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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중기 인물로 1530년에 태어나 1604년까지 살다 간 인물이 있습니다. 그 이름은 ‘금난수’. 그는 퇴계 이황의 제자였지만, 친구들과 달리 20대와 30대 내내 고향에서 과거 장수생 생활을 했습니다. 후배들을 모아 술 먹기 좋아하며, 공부를 게을리한 탓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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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세에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는 영광을 거두기도 했지만, 이후 30대 내내 대과에서 번번이 낙방하며 관직에 나가지는 못합니다. 결국 40대에 들어서며 관직을 포기하고 스승인 퇴계 이황과 관련된 사업을 진행하며 안동 지역의 오피니언 리더 활동에만 매진합니다.

 

그러다 50세가 되던 1579년, 그에게 첫 관직이 떨어집니다. 허나, 폼나는 현감직이나 부사직이 아닌 9급 공무원 묘지기(능참봉) 관직이었습니다. 다소 실망은 했지만, 그는 지루한 묘지기직을 충실히 수행합니다(가끔 농땡이도 폈지만요). 묘지기 생활을 하며, 미련이 남았던 대과에도 다시 꾸준히 도전했지만, 역시 번번이 낙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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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7년이란 세월이 흘렀고, 드디어 그에게 승진의 때가 왔습니다. 그의 나이 57세에 종8품 장흥고(종이 등의 물품을 공급하던 창고)의 실무자인 봉사(奉事)로 제수된 것입니다. 57세에 실무자 공무원이 되었다니 뭔가 좀 기묘하긴 하지만, 어쨌든 승진은 승진입니다. 새해가 되자마자 열심히 새 보직에 적응하는 그의 모습을 읽어볼까요.

 

 

더 자세한 내용이 궁금하다면,

지난 기사부터 보시길 추천!

 

 

승진 후, 일생일대의 위기를 맞다

 

1586년 12월~1월 - 『성재일기(惺齋日記)』

 

12월 28일. 내가 장흥고 봉사로 제수되었다는 소식을 보았다. 동료들과 함께 축하를 나눈 뒤, 상사인 주부(主簿) 구인과 함께 임금님께 사은숙배를 드린 후 장흥고에 첫 출근을 했다.

 

1월 1일. 장흥고에서 진상용 종이를 정리하여 관청에 공급했다. 그런데 승정원의 정여인과 배여우가 뒷방으로 조용히 나를 부르기에 찾아가서 앞으로 자주 보자는 얘기를 나눴다. 이날 밤에는 장흥고에서 숙직하며 보냈다.

 

2월 9일. 오늘 드디어 창고 다락방의 재고조사를 진행했다. 감찰 김입휘가 재고조사 과정을 감독했다. 워낙 물품이 많아 하루에는 다 못 끝내고 사흘은 진행해야 할 것이다.

 

장흥고에 부임하자마자 참봉으로 꿀 빨던 워라밸은 무너집니다. 새해부터 좋은 종이를 고르고 골라 여러 관청에 보내고, 밤에도 숙직하면서 창고를 지켜야 했죠. 그래도 승진은 승진이라 임금님을 곁에서 모시는 승지들과 사무실 뒤 ‘진실의 방’에서 이런저런 얘기도 나눌 수 있었지만, 57세에 실무자로 일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부임한 지 한 달 뒤에 있던 재고조사는 더욱 힘들었을 겁니다. 그냥 창고도 아니고, 창고의 위쪽 다락방 물품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꺼내고 점검해야 하니 57세의 금난수에게는 더욱 죽을 맛이었죠. 

 

하지만 감독관이 꼬박꼬박 지켜보고 있으니, ‘가라’로 하는 건 꿈도 못 꿨을 겁니다. 심지어 재고조사 셋째 날 감독관이었던 정대민은 금난수보다 스물한 살이나 아래였습니다. 60세에 가까운 실무자가 MZ세대 팀장의 감독을 받은 셈이랄까요. 어쩌겠습니까. 본인이 대과에 붙지 못한 탓인 것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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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난수가 장흥고 봉사이긴 했지만, 필요에 따라 여기저기 파견도 갔습니다. 때론 왕자의 집을 새로 도배하는 작업을 감독하기도 했고, 때론 종묘제례 때 의식에 참여하는 일을 준비하기도 했죠. 일주일 넘게 의식을 준비하다가 당일에 갑자기 업무가 없어지는 일도 종종 있었습니다. 나랏밥 먹는 사람을 주먹구구로 부리는 건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네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하루를 보내던 금난수에게 어느 날 관직 생활 최대 위기가 닥쳐옵니다. 선조의 아내인 의인왕후의 화를 돋운 사건이 벌어진 건데요. 일기를 보시죠.

 

1587년 7월 - 『성재일기(惺齋日記)』

 

1일. 진상용 종이를 선별하여 공급했는데, 중전께서 친히 종이를 살펴보신 후, “종이를 돌려보내고 다시 공급하라”는 명을 내리셨다. 나는 명을 받고 장흥고에 있던 모든 종이를 샅샅이 뒤져 가장 좋은 종이를 골라 보냈다. 하지만 이번에는 종이를 살펴보신 후,

 

“내가 두 번이나 기회를 주었는데도 또 질이 좋지 않은 종이를 보내다니. 벌을 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라며 진노하셨다. 나는 그 길로 상사와 함께 장흥고로 복귀하여 마음을 다잡고 목욕재계하였다.

 

5일. 남은 업무를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어떤 처벌이 내려질지 대기하며 기다려야 했다.

 

8일. 징계 결과가 나왔다. 감사관이 장흥고를 직접 조사한 후, 실무자의 잘못에서 비롯된 일이 아니라는 결정이 나왔다. 다행이었다. 나는 무거운 마음을 내려놓고 다시 장흥고로 출근했다.

 

‘중전 진노 사건’의 전말은 이렇습니다. 장흥고에서 공급된 종이의 질을 직접 살펴본 의인왕후는 한 차례 기회를 더 주어도 똑같은 종이가 들어오자 실무자의 잘잘못을 조사하여 처벌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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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난수에게는 날벼락과도 같은 일이었을 겁니다. 종이를 다시 보내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가장 좋은 종이를 고르고 골라서 보냈을 테니까요. 아무리 눈치가 없는 사람이라도 그 정도는 했을 겁니다. 하지만 다시 보낸 종이도 중전의 마음에는 들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의인왕후는 자신을 모시는 궁녀들에게도 화 한 번을 내지 않았다고 소문난 보살이었죠.

 

그 결과 금난수와 상사는 자택에서 대기발령 처분을 받습니다. 사건의 핵심은 실무자의 근무태만 여부에 있었죠. 조사 결과, 금난수가 잘못한 게 아니라는 결정이 내려집니다. 아마도 당시 장흥고에 들어온 모든 종이의 질이 좋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무사히 끝났고, 우리가 보기엔 시시콜콜한 헤프닝일 수 있지만, 금난수 입장에서는 일생일대 대위기였습니다.

 

이렇게 위기를 견뎌낸 금난수는 58세가 되던 1587년, 8품에서 7품으로 승진합니다. 직책은 장흥고 직장, 즉 장흥고의 책임자가 된 겁니다. 60세에는 6품까지 승진하였고 61세에 해직되어 한양에서의 관직 생활을 마무리합니다. 

 

50세에 임관하여 해직되는 61세까지 그의 이름은 실록에서 단 한 줄도 보이지 않습니다. 국무회의에서 이름이 거론될 만큼의 이벤트에 얽히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의 이름이 실록에 처음 등장하는 건, 그의 나이 71세가 되던 때였습니다.

 

 

허허벌판이 된 나라의 부름에 다시 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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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임진왜란이 터집니다. 금난수의 나이 63세 때였죠. 그는 가족을 이끌고 피난하다가, 고향인 예안 지역의 향병(鄕兵)을 조직하는 데 힘씁니다. 10년간의 관직 생활을 바탕으로 향병 조직을 구성하고 보급을 해결하는 행정 업무를 잘 해냈습니다. 왜군의 소식에 귀 기울이면서 파괴되고 사람이 흩어진 지역을 복구하는 데 최선을 다했습니다.

 

7년간의 임진왜란이 끝난 후, 그에게 뜻밖의 임명장이 날아옵니다. 70세의 노인 금난수를 봉화현감에 제수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1599년 3월~5월 - 『성재일기(惺齋日記)』

 

3월 10일. 내가 봉화현감에 제수되었다. 이미 지난번 성주판관 자리를 사양한 바 있으나, 고심 끝에 자리를 맡기로 하고 한양으로 향했다. 동네 사람들이 나를 전별하면서 노구에 관직 생활을 하러 가는 것을 걱정했다. 한양 가는 길에 (친구이자 처남인) 조목을 만나 인사를 나눴다.

 

4월 4일. 한양에 도착했다. 한양에서 그동안 보지 못 한 사람들을 만나 서로의 안부를 물었으나, 전쟁에 휘말려 죽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참담함을 감출 수 없었다. 한양은 불태워지고 약탈당해 건물은 사라지고 죄다 터만 남아 쳐다볼 수도 없었다.

 

4월 12일. 지난 6일 임금님께 사은숙배를 마치고 오늘 봉화 관아에 첫 출근을 했다. 나는 환곡을 분배할 준비를 시작했다.

 

전쟁이 끝난 뒤의 참상은 금난수가 이미 한 번 사양한 지방관직을 수락하게 한 원인이었을 것입니다. 70세의 노인이 한양을 왕복하는 것만 해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전쟁 후 해야할 일이 산더미 같이 쌓여 있는 지방관직을 수행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선비로서 나라를 위해 마지막으로 힘을 보태고 싶다는 마음으로 금난수는 어려운 길을 나섭니다.

 

한양 가는 여정을 일기에 남기며 그가 자주 한 말은, 

 

“참담하여 볼 수가 없었다.”

 

였습니다. 한양 가는 길에 지난 여러 도시의 관아들과 한양의 여러 궁궐, 관청도 모두 불타 그 터만 남았기 때문이죠.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퇴계의 아래에서 공부하던 젊은 날, 그가 유람하며 보았던 아름다운 조선의 강산은 폐허가 되었고, 사람들이 모여 더 나은 공동체를 위해 힘쓰던 일상은 무너졌습니다. 강산을 다시 가꾸고 공동체를 회복하는 것. 그것이 금난수가 노구의 몸을 이끌고 길을 나선 이유였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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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짤은 사실 허준 드라마 짤이나 잘 어울리니까

그냥 넘어가는 것으로...

 

그는 봉화현감으로 부임하자마자 전후 복구에 힘씁니다. 환곡 창고를 열어 곡식을 베풀고, 기강이 무너진 과거시험을 엄격히 시행하였으며, 향약(鄕約)을 복원하며 무너진 공동체의 윤리를 되새겼습니다. 

 

그렇게 정신없이 약 1년 반이 지난 어느 날, 금난수는 한양의 지인으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습니다.

 

1600년 8월 25일 - 『성재일기(惺齋日記)』

 

한양의 금 참봉이 편지를 보내왔다.

 

“조정에서 ‘금난수는 나이가 너무 많아 현감 임명의 적법성에 문제가 있습니다. 파직시켜야 마땅합니다.’라는 논의가 있었습니다.”

 

편지를 읽자마자 나는 곧바로 관아로 돌아와 짐을 쌌다. 내일 바로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봉화현감으로 부임한 지 1년 반. 무난히 지방관직을 수행하던 그의 발목을 잡은 것은 역시 나이였습니다. 실록의 기록을 보시죠.

 

1600년 8월 27일 - 『선조실록(宣祖實錄)』

 

사헌부에서 보고했다.

 

법전에는 65세가 넘으면 지방관직으로 부임할 수 없다고 정해졌는데, 봉화현감 금난수는 70세에 제수받았으니 문제가 있습니다. 게다가 잘 다스리지도 못한다는 말이 있으니 파직해야 합니다. 또한 금난수 외에 70세 이상 지방관이 있으면 모두 찾아서 파직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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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다스리지 못한다’는 말도 있었지만, 더 중요한 명분은 ‘나이가 많다’였습니다. 배후에서 실제로 어떤 정치적 논의가 있었는지는 현재로선 알 수 없습니다. 어쨌든 금난수의 이름이 실록에 적힌 건 바로 이 건과 관련된 기사 2개뿐입니다. 

 

지인으로부터 한양의 논의를 듣자마자 금난수는 아무런 미련 없이 바로 사직서를 쓰고 짐을 싸서 집으로 돌아옵니다. 이렇게 그의 오랜 과거 도전과 관직 생활은 끝을 맺습니다.

 

퇴계의 제자로서, 사람들을 한데 모으는 ‘계모임 메이커’로서, 그리고 미관말직의 공무원으로서 금난수의 삶은 고명한 선비의 삶이라기보단 박봉에 시달리며 생계를 꾸려나가는 보통의 회사원 같습니다. 물론, 나름 괜찮은 수저를 물고 태어났기에 오랜 과거 장수생 생활도 할 수 있었겠지만, 사대부 남성으로서 따라오는 수많은 의무를 수행해야 하는 것은, 한 편으로 혜택이 아니라 짐이었을 것입니다.

 

인간의 선한 본성을 믿으면서 때때로 흔들리다가도 묵묵히 버텨나간 그의 커리어는, 어쩌면 노욕으로까지 보일 법한 1년 반 남짓한 현감직으로 끝났습니다. 함께 퇴계의 아래에서 배운 동문들이 하나둘 잘 나갈 때, 그는 새파랗게 어린 젊은이를 상사로 모시면서 실무자가 해야 하는 시시콜콜하고도 반복되는 일을 해야 했죠. 혹자는 그를 ‘무난하기 짝이 없는 인생’으로, 더 심하면 ‘실패한 인생’ 혹은 ‘그저 그랬던 인생’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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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가 미관말직의 박봉과 아픈 허리를 견디면서도 끝끝내 10여 년 넘게 관직 생활을 스스로 그만두지 않은 까닭이 있습니다. ‘사람의 선한 본성’을 믿으면서 그는 휴일, 심지어 퇴근 후일지라도 늘 사람과 함께 하는 삶을 삽니다. 또한, ‘학문은 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실천하는 것이다’라는 스승 퇴계의 말을 언제나 가슴속에 새기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비록 미관말직일지라도 관직 생활은 작게는 사람을, 크게는 나라를 바꾸는 일이었으며 곧 젊은 날 자신이 공부한 바를 세상으로 옮기는 행동이었습니다. 누군가는 작다 하더라도, 그에게는 충만한 의미를 지녔던 거죠.

 

그렇게 존버한 덕분에 그에게는 자식 농사의 성공이라는 결과가 돌아왔습니다. 둘째와 셋째 아들이 대과(문과)에 합격하고, 장남은 사마시(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한 거죠. 관직 생활을 하면서도 자식 공부에 심혈을 기울였고, 자신이 평생 만나면서 쌓아온 인맥을 활용하여 자식들을 전폭적으로 서포트했습니다. 이것은 우리 시대, 심지어 세상이 뒤바뀔지라도 바뀌지 않는 월급쟁이 부모의 모습일 것입니다. 

 

그리고 1604년, 자리를 잡은 든든한 자식들이 모두 모인 가운데, 그는 수많은 사람을 바라보았을 그의 눈을 감습니다. 행복한 마지막이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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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나게 출세를 하고, 사회적 성공을 한 건 아니었지만, 금난수의 삶은 여러분의 삶처럼 위대했습니다. 세상에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를 끝끝내 해낸 사람이었으니까요.

 

특출나진 않았지만, 평범했고 위대했던 금난수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마칩니다. 다음 편에선 조선의 또 다른 직장인에 대해 다뤄보겠습니다. 지금도 열심히 자신이 맡은 바를 행하고 있는 여러분께 응원을 보내며, 저는 이만 인사드리겠습니다. 꾸벅  

 

 

참고문헌

 

(1)스토리테마파크 (http://story.ugyo.net/front/index.do)

(2)김종석, 「『성재일기』에 나타난 16세기 재지 사족의 교유 양상」, 『국학연구』 41, 2020.

(3)김효경, 「조선후기 능참봉에 관한 연구」, 『고문서연구』 20, 2002.

(4)이연순, 「성재惺齋 금난수琴蘭秀의 생애와 교유 양상」, 『국학연구』 41, 2020.

 

 
 

추신

 

빵꾼, 인사드립니다. 딴지스 여러분 덕분에, 

 

1. 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

 

2.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

 

에 이어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을 내놓았습니다.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은 조선의 복지 정책을 이야기하며 그 정책들이 백성들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그로 인해 어떠한 사회 단면을 만들었는지를 야무지게 담아놓은 책입니다. 빛과 그림자를 모두 담아내고자 시도했습니다.  

 

매번 책 소개를 드리기가 죄송하고 쑥스러워 이번에는 책 발간을 비밀로 하려 했으나, 딴지 편집부에서 귀신같이 알고 책 관련 원고를 써오라고 협박해서 기사로도 책 속 「가장 낮은 곳에 사는 사람들을 위해 : 최약 계층 지원 정책」(링크) 챕터 일부 이야기를 소개했었습니다.

 

조선의 복지정책에 대해 다방면으로 열심히 담아놓은 책이니, 자신만만하게 말하겠습니다.

 

관심 있는 형님, 누님, 동생 여러분! 책 한 권 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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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
조선사 교양서를 쓰고 있는, 딴지가 배출한 또 하나의 잉여 작가
딴지의 조선사, 문화재, 불교, 축구 파트를 맡고 있슴다.
이 네 개 파트의 미래가 어둡다는 거지요.

『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
『시시콜콜 조선부동산실록』 신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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