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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중기 인물로 1530년에 태어나 1604년까지 살다 간 인물이 있습니다. 그 이름은 ‘금난수’입니다. 그는 퇴계 이황의 제자였지만, 친구들과 달리 20대와 30대 내내 고향에서 과거 장수생 생활을 했습니다. 그의 장수생 생활은 쩍벌이 주특기인 누군가의 고시 생활과 다소 비슷했습니다. 맨날 보던 책을 더 보긴 싫은데 시간은 자꾸 흐르니, 후배들 불러 모아 술 파티를 열어대는 겁니다(그렇다고 금난수가 지금의 누구처럼 무식했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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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게들, 코가 삐뚤어지게 마셔 보자고~

 

그러던 그에게 스승 퇴계는 조언을 해줬고, 3개월 뒤, 그는 32세 나이에 드디어 생원시와 진사시에 2등으로 합격합니다. 이제 인생 술술 풀리는 줄 알았으나, 다음 단계에서 발목이 잡힙니다. 관직에 진출하기 위해선 최종적으로 대과를 통과해야 했습니다. 그는 이 대과에서 30대 내내 번번이 낙방하고, 관료가 되는 데 실패합니다. 결국 그는 관료가 되는 것을 포기하고, 40대에는 안동에서 스승인 퇴계 이황과 관련된 사업을 진행하며 지역의 오피니언 리더 활동에 매진하며 삽니다.  

 

그런 그에게 세월이 흘러 드디어 첫 관직이 떨어지게 됩니다. 그의 나이 50세가 되던 1579년의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내려진 관직은 폼나는 현감직이나 부사직도 아닌, ‘묘지기’였습니다.  

 

50세에 9급 공무원이 된 그의 임관 첫 달은 정신없이 흘러갑니다.

 

 

더 자세한 내용이 궁금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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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세에 시작한 9급 공무원 ‘묘지기’의 삶

 

1579년 5월 ~ 8월 - 『성재일기(惺齋日記)』

 

5월 19일. 서울에서 두 명이 나를 제릉참봉에 제수한다는 임명장을 가지고 왔다.

 

5월 23일. 임금님께 사은숙배를 드리고 제릉이 있는 개성으로 향했다. 도착하자마자 첫 업무인 초하루 제사를 준비해야 했다. 인근의 관리들이 모여 제사 준비를 시작했다.

 

7월 11일. 오늘은 나의 첫 녹봉 날이다. 녹봉을 받아 오기 위해 나의 종 구석이와 제릉의 청소 담당 직원 박만억에게 나의 녹패(월급 증빙패)를 주어 한양 광흥창으로 보냈다. 구석이는 녹봉으로 받은 쌀 10두와 콩 5두를 무명 15필 반으로 바꿔올 것이다.

 

8월 1일. 새벽에 제사를 지냈다. 이번에는 서로 편해진 덕분에 제사 후에 음복을 함께 했다. 통진현감과 파주교수는 곧바로 돌아갔지만, 강화부사와 교동현감은 그대로 남아 나와 함께 술을 마시다가 취해 버렸다. 나는 그들에게 제사용품 창고를 슬쩍 열어줘서 쉬다 갈 수 있도록 해줬다.

 

8월 29일. 이번 달 추석을 전후해 능 관리 업무를 보았다. 8월 초에는 바람에 쓰러진 나무들을 점검하면서 겸사겸사 직원들과 술을 마셨다. 15일 추석에는 제사를 지냈고, 16일에는 일꾼들을 모아 벌초를 진행했다. 또 8월 말에는 봉분의 잔디를 갈아입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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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황해북도 개성에 위치한 제릉

 

50세의 금난수가 처음 받은 직책은 제릉참봉, 즉 태조 이성계의 첫 번째 왕비인 신의왕후 한 씨(태종 이방원 친엄마)의 무덤을 지키는 일이었습니다. 나름대로 휘하에 여러 직원을 둔 관리자 직무를 수행했고, 능참봉이라도 역임하면 지역에서 그럭저럭 대우를 받았죠. 

 

하지만 미관말직의 대명사인 건 변함없었습니다. 그마저도 추천으로 받은 관직이었죠. 친구이자 처남인 조목은 첫 직장으로 현감, 그것도 수차례 거절하다가 받았는데, 그는 제사가 가장 중요한 업무인 능참봉이 되었으니 박탈감이 적지 않았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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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크든 작든 나랏일이었으니 금난수는 최선을 다해 직무를 수행합니다. 일반적인 능 관리 업무는 물론, 초하루 제사나 칠석 제사 등 때마다 찾아오는 제사를 꼼꼼히 준비하죠. 태어나서 첫 녹봉도 받아보고, 어느새 친해진 사람들과 아침부터 술을 퍼마시다가 창고에 짱박히는 농땡이도 피우게 됩니다. ‘계모임 메이커’이자 핵인싸였던 그는 신입 공무원임에도 불구하고, 능참봉이라는 직책의 이점을 살려, 업무와 술자리의 경계를 흐리는 부장님 같은 짬바를 선보입니다.

 

그런데 능참봉의 업무는 이게 전부입니다. 제사하고, 봉분 관리하고, 묘역 주변의 숲 관리하고. 이렇다 할 성과를 내기도 힘들고 그저 사고만 안 나면 되니, 지루해지기 딱 좋죠. 그렇다고 아무나 시킬 수도 없는 게, 왕실의 무덤 관리라는 직무 특성상 현감이나 부사와 같은 시장급을 상대해야 했고, 또 복잡한 예법이나 토목 지식까지 보유해야 했으므로 금난수처럼 교양 있는 사람만이 제대로 일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스펙 과잉인 느낌은 지울 수 없죠.

 

매일 쳇바퀴 도는 업무에 박봉인 월급. 이런 직장을 다니는 건 쉽지 않은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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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라밸이 훌륭하다면 어떨까요? 금난수의 참봉직이 그랬습니다. 부임한 지 3개월 만에 비번이 되어 한 달 동안의 꿀 휴가를 즐깁니다.

 

1579년 9월 - 『성재일기(惺齋日記)』

 

13일. 그동안 비번이었던 성 참봉이 나와 교대했다. 나는 증조모 기일을 맞아 휴가를 썼다. 오늘은 아침부터 삼촌께 인사를 드렸고, 마을의 여러 사람이 내가 집에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몰려왔다.

 

21일. 고향의 친구들과 함께 개천에서 물고기를 잡았다. 잡은 물고기는 십여 마리. 친구들과 함께 개울가에 둘러앉아 잡은 고기를 회 떠먹고 술잔을 돌렸다. 밤이 깊어서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고향에 오자마자 또 인싸의 삶을 즐기시는 금난수였습니다. 그는 우리 시대의 아버지들처럼, 개천에서 고기를 잡고 친구들과 술잔을 나누면서 한 달간의 휴가를 보냈습니다. 안주는 매운탕이 아니라 민물회였지만요. 워라밸이 보장되는 공무원의 삶, 제법 부럽죠?

 

조선시대 관리의 워라밸은 지금과 비교해도 꽤 나쁘지 않은 수준이었습니다. 시대마다 차이가 있었지만, 『경국대전』에는 여러 근태 규정이 있었는데요. 모든 관리는 오전 5시에 출근해서 오후 5시에 퇴근합니다. 해가 짧은 겨울에는 오전 7시에 출근해서 오후 3시~5시에 퇴근했죠. 단축 근무, 정말 달달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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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는 어땠을까요? 매달 1·7·15·23일과 24절기(입춘·입추 등)가 공식 휴일이었습니다. 1년에 72일 정도가 기본 휴일인 거죠. 물론 ‘빨간 날’이 겹칠 수도 있었습니다. 만약 1일과 입춘이 연이어 있으면 연휴가 되지만, 겹치면 그냥 하루만 쉬게 됩니다. 

 

또한, 설날에는 7일, 단오와 대보름에는 3일이라는 연휴가 있었고, 이 밖에도 제사·상례·부모의 병환 등 다양한 이유로 휴가를 신청할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요즘 안식 휴가와 비슷한 고가(告暇)라는 제도도 있었죠. 2022년 공휴일은 총 67일, 주 5일제 근무를 기준으로 한 휴일 수는 총 118일 정도인데, 조선시대도 이와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듯합니다.

 

다만, 능참봉의 경우는 조금 달랐는데요. 남들이 쉬는 날 그들은 제사를 드려야 했으므로, 다른 근무 방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원칙적으로는 2명이 매월 15일씩 교대근무를 한 후, 근무 날짜·교대 날짜·근무 기간 등을 작성한 출근 장부를 작성하여 1년에 한 차례 이조(吏曹)의 감사를 받았습니다. 이러한 출근 장부는 인사 평가에 반영되었죠. 하지만 실제로는 2명의 능참봉이 합의에 따라 근무일을 조금씩 조정하는 게 ‘국룰’이었습니다.

 

휴가가 많은 능참봉의 삶이었지만, 모든 능참봉이 이런 삶을 좋아한 건 아니었습니다. 능참봉 중엔 이 지루하고 단조로운 미관말직 능참봉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길 원하는 사람들도 있었죠. 이를 위해선 승진하거나 보직을 변경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승진이나 보직 변경을 위해선 반드시 450일의 실제 근무일을 채워야 했습니다. 휴가가 많으면 450일의 실제 근무일을 채우는 데는 그만큼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금난수의 경우도 고향을 다녀가는 데만 10일이 넘게 걸리니 휴가를 충분히 써야 할 테고 450일을 채우기가 쉽지 않았을 겁니다.

 

아무튼 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금난수는 어느덧 연말을 맞이합니다. 직장인에게 연말이란, 인사 평가와 연봉협상의 때죠. 사건 사고 없이 한 해를 마무리한 금난수는 딱히 책잡힐 일이 없었지만, 제사 지낼 때마다 음복을 나누던 동료 공무원들이 줄줄이 파직되는 소식을 듣습니다.

 

 

1579년 11월~12월, 1580년 12월 - 『성재일기(惺齋日記)』

 

11월 27일. 풍덕수령 심인겸이 조정에서 탄핵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인순왕후(명종의 아내)의 동생이었는데, 6품직에 오를 때 인순왕후의 후광 덕분에 승진할 수 있었다는 지적이었다. 나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그를 위로하기 위해 풍덕 관아를 찾아갔다.

 

12월 4일. 풍덕수령에 이어 개성유수까지도 파직되었다. 그런데 그는 나와 친분을 꽤 쌓았는데도 한마디 상의 없이 급하게 짐을 꾸려 떠났다. 나는 부랴부랴 먼 곳까지 나가 그를 만나 전송했다.

 

12월 18일. 며칠 전, 나의 외사촌 형인 정복시가 이번 인사 평가에서 중(中)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두 번이나 연달아 중급을 받았으니 파직이었다. 나는 새벽에 파주로 길을 나섰고, 파주 관아에서 복시 형을 만나 위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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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술잔을 마주하던 동료들이 줄줄이 파직되고, 다음 해에는 외사촌 형마저 파직됩니다. 그런데 인싸 참봉은 파직되는 사람을 하나하나 찾아가 위로하죠. 역시, 인싸도 부지런해야 할 수 있는 걸까요? 다행히 금난수는 몇 년간 별다른 위기 없이 무난한 관직 생활을 이어갑니다.

 

그런데...

 

 

57세 금난수, 드디어 승진하다 

 

너무 무난한 게 문제였습니다. 50세에 시작된 참봉 생활은 57세까지 이어졌는데요. 그동안 부임지만 바뀌었을 뿐, 전형적인 만년 참봉의 루트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 와중에도 기회가 날 때마다 대과에 응시했으나 계속 떨어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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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친구이자 처남인 조목은 수많은 관직, 때로는 중앙의 중요한 직책이 수차례 내려졌으나 그때마다 거절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조목에게 금난수는 은근한 부러움을 담아, ‘9급 공무원의 박봉으로는 집안 살림을 꾸려나가기 너무나 어렵다네.’라는 편지를 여러 차례 보냈죠. 이에, 조목은 다음과 같은 답시를 보냅니다.

 

1584년 4월 29일 - 『성재일기(惺齋日記)』

 

조목이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왔다.

 

그대는 편지를 쓸 때마다 항상 가난하다고 투덜대니 

나는 항상 그대의 벼슬살이가 잘 풀리길 바란다네.

 

나는 조목의 시에 차운하여 다음과 같은 답시를 보냈다.

 

이 몸이 세상사에서 벗어나 곤궁함도 편히 여길 만하니 

험하고 험한 벼슬길이 잘 풀리기를 바라지도 않네

험한 세상에 발을 잘못 디뎌 돌아가지도 못하니

술잔을 전하며 벼슬살이하는 마음을 응당 비웃으리라.

 

매일 같이 박봉을 한탄하는 금난수에게 조목은 위로 반 농담 반의 시를 보냅니다. 그러자 금난수는 마치 벼슬살이에 초연한 듯, ‘하기 싫은데 억지로 한다’라는 답시를 보내죠. 고위 공무원이 되고 싶은 속마음을 억지로 감추는 그의 허세 섞인 답시에 조목은 빙그레 웃었을 겁니다.

 

이렇게 9급 공무원의 삶을 한탄하던 그에게 드디어 승진의 때가 옵니다. 1586년, 그는 종8품으로 장흥고(종이 등의 물품을 공급하던 창고)의 실무자인 봉사(奉事)로 제수되는데요. 이때 그의 나이는 57세였습니다. 57세에 실무자 공무원이 되었다니 뭔가 좀 기묘하긴 하지만, 어쨌든 승진은 승진입니다. 새해가 되자마자 열심히 새 보직에 적응하는 그의 모습을 읽어볼까요.

 

<계속>

 

 

 

다음 편, 예고

 

장흥고에 부임하자마자 참봉으로 꿀 빨던 워라밸은 무너집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하루를 보내게 되죠. 이런 금난수에게 관직 생활 최대 위기가 닥쳐옵니다. 선조의 아내인 의인왕후의 화를 돋운 사건이 벌어진 건데요... 

 

 

 

추신

 

빵꾼, 인사드립니다. 딴지스 여러분 덕분에, 

 

1. 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

 

2.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

 

에 이어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을 내놓았습니다.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은 조선의 복지 정책을 이야기하며 그 정책들이 백성들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그로 인해 어떠한 사회 단면을 만들었는지를 야무지게 담아놓은 책입니다. 빛과 그림자를 모두 담아내고자 시도했습니다.  

 

매번 책 소개를 드리기가 죄송하고 쑥스러워 이번에는 책 발간을 비밀로 하려 했으나, 딴지 편집부에서 귀신같이 알고 책 관련 원고를 써오라고 협박해서 기사로도 책 속 「가장 낮은 곳에 사는 사람들을 위해 : 최약 계층 지원 정책」(링크) 챕터 일부 이야기를 소개했었습니다.

 

조선의 복지정책에 대해 다방면으로 열심히 담아놓은 책이니, 자신만만하게 말하겠습니다.

 

관심 있는 형님, 누님, 동생 여러분! 책 한 권 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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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
조선사 교양서를 쓰고 있는, 딴지가 배출한 또 하나의 잉여 작가
딴지의 조선사, 문화재, 불교, 축구 파트를 맡고 있슴다.
이 네 개 파트의 미래가 어둡다는 거지요.

『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
『시시콜콜 조선부동산실록』 신간(*´∪`)

https://www.instagram.com/ddirori0_0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