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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역사상 최단명 총리가 된 리즈 트러스

 

그래도 양심은 있다. 책임지고 물러난다고 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영국 역사상 44일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이런 식의 존재감을 드러낸 총리는 없었다. 경기부양 정책을 시행하겠다는 발표와 함께 증시가 폭락하고 파운드화 가치까지 폭락시킨 총리가 누가 있었던가. 어쨌든, 본인이 책임을 지고 사퇴한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이다.  

 

누구 얘기?

 

영국 총리 리즈 트러스 얘기다.

 

트러스 사임.jpg

 

그녀는 얼마 전 보리스 존스 총리 사퇴 후, 영국의 보수당에서 새롭게 리더로 선출되어 총리가 되었다. 코로나 상황에서 다른 정치인과는 다르게 역할을 나름 잘하며 많은 지지를 받았던 리시 수낙을 누르고 당당히 보수당 내 입지를 굳힌 여인이다. 그러나 그 기세도 잠시였다. 영국 역사상 가장 짧은 기간 총리직을 수행했던 인물로 역사에 기록됐다. 

 

애초부터 기대감이 없었던 것도 있었지만, 현재 시대를 적절하게 읽지 못한 경제정책 실패 때문이었다. 경제는 트러스의 전문 분야가 아니었기 때문에, 경제 전문가라도 잘 썼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다. 총리로서 좋은 평을 받기 힘들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빠른 시일 내에 자리를 내어놓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던 터라 얼떨떨하긴 하다. 

 

근데 몇 가지 의문점이 남는다. 

 

지난 19일, PMQ에 모습을 드러낸 트러스 총리는 노동당의 거센 공격에도 자신은 끝까지 싸울 것이고, 반드시 이 난관을 극복해 나갈 것이라고 목소리 높여 말했다. 

 

당시 PMQ 영상

 

당시 상황을 면밀히 살펴보면, 그녀는 전혀 사퇴할 의사를 내비치지 않았다. 아주 분명하게, 

 

파이터.jpg

 

“I am a Fighter, not a quitter”

(나는 전사야, 중도 포기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라며, 파이’터’, 퀴’터’로 운까지 맞춰가며 힙스럽게 대응했다. 

 

이런 트러스의 태도에 노동당 대표 키어 스터머는 

 

“경제 신용도를 비롯하여 보수당이 실시하려 했던 모든 정책이 물건너갔고, 오른팔이던 재무부 장관도 사임했는데, 왜 트러스만 그대로 남아있는가?”

 

라며 비꼬았다. 

 

키어 스터머.jpg

키어 스터머 노동당 대표

 

하지만 그녀의 반응은 매우 확고했다. 실수를 한 건 맞고, 분명하게 책임을 지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상황을 반드시 헤쳐 나갈 것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전사이며 반드시 극복할 것이라고 단언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랬던 그녀가 한 달도 아니고, 일주일도 아닌, 하루 반나절 만에 급작스런 사퇴 발표했다. 야당의 맹공에 고개 들고 맞서며 버티고 버텼던 그녀가, 왜 이토록 빨리 마음을 바꿨던 것일까. 

 

 

우선, 지지율 : 20% 초반

 

영국의 여론조사 기관인 유고브(링크)에 따르면, 현재 노동당은 국민 전체의 절반이 넘는 52-3%의 지지율을 얻고 있다. 반면 보수당은 리즈 트러스 취임 이후부터 지속적인 하향세를 펼치며 현재 20%대를 유지하는 중이다. 

 

그래프.PNG

보통 영국 정치 여론조사는 유고브를 참고하나,

폴리티코의 그래프(링크)가 더 명확하게 그려져 있어

폴리티코로 자료 첨부했다.

내용은 유고브 그래프와 별 차이 없다.

 

현재 양당 간 지지율 격차는 30% 이상을 웃돌고 있다. 1990년대, 영국 노동당에 혜성같이 등장한 토니 블레어 정부 이후 처음 있는 그래프 양상이다. 코로나로 수천 만 명이 바이러스에 감염되고 수십만이 목숨을 잃었을 때도, 크게 요동치지 않던 지지율 그래프였다. 게다가 우리나라였음 탄핵되고도 남았을 그 상황에서 보리스 존슨의 지지율은 40%나 나왔다. 그런데 지금 보수당 지지율이 20% 초반이다. 이 추세대로라면, 다음 총선에서 노동당이 전체 과반을 훌쩍 넘는 410석 이상을 차지할 것이라는 조사 결과가 계속해서 나오고 있다. 

 

 

억울한 리즈 트러스?

 

지금 세계 어디나 마찬가지지만, 그녀가 취임한 영국도 굉장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런 상황에 트러스가 총리로 취임했다. 트러스는 총리로서 자신이 처한 이런 상황에 대해 억울함을 일부 드러내기도 했다. 

 

영국은 코로나 여파로, 이미 시장에 풀릴 대로 풀린 파운드를 회수하기는 역부족이고, 국가 예산도 미리, 그것도 엄청나게 (우리 돈으로 약 600조 이상) 끌어다 썼으니 돈이 모자라다. 게다가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은 ‘에너지 위기 + 3차 대전의 위협’으로 몰고 갔으니, 유럽 지역에 있는 영국은 죽을 맛이다. 보리스 존슨이 만들어 놓은 밭에 러시아가 폭탄을 터뜨린 형국이다. 

 

이런 절체절명 위기 상황에선, 누가 총리 자리에 앉든, 크든 작든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트러스가 세계적인 경제 흐름을 못 읽은 정책을 발표하긴 했지만, 아직 시행한 것도 아닌데다가 다른 때 같았으면 이 하나로 인해 이렇게 최단기 사임까지 하게 되진 않았을 것이다. 트러스 개인적으로는 일부 억울함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경선.jpg

지난 보수당 당 대표 경선대회에서

리시 수낙과 리즈 트러스 

출처-<연합뉴스>

 

그러나 그녀가 총리가 되겠다며 보수당 당 대표 경선대회에 뛰어들었을 때부터 이런 상황은 이미 도래해 있었다. 이 상황에서 총리에 도전하려면, 충분한 근거와 자신감이 있어야 했다. 총리가 된 다음엔 정책의 발표든 시행이든 굉장히 신중을 기했어야 했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선 더더욱. 작금의 상황에서 총리직을 잘 수행할 자신이 충만하지 않고, 상황을 탓할 생각이었다면 총리에 도전 자체를 하면 안 됐다. 트러스가 한 개인으로선 억울함이 있을 수 있겠지만, 한 사람의 정치인으로서 게다가 총리로서, 그런 억울함은 받아주기 힘들다. 

 

영국민들 입장에서는, 전임 보수당 대표이자 총리였던 보리스 존슨이 내로남불의 모습만 보이며 상당한 신뢰를 잃고 사임했는데, 취임 때부터 기대감 제로였던 (같은 당의) 리즈 트러스 총리가 (경제적으로 죽겠는 이 상황에서) 첫 정책부터 똥볼을 날리니, 바로 희망을 버리게 되었다. (관련 기사 '영국 정치썰을 풀어본다 : 1975년생 신임 총리는 왜 기대감 ZERO일까' 링크)

 

하지만 전술했듯,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러스는 총리에서 물러날 생각이 없음을 분명하게 밝혔다. 근데 왜 생각을 바꿨을까.

 

 

사임한 이유

 

지금 트러스는 개인적으로 총리 자리에 계속 욕심냈다간, 역사적으로도, 자신의 정치생명에도 큰 위협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다. 남은 임기 2년을 채워 최단명 총리의 오명을 쓰지 않는다 해도, 분명 다음 총선에서 노동당에 대패할 게 뻔하다. 그냥 지는 것도 아니고 20년 만에 처음 겪는 격차로 질 수 있는 위기다. 

 

사실 영국 의회는 완벽하게 의회민주주의 시스템으로 굴러가기 때문에 아무리 상대 당에서 반대한들, 머릿수가 모자라면 말짱 도루묵이다. 우리 국회야 인원수 많은 걸로 독재네 뭐네 하며 떠들고, 이에 맞서 협치를 해야하네 마네 하면서 서로 정주고 마음 주고 사랑도 주지만, 다수당이 국회를 운영하는 건 당연한 민주주의 시스템이다. 그러라고 국민들이 많이 뽑아준 것 아닌가. 그러니 노동당이 대승을 거둘 경우, 보수당은 웨스트민스터에서 4년 혹은 8년간 꿔다 놓은 보리자루 신세로 전락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실제로 1997년 토니 블레어 총리 10여 년간, 영국의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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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청와대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

 

시행령으로 있던 최저임금제를 법제화하여 오랜 기간 보수당에 붙어서 마음대로 운영을 일삼던 기업인이 더 이상의 갑질을 할 수 없도록 했다. 귀족 중심의 상원제도 – 과거 세습으로만 상원의원 자리를 맡을 수 있었던 관행을 철폐 – 도 개정했다. 제3의 길, 즉 귀족과 중산충, 노동자 계층이라는 뚜렷한 계층사회에 대한 반기를 들고 모두가 중산층이 되어야 한다는 아젠다를 실현시키기 위한 여러 정책들을 시행했다. 

 

그때 보수당은 뭐 했을까?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보수당은 그때의 기억을 여전히 하고 있을 것이다. 만약 리즈 트러스가 2년간 자신의 임기를 채우겠다 선언하고 나온다면, 다음 총선에서 국회는 완전 물갈이될 것이고, 이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리즈 트러스에게 돌아갈 것이다. 앞으로 계속 정치할 생각이 있다면, 그런 엄청난 정치적 위험 부담을 안고 총리직을 더 유지하기란 쉽지 않다. 

 

트러스 사임 연설

 

또 트러스의 행적을 보면, 그중에서 특히 약 1분 30초에 달하는 트러스의 사임 연설을 보면, 그녀의 욕구는 총리가 되어 뭔가를 잘해보겠다는 것보다 총리가 되는 것 그 자체에 맞춰져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총리로서 공과를 평가하기 이전에, 테레사 메이는 마지막엔 울먹이면서 사임 연설을 끝냈고, 존슨도 총리로서 직책을 수행함에 있어 아쉽다는 감정이 느껴졌다. 이것저것 해보려 했는데 결과가 좋지 않아 아쉽다는 게 느껴졌다. 근데 트러스는 정책 발표 하나로 수백조를 날려 먹었음에도 미안한 기색 하나 없이 “나 그만둠” 이러고 휙~ 가는 걸 보니, 저 사람이 도대체 총리로서 일말의 책임감은 있었던 건가 하는 생각이 드는 바이다. 

 

 

사실상 다음 총리는 확정됐다

 

지금 영국은 속전속결로 리더를 선출해야 하는 상황이다. 2달여간 기간을 두고 보수당 당 대표 경선을 했던 존슨의 사퇴 때와는 다르게, 이번엔 10일 만에 새로운 리더를 선출하기로 했다. 

 

현재 보수당 의원의 총수는 357명이다. 원래 보수당 경선 방식은 후보가 되기 위해선 100명의 추천을 받아야 하고, 중복 선택할 수 없다. 그래서 최종 후보는 3명까지 나올 수 있다. 이 3명에 대한 투표를 진행해 1, 2위를 뽑고, 그 2명이 최종 후보에 올라 당원들의 온라인 투표로 당수를 선출한다. 

 

3명.PNG

출처-<헤럴드경제>

 

얼마 전 사임한 보리스 존슨 전 총리의 보수당 내 지지율은 30%를 웃도는 상황이고, 보수당 원내대표인 페이 모돈트가 경선 레이스에 참여하겠다고 밝혔다. 지난번 경선에서 트러스에게 패배의 고배를 마셨던 리시 수낙도,

 

“영국은 훌륭한 나라지만, 심각한 경제 위기에 처했다. 그것이 내가 출마하는 이유”

 

라며 출마 의사를 밝혔다. 이 3명이 출마한다면, 실질적으로 존슨과 수낙의 2파전 대결로 흘러갈 것이라고 영국 여러 언론들은 논평을 내놓았다. 그러나 존슨은 곧 불출마 의사를 밝혔고, 페이 모돈트는 보수당 의원 27명의 추천을 받는 것에 그쳐 영국 시간으로 24일 오후 2시에 마감되는 당 대표 후보 신청조차 불가능하게 되었다.    

 

현재의 추세라면, 수낙이 단독 후보가 되어 추가 절차 없이 당 대표 겸 차기 총리로 결정될 가능성이 굉장히 커졌다. 아니, 확실하다고 볼 수 있다. 새 총리가 취임한다 한들 사실상 2년 뒤 총선은 노동당으로 넘어갈 가능성이 다분하다. 이런 상황에서 리시 수낙은 취임 후 어떤 영국을 보여줄까 또 2년 안에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을까. 이 부분이 앞으로 영국 정계를 바라보는 관전 포인트가 될 것이다.

 

수낙수낙.jpg

인도계 영국인이자

존슨 내각에서 재무부 장관이었던

리시 수낙

출처-<Reute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