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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사부의 평판이 안 좋은 이유

 

2019년 6월. 집 근처에서 가장 큰 인력사무소에 출근하기 시작했다.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정리 반장이 되었다. 반장이라고 하면 뭔가 대단한 것 같지만 인력사무소의 정리 반장은 사람들 태워서 오가는 것이 주 역할이다. 운전사라서 몇천 원 더 받는다는 것이 메리트라면 메리트다. 현장에 몰고 다니라고 구형 스타렉스를 받았다. 47만 킬로미터를 뛴 차였다. 차를 받아 대충 치우던 중 뒷좌석에서 낯익은 이름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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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가명) 형님. 나에게 빠루질을 가르친 사부다. 인력소장은 나에게 빠루질을 가르친 분이 김덕 형님이라는 것을 알고 나선

 

"자네가 잘 몰라서 그럴 텐데, 이 일하면 사람 많이 가려야 한다네"

 

를 반복해서 말했다.

 

"김덕은 사람 질이 안 좋으니 안 만나는 것이 좋을 것"

 

이라는 말도 거듭했다.

 

당시 김덕 형님은 추락 사고로 병원에 입원했었다. 내가 연결해 준 노무사의 도움으로 산재 보상금을 받아 병원에서 수술을 막 마친 상태였다. 깁스한 채 재활 운동하고자 조금씩 동네 걸어 다니는 것이 다였다. 그때 잠깐씩 말동무를 했다.

 

인력사무소 소장의 이야기에 관해 김덕 형님에게 조금씩 자초지종을 들었다. 김덕 형님을 포함, 해체정리팀 세 반장이 인력사무소 거래처에 기존 거래보다 좋은 조건을 제시한 다음, 독립(또는 배신)했던 것이다. 소장님은 졸지에 거래처를 잃었다. 김덕 형님은 '최악의 배신자'였던 셈이다.

 

그런 전적이 있는 사람과 연이 있어서인지 그 인력 사무소에서 자리 잡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일은 잘한다는 평가를 받아 쉬지 않고 일할 수 있었다. 일을 주지 않으면 수입이 없는 것이 노가다다. 노가다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일이 끊기지 않는 거다. 그게 고마워서 그만둘 때도 정중하게 인사하고 나왔다. 그래서인지 요즘도 종종 소장이 전화한다. 조합 소속의 형틀 목수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데마 나는 날(일거리가 없는 날)'이 있으면 꼭 나오라고 이야기한다. 일당을 생각하면 마냥 반가운 제안은 아니다.

 

날씨를 생각하면 아예 제쳐둘 수도 없는 제안이다. 2020년 장마는 무려 50여 일간 이어졌다. 그 기간 일을 못 했다. 1주일 좀 지나서는, 기다린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싶어 비 맞으면서 자전거를 탔다. 배달의 민족 라이더로 간신히 생계를 이을 수 있었다. 그 기억 때문인지 장마 때 찾아뵙겠다고 말하곤 전화를 끊는다. 명절에 종종 안부 문자 넣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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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여름의 우리 집 밥줄.

 

2018년 7월. 나를 신기하게 본 김덕 형님

 

김덕 형님은 용인 현장 이후 두어 달간 쉬다가 복귀했다(용인 현장 이야기는 아래에 나온다). 형님이 복귀하자마자 팀장은 팀을 꾸려 순천으로 향했다. 그 팀에 나도 있었다. 부랴트 공화국(Buryat, 동시베리아 남부 바이칼호 동남쪽에 있는, 러시아 연방에 속하는 자치 공화국)에서 온 알렉산드르와 제니아, 그리고 볼토의 여친과 함께.

 

순천까지 가야 했던 이유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우리 팀의 주요 고객사 중 한 곳이 순천에서 시작한 골조 전문 건설업체다. 고객사 현장에 지역에서 농사짓는 분들이 해체와 정리를 하러 오셨던 거다. 다들 막걸리 한 잔씩 하고 일했다. 위험하거나 힘든 일을 할 리가 없었다. 조금만 더워도 일 못하겠다고 누워버렸다. 거기다 한참 현장 바쁘게 돌아가는 7월이었다. 굳이 객지까지 보낼만한 해체팀이 없었다. 그러던 터에 한국인들 단가와는 차원이 다른 그것을 제시하는 불법체류자 팀을 알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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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의 밥집이 어떤지 구경은 하고 왔다

 

가서 별일은 없었다. 그런데 형님에겐 내가 그때 좀 인상적이었던 듯하다. 부랴트 공화국 출신들에게 일을 시키고자 내 도움, 정확하겐 구글 번역기를 이용해 러시아어만 할 줄 아는 이들과 이야기했던 것이 좀 신기했나 보다. 현장의 많은 분께 스마트폰이란 네이게이션과 유튜브, 게임이 되는 전화기 이상이 아니다. 그런데 그 전화기로 외국인들과 외국어로 소통하는 게 좀 신기했던 듯싶다.

 

2018년 9월. 형님에게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2018년 여름. 술자리가 하나 있었다. 2018년의 여름도 끔찍하게 더웠다. 안전화 목까지 두어 번 찬 땀을 버려야 하루가 갔다. 그 상태에서 맥주 한 병 마셨다가 죽는 줄 알았다. 한동안 술자리를 피했다.

 

생활정보지에서 보고 그 해체팀으로 찾아갔던 이유 중의 하나가 '퇴근 시간'이었다. 4시 반 정도엔 집에 돌아온다는 문구를 보고 바로 전화 걸었었다. 그 까닭에 일이 힘들어도 다른 곳에 갈 생각은 별로 안 했다. 일찍 집에 돌아와야 저녁밥을 지어서 마님과 같이 먹고, 밤에 간단히 산책이라도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게 다 해체팀 사람들에게 아주 이상하게 보였던 듯하다. 사실 한국에 들어와서 일했던 거의 모든 곳에서 내가 밥을 한다는 사실 자체를 괴이하게 여겼다. 새벽에 나가는 일을 하고 있으니 술도 줄여야 했던 판이었는데 그 팀 사람들에겐 용납할 수 없던 일이었다.

 

팀 분위기를 해치고(?) 일도 늘지 않으니(!) 내보내자는 의견이 주였단다. 총반장이 그 분위기를 주도했다는 이야기에 헛웃음이 나왔다. 총반장은 웨지핀도 잘 제거하지 못하던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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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 보라색 원안에 있는 게 웨지핀(Wedge Pin, 현장에선 보통 핀 혹은 유로폼 핀이라고 부른다)이다. 저걸 빼줘야 거푸집을 뜯을 수 있다. 그런데 총반장의 주특기가 저거 몇 곳씩 안 빼고 지나가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폼을 잘 뜯었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알코올중독이라 몸에 열이 많아서인지, 허약해서인지, 좀 더우면 에어컨 밖으론 나가지도 않았다. 자재 규격 같은 것은 당연히 못 외웠다. 말하는 자재 번호가 이상해서 다른 기술공들에게 물어보면 '원래 그런 양반이니 신경끄라'는 대답을 받았다. 지게차와 작업용 리프트를 좀 다룰 줄 안다는 것 정도가 다였던 분이다. 그런 분이 내가,

 

"머리가 아주 나빠서 일을 못 시키겠다"

 

고 했단다.

 

분위기가 그렇게 흘러가던 중 김덕 형님이

 

"내가 한동안 데리고 다니면서 일 가르칠게"

 

라고 나서자 그 이야긴 거기서 끝났다고 한다. 뭐 딱히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었지만 해체 일은 그때까지만 해도 나에겐 '부업' 개념이었다. 본업은 다른 것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더구나 집에 돌아오면 강연 준비하고 글 쓰느라 바빴다. 일하던 중에 궁금하던 것들이 생겨도 찾아볼 시간이 없었다. 그때는 그랬다. 

 

속이 뻥 뜷린 날

 

궁금했던 것은 많았다. 타이(Flat Tie. 콘크리트를 부어 넣어도 벽체 간격을 유지할 수 있도록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가 들어가 있는 핀들이 대체로 때려서 빼기 힘들었다. 유독 빼기 더 힘든 핀들이 있었다. 궁금증은 김덕 형님과 처음 같이 갔던 날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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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Flat T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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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는 철근이 들어간 상태에서 넣는데 이때 철근이 타이가 들어가야 하는 딱 그 위치에 있는 경우들이 있다. 부지런한 목수들이면 철근공들이 작업한 철근 상하좌우를 망치로 살살 때려서 타이가 수평이 되도록 해준다. 내가 일하던 현장의 목수들은 거푸집만 빠르게 붙일 줄 아는 불법체류자들이 대부분이었다. 틀어져 있으면 앞에 거푸집 끼울 때 힘으로 대충 욱여넣고 말았다. 그렇게 욱여넣으면 콘크리트 타설할 때의 압력까지 합쳐져 끼워져 있는 핀들이 서로 씹어 물고 들어간다. 방법은 망치로 잘 부러트려서 빼는 것밖엔 없는데 그 요령을 김덕 형님이 처음 알려줬다.

 

그날 하루에 꽤 많이 배웠다. 어떻게 해야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중력을 이용해서 거푸집을 쉽게 떼어낼 수 있는지, 어떤 자세로 잡아당기고 밀어야 근력과 골격구조를 이용할 수 있는지 등등. 약 1주일 정도 같이 일하고 나서 다른 반장들이 일하고 있는 현장에 같이 갔었다. 그날 시간당 평균 100장의 거푸집을 떼어냈다. 그다음부터 퇴출이니 뭐니 하는 이야기는 쑥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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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김덕 형님은 몇 주 전 술자리에서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말해줬다. 형님은 이해할 수 없었다고 했다. 남들은 하나 하기도 버거워하는 외국어를 여러 개 하는 녀석이 머리가 나쁠 리 없고, 체격이 있어서 힘이 딱히 떨어질 것 같지 않은데 일을 못 한다는 소릴 듣는 데에는 뭔가 다른 이유가 있어서 그럴 것으로 생각해 본인이 한동안 가르친다고 했었다고 한다. 

 

그 이야길 듣고 나서 내가 어려워하고 있었던 문제들(어두워서 앞이 잘 안 보이던 것)을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에 대한 이런저런 해답도 얻었다. 퇴근하면 바로 집에 밥하러 갔던 것도 이해해줬다. 형수님이 당찼던 터다. 또, 형님은 예고된 술자리는 될 수 있는 한 참석하라고 이야기해주셨다. 찬 바람이 좀 불기 시작하면서부턴 술자리도 종종 쫓아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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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랴트 공화국 출신 언니들과 사진 찍던 김덕 형님

 

2018년 10월. 나에게는 은인, 팀에는 민폐

 

용인의 프렌차이즈 장례식장 건설 현장이었다. 총반장이 팀에서 가장 일 잘한다는 기술공 넷을 끌고 가서 오전에 2시간만 작업하고 퇴각했던 곳이었다. 현장소장이라는 분이 골조 만드는 것에 대해서도 아는 게 없었다. 가끔 일용직 잡부로 평생을 사셨던 분들이 '내가 어디서 현장소장도 했어!'라는 믿기 힘든 이야기를 종종 하는데, 그 현장의 소장이 바로 그런 분이었다. 직영 반장 정도 하면 딱 될 텐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런 분들을 소장으로 앉혀 놓는 전문건설업체들을 종종 봤다.

 

그날 총반장 팀이 퇴각했던 이유는 한창 더울 때 물이 가득 찬 지하 공간에 내려보냈기 때문이었다. 사람이 간신히 움직일 수 있는 폭 밖엔 안 나오는 데다 물이 가득 차 있으니 망치로 핀을 때려서 뽑을 수도 없었다. 소장은 그게 왜 문제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다른 팀들도 불렀지만 모두 고개를 젓고 물러섰다. 그때야 양수기로 물을 다 빼고 형님과 내가 있던 팀을 다시 불렀다. 팀장은 물이 빠진 상태고, 뜯어낸 것이 좀 있으니 대충 2~3시면 끝날 것으로 생각했던 듯하다. 형님은 너무 빨리 끝내지는 말고 시간 봐가며 '야리끼리(그날 할 분량의 일을 치고 퇴근하는 것)'하자고 했었다.

 

그날 김덕 형님은 신났던지 10시 반쯤 지시받은 일을 다 끝내버렸다. 이러면 야리끼리가 안된다. 더구나 소장은 일 양을 가늠할 줄 몰랐다. 계속된 추가 작업 지시를 받아 결국 오후 5시 넘어서까지 일하다가 퇴근했다. 현장소장의 머릿속엔 김덕 형님과 내가 했던 노동량이 '표준 작업량'으로 박혔다. 현장소장의 머릿속에는 작업을 위해 준비해야 하는 과정들이 있다는 것이 입력될 리 없었다. 다른 이들은 준수한 속도로 일하고 있음에도 '일이 늦다'고 갈굼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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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죽자고 하는데 지적당하니 그 이유를 찾아볼 수밖에 없다. 소장 입에서 형님 이름이 나왔다. 모두 이유를 알았다. 김덕 형님의 미친 작업속도가 소장에겐 표준 작업량으로 머릿속에 입력되어 있었던 것을.

 

그리고, 사부는 댄스를 좋아했다

 

남다른 형님의 다른 이야기들은 나중에 수원이 집인 이들과 술 마시던 날 들었다. 김덕 형님은 태권도 특기자로 모 대학 체육학과에 입학했었다. 1학년 초에 술 마시고 호기 부리다가 추락했다. 무릎 수술을 하면서 선수 생활을 단념했다. 공부가 싫어서 태권도를 했던 건데, 학적을 유지하려면 운동생리학 등을 들어야 했다. 그걸 쫓아갈 수 없었다. 이일 저일 하다가 거푸집 해체일을 시작했다. 어디까지 사실일지는 모르나 유연성과 근육 쓰는 것이 일반인의 그것과는 확실히 차원이 달랐다.

 

형님은 두어 달에 한 번씩 무단결근을 했다. 나이트클럽에 가서 맥주 한 병 시켜놓고 밤새도록 춤추다가 방전되어 종일 잤다. 춤이 그렇게 좋냐고 놀리면 '이 일은 리듬을 잘 타야 잘하는 거'라고 받아치는 걸 보고 그냥 좀 웃긴다고만 생각했다.

 

형님이 산재 보험금 받고 깁스한 상태로 동네 마실 나왔을 때, 문득 기억났던 것이 있어서 물어봤다. 형님을 포함해 반장 세 명이 모여서 독립(또는 배신)했을 때 형님에게도 지분 같은 것이 있지 않았냐고, 셋 중 한 명으로 함께 동업한 팀장이 형님 산재 보험금 받는 것으로 그 난리를 칠 수 없는 것 아니냐고 물었다. 답변이 좀 깼다. 자긴 그런 거 모르고 일이 안 끊어지게만 해달라고 했었단다. 

 

김덕 형님은 기술 하나만 있었다. 나머지 일에는 어두웠다. 인맥도 없었다. 독립(또는 배신)해서 일을 시작하려면 지분 관계 같은 것을 어떻게 해야 한다든지 하는 조언도 누군가에게 들을 수 없었다. 그러니

 

"일만 끊기지 않게 해달라"

 

는 소박한 요구만 했던 터다. 팀장은 그 소박한 요구를 충실히 이행했으니 본인의 할 일은 다 했던 거다.

 

나중에 팀장 이야기를 듣고선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 사무실을 열고 팀장 본인이 영업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총반장'의 역할을 김덕 형님이 해주길 바랐다. 총반장은 그 현장 소장들과 잘 지내는 것은 물론이고 팀들을 빡세게 굴려야 자기에게 돈이 많이 남는다. 그런데 김덕 형님은 태생적으로 그런 일들을 못 했다. 결국 팀장은 포기했다. 노가다하는 고향 선배를 불러서 총반장을 맡겼다. 애초에 팀장이 원했던 캐릭터가 호통 잘 치는 사람이었으니 기술만 아는 형님 캐릭터와는 거리가 있었다.

 

산재로 거의 2년을 쉬었던 김덕 형님은 재작년쯤부터 다시 그 팀에서 일한다. 그즈음, 코로나가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그때 어쩌다가 이란 소식에 관심이 생겼다. 트럼프의 미국이 가하던 각종 제재 때문에 필수적인 의료 물품도 없는 상태에서 확진자가 폭증하고 있었다. 영국 가디언은 짧은 비디오로 소개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이란의 의료진들은 서로 기운 내고자 춤을 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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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의사와 간호사들이 사기를 높이고자 춤을 추었다.

김덕 형님이 생각났다

 

김덕 형님은 가장의 책임을 져야 한다. 본인의 쓸모 있는 기술은 단 하나다. 그런데 팀원들에게는 존경은 고사하고 '형님 때문에 너무 힘들어요' 소리나 듣는 상황이다. 다른 곳으로 가면 일당이 오를 수 있다. 그러나 일을 지속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심심하면 '약속은 깨라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팀장의 약속 하나 믿고 계속 일해야 한다. 스트레스는 상당했을 것이다. 김덕 형님의 춤도 저들과 같은 심정에서 나왔던 것이 아니었을까. 차이라면 팀의 사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 속의 무언가를 채우고자 춤을 춘다는 점일 테다.

<계속>

 

Sameul Se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