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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군비 축소 조약을 지키고자 한 영국

 

킹 조지 5세급 전함(King George V class)은 2차 대전 당시 영국 해군이 보유한 유일한 신형 전함들이었다. 2차 대전 전야의 급박한 상황에서 영국은 1936년 이 전함들을 급하게 찍어내기 시작했다. 1번 함인 킹 조지 5세급부터 시작해서 5번 함인 ‘하우(Howe)’까지.

 

‘찍어냈다’란 표현이 전혀 과장된 게 아니다. 1번 함(킹 조지 5세)부터, 2번 함(프린스 오브 웨일스), 3번 함(듀크 오브 요크)까지 3척을 1936년 7월 29일 발주했고, 1937년 1월과 5월 기공(起工)했다. 완공한 해가 1940년, 1941년인 걸 보면 정말 미친 듯이 찍어낸 거다. 4번 함 앤슨은 1936년 11월 발주해 1937년 7월에 기공했다. 5번 함 하우도 1937년 4월에 발주한 걸 보면 영국 해군이 얼마나 급했는지 알 수 있다.

 

킹 조지 5세급은 전함 무장에 있어서 14인치 주포(主砲, 군사 군함이나 전차에 장치한 포 가운데 가장 위력이 큰 포)부터 16인치 주포까지 다양한 선택지를 놓고 고민했다. 결국 14인치 12문으로 낙찰을 보게 됐다. 즉 4연장 포탑 3개로 12문의 14인치 포를 달겠다고 결정했는데, 탄약고 방어를 위해 주포 2문을 포기해 결국 4연장 포탑 2개, 2연장 포탑 1개로 타협을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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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번 함(듀크 오브 요크)의 4연장 포탑과 2연장 포탑.

(배 후방에 4연장 포탑 1기가 더 있다)

 

영국은 끝까지 런던 해군 군축조약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했다. 킹 조지 5세급이 괜히 ‘조약형 전함(조약 내에서 가능한 전함)’의 표본이 된 게 아니다. 다른 나라들이 슬쩍슬쩍... 아니, 대놓고 조약을 어기는 와중에도 영국 해군은 꿋꿋이 조약을 지키고자 애썼다. 독일의 비스마르크급은 대외적으로 35,000톤급이라고 말했지만, 실제론 4만 톤이 훌쩍 넘어갔다. 역으로 말하자면, 조약에 충실했던 영국과 미국은 제한 조건 안에서 최대한의 역량을 뽑아내기 위해 노력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기술력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즉, 영국과 미국의 건함 건조기술이 뛰어났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2. 급조한 결과

 

이렇게 야심 차게 내놓은 전함이지만, 영국 해군이 처음 시도한 4연장 포탑은 전쟁 내내 문제를 일으켰다.

 

급하게 찍어낸다고 상당히 보수적으로 설계하기도 했다. 전형적인 영국 디자인에 함포의 안정적인 사격을 위해 평평한 갑판이었고, 속도는 동시대 다른 전함보다 약간 떨어지는 28.5노트 정도, 공격력보다는 방어력에 더 주안점을 둔 설계 등등. 그러나 이마저도 없었다면 영국 해군은 힘들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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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 조지 5세급 전함

 

까놓고 말해서 1939년 9월 1일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나서 영국 해군은 북해에서 제대로 된 제해권을 확보하지 못했다. 왜? 당장 독일의 샤른호르스트급(Scharnhorst)을 상대할 빠른 발이 없었기 때문이다. 조약에 묶여 있었던 전함들이었기에 샤른호르스트급을 상대하기 버거웠다. 참고로 샤른호르스트급은 비스마르크급이 취역하기 전까지 독일 해군의 상징 같은 존재였다. 31노트에 달하는 빠른 발로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다녔다. 물론, 이걸 가지고 영국의 전함을 상대하긴 어려웠다. 11.1인치 포 9문이었기에 화력에서는 전함을 상대하기 어려웠다.

 

영국은 ‘바다로 연결된 제국’이었다. 쉽게 말해 식민지와 본토를 연결하는 ‘해상 교통로’를 지켜내지 못하면, 굶어 죽는다는 의미다. 특히나 인도에서 수에즈 운하를 거쳐 지중해를 찍고, 지브롤터를 거쳐 오는 항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내야 했다. 이러다 보니 이 해상 교통로를 지키기 위한 해상전력을 따로 떼 놔야 했다.

 

이러한 터에 유럽에서 전쟁이 터지면, 급하게 본토함대(Home Fleet)를 확충해야 하고, 교통로를 어디서 어떻게 지켜야 할지를 고민해야 한다. 당장 본진이 털리면 안 되니, 본토는 지켜야 하는 게 당연한 거고 해상 교통로도 중요도에 따라 우선순위를 챙겨야 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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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연방 국가들

 

문제는 본토함대라고 급하게 전력을 확충했지만, 초반부터 본진이 털리는 어이없는 참사가 연달아 터진 것이다. 1940년 6월 항공모함 글로리어스가 샤른호르스트와 그 자매함(그나이제나우)에 걸려 포격을 받아 격침당했다. 그 이전에 1939년 10월에는 독일 유보트 U-47이 영국 해군의 본진인 스캐퍼플로(한국으로 치면 진해항 정도 되겠다)로 몰래 잠입해서 32,000톤급 전함인 로열 오크(HMS Royal Oak)를 격침하고 유유히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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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열 오크에 어뢰 공격을 한 독일 유보트 잠수함 U-47의 상상화.

당시 기습 공격한 시각이 자정을 지난 캄캄한 밤중이었기 때문에

침몰 장면은 사진으로 전해지지 않는다

 

영국해군은 그 흔한 ‘설계변경’ 한 번 하지 않고 스트레이트로 이 전함을 만들었다. 영국 해군이 급했던 거다. 물론, 급한 만큼 빨리 만들었고 기대한 만큼은 아니어도 어느 정도 영국 해군의 숨통을 터준 건 사실이다. 그러나 이 함은 그 명칭부터 시작해서 초반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하더니 좋지 않은 추억을 안고 가게 된다. 개인적으론,

 

"에드워드 8세의 저주"

 

라고 말하고 싶다. 킹 조지 5세급 전함(King George V class) 5척 중 가장 비참했던 2번 함 프린스 오브 웨일스(Prince of Wales)의 함생()은 에드워드 8세의 저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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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 윌리스 심프슨과, 에드워드 8세(프린스 오브 웨일스)

국왕 재위 기간이 1936년 1월 20일 ~ 1936년 12월 11일로

채 1년이 안 된다

 

3. 이름부터 험난했던 킹 조지 5세

 

이야기는 복잡한 영국 왕실 가계도에서부터 시작해야겠다. 지금 영국 왕실은 도도한 독일 귀족 가문의 피가 흐르고 있다. 바로 작센코부르크고타(Sachsen-Koburg und Gotha)다. 영국 왕가에 왜 독일 공국의 피가 흐르는 걸까? 이야기는 빅토리아 여왕(재위 1837년 6월 20일 ~ 1901년 1월 22일)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빅토리아 여왕이 작센코부르크고타 공국의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앨버트와 결혼을 한 거다. 이때까지만 해도 별문제는 아니었다. 당시 유럽 왕실은 한 다리 건너면 다 친척이고, 친지였다(1차 대전 당시 영국의 킹 조지 5세는 고종사촌이 독일 빌헬름 2세, 이종사촌이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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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순서대로 왕위를 차지했다.

조지 5세(부친) → 에드워드 8세(장남) → 조지 6세(차남)

조지 6세는 영화 <킹스 스피치> 모델이자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아버지

 

문제는 1차 대전이 터지면서 영국 내 분위기가 심상찮게 돌아갔다는 거다. 한 번 전투로 10만 단위의 병사들이 죽거나 다치는 상황에서 독일에 대한 감정이 좋을 리가 없지 않은가? 이런 상황에서 독일식 이름을 사용하는 왕가가 국민들 눈에는 어떻게 보일까?

 

"아니, 우리 왕이 독일 출신인데 우린 지금 독일이랑 싸우잖아? 이게 말이야 막걸리야?"

 

이런 분위기를 감지한 킹 조지 5세는 1917년 7월 어명을 하나 내린다.

 

"앞으로 윈저 왕가(House of Windsor)라고 불러라."

 

조지 5세는 윈저라는 명칭을 만들고는 빅토리아 여왕의 모든 남자 후예는 윈저 왕가의 일원이라는 선언을 한다. 윈저 왕가가 따온 ‘윈저’라는 명칭은 윈저성에서 따온 거다. 같은 자리에서 가장 오랫동안 그 자리에 보존된 성채이자, 영국 왕실의 공식 거주지이기도 한 곳이 바로 윈저성이다. 한국으로 치자면... 고려 초부터 지금까지 자리 잡고 있는 성이다.

 

빌헬름 2세는 고종사촌인 조지 5세가 자기 때문에 성을 ‘윈저’로 바꿨다는 소식을 듣고는,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즐거운 아낙네들을 관람해야겠구먼."

 

이라고 뼈있는 농담을 날렸다. 빌헬름 2세는 셰익스피어의 희곡 ‘윈저의 즐거운 아낙네들’이란 희곡의 제목을 ‘작센코부르크고타’로 바꿔서 놀린 거였다. 여기까지는 독일식 이름 때문에 고민하다가 개명을 한 영국 왕의 가슴 아픈(?!) 사연이다. 그러나 진짜 비극은 따로 있었다. 킹 조지 5세를 둘러싼 가슴 아픈 이야기는 따로 있다.

 

그는,

 

"왕으로 키워진 사람"

 

이 아니었다. 아버지 에드워드 7세(재위 1901년 1월 22일 ~ 1910년 5월 6일)는 자유분방함의 끝판왕으로 수많은 여배우와 염문설을 퍼뜨렸다. 애인(애인이라 쓰고 첩으로 읽는)도 있었다. 그는 술·담배·도박·여자 등 어머니인 빅토리아 여왕이 싫어하는 것만 골라서 했다. 어머니 시대가 엄숙주의(嚴肅主義) 느낌이 강했다면, 에드워드 7세 시절은 밝지만 어딘가 퇴폐적이라고 해야 할까? 어쨌든 장수한 어머니 때문에 왕위에 오르기 위해 꽤 고생했고, 마지막에 가서야 겨우 왕위를 물려받아 재위 10년을 채웠다. 그의 재위 10년 동안 딱히 기억날 만한 건 없고... 에드워드 7세의 가장 큰 업적은 그의 ‘죽음’일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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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7세의 장례식에 모인 9개 나라의 군주들.

아랫줄 가운데 있는 사람이 아들 킹 조지 5세

 

4. 군주제의 끝물

 

에드워드 7세는 1910년 5월 6일에 68세로 사망한다. 이때 그의 장례식에는 유럽 각국의 황제·왕·귀족들이 모였다. 제1차 대전을 두고, '군주제의 종말'을 고한 전쟁이라고 말들을 한다. 군주제 종말의 바로 직전에 있었던 에드워드 7세의 죽음. 이건 군주제의 마지막 대미를 장식하는 화려한 종막이었다. 1차 세계대전 개전 초기 한 달을 실감 나게 그린 소설 <8월의 포성>을 쓴 작가 바바라 터크먼은 에드워드 7세 장례식을 아래와 같이 묘사했다. 

 

···(상략)··· 1910년 5월 아침, 영국 국왕 에드워드 7세의 장례식에 참석한 아홉 명의 왕들이 말을 타고 지나가자 엄숙하게 기다리고 있던 군중들은 너무나도 화려한 이 광경 앞에서 놀라움의 탄성을 억제할 수 없었다. 깃털로 장식된 헬멧, 금줄, 진홍색 복띠 그리고 보석이 박힌 훈장을 햇빛에 번쩍이며 주홍, 청, 녹 그리고 자주색의 화려한 복장을 한 군주들이 세 명씩 세 줄을 지어 말을 타고 왕궁 정문을 지나갔다. 그 뒤를 이어 다섯 명의 상속자, 사십 명이 넘는 왕족들, 네 명의 태비와 세 명의 왕비들, 그리고 왕정을 하지 않는 나라에서 온 특명 대사들의 무리가 뒤따랐다. 이들을 모두 합하면 칠십 개국을 대표하는 조문 사절로서 한 장소에 모인 이러한 종류의 집회로는 그 권위와 규모 면에서 사상 최대이자 최후의 사건이었다. 운구 행렬이 왕궁을 출발할 때 빅벤은 그 둔중한 종소리로 아침 아홉 시를 알렸으나 역사의 시계로 본다면 때는 이미 황혼이었다. 바야흐로 구세계의 태양이 다시는 볼 수 없을 광영의 마지막 불꽃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하략)···

- 바바라 터크먼 (Barbara W. Tuchman)의 <8월의 포성> 中 발췌

 

바바라 터크먼의 표현처럼 군주제는 ‘구세계의 태양이 다시는 볼 수 없을 광영(光榮)의 마지막 불꽃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그 마지막을 고했던 게 에드워드 7세의 죽음이었다.

 

이 에드워드 7세의 아들이 조지 5세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