음성분석기보다 더 날카로운 말소리 분석 능력을 갖춘 한국인들을 상대로 뉴스 앵커 출신 대통령실 홍보 수석이 ‘바이든’을 ‘날리면’이라고 우기는 건 스스로 비웃음을 자초하는 일이다...

 

이제 모음 차례다. 훈민정음 모음 체계를 보면 ‘우와!’ 벌어진 입을 닫을 수가 없다. 먼저 국제음성기호의 모음 일람표(해당 표는 누가 봐도 복잡하다. 그 점을 지적하고자 두 문단으로 아주 간략히 설명하고, 이와 대비를 이루는 훈민정음 설명으로 넘어간다)를 보자.

 

7.jpg

 

밑변이 윗변보다 짧은 사각형은 입을 단순화하여 도식화한 것이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그은 빗금과 수직선은 혀의 앞·뒤 위치를 보여주고 수평선은 혀와 입천장(구개)의 거리를 표시한다. 모음을 발음할 때 혀가 입천장에 완전히 닿는 경우가 없지만 혀와 입천장의 거리는 편의상 개(open), 폐(close)를 기본 단위로 삼는다.

 

빗금이나 수직선을 중심으로 양쪽에 발음 기호가 놓여 있는데 이것은 입술 모양을 표시한다. 오른쪽에 발음 기호가 놓이면 입을 둥글게 모아 발음하라는 소리다. 각 기호가 놓인 자리를 보면 혀의 위치와 입술의 모양을 짐작할 수 있다.

 

입의 모양을 단순화해서 한눈에 혀나 입술의 위치를 알아보기 쉽지만 쓰인 기호들은 참… 너무… 복잡하다. 기호 자체에는 한글처럼 어떤 원리나 관계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기호들을 하나하나 소리와 연결해서 외우지 않는 한 기호만 보고 소리를 추측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훈민정음의 모음도 소리와 혀의 위치에 따라 국제 발음기호의 틀에 맞춰 배치할 수 있다. 훈민정음은 이미 모음을 구축(口蹙; 모은 입술), 구장(口張; 편 입술) 하는 식으로 2단으로 계량화하고, 혀의 위치도 축(縮)·소축(小縮)·불축(不縮) 3단으로 계량화해서 표기해 놓았다. 국제 음성표기처럼 2단계와 3단계로 분류했으니 그 틀에 맞추는 건 어려운 일은 아니다. 실제 국어 언어학 연구도 국제음성기호의 발음기호에 맞춰 한글 모음 소리를 분류한다.

 

문제는 국제음성기호의 모음 표에 한글의 모음을 맞추면 과학적이고 조직적인 훈민정음 모음체계를 확인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훈민정음의 치밀하고 과학적인 면모를 드러내려면 국제음성기호 틀을 포기하고, 훈민정음 내용들을 약간의 수학적 연산기호와 숫자를 빌어 표를 만들 필요가 있다.

 

8.png

 

모음자 밑에 작게 써 놓은 것은 모음자를 훈민정음의 모음소 'ㆍ, ㅡ,ㅣ'와 두 개의 연산자 '⊕, ⊗'로 해당 모음을 분해해서 표기한 것이다. 필자는 이 표를 보고 있으면 입자물리학으로 다듬어진 원소 주기율표를 보는 것 같다. 이런 것이 600년 전에 만들어진 훈민정음에서 구현되다니 그저 놀랍기만 하다.

 

지구상에서 한글만 유일하게 된다. 이유는 세상 누구도 추려내지 못한 물리학의 쿼크 같은 모음의 단위 음소를 찾아냈기 때문이다. 현대 과학 같은 맥락으로 단위 음소들의 역학 관계로 말소리를 설명하셨기에 가능한 일이다.

 

필자는 앞서 보였던 훈민정음의 자음 표와 이 모음 표를 보면 세상의 모든 소리가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듯하다.11) 국제 발음기호 표와 비교해서 어느 것이 더 현대적인지는 독자 각자의 판단에 맡긴다.

 

6. 니들이 ‘ㅇ’ 값을 알아? 

 

마지막으로 ‘ㅇ’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훈민정음이 자음과 모음을 거의 완벽하게 나눌 수 있었던 결정적 요소는 ‘ㅇ’ 값을 설정한 데 있다. 어떤 학자들은 숫자 0과 비슷해서 ‘ㅇ’이 고유한 소릿값을 지니지 않은 것으로 설명한다.

 

안타깝지만 훈민정음은 ‘ㅇ’ 값이 실제 존재하는 값이라고 분명히 써 놓았다. 당연히 ‘ㅇ’ 값을 찾아야 한다. 실제 ‘ㅇ’은 모음 앞에서 자음이 지닌 성질을 발현한다. 자음과 모음을 결정적으로 가르는 주된 기준은 성대 진동이다. 성대 진동이 없으면 자음이고 성대 진동이 있으면 모음이다.12) 그런데 ‘ㅇ’은 짧지만 성대 진동이 없다.

 

현대 음성학도 훈민정음처럼 사람의 말소리를 자음과 모음의 조합으로 해석한다. 'C + V' 혹은 'C+V+C'로 표기한다. C는 영어 단어 consonant(자음)의 첫 글자이고 V는 vowel(모음)의 첫 글자다.

 

제일 첫 자음의 자리를 onset(음절의 어두 자음군 또는 시동자리)이라고 한다. 그런데 자음 없이 모음만 덜렁 쓰고 읽는 인도-유럽 어족 모음을 음성분석기로 분해하면 시동자리에 마치 자음이 놓인 것처럼 성대 진동이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현대 음성학은 모음으로 시작하는 발성에서 성대 진동이 비어 있는 시동자리에 ∅ 값을 배정했다.

 

공집합 기호인 ∅(또는 {})는 수학에서 원소가 없는 집합을 의미한다. 집합은 적어도 한 개 이상 원소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공집합은 원소가 없는 집합으로 현대 수학은 규정한다.13) 모순 자체인 공집합 개념을 도입한 것은 수학의 완전성을 위해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음성학도 이론의 정합성을 위해 ∅기호를 도입했다. 그러나 수학과는 조금 다른 결로 사용한다. 껍데기는 있는데 내용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다!’는 뜻으로 쓴다.

 

반면 세종대왕께서는 현대 음성학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다고 여긴 그 onset(시동 자리)에 목구멍과 구강을 아주 원활히 통과하는14) 고유한 소리를 지닌 자음 작용이 모음 앞에 있다고 파악하셨다. 목구멍을 본떠 ‘ㅇ’로 표기하고 목구멍소리의 기본자로 삼으셨다.

 

‘ㅇ’에 고유한 소릿값이 없다면 나머지 목소리 소리(후음)의 다른 글자(소리), ᅙ·ㅎ·ᅘ들은 끌어낼 수 없고 자음과 모음도 완벽하게 분리할 수 없다. 세종대왕께서는 중성(모음)은 초성(자음)이 이끌어야 발현된다고 여겼다. 모음 홀로 글자 소리를 시작할 수 없다고 봤다.

 

"중성이 깊고, 얕고, 닫고, 여는 소리로 앞에 있는 초성을 부르면, 초성은 5음과 청탁으로 중성에 화답한다."

- 훈민정음해례본 제자해(필자 역)15)

 

현대 음성학의 이론은 정확히 세종대왕께서 600년 전에 하신 발상과 정확히 일치한다.

 

한 번 더 판단의 시간이 돌아왔다. ‘ㅇ’의 소릿값을 ‘∅’로 간주하는 현대 음성학과 ‘ㅇ’의 소릿값을 어금니 소리인 ‘ㆁ’ 비슷한 소리라고 여겨 ‘ㅇ’에 고유한 소릿값을 준 훈민정음 중 어느 쪽이 더 첨단인지 독자께서 판단해 보시기 바란다. 필자는 현대 음성학의 논의를 보고 훈민정음을 읽다 보면 부처님 손바닥 위에 있는 손오공이 자꾸 떠오른다.

 

<한글과 그 루머 이야기는 5편에서 계속합니다>

 


 

1) ‘ㅅ’을 ‘시옷’으로 읽는 것은 세종대왕이 아니라 훈민정음이 반포되고 100년 정도 지난 뒤 중국어에 능통했던 최세진이 어린이에게 천자문을 가르치기 위해 쓴 ‘훈몽자회’에서 임의로 붙인 이름이다. 아마 당시 최세진은 훈민정음 언해본도, 훈민정음해례본도 참고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덕분에 발음기관에 따라 분류되어 질서정연했던 훈민정음의 초성이 모두 흐트러졌는데 그 순서와 이름이 아직도 한글을 처음 배울 때 쓰인다. 이름은 둘째 치고 순서는 당연히 교정이 필요해 보인다. 훈민정음의 원래 순서로 가르쳐야 훈민정음이 지닌 과학성의 참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2) 모음은 따로 읽기도 하지만 모음 시작 전에 ‘ㅇ’음이 붙어 있다. 세종대왕께서는 훈민정음을 초성・중성・종성, 즉 자음과 모음을 배합해 음절 단위로 표기하도록 규정하셨다. 한글이 풀어쓰기가 아닌 모아 쓰기를 하게 된 이유는 말소리의 조성이 자음과 모음이 더해져 음절로 구현되어 가능한 것으로 이해하셨기 때문이다. 주시경을 위시한 일군의 국어학자들은 효율성, 발음 표기의 실제성 등을 이유로 한글의 풀어쓰기를 주장했었다. 이는 세종대왕께서 훈민정음을 만들 때 만드신 새로운 음성학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3) 如入聲之彆字 終聲堂用ㄷ 而俗習讀爲ㄹ 盖ㄷ 變而爲輕也 입성인 별彆자 같은 경우 종성은 당연히 ‘ㄷ’을 써야 하는데 사람들 버릇이 ‘ㄹ’로 읽는다. 이는 대개 ‘ㄷ’이 가볍게 변했기 때문이다(훈민정음해례본 종성해, 필자 역). 훈민정음의 ‘ㄷ’은 혓소리고 ‘ㄹ’은 반혓소리다. 현대 음성학에서는 ‘ㄷ’에 해당하는 ‘d’과 ‘l’을 모두 치경음으로 분류한다. 훈민정음이 혀를 중심으로 설명한 것이라면 현대 음성학은 이를 중심으로 설명한 것이다. 모두 혀와 안쪽 잇몸이 만드는 공간을 폐에서 나온 공기가 빠져나오며 내는 소리를 의미한다. 훈민정음과 현대 음성학의 용어가 다를 뿐 두 소리는 비슷한 발음 구조에서 나는 소리로 인식하고 있는 셈이다.

 

4) strike를 현대 음성학의 음절 분석으로 표기하면 C1C2V1V2C3이 된다. 첫 번째 자음에는 모음 개입 없이 자음 만으로 소리가 만들어지는 것으로 분석한다. 라틴계열 문자의 자음에 과연 모음의 성분이 포함되어 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거리다. 영어 알파벳에서도 /r/ 소리에 대해서는 자음의 모음성을 지적하지만 그 외의 자음들은 모두 순수한 자음 성분을 가진 글자로 분류한다. 국제 발음기호에 훈민정음의 ‘ㅡ’에 해당하는 발음기호가 /ɯ/ 또는 / ʉ/가 있으나 이를 라틴 계열 문자의 자음이 단독으로 쓰일 때 부기하지 않는다. 현대 음성학도 사람의 말소리를 음절 단위로 분석하지만 훈민정음만큼 말소리의 [자음소(C)+음소(V) à 음절(syllable)]의 관계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인간이 내는 모든 소리가 이와 같은 음절 구조를 가졌다고는 할 수 없지만 언어와 관련된 발성을 분석하는 데 있어 훈민정음과 모아 쓰기 음절 단위 표기가 소리의 성분을 분석하는 데 국제 발음기호보다 훨씬 정교하고 강력하다.

 

5) ’s’뿐만 아니라 모든 자음이 모음 없이 발음이 가능하다. 이것은 페니키아-라틴계 문자들의 공통적인 특징이고 인도 범자의 특징이기도 하다. 인도 산스크리트 기본자는 모두 모음을 내재하고 있다. 사실 한글을 제외하면 세상의 모든 글자는 인간의 기억 이전에 만들어진 문자들이고 훈민정음처럼 체계적인 음성학 이론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글자들이 아니다. 따라서 관습적으로 써왔던 이들의 언어습관도 마땅히 존중 받아야 하나 음성학적 견지에서는 사람의 말소리를 충분히 표시할 수 있다고 보기 어렵다. 이런 점에서 훈민정음의 음성학적 가치는 현대 음성학이 만든 국제 발음기호를 뛰어넘는 최첨단이라고 볼 수 있다.

 

6) 사실은 쿼크도 빛이 덩어리지며(양자화되면)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으니 물질의 최소 단위는 하나의 원소, ‘빛’으로 환원된다.).

 

7) 이를 대통일 이론이라고 부른다. 힉스 입자의 발견으로 양자역학과 일반상대성 이론의 대통합에 한 발짝 더 다가섰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지금보다 더 큰 현미경, 입자가속기가 필요하고 이론 정리도 필요하지만 지금까지 인류 지성사가 걸어 온 길을 보면 우리의 우주를 깔끔하게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이 만들어지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진 않다.

 

8) 여기에 입술소리 밑에 ‘ㅇ’을 붙여 만든 순경음 4자를 포함하면 총 27자의 자음이 완성된다. 심지어 세종대왕께서는 한자음에 있는 치음들을 표시하기 위해 이빨소리의 글자 모양을 변형한 글자 ‘ᄼᄽᅎᅏᅔᄾᄿᅐᅑᅕ’를 만드셨다. 이 내용은 훈민정음 언해본에서 확인할 수 있다.

 

9) 聲道, vocal tract. 발성하기 위해 날숨이 폐에서 나와 성대에서 입술과 코로 지나는 통로를 말한다.

 

10) 날숨의 세기와 마찰 강도에 따라 각 글자의 음높이도 달라진다. 첫째 행의 아래 쓰인 ‘궁상각치우’는 실제 각 자음의 음높이로 추정된다. 훈민정음해례본이 주역의 원리로 글자들의 작동 원리를 설명하고 있어 예전부터 중국에서 내려오던 오행과 오성의 철학적 표현으로만 치부하려는 경향이 있지만, 그보다는 각 글자의 상대적 음높이도 고려해서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11) 훈민정음도 세상의 모든 소리를 다 담기는 힘들다. 혀를 빠르게 차서 내는 소리, 날숨이 아닌 입천장에 붙인 혀를 빠르게 떼며 기압 차를 이용해 들숨으로 내는 소리 등 세상에는 훈민정음으로도 표기할 수 없는 소리가 존재한다. 그렇더라도 지금까지 나온 그 어떤 음성기호도 표기할 수 없는 소리들을 훈민정음은 표기할 수 있다.

 

12) 실제로는 사람의 모든 발성은 성대 진동을 동반한다. 이렇게 성대가 진동해서 나는 소리를 기음(基音)이라고 하고 사람 발음의 바탕이 된다. 따라서 유성음과 무성음의 구분은 사실 무의미하다. 음성학에서 사람의 발성을 기술하는 가장 지지받는 이론은 음원 여과(source filter)이론이다. 여기서 여과(filter)는 2~4개까지 독립적인 여과장치들을 지닌 가정용 정수기를 생각하면 된다. 수도관에서 나오는 원수를 정수할 때 쓰는 여과장치들을 생각하면 된다. 성도의 여러 부위들, 흉곽, 기도, 성대, 후두, 구강, 비강, 코와 입 주위에 산재한 발성 부위들이 여과장치다. 소리는 폐에서 나온 날숨이 먼저 기관을 지나 성대에 있는 성문(glottis)에서 기본적인 파장을 만든다. 사실 기관을 흉곽 부위에서 지날 때도 파장이 발생하는데 이 두 파장이 말소리의 기음을 이룬다. 이렇게 기관과 성문을 통과한 날숨은 후두를 거쳐 입과 코로 나간다. 당연히 이 과정에서도 날숨이 마찰하며 파장을 만든다. 소리는 이렇게 날숨이 여러 성도 부위를 거치며 만드는 파장들이 서로 공명하거나 상쇄하며 만든다. 기관과 성대를 지나며 만들어지는 주파수와 날숨이 그다음 성도 부위를 거치며 만드는 주파수가 비슷하게 일정 범위 안에 들면 공명(resonance)이 일어나고 주파수가 일정 범위 안에 들지 않을 정도로 차이가 나면 주파수는 상쇄된다. 유성음과 무성음이란 표현은 음원 여과 이론으로 설명하면 소리의 공명과 상쇄를 표현한 용어들이다.

 

13) 수학에서는 이외에도 상식에 위배되는 모순을 허용하는 개념들이 있다. 허수도 그 경우인데 제곱해서 음의 값을 지닌 수를 상상하는 것은 쉽지 않다. 허수 개념이 없었다면 수학이나 물리학이 지금처럼 발전할 수 없었다. 물리학에서 반입자라는 개념이 처음 나왔을 때도 이것은 모순이라고 생각했다. 수학적 계산을 통해 추정된 반입자는 이는 곧 실재하는 것으로 입증되었다. 전자에 대한 반입자인 양전자가 발견되었고 이것은 사람 몸을 들여다 보는 PET라는 관찰 기구에 응용되고 있다.

 

14) 소리가 빈 듯 잘 통한다. 물처럼 맑게 비어 막힘없이 흐르는 것이다. 聲虛而通 如水之虛明而流通也 (훈민정음해례본 제자해, 필자 역)

 

15) 中聲以深淺闔闢唱之於前 初聲以五音淸濁和之於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