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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버락 오바마, 리시 수낙

 

2008년, 미국 대선 레이스에 등장한 핫한 인물을 기억하는가. 이름하여 버락 오바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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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첫 흑인(?) 출신 대통령이자, 늘상 누가 대통령이 될까 팽팽한 접전을 이어오던 미국의 대선에서 확고한 리더쉽과 인기를 누리며 압도적 지지율로 미합중국 대통령에 오른 인물이다. 

 

케냐 출신 아버지, 유럽계 미국인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마이너리티’임에도, 하버드 대학 로스쿨을 나온 엘리트 법조인&정치인이며, 화려한 언변까지 장착한 그에게 사람들은 열광했다. 지금이야 그에 대해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지만(특히 한국과 관련된 외교 정책에서), 당시만 하더라도 오바마의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몰랐다. 

 

그런데, 영국에도 비슷한 일이 발생했다. 영국 최초, 인도계 이민자 가정의 자녀가 영국 총리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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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영국브리핑 14: 인도계 정치인은 어떻게 유력 총리 후보가 됐나(링크)’ 기사에서도 그에 대해 언급한 바 있지만, 영국 정치인 중 가장 섹시한 남자로도 인기를 누린 바 있는 리시 수낙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여러모로 오바마와 닮은 듯한 그다. 재벌 2세 아내의 세금 미납 문제로 지난 보수당 당 대표 경선에서 트러스에게 한 번 낙석의 고배를 마신 적 있지만, 고배를 마신 뒤 두 달도 채 안 돼 보수당 대표이자 총리가 되었다. 이제 골드만삭스에서 돈을 만지던, 전 재무장관 출신의 그에게 급하락세를 타고 있는 영국 경제의 미래를 걸게 되었다. 

 

 

수낙의 가계도와 학창 시절

 

영국 최초 인도계 이민자 출신 총리라 하니, 그의 가계를 한 번 살펴보자. 

 

리시 수낙의 할아버지는 람다스 수낙(Ramdas Sunak)이란 인물로 펀잡(Punjabis, 현 인도와 파키스탄 국경지대이며 과거 영국의 식민지배 지역) 출신이다. 그는 1935년 인도와 마찬가지로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던 케냐로 이주했다. 인도계 케냐인이 된 것이다.

 

수낙의 외할머니는 라후비르(Raghubir)란 인물로 현 탄자니아, 그러니까 과거 영국의 식민지였던 탕가니카 (Tanganyika) 지역에 거주하며 세금을 걷는 일을 했던 영국의 공무원이었다. 그녀는 영국을 위해 너무 세금을 잘 걷어 영국 정부로부터 큰 공로를 세웠다 하여 MBE(Most Excellent Order of the British Empire) 훈장을 수여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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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시 수낙의 부모와 외할아버지(가운데)

출처-<데일리에코>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수낙의 아버지는 케냐, 어머니는 탄자니아에서 나고 자랐다. 그리고 이들은 학생이었던 1960년대에 영국 본토로 이주하여, 영국에서 학창/대학 시절을 보냈다. 이들은 모두 학업 성적이 우수하여 아버지 야시브(Yashvir) 수낙은 의사가, 어미니 우샤(Usha)는 약사가 되었고, 평생 영국의 국가의료기관인 NHS를 위해 일했다. 

 

영국에 거주하면 느낄 수 있는 부분이긴 하지만, 인도인 출신으로 영국에서 의사를 하는 경우가 매우 많다. 이주자, 혹은 이민자로서 객지에서 윤택한 삶을 살기를 추구한다면 –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인종차별이 암암리에 만연하던 터라 – 전문직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가능하다면 의사나 약사, 법조인 등을 직업군으로 많이 선택했는데, 수낙의 부모가 그런 케이스다. 

 

의사-약사 부모 밑에서 교육받고 자라서인지, 자녀에게 공부를 많이 시키는 이주민 특유의 교육열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수낙은 공부를 잘했다. 이튼, 해로우와 함께 영국의 3대 명문 사립학교라고 불리는 윈체스터 칼리지에 진학해 장학금을 받아가며 공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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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체스터 칼리지

1382년 설립된 명문 남자 기숙 사립학교다

 

영국의 명문 사립학교들은 보통 기숙사 생활을 하는데, 이런 기숙사 생활을 하는 학교를 통칭해서 ‘보딩 스쿨’이라 부른다. 수낙이 다녔던 윈체스터 역시 보딩 스쿨이었는데, 수낙은 학교가 개교한 600년 이래 처음으로 데이스쿨 출신(근교에 살면 생활을 집에서 할 수 있도록 해 등하교를 하는 학생들을 일컫는 말) 학생회장이 되었다. 이민자 가정 출신에 데이스쿨 학생이었음에도 학생회장이 된 걸 보면 고등학교 때부터 난놈이긴 했던 모양이다. 

 

전언에 따르면, 그때부터 그는 이미 달변가의 면모를 가졌다고 한다. 친구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은 것은 물론이고, 학생회장으로서 뜻을 관철시키고자 선생님과 1:1로 앉아 토론을 하면, 대부분 그의 설득에 넘어갔었다고 한다. 

 

1980년생으로 그가 학창 시절을 보냈던 1990년대 영국은 이민자에 대한, 특히 그들의 자녀들에 대한 괴롭힘이 심각한 사회 문제 중 하나였던 터라, 이런 수낙의 학창 시절 이야기들은 영국 사회에서 불리하게 작용될 자신의 조건들까지도 별 장애물이 되지 않게 할 만큼 그의 인격이나 자질이 뛰어났음을 볼 수 있는 일화다(수낙이 뛰어났다는 것이지 이런 조건에서 괴롭힘을 당하는 이들이 못났다는 의미는 아니니 오해마시라).

 

 

옥스포드 PPE

 

그렇게 뛰어난 자질을 갖췄다고 자타공인(?)을 받은 그는 영국의 정치인들, 특히 총리가 가져야 할 기본 조건(?)이라 할 수 있는 옥스포드 대학 PPE 학과에 진학한다. PPE란 Philosophy, Politics and Economic의 약자로 정치, 경제, 철학을 융합적으로 탐구하는 학문으로 옥스포드에서 최고의 전공으로 꼽히며, 수많은 유력인사를 배출한 학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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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스포드 대학교

 

하나 하기도 힘든데 세 과목을 어떻게 다 공부를 한단 말인가? 혹시 셋 중에 하나만 전공해야 하는 거 아닐까? 물을 수 있다. 하지만 국제화/세계화라는 이름에 걸맞게 학계 역시도 Interdisciplinary, 즉, 학제 간 연구를 중하게 여긴다. 정치와 경제가 따로 놀 수 없고, 철학 없이 제대로 된 정치가 이뤄질 수 없다. 경제에도 철학이 필요한 건 당연할 일이다. 세 과목을 융합하여 배운다(한국의 많은 정치인들을 보면, 필히 이 학부 과정이 개설되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물론 과정은 매우 어렵다. 그래서 아무나 입학할 수 없고, 누구나 졸업할 수 없다. 1920년대에 개설된 학과로 당시 귀족들의 전유물이라 여겨진 코스라고 할 만큼 고난이도라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과정을 무사히 마친 이들에겐 큰 혜택(?)이 있기 때문에, 개인교습을 해서라도 다들 어떻게든 잘 마치려고 한다. 

 

이 과정만 잘 마치면, 일반적으로 영국 유수 정치인들과 네트워크를 만드는 것은 물론, 최고 레벨의 금융권을 비롯한 영국 대기업에 취업하는데 한결 가벼운 첫걸음을 내딛는다. 그래서일까? 그간의 영국, 특히 보수당 출신의 총리들을 보면 옥스포드 PPE 출신이 많다. 현대로 들어서면서 그 비율은 점점 높아지고 있다. 44일 천하를 누린 리즈 트러스도, 브렉시트 시작의 주인공 데이비드 카메룬도 옥스포드 PPE 출신이다. 

 

(PPE가 아니라도, 우리가 잘 아는 영국 총리 중 옥스포드 출신은 상당히 많다. 보리스 존슨은 옥스포드 고전학(Classic), 노동당 소속으로 전 총리였던 토니 블레어는 옥스포드 법대, 그리고 마가렛 대처는 옥스포드 화학과 출신이다. 역대 57명의 영국 총리 중 옥스포드 출신은 리시 수낙을 포함하여 30명이나 된다. 옥스포드를 총리 배출의 전통 명문대라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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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스포드 출신 영국 총리들

 

 

골드만삭스 입사와 스탠포드에서 만난 인맥

 

옥스포드 PPE 출신이라고 모두 성공의 가도를 달리는 것은 아니지만, 학창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내던 수낙은 사립명문학교-옥스포드의 끈을 이어 대학을 졸업하고 2001년 골드만삭스에 입사한다. 학부 시절, 영국 보수당의 CCHQ(the Conservative Campaign Headquarters)라 불리는 보수당의 인재양성 핵심코스에서 인턴쉽을 하는 등 정치로 진로를 선택한 듯 보였으나, 경제를 우선 알아야겠다는 인식이 들어서였는지 방향을 틀었다. 

 

(옥스포드 출신이라고 해서 다 골드만삭스나 JP 모건, 모건 스탠리 같은 굵직굵직한 영국의 투자회사에 들어갈 수 있는 건 아니다. 다만, 그 구성원들 대부분이 옥스포드나 케임브리지 출신이라는 점을 보면, 타학교 출신들보다 입성하기 훨씬 수월하다고 할 수 있겠다) 

 

골드만삭스에서 4년간 일을 한 그는, 다음 수순으로 미국 스탠포드 경영대학원에서의 MBA 과정을 택했다. 그것도 전액장학금을 받고 유학했다. 

 

부모님은 일찍이 영국으로 이주해 전문직(의사, 약사)에 봉직한 중산층이고, 수낙 본인은 영국 명문 학교들만 나온 뒤 억대 연봉으로 유명한 골드만삭스에서 4년간 근무하다 전액장학금을 받으며 스탠포드 진학했다. 스탠포드 경영대학원에서는 세계적인 인맥까지 쌓았다.  

 

(미국 유명 경영대학의 경우, 영국의 옥스포드 케임브리지는 물론, 영국 내 금융회사들에 장학금을 주어 인재를 육성하고, 네트워크를 만드는데 투자하는 경우가 많다. 수낙도 그 혜택자 중에 한 명인 셈. 즉, 미국 유명 경영대학들은 자신들을 매개체로 세계적 규모의 끼리끼리 네트워크를 형성시키는데, 수낙이 나온 스탠포드를 비롯, 하버드의 HBS나 트럼프가 나온 펜실베니아 대학의 와튼스쿨과 같은 경영대학원은 공부를 하러 온다기보단, 인맥을 만들러 오늘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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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시 수낙의 가족사진

부인과 두 딸의 모습도 보인다

 

학비와 생활비 걱정 없이 미국 생활을 이어가던 수낙은 여러 인맥을 쌓던 중 한술 더 떠 아예 평생의 동반자까지 만난다. 그 사람이 바로 현재 부인이자 인도의 재벌로 알려진 다국적 IT 기업 Infosys 창업자 나라야나 무르티(N.R. Narayana Murthy)의 딸 악샤타 무르티(Akshata Murthy)다. 

 

 

인도계 이민자 출신이라 할 수 있을까

 

백인밖에 존재하지 않던 영국 총리란 자리에, 다른 혈통의 인물이 총리에 오른 건 역사적이고 기념비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 미국과 같이 애초부터 이민자들로 세워진 국가가 아님에도 인도계 인물이 최고 실권자인 총리란 자리에 오를 수 있는 사회적 포용력을 가진 영국 사회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보게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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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Reuters>

 

그러나 수낙에게 붙는 ‘인도계 이민자 출신’이라는 수식어에는 의문이 든다. 오바마가 흑인계 부친의 피를 이어받았다고는 하지만, 어머니가 백인계 미국인이었다. 그의 얼굴은 검을지 모르지만, 그의 생각과 세계관, 가치관, 마인드는 모두 미국적, 그 자체였다. 리시 수낙도 마찬가지다. 그의 조부모는 지금의 인도-파키스탄 지역에서 태어난 인도계 출신이고, 부모는 영국의 아프리카 식민지에서 태어났지만, 부모 모두 대체로 학창 시절을 영국에서 보냈다. 수낙은 아예 영국에서 태어나 자랐다. 

 

그의 부모는 영국에서 전문직으로 살며 중산층 생활을 누렸고, 그 혜택과 더불어 공부까지 잘했던 수낙은 영국 백인 ‘엘리트 of 엘리트’가 밟는 코스를 그대로 밟았으며, 영국 백인 귀족들이 누려왔던 교육, 문화, 사회적 배경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지극히 영국적인 인물이란 거다. 게다가 스탠포드에서 만난 재벌 2세와 결혼해 억만장자 소리 듣는 가문의 사위가 되었다. 정치자금에 대해선 눈곱만큼도 걱정할 필요 없는 배경도 갖추게 된 것이다. 

 

또한 그의 외가는 대영제국을 위해 열심히 세금을 걷어 영국 정부의 재정을 확장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하여 훈장까지 수여받은 가문이다. 이런 리시 수낙에게 그의 피부색만으로 단순하게 인도계 이민자 출신이라는 수식어를 쓰는 것이 맞는 것인지 심히 회의적이다. 

 

암튼 이렇게 리시 수낙이 어떤 삶의 루트를 달려왔는지 대략 훑어보았다. 지금의 영국은 코로나 후유증, 인플레이션과 우크라이나 전쟁 등으로 인해 상당히 어려운 상황이다. 게다가 전임 총리인 리즈 트러스가 사고를 친 후이기 때문에, 앞으로 떨어진 국가 신용도 회복해야 한다. 지금껏 인생에서 인정과 성공만을 거쳐온 1980년생의 젊은 총리 리시 수낙. 과연 그는 기울어가는 작금의 영국 경제를 회복하고 다시 일으키는 데 성공할 수 있을까.

 

아! 영국을 기반으로 한 장인의 기업이 그간 세금을 미납한 것이 결정타가 되어 저번 경선에서 리즈 트러스에게 패했던 그는, 총리가 되면 세급을 완납하겠다고 했었다. 그 약속을 지키는지도 관전포인트로 삼을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