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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죄와 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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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민음사>

 

 

타락한 도시, 페테르부르크

 

시민혁명의 수호자였으나 끝내는 배신자가 된 나폴레옹은 프랑스의 황제가 되었다. 그리고 곧 유럽의 황제가 되고자 했다. 나폴레옹은 러시아를 침공했으나 패배했다. 러시아는 유럽의 강대국이 되었고, 이는 곧 급격한 경제성장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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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에서 퇴각하는 나폴레옹

19세기 아돌프 노르텐의 그림

 

‘표트르 대제’가 건설한 러시아 최고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이러한 경제발전의 직접적 수혜자였다. 물론 돈이 흐르는 곳에 반드시 불청객이 따라붙는다는 사실은 이 도시도 예외는 아니었다. 퇴폐, 범죄, 빈부격차 등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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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트르 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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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트페테르부르크

 

“하나밖에 없는 우리 딸애가 처음으로 황색 감찰(제정 러시아의 창녀 영업 허가증)을 받고 나갔을 때, 그때 나도 밖으로 나갔답니다......”

 

원하는 여성 누구나 하루 만에 ‘황색 감찰’을 받을 수 있는 도시가 바로 페테르부르크였다. 법대생이었던 ‘라스콜니코프’는 이 도시의 더러운 싸구려 술집에서 우연히 만난 실직 공무원이자 알콜중독자인 ‘마르멜라도프’의 목멘 주정을 들어주고 있었다. 

 

그는 실직한 아버지와 폐병 걸린 계모, 계모의 어린 세 아이들의 생계를 위해 창녀가 된 자신의 딸, ‘소냐’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물론 그가 마시는 술은 소냐에게 얻은 돈이 있어 가능한 것이었다.

 

라스콜니코프는 몇 달째 밀린 하숙비로 인해 (하숙밥을 주지 않아) 이틀째 아무것도 먹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마지막 값어치 있는 물건이자 아버지의 유품인 시계를 전당 잡힌 돈으로 밥이 아닌 술을 마시고 있었다. 악독한 전당포 노파 ‘알료나 이바노브나’는 4루블을 요구한 라스콜니코프에게 1루블 50코페이카만을 내어 주었다. 정확히는 선이자를 떼고 1루블 15코페이카였다.

 

가난 때문에 포기한 학업, 몇 달째 밀린 하숙비, 전당포에서 받아온 1루블가량의 돈, 딸이 몸판 돈으로 술을 마시며 주정하는 마르멜라도프, 그리고 페테르부르크 뒷골목의 악취. 이 모든 것이 싸구려 술의 독한 알콜과 섞여 이틀째 빈속인 라스콜니코프의 위장 속으로 밀려들어 왔다. 그에게 술은 고통을 연장해 주는 것이었고, 그는 그것을 원해서 술을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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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죄와 벌(1970)’ 中

 

라스콜니코프는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된 마르멜라도프를 부축해 그와 그의 가난한 가족들이 살고 있는 셋방으로 데려다주었다.

 

도시의 이 구역에 유달리 많이 있는 술집에서 풍기는 참을 수 없는 악취, 평일인데도 심심찮게 마주치는 술 취한 사람들 때문에 이 풍경은 한층 더 혐오스럽고도 서글픈 색채를 띠었다. 깊디깊은 혐오감이 한순간 청년의 섬세한 얼굴선 위로 드리워졌다.

 

 

전당포 노파 살인 사건

 

이상한 생각이 달걀 속의 병아리처럼 그의 머릿속을 쪼아 대며 밖으로 나와 그를 온통, 온통 사로잡았다.

 

싯누렇고 먼지투성이인 벽지가 발라진 골방, 천장은 낮아서 머리가 부딪칠 것만 같은 자신의 하숙집 소파 위에서 라스콜니코프는 미몽 속을 헤메고 있었다. 이미 하숙집 아주머니는 두 주째 음식을 내놓지 않고 있었다. 이보다 더 궁색하고 추레하게 살기도 힘들 정도였다.

 

골방 속에 틀어박힌 그는 악몽과 고열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는 푹푹 찌는 페테르부르크의 여름날에 오히려 으슬으슬 기운에 몸을 떨고 있었다. 그 와중에 그의 머릿속을 맴도는 말들이 있었다. 그것은 ‘공리(公利)’였다.

 

하나의 하찮은 범죄가 수천 개의 선한 일로 무마될 수는 없을까? 하나의 생명을 희생시켜 수천 개의 생명을 부패와 해체에서 구하는 거지.

 

그는 납덩이처럼 무거운 몸과 무시무시한 두통에 시달리며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채 엎드려 누워 있었다. 환영이 어른거렸다. 어떤 숙명, 어떤 계시 같은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악질 전당포 노파의 돈이라면 수천 개의 선한 일들이 가능했다. 수십 개의 가정이 가난과 해체와 파멸과 방탕과 성병 병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것이 공리였다.

 

갑자기 시계 종 치는 소리가 들렸고, 그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누가 그를 잡아당긴 것처럼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외투를 입었다. 외투 속 겨드랑이 부분에 도끼를 감췄다. 사형장에 끌려가는 사람이 온갖 생각에 골몰하듯이 페테르부르크의 풍경들을 보며 상념에 잠겼다. 그는 먼지와 악취와 온갖 더러움이 만연한 거리를 걸어 전당포로 향했다.

 

라스콜니코프의 도끼가 노파의 정수리를 가격한 것은 그녀의 키가 작았기 때문이었다. 노파는 비명을 질렀지만, 소리는 가늘었다. 노파는 주저앉았다. 노파의 손에는 여전히 라스콜니코프가 미끼로 건넨 담보물이 쥐어져 있었다. 라스콜니코프는 도끼 등으로 다시 한번 정수리를 내려쳤다. 콸콸 솟구치는 피와 함께 노파는 뒤로 발라당 자빠졌다. 두 눈은 튀어나올 기세로 휘둥그렇게 뜨고 있었고 이마와 얼굴은 경련으로 인해 온통 주름투성이로 일그러져 있었다. 노파는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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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사이에 피가 흘러넘쳐 진즉에 웅덩이가 됐다.

 

라스콜니코프는 자신이 미쳐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환청이 들렸다. 아니었다. 환청이 아니었다. 그가 환청이라고 느꼈던 희미한 비명 소리는 환청이 아니었다. 노파를 죽이고 나오자 방 한가운데 노파의 이복동생인 ‘리자베타’가 넋을 잃고 완전히 백지장처럼 질린 채 서 있었다.

 

라스콜니코프는 애원하듯 입술이 일그러져 있는 그녀에게 도끼를 날렸다. 도끼날은 곧바로 그녀의 두개골을 쪼개 버렸다. 지능은 낮지만 착한 여자, 노파의 악행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리자베타는 날아오는 도끼날에 얼굴을 가릴 생각조차 못 한 채, 그렇게 죽었다.

 

자기 방에 들어오자 그는 옷을 입은 채 소파로 몸을 던졌다. 잠이 든 것도 아니고 그냥 넋이 나간 상태였다.

  

 

페테르부르크로 오는 어머니와 여동생 두냐

 

3년째 보지 못한 고향의 어머니와 사랑하는 여동생 ‘두냐’가 보낸 편지가 라스콜니코프에게 배달되었다. 

 

무엇보다도 그때 네가 그토록 필요로 했던 60루블을 보내기 위해서였고 작년에 너는 그렇게 돈을 받았던 거란다.

 

라스콜니코프는 그들의 희망이었다. 라스콜니코프가 대학을 졸업하고 법관이 되는 것만이 그들을 가난에서 구원해줄 수 있었다. 두냐는 이 희망을 위해 그리고 오빠의 꿈을 위해 ‘스비드리가일로프’씨 집안의 가정교사가 되었다. 두냐는 오빠의 학비를 위해 100루블을 선불로 받았다. 어머니의 편지에는 두냐가 겪어야 했던 고통과 둘의 운명을 바꿀 수도 있는 일들이 벌어진 과정이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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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냐와 어머니

 

호색한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젊고 매력적인 두냐에게 추잡한 연정을 품었다. 그는 두냐에게 애걸복걸했다. 돈을 제시했고 외국으로 도망치자고도 했다. 어느 날 정원에서 무릎을 꿇고 두냐에게 호소하는 남편의 모습을 발견한 그의 아내 ‘페트로브나’는 두냐의 뺨을 때렸다. 두냐는 누명을 썼고 감당할 수 없는 모욕을 당해야 했다.

 

강인한 두냐는 고통을 견뎌냈고 진실은 밝혀졌다. 마을 사람들은 두냐를 오해한 것을 사과했으며 존경을 표했다. 페트로브나는 두냐에게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용서를 빌었다. 그녀는 두냐에게 자신의 먼 친척인 ‘표트르 페트로비치 루쥔’을 소개했다. 이미 7등관 공무원인 그는 돈과 장래 모두를 가진 남자였다. 두냐는 고민 끝에 승낙했다. 그것이 두냐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편지는 인편을 통해 30루블을 보낸다는 것과 페테르부르크에 와 있는 루쥔과의 결혼을 위해 두냐와 어머니가 페테르부르크로 온다는 것을 말하며 끝을 맺었다. 

 

편지를 펼친 순간부터 읽는 동안 거의 내내 라스콜니코프의 얼굴은 눈물에 젖어 있었다. 하지만 다 읽고 나자 그의 얼굴은 창백해지며 경련으로 일그러졌고, 힘겹고 초조하고 심술궂은 미소가 일면서 입술이 씰룩거렸다.

 

 

살인자가 30루블을 쓰는 법

 

온갖 미몽과 환청, 그리고 우울증과 착란 상태의 나날들을 버티던 라스콜니코프는 어두워지는 거리로 나섰다. 그의 주머니에는 어머니와 동생 두냐가 빚을 내어 보내준 돈, 거금 30루블이 들어 있었다. 어느 순간 라스콜니코프는 저쪽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웅성대며 고함을 지르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 무리 한 가운데에는 어떤 마차가 서 있었다.

 

라스콜니코프는 모여든 사람들을 비집고 들어가 이 소동의 범인을 보게 되었다. 그것은 마차를 끄는 말에 짓밟혀 온통 피범벅이 되어 있는 마르멜라도프였다. 모여든 사람들은 그가 술에 취해 달리는 말에 뛰어들었다며 수군댔다. 

 

라스콜니코프는 죽어가는 마르멜라도프를 서둘러 그의 집으로 옮겼다.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사례하겠다고 했다. 돈을 내겠다고 했다. 의사를 불러달라고 했다. 피투성이에 의식조차 없는 마르멜라도프의 모습에 폐병으로 죽어가는 그의 아내는 완전히 새파랗게 질려 힘겹게 숨을 내쉬었다. 그의 어린 자식들도 겁에 질렸다.

 

달려온 의사는 가망이 없다고 했고, 따라서 임종을 지켜봐 줄 사제를 불렀다. 그의 아내는 “오 지랄 같은 인생!”이라며 절망에 차 절규했다. 군중을 헤치고 한 처녀가 조심스럽게 나타났다. 빈곤과 누더기와 죽음과 절망이 만연한 이 방에, 역시 누더기를 걸친 그의 딸 ‘소냐’가 나타난 것이다. 

 

소냐는 열여덟 살쯤 됐고 키가 작고 마르긴 했지만 푸른 눈이 돋보이는, 상당히 예쁜 금발 아가씨였다. 그녀는 침대를, 사제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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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멜라도프는 죽었다. 그가 남긴 최후의 말은 “소냐! 내 딸아! 용서해 주렴!”이었다. 소냐는 가냘픈 비명을 지르며 그를 부둥켜안았고, 그는 딸의 품 안에서 죽었다. 폐병 걸린 그의 아내는 무슨 돈으로 장례를 치를 것인지와 앞으로 어떻게 어린아이들과 먹고살 것인지에 대해 악을 썼다. 라스콜니코프는 의사, 경찰 등에게 쓴 10루블을 제외하고 남은 돈 20루블 모두를 그녀에게 주었다. 그리고 다시 빈털터리가 되었다.

 

다음날 감사 인사를 위해 라스콜니코프의 방을 방문한 소냐는 그의 가난한 살림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리곤 이 말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어제 우리에게 전부 내주신 거였군요!”

 

 

루쥔의 오만과 착각

 

내심 비밀리에, 행실이 바르고 가난하면서도(반드시 가난해야 한다) 아주 젊고 아주 예쁘며 고결하고 교양 있는 처녀, 불행한 일을 수없이 많이 겪은 탓에 몹시 위축돼 있고 그의 앞에 납작 엎드려 평생 동안 그를 자기의 구세주로 여기며 경건한 마음을 갖고 그에게, 오직 그에게만 복종하고 또 놀라는 그런 처녀를 꿈꾸며 희열을 느껴 왔던 것이다.

 

이것이 보잘것없는 형편을 이겨내고 출세한 남자가 가난한 여자를 결혼 상대로 선택한 이유였다. 즉 표트르 페트로비치 루쥔이 두냐를 선택한 이유였다. 라스콜니코프는 페테르부르크로 온 두냐와 어머니, 그리고 루쥔과 함께 만났다. 여동생의 남편이 될 사람을 소개받는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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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쥔이 소냐의 ‘황색 감찰’을 비웃었을 때, 라스콜니코프는 그의 인간됨과 잔인함 그리고 비열함을 간파했다. 라스콜니코프는 대화 내내 루쥔의 본색을 밝히기 위해 노력했다. 라스콜니코프의 대화는 루쥔을 겨냥한 함정이고 올가미였다. 그는 걸려들었다. 그는 자신의 인색함과 천박함을 표출했고 그것에 두냐와 어머니는 분노했다. 두냐는 파혼을 선언했다.

 

그는 헐벗고 의지할 데 없는 두 여자가 자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은 아예 전제하지도 않고 마지막 선까지 기고만장했다.

 

루쥔의 분노와 좌절에 기뻐하는 사람이 있었다. 루쥔과 두냐의 파혼 소식을 인생의 구원으로 받아들인 사람이 있었다. 그는 바로 호색한 ‘스비드리가일로프’였다. 두냐에 대한 그의 욕정은 걷잡을 수 없는 사랑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는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이용해 두냐의 사랑을 쟁취하고 싶었다. 그는 자신의 추악한 삶을 구원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순결한 두냐 뿐이라고 굳게 믿었다.

 

스비드리가일로프는 페테르부르크로 향했다.

 

 

유일한 출구, 소냐에게 비밀을 고백하다

 

라스콜니코프에게는 이상한 시간이 찾아왔다. 갑자기 눈앞에 안개가 자욱이 깔리면서 출구도 없는 묵직한 고독 속에 감금된 것 같았다.

 

라스콜니코프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병적일 만큼 고통스러운 불안이 공황에 가까운 두려움으로 변하여 그를 사로잡았다. 미치든가 자신의 죄를 토해내든가 해야 할 선택의 시간이 다가왔음을 알 수 있었다. 라스콜니코프는 소냐의 온순하고 푸른 눈을 떠 올렸다. 지은 죄도 없이 늘 바들바들 떨고 있는 그녀의 작은 몸도 떠 올렸다. 살인자의 고백을 들어주는 역할로는 착하고 순결한 매춘부가 제격이었다. 라스콜니코프는 고백의 대상으로 소냐를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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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자고, 어쩌자고 자기 자신에게 그런 짓을 저질렀어요!” 그녀는 절망에 차 이런 말을 내뱉으면서 무릎을 펴고 벌떡 일어나더니 그의 목으로 달려들어 그를 끌어안고 두 손에 꼭-꼭 힘을 지었다.

 

살인자가 내민 구원을 바라는 손을 매춘부가 잡았다. 

 

“그럼 나를 버리지 않겠지, 소냐?” 그는 희망 같은 것이 담긴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라스콜니코프의 희망과 절망이 섞인 그 말에 소냐는 ‘언제까지나, 그 어디서도’라고 대답했다. 소냐는 무한한 고통이 담긴 라스콜니코프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 속에서 라스콜니코프는 ‘공리’를 내세운 살인이 궤변이었음을 깨달았다. 그의 고백은 더욱 고통스러워지며 더욱 격렬해졌다.

 

“나는 그냥 죽였어. 나 자신을 위해, 나 하나만을 위해 죽인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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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콜니코프는 소냐에게 자신을 이해해 달라고 애원했다. 그리고 만약 똑같은 길을 간다고 해도, 절대 두 번 다시 살인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라스콜니코프는 자신의 모든 희망과 출구가 그녀에게 있다고 느꼈다. 소냐는 울었다. 울면서 그녀가 알고 있는 유일하고 옳은 해결책을 말했다. 그것은 ‘속죄’였고, 그 방법은 ‘자수’였다.

 

두 사람은 폭풍우에 휩쓸려 외따로 텅 빈 해안가에 버려진 자들처럼 슬픔에, 비탄에 잠긴 채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는 소냐를 바라보며 그를 향한 그녀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를 느꼈는데, 이상하게도 자신이 이렇게 사랑을 받는 것이 갑자기 힘겹고 고통스러워졌다.

 

 

두냐를 원한 스비드리가일로프의 마지막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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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콜니코프의 고백은 소냐만 들은 것이 아니었다. 소냐의 하숙방과 벽 하나를 사이에 둔 또 다른 방에는 페테르부르크로 온 호색한 ‘스비드리가일로프’가 세 들어 있었다. 스비드리가일로프에게는 ‘사랑과 협박’이 충분히 공존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는 두냐의 오빠에 대한 사랑을 알고 있었다. 두냐는 오빠의 비밀을 알고 있다는 스비드리가일로프의 협박에 그의 방을 방문했다. 스비드리가일로프는 방 안에 들어온 두냐를 본 후 방문을 잠갔다.

 

스비드리가일로프는 두냐에게 오빠의 비밀에 대해 말하고 자신의 돈과 권력으로 오빠를 구원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대가로 두냐의 사랑을 원했다. 그러나 두냐의 입에서 나온 말은 ‘비열한 놈!’이라는 분노의 외침이었다.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애원했다.

 

“나는 당신을 한없이 사랑합니다. 당신의 원피스 자락에 입을 맞추게 해 줘요, 제발! 제발요!”

 

스비드리가일로프의,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애원에 두냐가 느낀 것은 공포와 경악이었다. 두냐는 벌떡 일어나 문 쪽으로 달려갔으나 문은 잠겨 있었다. 문을 열어달라고 외치는 두냐의 모습에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정신을 차렸다. 그의 입가에는 다시 표독스러운 냉소가 돌았다.

 

두냐는 방구석의 탁자 뒤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권총을 꺼내어 공이치기를 올린 다음 손에 쥐었다. 공포와 분노가 그녀를 광란 상태로 만들었다. 두냐는 언제라도 쏠 기세로 권총을 들고 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어느 날 갑자기 죽은 그의 아내, 페트로브나가 그에게 독살된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스비드리가일로프가 그녀를 향해 한 발짝을 내딛자 두냐는 권총을 쏘았다. 총알은 그의 머리카락을 스치고 뒤쪽 벽에 맞았다. 그의 관자놀이를 따라 가느다랗게 피가 흘러내렸다. 그는 웃었지만 음산하게 다시 쏘아보라고 말하며 두냐에게 다가왔다. 두냐는 절망적인 심정으로 다시 쏘았으나 이번에는 불발이었다. 그녀는 두 발짝 앞의 그에게 권총을 내던졌다.

 

“나를 놓아줘!” 두냐가 애원하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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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비드리가일로프는 절망감에 몸서리쳤다. 그의 마음속에서 무언의 끔찍한 투쟁의 순간이 지나갔다. 그는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시선으로 두냐를 보다가 그녀에게 열쇠를 집어던졌다. 그리고는 두냐에게 어서 가버리라고 외쳤다.

 

두냐가 방을 빠져나간 후 창가에 잠시 서 있던 그는 이상한 미소를 지으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 미소는 애처롭고 서글프고 힘없는 절망의 미소였다. 그는 두냐가 던진 권총을 집어 들었다. 아직 탄알 두 발과 뇌관 하나가 남아 있었다.

 

그날 밤 내내 그는 거리를 쏘다녔다. 술을 마셨다. 그리고 집에 돌와와 옆방의 소냐를 방문했다. 그는 소냐에게 자신이 가진 돈 전부를 주었다. 폐병 걸린 엄마마저 죽어 고아가 된 아이들을 위한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라스콜니코프의 일은 영원히 비밀에 부칠 것이며 어떤 선택을 하든 그것은 그의 몫이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자신이 아메리카 같은 남의 나라로 떠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놀람과 경악과 의혹을 소냐에게 남긴 채 다시 거리로 나갔다. 스비드리가일로프는 페테르부르크를 흐르는 네바 강을 향한 도로를 걸었다. 미끄럽고 더러운 목조 포장도로였다. 그의 눈에 높게 솟은 소방 망루가 보였다. 그는 그곳이 안성맞춤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두냐를 떠올렸다. 

 

쳇, 젠장! 하여간 그녀라면 나를 어떻게든 개과천선하게 했을 텐데.....

 

스비드리가일로프는 두냐가 던지고 간 권총을 자신의 오른쪽 관자놀이에 갖다 댔다. 그리고 공이치기를 당겼다.

 

 

자수한 라스콜니코프와 시베리아로 간 소냐 

 

“바로 제가 그때 관리 미망인인 노파와 그 여동생 리자베타를 도끼로 살해하고 금품을 훔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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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서를 찾아간 라스콜니코프는 경찰서 부서장에게 조용히 띄엄띄엄, 하지만 또박또박 말했다. 그의 불우한 처지와 그 속에서도 그가 베푼 선행 그리고 자수했다는 점이 참작되어 그는 팔 년의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졌다. 소냐는 그를 따라 시베리아로 향했다.

 

소냐는 시베리아에서 삯바느질을 했다. 그리고 틈틈이 라스콜니코프를 면회했다. 그는 처음에 그런 소냐에게 신경질 내고 거친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녀가 몸이 아파 한동안 면회를 오지 않자 몹시 울적해 했다.

 

유형소의 죄수들 모두가 그녀를 알게 되었다. 그들은 모두 소냐를 좋아했다. 그녀는 성탄절에 감옥 사람 모두에게 피로그와 칼라치(부드러운 빵)를 나눠주었고, 죄수들이 그들의 가족에게 보내려는 편지를 대신 써 주고 부쳐주기도 했다. 소냐가 라스콜니코프에게 가려고 그의 작업장으로 가다 죄수 무리들을 마주치면, 죄수들은 모자를 벗고 고개 숙여 그녀에게 인사했다.

 

“어머니, 소피야 세묘노브나(소냐), 당신은 상냥하고 인정 많은 우리의 어머니요!” 범죄자의 낙인이 찍힌 저 거친 유형수들이 이 작고 여윈 피조물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어느 화창한 날 이른 아침이었다. 라스콜니코프는 작업장인 강기슭으로 향했다. 이곳으로 보내진 죄수는 세 명뿐이었다. 한 명이 호송병과 함께 연장을 가지러 요새로 갔고 다른 한 명은 장작을 패기 시작했다. 라스콜니코프는 통나무 위에 앉아 광활한 주변 정경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멈춘 듯했다. 

 

갑자기 그의 옆에 소냐가 와 있었다. 살그머니 다가와 나란히 앉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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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냐는 그에게 평소처럼 조심스레 한 손을 내밀었다. 그녀가 조심스러웠던 이유는 라스콜니코프가 뿌리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이날은 달랐다. 둘의 맞잡은 손은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그 순간 모든 것을 깨달았다. 알 수 있었다.

 

그녀가 깨달은 사실,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란 그가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 무한히 사랑한다는 것, 마침내 이 순간이 도래했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 인생을 사는 방법

 

컴퓨터로 게임을 하다 보면 과감해질 때가 있습니다. 특히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날이나, 무언가 화끈한 것이 필요할 때 더욱 그렇습니다. 애써서 키운 캐릭터가 아깝기는 하지만, 여차하면 리셋해서 다시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몬스터들 속으로 돌진하기도 하고 끝판왕에게 덤비기도 합니다. 이럴 때면 문득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인생도 리셋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특별하지 않은 보통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지나간 삶에 후회가 있을 것입니다. 바보 같았던 실수들, 이제 와 생각해보면 잘못된 선택들, 중요하지도 않은 일로 소중한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었던 일들, 좀 더 열심히 노력했어야 했던 일들, 놓쳐 버린 기회들...... 이렇게 생각해보면 아마도 셀 수도 없이 많은 후회의 순간들이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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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드는 생각입니다. 만약 두 번째 인생을 살 수만 있다면, 분명히 지금 인생보다는 좀 더 괜찮게 살 수 있을 텐데... 마치 실패로 끝난 ‘첫사랑’보다는 ‘두 번째 사랑’이 성공할 확률이 높은 것처럼 말이죠. 인생이든 사랑이든 처음 해보는 것들은 아쉽기 마련입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인생도 리셋이 된다면 참으로 좋겠습니다.

 

두 번째 인생을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불가능한 망상임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는 아니어도 ‘두 번째처럼’ 살아볼 수는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바로 위에 소개된 라스콜니코프의 인생처럼 말입니다. 그는 끔찍한 살인자였지만 소냐에 의해서 구원받았습니다. 그가 소냐의 손을 잡음으로 해서, 분명히 그는 그 이후로 예전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라스콜니코프는 두 번째처럼 살게 될 것입니다.

 

구원이 필요했다는 점에서 같은 성격을 가진 두 사람이었지만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자살로 자신의 실패한 인생을 마감했고, 라스콜니코프는 두 번째처럼 살 기회를 얻었습니다. 둘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찬찬히 살펴본다면, 우리의 인생에도 그 기회가 주어지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요구’를 했고, 라스콜니코프는 ‘고백’을 했습니다. 스비드리가일로프의 요구는 자신의 욕망에서 나온 것이었지만 라스콜니코프의 고백은 죄책감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잘못된 판단과 온전치 못한 정신 상태에서 저지른 끔찍한 범죄 앞에서 그는 끊임없는 죄책감을 느낍니다. 죄책감은 자신을 향한 채찍질이었으며, 밥을 굶는 그가 어머니와 여동생이 빚을 내어 보내 준 전 재산을 소냐 아버지의 장례식에 쓰도록 내놓게 한 동력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죄책감이 고백을 이끌어냈고, 제 발로 경찰서를 찾아가 자수하게 한 힘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죄책감이 반성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죄책감은 양심으로부터 나와 반성으로 마무리됩니다. 그것은 죄책감이 타인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 화를 내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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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맥윌리엄스

 

“죄책감은 우리 자신을 향한 분노다.” 

 

-미국의 시인 ‘피터 맥윌리엄스’-

 

양심이 없는 사람은 죄책감이 없으며,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다면 반성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끔찍한 죄를 저지른 라스콜니코프에게 두 번째처럼 살 기회가 주어진 것은 그의 양심과 반성 때문일 것입니다.

 

굳이 인간의 본성이니 하는 거창한 말을 꺼내지 않아도 양심이 없는 사람이나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사람은 살면서 많은 실수들을 합니다. 혹은 잘못을 저지르기도 합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니까요. 그러나 그것이 반성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경우들이 꽤나 존재합니다. 죄책감을 느끼게 하지 못하는 양심은 양심이 아니듯이 반성으로 이어지지 않는 죄책감은 진정한 죄책감이 아니겠지요.

 

두 번째 인생을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처럼 사는 방법은 있습니다. 잘못을 했다면 죄책감을 느껴야 합니다. 그리고 반성하고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용서를 얻지 못했다면 처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옳습니다. 그것이 같은 실수와 잘못을 최소화하는 인생을 살게 해 주는 길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이미 새로운 이야기가, 한 인간이 점차 새로워지는 이야기이자 점차 다시 태어나는 이야기, 점차 하나의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옮겨 가 여태껏 전혀 몰랐던 새로운 현실을 알아 가는 이야기가 시작된다.

 

반성을 통해 구원받은 라스콜니코프의 이야기를 끝내며 그가 새로운 세계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것임을 암시하는 ‘죄와 벌’의 마지막 구절입니다. 반성하지 않는 인생에게 새로운 세계는 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낡은 세계와 늘 똑같은 낡은 인생만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으로 스물한 번째 인생 탐구를 마무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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