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1. 유엔이 탄생한 곳, 프린스 오브 웨일스

 

국제연합(United Nations : UN)을 모르는 이는 없을 거다. 국제 질서를 조정해 또 다른 세계 대전을 예방하고자 세계 각국이 머리를 맞대 만든 국제조직. 이 UN은 어디에서 시작된 걸까? UN의 역사에 대해 관심이 있는 이들은 1945년의 샌프란시스코 회의를 말한다. UN 헌장이 발효된 10월 24일(UN 창설일로 기념일로 지정됐다)을 말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UN이 실질적으로 만들어졌다고 보는 건 1941년 8월 14일이라고 보는 게 맞다. 최소한 UN의 '이념적 토대'를 깔아 놨던 시점. 그러니까 '대서양 헌장(Atlantic Charter)'이 바로 이때다.

 

1941년 8월이란 시점을 생각해 봐야 한다.

 

1940년 5월 낫질 작전(Sichelschnitt. 독일군 중장 만슈타인이 구상한 작전. 간단히 말해 성동격서. 독일군 주력이 1차 대전과 같이 벨기에 쪽으로 가는 것처럼 하면서, 실제로는 연합군이 상상도 못한 아르덴 숲을 관통하여 대서양 항구 도시인 노이엘로 진격하여 주력의 배후를 차단하고 섬멸하였다)에 의해 6주 만에 프랑스가 항복한다.

 

제목 없음.jpg

낫질작전 2.jpg

낫질작전(Sichelschnitt)

출처-<유튜브 건들건들>

 

이제 유럽에서 영국의 동맹은 아무도 없었다. 독일의 칼날이 외로이 남은 적, 영국으로 향했다. 1940년 7월 10일부터 영국 본토 항공전(Battle of Britain)을 시작한다. 영국 이곳저곳에 독일의 폭탄이 떨어진다. 풍전등화의 위기였다.

 

1941년 6월까지 유럽에서 영국에 그나마 반전의 실마리 비슷한 게 느껴진 게 1941년 6월 22일이었다. 독일이 소련을 침공했다(오히려 위험이 더 증대했다고 볼 수도 있다. 이 당시 독일이 소련을 정복할 거란 비관적인 예측이 주를 이뤘기 때문이다).

 

이 와중에 처칠은 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스(Prince of Wales)를 타고 캐나다 동해안의 섬인 뉴펀들랜드(New Fou ndland)로 달려갔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플레세티아만에 정박했다. 이곳에서 영국의 처칠 수상과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이 8월 10일부터 회담한다. 이들은 5일간 프린스 오브 웨일스에서 회담했다. 이때 나온 대서양 헌장은 1942년에 있었던 국제연합 공동선언의 기초가 된다.

 

cp9.jpg

루스벨트와 처칠

 

2. 비극적인 최후로 유명한 배

 

주목해 봐야 하는 건 처칠과 루스벨트가 선상 회의를 했던 프린스 오브 웨일스(Prince of Wales)다. 처칠이 이 배를 타고 갈 정도면, 이 당시 영국이 이 함에 대해 가지고 있는 애정과 자신감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영국 대표가 미국 대표를 만나러 가는데, 좋은 배를 타고 가지 않았겠는가? 여기서 며칠간 선상 회의를 할 거라면 신경 썼을 테다.

 

프린스 오브 웨일스는 1937년 1월 1일 기공해서 1939년 5월 3일 진수됐다. 최종 완공일은 1941년 1월 19일이다. 즉 당시 영국에서 나온 전함 중 가장 최신형이 프린스 오브 웨일스란 소리다. 회담이 끝난 5일 뒤인 1941년 8월 19일 최종 완공된 자매함 듀크 오브 요크를 생각한다면, 당시 영국이 내놓을 수 있는 최신예 전함이란 말이 빈말이 아닌 걸 알 수 있다.

 

Blackie_and_Churchill_(cropped).jpg

프린스 오브 웨일스의 함재묘(艦在猫, Ship's Cat)와 처칠.

고양이를 배에 태운 역사는 고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양이를 태우는 이유는 쥐를 잡기 위함이었다

 

이 역사적인 전함(2차 대전을 끝낸 미주리 급은 아니지만)은 동급 함정 중에서 가장 유명하다. 이유는 안타깝게도 '비극적인 최후' 때문이다. 태어날 때부터 조짐이 좋지 않았다. 데뷔전이라 할 수 있는 비스마르크 추격전에서 한 방을 제대로 먹었었다. 이후 말레이 해전에 투입됐다가 일본군의 공습에 힘 한 번 써보지 못하고 격침당했다. 그때가 1941년 12월 10일이다. 처칠을 싣고 대서양을 건넌지 4개월 만에 있었던 일이다.

 

그 이름부터가 불길(!?)했던 프린스 오브 웨일스와 그 자매함들의 역사를 이야기해보려 한다.

 

262E684A5465A15B34.jpg

프린스 오브 웨일스 갑판 위를 거닐고 있는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

 

3. 1920년대, 가장 많은 전함이 사라졌다

 

1930년대까지 해전에서 주력은 '전함'이었다. <전쟁으로 보는 국제정치> 기사(링크)에서도 밝혔듯이 1920년대 유력한 패권국가 해군은 건함(建艦)을 위해 국가 예산의 20~30%를 쓰는 미친 짓을 하고 있었다. 나라 재정은 기울고, 국민들 삶은 힘들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 악순환을 막고자 내놓은 것이 인류 역사상 최고의 군축조약이라 할 수 있는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Washington Naval Treaty)'

 

이다. 역사상 그 어떤 명장이 달려와도 이렇게 짧은 기간 안에 이 많은 전함을 격침할 수는 없었을 거다.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을 위해 세계 각국은 보유하고 있던 전(前) 드레드노트급(Pre-dreadnought, 1890년대 중반에서 1905년까지 제작된 대양 항해용 전함), 드레드노트급(1906년에 건조된 혁명적인 HMS 드레드노트를 따라 설계된 전함), 순양전함(巡洋戰艦) 등을 폐기했다.

 

테이블 위의 전쟁이라고 해야 할까? 세계열강은 공멸을 피하고자 타협을 선택했다. 세계 각국의 해군은 정해진 비율대로 전함을 정리하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나온 게 그 유명한 '해군 휴일'이다. 신조 전함을 만들지 못하고, 기존 전함을 개장하는 선에서 전력 증강을 계속 억제하면서 전 세계는 안정을 되찾는다.

 

그리고 1930년대가 시작됐다.

 

4. 1930년대 런던 해군 군축 회담

 

1930년 4월 22일에 2번째 해군 군축 회담이 열리게 된다. 바로 <런던 해군 군축 회담(London Naval Conference)>이다. 이 회담의 주요 목표는 전함이 아닌 다른 함정 때문에 생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바로,

 

"조약형 순양함(조약에서 가능한 고성능함)"

 

때문이었다. 전함에 대해서는 조약으로 규제가 들어왔지만, 전함이 아닌 함정들에 대해선 규제가 없었다. 이러다 보니 보조함정에 대해서 또다시 군비경쟁이 붙었다. 각국은 조약 밖의 존재인 순양함들을 미친 듯이 찍어내기 시작했다. 그것도 '고성능'으로 말이다. 이때 순양함을 포함한 보조함정들까지 규제하게 된 게 런던 해군 군축 회담이다.

 

44577588.jpg

영국의 첫 번째 조약형 순양함인 Leander급

 

그 후 5년 사이 세상이 급변했다. 1929년 터진 대공황. 이어지는 일본의 만주 침공, 나치 정권의 등장, 스페인을 둘러싼 불온한 움직임(스페인 내전은 1936년 발발한다). 모든 것의 총합은 '전쟁'이었다. 이런 중차대한 상황에서 일본이 다시 한번 침략의 야욕을 드러냈다.

 

1934년 12월,

 

"우리는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 파기를 통고한다."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의 경우 조약 파기를 통고하더라도 2년간 유효했다. 2년간 유예란 소리다.

 

문제는 1936년이다. 조약 파기를 통고했던 일본이 1936년 1월 15일 본회의 탈퇴를 선언했다. 이탈리아도 워싱턴 조약에서 탈퇴했다. 세계가 전쟁의 참화로 뛰어들기 직전이었다. 이 당시 이탈리아는 워싱턴 조약을 탈퇴한 뒤 바로 에티오피아로 쳐들어갔다. 조약 탈퇴는 침략을 위한 사전 정지작업이었던 거다.

 

1936년 3월 25일 <제2차 런던 해군 군축 조약>이 체결됐다. 그러나 이건 말 그대로 형식만 남은 군축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이 뛰쳐나간 상황에서 영국·미국·프랑스 3개국만이 조약을 체결했기 때문이다. 놀라운 건 뛰쳐나간 일본에 대한 '배려'가 있던 점이다.

 

"일본이 만약에 돌아올 수도 있잖아? 괜히 구박하지 말고,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일본이 돌아올 명분을 만들어 주자."

 

이렇게 해서 전함 규정을 기준 배수량 45,000톤 이하, 주포는 16인치 이하로 변경했다. 전함과 항공모함의 보유 범위를 확대했다. 조약 탈퇴하고 야마토 찍어내던 일본을 위한 배려였다.

 

제2차 런던 군축조약 때 영국은 잠수함의 폐기를 주장했었다. 선견지명이라고 해야 할까? 1차 대전의 교훈이라고 해야 할까? 2차 대전 대서양 전투 당시 영국이 당한 걸 생각하면 제2차 런던 군축조약에서 일본이 빠진 게 못내 아쉬울 거 같다.

 

당시 미국은 일본이 잠수함을 늘리지 않으면 자국도 늘리지 않겠다는 입장이었다. 이렇게 에스컬레이터 조항은 따로 만들어 놓고는, 건조하는 전함은 배수량 35,000톤 함포 14인치로 한정했다.

 

문제는 제2차 런던 군축조약이 다음부터였다.

 

5. 군비경쟁에서 후달리기 시작한 영국 

 

제2차 런던 군축조약 막전 막후로 전 세계는 미친 듯이 전함을 찍어냈다. 이탈리아는 1934년에 리토리오급(Littorio) 건조에 들어간다. 원래 총 4척이 계획됐다가 3척(리토리오, 비토리오 베네토, 로마)이 취역했다. 

 

리토리오급은 조약을 지키는 듯이 건조에 들어갔다. 대외적으로 공표한 배수량은 35,000톤이지만 실제로는 41,377톤이었다(만재배수량은 45,963톤이었다). 주포는 15인치였다. 리토리오급이 어떤 활약을 하고, 어떤 약점을 가졌는지는 이 당시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카탈로그상 스펙만 보더라도 기존 영국의 전함들을 충분히 위협했다.

 

Italian_battleship_Roma_(1940)_starboard_bow_view.jpg

이탈리아 리토리오급 전함(Classe Littorio).

무솔리니가 구상하고 있던 신로마제국의 

지중해 지배계획의 일환이었다

 

1935년에는 프랑스의 리슐리외급(Richelieu)과 독일의 샤른호르스트급(Scharnhorst)이 건조에 들어갔다. 리슐리외급은 성공적인 4연장 주포 포탑을 앉혔다. 안정적으로 15인치 포탄을 날릴 수 있었다. 속력도 30노트에 달해서 유럽 내에서는 거의 최강 수준이었다.

 

이런 전함들이 속속 건조되다 보니 영국도 전함을 찍어내야 한다는 절박감에 몰린다. 해군 휴일 동안 영국 해군은 조약을 충실히 지켰고, 실제로 이후에도 충실히 조약을 지키려 애써왔지만... 당시 상황으론 하루빨리 신규 전함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 시절부터 영국은 군축조약에 호의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때쯤부터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 서서히 무너지고 있어서다. 1차대전은 미국이 돈을 빌려주지 않았다면 감당하기 어려웠던 전쟁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세계 최고의 채권국 중 하나였던 영국이 미국의 채무국이 됐다.

 

식민지는 그대로였다. 이를 관리할 함대는 유지해야 했다. 미국과 일본 같은 새로운 열강들이 함대를 건설하고 있었다. 영국으로서는 군축 조약을 지키는 것이 무너져 가는 제국의 힘을 조금이라도 지켜내는 방법이었다. 그렇기에 조약 준수를 위해 각별히 신경을 썼다.

 

이러한 터에 나온 게 바로 킹 조지 5세급 전함(King George V class)들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