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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 윤석열이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되게 한 장면들에는 반드시 '분노'가 있었다. 박근혜 정부 때도, 문재인 정부 때도, 후보 선거 유세에서도, 대통령이 된 후 당 대표를 찍어 날릴 때도 그의 말에는 분노가 가득 담겨 있었다. 그의 분노는 권력에 대한 도전이라는 형태로 표출됐다. TV 앞에서, 검찰총장실에서, 유세차 안에서 그는 '족보도 없는 나라'와 같은 쌍팔년도 워딩으로 권력에 도전했다.

 

그러던 그가 이제는 도전받는 자리에 앉았다. 취임 이후 그는 이준석으로부터, 미디어로부터, 야당으로부터, 북한으로부터 도전받았다. 여기서 그와 연산군이 하나가 된다. 도전을 다루는 그의 대응은 적잖이 연산군스럽다. 일단 연산군 얘기부터 천천히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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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왕의 남자> 장녹수와 연산군

 

1. 연산군, 하고 싶은 것만 파던 중2병 청소년

 

한때 연산군이 성군(聖君)의 자질을 가졌고 즉위 초기의 행적도 아버지이자 태평성대라 불렸던 성종(成宗) 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평가가 주를 이었다. 그런데 성군의 자질을 지녔는지는 조금 의심스럽다. 그는 세자 시절 엄격한 교육을 큰 낙오 없이 통과하긴 했지만, 여러 차례 지적을 당했다.

 

성종 : "세자가 지금 17살이나 됐는데도 아직도 문리(文理)를 이해하지 못하니 정말 걱정된다." (1492년 1월 19일 - 『성종실록』)

 

세자의 스승 : "세자께서 오로지 유학의 경서만을 읽어서 문리가 통하지 못합니다. 반드시 역사서를 읽게 하여 역사를 아시게끔 해야 합니다." (1492년 1월 29일 - 『성종실록』)

 

세자 시절 연산군이 받았던 주된 평가는 '문리가 통하지 않는다.'였다.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하기는 하는데, 공부한 바를 통합적으로 판단하고 평가하는 능력인 '통섭'에 대한 감각이 떨어졌다는 뜻이다. 게다가 하고 싶은 공부만 하는 경향도 있던 것 같다. 그가 정말로 하고 싶었고 잘했던 일은 문학과 예술이었다. 남아 있는 시만 해도 100여 편이 넘는데, 냉혹하게 칼을 휘두른 군주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섬세하고 애달픈 감정을 노래한다.

 

너무 애달파 눈물 거두기 어렵고

슬픔이 깊으니 잠조차 오질 않네.

마음이 어지러워 애끓는 듯하니

이제 깨어나면 어찌 살아가려나.

 

『연산군일기』에 기록된 이 시는 연산군 11년, 자신이 총애하던 월하매가 죽자 지었던 시다. 군주에게도 사람의 마음이 있을 테니, 왕이 이토록 애통한 시를 짓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문제는 이쪽으로만 재능이 뛰어났다는 데 있다. 더구나 이런 시를 짓고 관료들에게 답시를 억지로 받아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만을 콕 집은 후, 그것을 정치적인 행위와 연결 지어 '우리 편'을 만들었다. '우리 패밀리'끼리 하고 싶은 것만 하려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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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역적>의 월하매.

연산군은 어릴 때 친모를 잃어서 생긴 결핍 때문인지, 연상녀를 좋아했다.

연산군을 매혹한 장녹수도 대여섯 살 연상이었다.

나이 기록이 없는 월하매도 연상의 유부녀였으리라 짐작한다

 

아마도 세자 시절의 연산군은 이런 타입의 학생이었을 거다. 0교시부터 야자까지 절대 빼먹지 않고 진득하니 붙어 있지만, 실제로 공부하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고, 공부하는 것도 자기가 하고 싶은 공부만 골라서 하는, 게다가 공부보다 예술에 더 관심이 많은 학생. 이런 학생이 나쁘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가 비교적 평범한 집에 태어났다면, 나름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었을 테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모든 정보를 종합해 매번 이성적인 판단을 내려야 하는 왕의 후계자로 태어난 것이 문제였다. 심지어 정통성을 두루 갖춘 적장자로. 그는 '모범생 코스프레'를 하면서 어떻게든 존버했고, 그 결과 무난히 왕의 지위에 올랐다.

 

그를 아무도 견제할 수 없고 그가 들이받을 윗선도 없자, 그는 내면 안에 응어리진 슬픔과 분노를 통치 행위와 연결 짓는다. 연산군의 어머니인 폐비 윤씨의 복위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갑자사화가 그것이다.

 

사실 이미 "위하여" 한 잔에 우리 편과 느그 편이 갈라지던 연산군의 초기 시절부터 위기는 시작됐다.

 

2. 가오에 살고 가오에 죽는 정치

 

연산군이 물려받은 정치적 환경은 유학적으로 이상적인 모습이었다. 임금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는 사간원·사헌부·홍문관 삼사의 권위가 커졌기 때문이다. 성종은 본인의 신념으로 삼사의 권한을 지속해서 확대했고, 가끔 '선 넘는' 발언이 올라와도 터치하지 않았다. 성종 대의 문제 해결 프로세스는 겉으로 보기엔 지루하지만, 자세히 들여보면 치열한 논리의 대결이었다. 도성 안의 불법 건축물을 철거하는 문제를 다루는 당시의 국무회의장을 살펴보자

 

1481년 2월 8일 - 『성종실록(成宗實錄)』

 

신경 : 풍수지리만 믿고 2백 채가 넘는 집을 하루아침에 날리면, 뒷날 누군가 폭군이 이 사례를 악용할까 봐 두렵습니다.

 

성종 : 풍수설이라는 게 무덤에만 적용되고 수도에는 적용되지 않는가? 게다가 가옥 문제는 그대들이 먼저 꺼내지 않았는가?

 

신경 : 만약 풍수설에 근거했다면, 서민의 집은 철거하지 않고 고위 관료의 집만 철거한 것은 온당하지 않습니다.

 

성종 : 내가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서민들은 자세한 사정을 모르기 때문에 철거하면 윗사람을 원망하지만, 관료들은 알만한 사람들이므로 철거해도 이해해야 하지 않은가? 게다가 언제는 길일을 잡아야 한다고 하더니, 왜 말이 앞뒤가 다른가?

 

이 논의의 맥락은 이렇다. 당시 서울은, 지금도 그렇듯 주택난이 심각해서 고위 관료까지도 산에 불법 건축물을 짓고 살 정도였다. 그런데 이는 풍수지리적으로 궁궐을 압박하는 형세였고, 그래서 선대로부터 내려온 룰에 따라 이를 철거하고자 한다. 여기까지는 신하들과 성종의 합의가 이뤄진 상태였다. 그런데 갑자기 집을 철거하면 백성들의 원망이 커질 터다. 성종은 고위 공직자의 집부터 철거하도록 명한다. 여기서부터 두 세력의 갈등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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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 문제는 조선시대부터 있었다.

약 100년간 조선시대 집값이 16배 증가한 때도 있었다

출처-<역사스페셜>

 

신하들은

 

"풍수설은 근거가 없고, 게다가 훗날 폭군이 악용할 여지가 있음!"

 

이라고 주장했다(훗날 연산군은 자신만을 위한 유흥업소를 짓는다고 민가를 마구잡이로 해체했다. 나름 선견지명이랄까...?). 

 

성종은

 

"언제는 풍수설 같은 거 믿자면서 왜 앞뒤가 다름? 그리고 당연히 관료가 먼저 희생해야지 ㅇㅇ"

 

라고 주장했다. 양자의 주장은 각기 타당성을 가졌지만, 성종의 '말이 앞뒤가 다르다'라는 공박은 치명적이다. 결과적으로 타협을 거쳐서 성종의 주장이 받아들여졌다.

 

연산군 대에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 성종이 승하하고 갓 즉위에 오른 뉴비왕 연산군은 성종의 수륙재(水陸齋, 물과 육지를 헤매는 영혼과 아귀를 달래는 의례. 이걸 시주한 사람은 극락왕생한다고 믿었다)를 지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삼사는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결사반대를 외친다.

 

1494년 12월 26일, 28일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삼사 : "성종 대왕께서 불교를 좋아하시지 않으셨는데 수륙재가 웬 말입니까. 전하께서는 삿된 길을 버리시옵소서."

 

연산군 : "그건 나도 알지만, 수륙재는 성종 대왕 이전부터 있었던 일이다."

 

삼사 : "성종 대왕께서는 불교를 싫어하셔서 이전의 전례를 많이 폐지하셨습니다. 『논어(論語)』에서 '삼 년 동안 아버지가 정한 것들을 고치지 않아야 효도라 할 수 있다.'라고 하셨는데, 전하께서는 수륙재를 지내시면서 효도라고 하십니까?"

 

연산군 : "성종 대왕께서는 예종 대왕을 위해서 하지 않는 일이 없으셨다. 나 또한 그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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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륙재

출처-<불교신문>

 

성종의 주택 철거 사건과 연산군의 수륙재 사건은 비슷한 점이 많다.

 

① 왕의 권위와 직결된 문제였다

②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가 합리적인 설이 아니었다(풍수지리, 수륙재)

③ 신하들의 신념과 이익에 반했다

 

풍수지리나 수륙재가 합리적인 근거는 아니지만, 민가가 궁궐의 영역을 침범하는 문제나 수륙재를 통해 백성들에게 정권 교체를 선보이는 건 나름대로 타당한 아이디어였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는 유학자, 특히 당시 새롭게 세력을 형성해 가던 사림에게는 가만히 두고 볼 수 없는 문제였다. 즉, 통치 행위 기반이 되는 이데올로기 싸움이다. 성종은 토론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상대의 논리적 모순을 지적하며 타협안을 끌어냈지만, 연산군의 선택은 달랐다. 연산군은 반대하는 유생들을 감옥에 집어넣었다. 유생들을 석방하라는 주장이 제기되자 이렇게 말한다.

 

"고작 어제 가뒀는데 오늘 석방해버리면, 사람들이 나를 보고 기강이 없다고 하지 않겠냐?"

 

가오가 상해서 석방하지 못하겠다는 말이었다. 반불교적인 논리에 기반한 유생들의 주장은 나름의 타당성이 있었다. 연산군의 수륙재 시행 논리는 어떤가? 연산군의 말대로 수륙재는 태조 이성계 시대부터 내려오던 관습이었지만, 성종의 유지를 이은 왕이라면 굳이 해야 할 행위가 아니었다. 특히, 연산군은 누가 뭐래도 성군이었던 성왕의 적장자였다. 그 어떤 정통성 리스크도 갖고 있지 않았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일'을 자신의 가오를 위해 밀어붙이면서, 즉위 초부터 신료들과 각을 세웠던 셈이다.

 

사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가오가 상해서 못 풀어 주겠다."라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을 대간들이 아니었다. 대간들은

 

"유생을 가둔 일 자체가 정당하지 않은데, 유생들을 풀어주면 기강이 없다고 하신 말씀은 대체 무슨 뜻입니까?"

 

라고 비판한다. 이에 연산군이 폭발한다.

 

"내가 바른말을 듣기 싫어해서가 아니라, 감히 윗사람을 능멸하는 못된 풍습을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수륙재를 하냐 안 하냐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연산군은 즉위 첫해, 수륙재를 가지고 오지게 기 싸움을 하면서 보낸다. 이 과정에서 본인도

 

"생각해봤는데 수륙재 별로 쓸모없는 거 같아. 안 할게."

 

했다가, 그날 바로

 

"다시 생각해봤는데, 아무래도 선배 왕들이 다 했는데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하자."

 

라고 말을 바꾼다. 그야말로 가오가 오지게 상하는 일을 벌인다. 그해 12월이나 돼서야 수륙재는 하지 않는 쪽으로 가닥을 잡는다. 그 사유도

 

"내가 맨날 신하들하고 싸워대니 백성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어. 가오가 안 선다 이 말이야."

 

였다. 그렇게, 연산군은 '가오가 뇌를 지배하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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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오가 뇌를 지배하는 예 

 

3. 술자리, 가오가이거에게 그 어떤 곳보다 중요한 정치 공간

 

연산군이 삔또가 상하는 장면은 이때나 훗날에나 비슷하다. 수륙재가 아버지에 대한 효심에서 비롯된 폭주였다면, 갑자사화는 어머니에 대한 비통함에서 비롯된 폭주였다. 그런데 여기서도 '나의 가오'를 살려주는 사람만 제대로 된 신하라는 발언이 나온다.

 

"(폐비 윤씨의 무덤이 엉망이라는 소식을 듣고) 왕 어머니의 무덤이 이럴 수가 있는가? 자식으로써 용납할 수 없다. 좋은 날짜를 기려서 좋은 곳에 모셔야 하며, 제사도 자주 지내야 한다. 안 된다고 하는 자는 나의 신하가 아니다." (연산군 2년 윤 3월 13일)

 

모든 정치는 말에서 시작된다. 모든 사대부는 왕의 쓰임을 기다린다. 왕으로부터 쓰임을 받지 못하고 왕과 대화도 하지 못하는 관료는 그 존재 가치를 잃는다. 그러니까, 연산군은 "나의 가오를 살려주는 신하들하고만 정치하겠음"이라는 선언을 해버린 셈이다. 이게 연산군 재위 2년 차의 발언이었다. 재위 6년 차에는, "다른 개가 어미를 물자 강아지가 그 개에게 덤벼들었는데, 그냥 덤벼든 것인지, 아니면 강아지에게도 어머니를 생각하는 정이 있어서 그런 것인지 모르겠다." (연산군 6년 11월 5일)란 말을 한 적이 있다. 어머니에 대한 슬픔과 분노는 서서히 깊어만 갔다. 자기편이 되어줄 사람들에 대한 테스트도 간간이 행해졌다.

 

그런데 갑자사화 때의 정치적 환경은 즉위 초기와는 다소 달랐다. 수륙재라는 명분으로 삼사와 지지고 볶았던 즉위 초기에는 그래도 고위 관료인 대신이라는 다른 세력이 있었다. 이들은 연산군의 기를 살려주는 쪽으로 부둥부둥 해 줬다. 삼사와 왕이 허구한 날 말싸움을 하는 와중에도 양측에 적당히 브레이크를 걸었다(소위 '훈구파'니 '사림파'니 하는 구분은 기득권을 둘러싼 이분법적 구도는 사실 당대의 정치환경을 적확하게 담아내지 못한다. 성리학이라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관한 차이, 즉 노선의 차이라고 봐야 조금 더 정확할 것이다). 그런데 이 두 세력은 무오사화로 사람들이 죽어 나가고 연산군의 술 잔치도 늘어나자, 이러한 공감대를 형성한다.

 

"연산군 슬슬 선 넘네?"

 

본인 가오를 살려줄 자기편을 만들려고 했던 연산군의 시도가 무색하게, 정신이 조금이라도 제대로 박힌 신하들은 점점 연산군과 거리를 두려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 연산군이 트리거를 당기게 한 사건이 발생한다. 이른바, 술잔 파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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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3년 9월 11일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왕이 노인들을 위해 양로연(養老宴)을 베푼 후 말했다.

 

연산군 : "오늘 내가 술잔을 내렸는데, 반 이상을 엎지른 자가 있었다. 이 일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겠는가?"

 

승정원 : "정말로 엎질렀다면 매우 불경한 일입니다. 신하 된 자로서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연산군 : "그자는 예조판서 이세좌였다. 내가 준 술잔을 반 넘게 엎질러 감히 왕의 옷까지 적셨다. 심지어 그자는 의전을 담당하는 책임자인데, 벌을 주지 않을 수가 없다."

 

이 죄로 이세좌는 유배되었다가, 다음 해 갑자사화가 벌어지자 결국 명령받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세좌에게는 너무나 억울한 것이, 사실 그는 술을 잘 못 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사건이 있던 날, 다른 대신들에게 이렇게 자랑했다.

 

"내가 원래 술을 한 잔도 못 하는데, 오늘은 임금님이 주신 술을 다 마셨습니다."

 

이 말을 듣고 다른 대신들도 웃었다고 하니, 이세좌는 술을 너무나 못하는 사람이라서 자신이 술잔을 쏟았는지도 모를 정도로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세상에 술잔 좀 엎었다고 죽는 사람이 어딨겠냐만, 그에게 죄가 있다면 폐비 윤씨에게 직접 사약을 갖다준 죄였다. 하나에 꽂히면 박사급 덕후가 되는 연산군이었다. 어머니의 비극과 관련된 타임라인을 샅샅이 알아내 버렸고, '그 사건'의 관계자들 또한 몽땅 알게 된 터에 일으킨 일이다.

 

아무리 원한이 있다 하더라도 술잔 엎은 걸 명분으로 삼을 수 있냐는 반문이 떠오른다. 당연히 그때 사람들도 그렇게 말했다. 그에 대한 연산군의 대답은, 이렇다.

 

"늙은 대신으로서 임금이 어리다고 하여 불경하게 대하니, 될 일이냐?"

 

연산군 부장님의 사고체계에서는 본인이 건넨 술잔을 엎은 건 대역무도한 죄나 다름없었다. 대신과 삼사가 똘똘 뭉쳐서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그 고립감과 확증편향, 그리고 가오에 지배당한 그의 뇌가 만들어낸 '술잔 대역죄'는 갑자사화의 포문을 여는 트리거가 되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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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연산군과 윤석열,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

 

연산군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는 삼사, 즉 언관들과의 갈등에서부터 시작한다. 사실 성종이 워낙 언관들을 우쭈쭈한 끝에 즉위한 터라 초기부터 연산군에 대한 언관들의 가스라이팅이 좀 심하긴 했다. 안타깝게도 연산군은 그러한 환경을 슬기롭게 풀어갈 재량이 되지 못했다.

 

그런데 이러한 정치적 환경은 태평성대를 이끌었던 성종의 유산이다. 윤석열도 비슷하다. 문재인 정부의 일관된 언론의 중립성을 보장하는 정책은 박근혜 정부 때의 풍토와 달라졌다. 그 결과, 청와대에서 간절히 '보도 자제'를 요청했음에도 대부분의 언론사에서 '휘바이든' 드립을 보도했다. 그 결과 나온 반응이, 잘 알듯이 이랬다.

 

"한미 동맹을 훼손하는 사실과 다른 보도, 진상 밝혀야"

 

윤석열과 연산군에게 가장 중요한 건, 자신의 행위로 인해 벌어진 정치적 결과가 아니다. 더 중요한 건 실수를 지적하거나 까발려서 본인의 가오를 상하게 하는 일이다. 그게 바로 국격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가오가이거'에게 논리적 정당성이나 정합성이 중요한가? 아니다.

 

물론, 세상에 가오가이거는 한둘이 아니다. 정치인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런데 윤석열은, 연산군이 그랬듯 '윗선이 있을 때는' 적절히 자신의 가오를 관리하려고 노력했다. 대선 전, 이준석과 윤석열의 갈등이 절정일 때를 복기해보자. 지지율이 나락으로 가는 걸 보고 윤석열은 이준석을 다시 찾는다. 이준석은 '꾀주머니' 드립을 치면서 윤석열에게 아침 인사를 하게 했다. 그때 윤석열의 표정은 가랑이 사이를 지나가는 한신의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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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면이,

 

"내부 총질이나 하던 당대표가 바뀌니 달라졌습니다."

 

라는 사건을 터지게 만든 한 컷이다. 엘리트에게 아침 인사라는, 흔한 정치인이나 할 법한 요식 행위를 하게 하여 전 국민 앞에서 가오를 상하게 만든 이준석을, 윤석열은 좌시할 수 없었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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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경향신문>

 

지금의 윤석열은 연산군의 집권 초기와 유사하다고 본다. 온갖 세력과 갈등을 일으키면서 내 편이 될 사람을 만들고 있다. 어중이떠중이들이 다 모인 대선 캠프를 만든 것도, 지금 김문수나 나경원을 중책에 임명하는 것도, 극우 유튜버와 친구 아들을 청와대에 때려 넣은 것도 본인의 가오가 곧 국격이라는 범상치 않은 국격관에서 비롯된 '데덴찌'랄까.

 

그가 고심해서 임명한 장관은 본인이 잘 알고 재밌어하는 법무 분야의 한동훈밖에 없다. 나머지는 관심도 없다. 충성충성^^7을 외치며 본인의 가오를 살려 줄 내 편만을 꼬집어 만드는 과정 중이다(지금처럼 심각한 시국에 아직도 이러고 있다는 게 희극이자 비극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연산군처럼 그도 고립될 때가 올 터이다. 그때 나경원·장제원·김문수·김한길을 믿느니 토리를 믿겠다. 

 

한 가지 위안이 있다면 그에게는 연산군 내면에 짙게 깔린 슬픔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분노는 사라지기 마련이지만, 슬픔은 끝이 없는 법이다. 이 금쪽이를 케어하는 청와대의 많은 오은영들에게 심심한 위로를 보낸다.

 

 

뱀발. 나는 그에게서 '족보도 없는 나라'와 같은 워딩이 튀어나온 까닭이 그가 '90년대 제사상 상차림 같은 인간'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에 대해선 나중에 말할 기회가 있을 것 같다.

 


 

참고문헌

김창규, 「연산군의 슬픔과 분노」, 『한국인물사연구』 제19호, 2013, pp. 111-143.

윤대식, 「연산군, 권력과 폭력 간 불안한 경계 짓기의 실패자?」, 『한국동양정치사상연구』 제16호, 2017, pp. 57-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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