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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도요새에 관한 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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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문학과지성사>

 

 

가이아 ‘지구’의 암세포

 

모든 생명체는 세포들로 이루어져 있다. 생명체 속 세포들은 유기적 관계 속에서 협력하며, 그 결과로 자신들을 품고 있는 생명체의 생명 활동을 유지시킨다. 그래서 생명체와 그 구성요소인 세포들은 상호 의존적이다.

 

인류를 포함한 만물과 지구의 관계도 그렇다. 지구는 자신의 품속에서 살아가는 생명체들에게 각각의 역할을 부여했다. 누군가는 신선한 산소를 생성하고 누군가는 백혈구처럼 자기를 희생하여 다른 세포들의 생존을 돕는다. 지구는 이 세포들의 활동을 조절하고 통제하며 변수를 최소화하여 품속의 모든 생명체들이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한다. 이것이 ‘항상성’이며 항상성은 생명체의 가장 기본적인 성질이다. 그래서 지구는 하나의 거대한 ‘생명의 나무’다. 우리는 이 거대한 생명의 나무를 ‘가이아’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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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생명의 어머니 가이아가 신음하고 있다. 품속의 세포 중 하나가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이 반란자는 스스로에게 ‘만물의 영장’이라는 자격을 부여하고는 무한 증식을 하고 있다. 어머니의 심장에 빨대를 꽂고 잔인한 흡혈 행위를 하고 있으며, 다른 모든 가이아의 세포들을 멋대로 죽이고 있다. 이들이 뿜어내는 어마어마한 양의 이산화탄소는 체온 조절이라는 가이아의 가장 중요한 항상성마저 위협하고 있다. 이 모든 행위를 생존이 아닌 탐욕 때문에 저지르고 있다. 

 

우리는 반란을 일으켜 생명 모체의 통제를 벗어난 이 세포를 암세포라고 부른다. 가이아를 신음하게 하는 이 암세포의 다른 이름은 바로 ‘인류’다.

 

“내가 그간 여기서 지내면서 깨달은 걸 말해주지. 너희 종족을 분류하려다가 떠오른 건데, 너희는 사실 포유류가 아니다. 지구상의 모든 포유류는 본능적으로 자연환경과 공존하게 되어 있는데, 너희 인간은 그렇지 않거든. 인간은 번식하며 자원을 소비하고, 거주지를 옮기면 또 그곳의 자원이 바닥날 때까지 번식을 계속하지. 곧 너희가 생존하는 단 하나의 방법이란 또 다른 장소로 거듭 퍼져나가는 거다. 지구상에 인간과 비슷한 생명체가 있지. 그게 뭔지 아나? 바이러스야. 인간은 질병 그 자체다. 지구의 암 덩어리지. 너희는 병원체고, 우리가 그걸 치료하는 거지.”   

              

-영화 ‘매트릭스’ 中 ‘스미스 요원’의 대사-

 

 

아름다운 생태계가 넘쳐나는 동진강

 

모든 강은 바다로 이어졌다.

 

연장 54킬로미터의 동진강은 아름답고 맑은 강이다. 다른 강들처럼 산에서 시작해 평야를 거쳐 바다로 흘러든다. 동진강의 종착역은 동해 남단 바다다. 바다로 들어가기 직전 강의 하구에는 흙과 모래가 쌓인 풍요로운 삼각주가 있었다. 

 

민물과 짠물이 맞닿은 이곳에는 수심 얕은 수초들이 자라고 있었고, 그곳은 물고기들에게 최고의 산란장소였다. 물고기뿐 아니었다. 새우들, 조개들, 민등뼈동물들도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맑은 물과 풍부한 먹이가 있는 이곳은 철새와 나그네새들에게도 최고의 휴식처가 되었다. 

 

수백 킬로미터에서 수천 킬로미터를 여행하는 새들은 이 기름진 삼각주에 들러 주린 배를 채우고 휴식을 취하며 날개를 손질했다. 그리고 나서 다시 먼 여행길에 올랐다. 바다는 파도와 바람으로 새들의 여행을 응원했다.

 

동진강 하구에서 시작되는 삼각주 갈대밭과 다복솔 울창한 해안 구릉 사이로 보이는 바다는 철에 따라 색깔이 달랐다. 봄이면 녹청색을 띠다, 여름이면 짙푸른 파랑, 가을이면 감청색으로 어두워졌고, 겨울이면 짙은 남색으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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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실제 동진강이 존재하지만,

동진강 포함 소설 속 등장하는 모든 지명은 가상이다. 

 

 

불행한 집안의 희망, 병국

 

병국의 아버지는 실직자였다. 원래는 동진 시내 공립 중학교의 서무과장이었는데, 일수놀이를 하는 사채꾼이자 동네 계주였던 어머니의 공갈과 협박에 넘어가 공금에 손을 댔다. 다시 채워주겠다는 어머니의 약속은 공염불이었다. 가진 것이라고는 오직 ‘정직’이었고, 없는 것은 ‘주변머리’인 아버지는 교장에게 그 사실을 고백했고 실직했다. 실향민에 전쟁의 상처로 다리를 절며, 말까지 더듬는 아버지는 그대로 담배꽁초를 주워 피고 눈칫밥을 먹는 신세로 전락했다. 아버지는 시간이나 쪼아 먹는 한 마리 날개 꺾인 새가 되었다. 

 

원래도 그랬지만 아버지의 실직 이후, 집안의 경제권은 완벽하게 어머니 차지가 되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다르게 수완가였고 억척스러웠다. 아버지가 실직했어도 병국의 가족은 거리에 나앉지 않았다. 끼니를 거르지도 않았고, 병국과 병식 형제의 학업도 중단되지 않았다. 영악하지만 방탕한 동생, 병식의 재수생 생활까지 그대로 유지되었다.

 

수재 소리를 듣고 자란 병국은 이들 모두의 희망이었다. 그에 걸맞게 병국은 서울 명문 국립대에 진학했다. 동진을 떠나 서울로 향하는 병국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에는 암행어사가 되어 귀향하는 아들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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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이 되고 군대까지 다녀온 병국은 철없이 불장난에 가담했다. 그는 가족 모두의 희망과 기대를 배신했다. 박정희의 ‘긴급조치’를 위반한 것이었다. 군대를 사적으로 동원해 4.19를 짓밟고 대통령이 된 그는 영구집권을 꿈꿨다. 유신헌법을 제정했고, 이를 통해 ‘헌법상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잠정적으로 정지’할 ‘긴급조치’라는 권한을 가졌다. 독재자의 권력 앞에서 헌법은 힘없이 정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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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김성진 당시 문화공보부 장관이

‘긴급조치 1호’를 발표하는 장면

출처-<한겨레>

 

병국이 자신의 하숙방에서 등사기를 돌려 반정부 유인물을 제작했을 때, 그의 청춘과 그의 꿈은 산산조각나 허공에 흩어졌다. 그는 구속됐고 학교 게시판에는 그의 제적 사실을 알리는 공지가 붙었다. 

 

광야에서 초인을 기다리던 설렘과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를 그리던 내 열정이 노래로 남고, 삶의 열정조차 덧없는 한때로 받아들일 때, 나는 내 낙향을 젊음의 끝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었다.

 

 

집안의 배신자로 전락하다

 

구치소를 나온 병국은 밤 고속버스 차창에 비친 파리하게 시든 병약한 자신의 모습을 보며 고향으로 돌아왔다. 돌아온 병국을 맞이한 것은 동생 병식의 비웃음과 돌변한 어머니의 태도였다. 

 

병국의 지위는 희망에서 배신자로 바뀌어 있었다. 정확히 기대감에 반비례하는 배신감이었다. 어머니의 사랑은 증오로 바뀌었고, 충격에 빠져 중얼대던 넋두리는 욕설이 되었다. 어머니는 자결하라는 말까지 서슴없이 해댔고, 병국의 책들과 학창 시절 받았던 상장들을 불태우기까지 했다. 동진시 공업단지의 총괄 책임자 정도는 되리라던 아들이 전과자가 된 것에 대한 분노였다.

 

그때 나는 엄마가 내게 걸었던 기대가 모성보다는 자식에게 기댄 허영심임을 알았다.

 

낙향한 병국은 인생의 본질이 비극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병국은 식사량을 줄였다. 병국의 얼굴은 노래졌으며 꺼진 눈자위 주위는 검츠레하게 변해갔다. 그의 머릿속 텔레파시에는 오직 ‘절망’이라는 단어만이 흐르고 있었다. 그나마 새벽의 발기만이 그가 살아 있다는, 그가 아직 젊다는 유일한 증거였다. 

 

병국은 자살을 생각했으나 그것을 실행하지는 못했다. 그러기에는 그의 심성이 너무 나약했다. 병국은 죽지 못한다면 살아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할 일이, 희망이 있어야 했다. 생존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며 살아야 할 이유를 생각했다.

 

다만 우리 나이가 중년에 이르렀을 때쯤, 이 시대가 당도할 좌절이나 희망만은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병국의 동생 ‘병식’이 유흥비를 버는 법

 

생명을 가진 모든 것, 사람이든 짐승이든 그것들의 시체는 추하다. 그러나 병식과 친구 ‘족제비’가 잡아 온 ‘꼬마물떼새’는 그렇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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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물떼새

출처-<국립생물자원관>

 

죽어 있어도 작고 안쓰럽고 귀여웠다. 박제사 ‘이 씨’는 꼬마물떼새의 시체를 집어 도마에 놓았다. 칼자국 흠마다 피가 밴 두꺼운 도마였다. 이 씨는 메스를 들었다.

 

떨어져 나간 새의 목과 몸통에서 피가 흘러 도마 바닥에 응고되었다. 이 씨가 다리와 날개에 이어 꽁지를 자르자 새는 몸통만 남았다.

 

이 씨는 메스를 놓고 탁구공만 한 꼬마물떼새의 대가리를 쥐었다. 잘라낸 목에서 기관과 식도의 심줄을 빼내고, 거기에다가 핀셋을 쑤셔서 뇌를 뽑아냈다. 뇌는 붉은 실핏줄로 싸발린 둥근 핏덩이였다.

 

학관비와 도서관비를 삥땅 쳐도 병식의 유흥비는 늘 부족했다. 어머니는 언제나 병식이 요구한 돈을 다 주지 않고 감해서 줬다. 그때 족제비의 제안은 솔깃한 것이었다. 동진강 삼각주의 새를 잡아다 주면 박제사 이 씨가 돈을 준다는 것이었다. 박제가 된 새들은 부잣집 거실의 장식품이 되었다. 천연기념물과 같은 귀한 새일수록 더 많은 돈을 준다고 했다.

 

족제비와 함께 이 씨가 꼬마물떼새를 박제로 만드는 과정을 지켜보던 병식은 낯을 찡그리며 침을 뱉었다. 

 

“죄책감이 드니?”

 

“죄책감? 웃기고 자빠졌네.”

 

“인간은 무엇이든 죽일 수 있어. 인간은 파괴자야.”

 

“제법인데?”

 

“인간은 자연을 정복했어. 정복이란 살인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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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부리도요

출처-<국립생물자원관>

 

‘중부리도요’를 잡으면 큰돈이 될 수 있었다. 희귀한 만큼 부자들이 원했기 때문이었다. 병식은 족제비와 함께 중부리도요를 잡기로 했다. 둘은 동진강으로 갔다. 물에 불린 콩을 갈대숲에 뿌렸다. 콩에는 독극물이 발라져 있었다. 많은 새들이 죽을 것이고, 그중 값나가는 새들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중 한 마리는 중부리도요일 수도 있었다. 병식에게 이 일은 소나 닭을 죽이는 것과 아무 차이가 없었다.

 

우리 세대의 타락은 그들로부터 배웠다. 그들이 새로운 타락 방법을 만들어내면 우리는 그 방법을 재빨리 답습했다.

 

 

병국이 찾은 살아야 할 이유

 

그날도 병국은 술만 죽여내고 있었다. 모든 것이 깜깜했다. 그 어떤 빛도 보이지 않을 때였다. 어디선가 나그네새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병국의 의식이 살아났다. 그가 어렸을 때, 그가 서울로 떠나기 전, 늘 그가 바라보던 동진강 하구의 새 떼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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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문화마케팅연구소>

 

특히 빛났던 도요새가 떠올랐다. 귀하디귀한 새였지만 동진강은 도요새까지 품고 있었다. 도요새 중에서도 더욱 귀한 ‘중부리도요’까지도 기름진 동진강 삼각주에는 있었다. 

 

내 사고의 닫힌 문을 도요새가 날카로운 부리로 쪼며 밀려들어, 떠남의 자유와 고통에 대해 여러 말을 재잘거렸다.

 

병국은 비상하는 새 떼를 보고 싶었다. 보아야만 했다. 그러나 새 떼는 없었다. 가을이었지만 새 떼는 없었다. 중부리도요는 말할 것도 없었고, 그 흔히 보던 청둥오리, 왜가리, 고니, 기러기들도 볼 수 없었다. 자신의 발걸음 소리에 쫓겨 날아오르는 수백 마리 새 떼의 아우성은 그의 상상 속에만 있었다. 새벽노을을 배경으로 점점히 뿌려져 나부끼는 새 떼의 힘찬 비상은 이제 그의 추억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되었다.

 

독재 권력의 공업화가 이룬 성장의 열매는 누군가의 주머니 속으로 형체도 없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들이 분배한 것은 오직 공해와 저임금이었다. 동진강 하구의 동진만은 중화학 공업단지가 되었고 동진읍은 동진시가 되었다. 동진강에는 폐유가 흘러들었고 기름진 개펄은 수은과 크롬산으로 오염되었다. 동진강 일대는 농사조차 지을 수 없는 죽은 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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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시사저널>

 

병국은 도요새를 찾아야 했다. 병국은 미친 듯이 도요새를 찾아 개펄을 헤맸으나, 도요새는 자취를 감췄다. 병국은 살아야 할 이유를 찾았다. 도요새를 찾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깨어진 청춘의 꿈 조각을 맞추는 것이라 생각했다. 병국은 낡은 텐트와 그보다 더 낡은 침낭을 들고 동진강 삼각주 개펄에서 야영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가 발견한 것이라고는 갈대 사이에 죽어 널브러진 새들의 시체뿐이었다.

 

놀빛이 사그라져 바다가 암청색을 띠는 저녁이었다. 그날도 병국은 바닷가를 헤매고 있었다. 그때, 동생 병식과 그의 친구인 ‘족제비’를 마주쳤다. 재수하는 녀석이 공부는 하지 않고 싸돌아다니냐는 충고는 병국의 역할이 아니었다. 병국은 그럴 자격이 없었다. 바다를 향하는 병국의 등 뒤로 “형 곧장 걸어가면 바닷속으로 들어가”라고 병식이 외쳤다. 병국은 걸음을 멈추고 병식과 그의 친구를 보았다.

 

“난 새가 될 텐데 왜 바다로 들어가? 비상을 하지.” 내가 말했다.

 

“형, 새가 되더라도 개펄에 떨어진 콩은 주워 먹지 마슈.” 병식이 친구가 외쳤다.

 

 

병국이 낸 진정서에 대한 보답

 

도요새를 찾고자 하는, 도요새가 다시 동진강으로 돌아오게 하고자 하는 병국의 모든 노력은 허사였다. 아니, 허사 정도가 아니라 거센 탄압을 자초한 행동이었다. 독재자의 말 한마디가 헌법보다 위에 있는 시대였다. 법은 활자로만 존재했고 권력과 결탁한 기업의 이윤추구는 법 위에 선 존엄한 것이었다.

 

병국은 동진강의 오염실태와 공해를 뿜어내는 공장과 기업들을 추적해 관계 기관에 진정서를 냈다. 그가 낸 진정서에 대한 대답은 해당 기업에 대한 ‘시정 조치’나 ‘처벌’이 아니라 병국의 집을 찾아오는 ‘노무과장’이란 자와 그를 호위하는 덩치들이었다. 경찰이란 존재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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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함부로 집에 들어왔고 욕을 퍼부으며 협박해 댔다. 그들은 병국이 ‘조국 근대화’를 방해하는 악질이라고 했다. 독재자의 슬로건은 그 무엇보다도 강력한 힘을 가진 것이었다. 이것이 법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깡패짓의 근거였고, 깡패짓이 법의 보호를 받는 이유였다. 그들은 거꾸로 ‘명예훼손’을 들먹이며 병국을 법으로 처벌하겠다고 협박했다.

 

“국민소득 1천 달러 달성에, 오늘날 조국 근대화가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는 선생도 잘 알지요?”

 

“더러 기계 고장으로 가스가 새는 수가 있긴 합니다. 그러나 이를 고의로 몰아붙이는 이런 진정에는 우리가 명예훼손으로 자제분을 고발할 수 있어요.”

 

덩치들의 주먹과 노무과장의 혓바닥에 빈집에 홀로 있던 병국의 아버지는 더 심하게 말을 더듬었다. 이것이 도요새를 돌아오게 하고자 한 병국의 노력에 대한 보답이었다.

 

 

기다리던 도요새의 등장, 그러나...

 

병국은 바닷가 개펄에 앉아 흐릿한 시야로 주변을 응시했다. 동생 병식에게 두들겨 맞다 안경알이 깨졌지만, 황혼 무렵에 바다로 향해 자맥질하는 새 떼가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새들의 죽음이 동생 병식의 짓이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병국은 분노했다. 자격 없는 형이었고 동생보다 약한 형이었지만, 병식의 턱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개떡 같은 이론은 집어치워. 지구상에는 30억 넘는 새가 살아. 그중 내가 몇 마리를 죽였다 치자, 형은 그게 그렇게 안타까워?”

 

마른 장작개비 같은 병국은 병식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병식은 형인 병국을 들어 바닥에 내동댕이치고는 의자를 치켜들었다. 그 의자로 병국의 면상을 찍으려 했으나, 그것만은 하지 않고 술집을 나갔다. 새를 팔아 주머니가 두둑한 병국이 마련한 형과의 술자리는 난장판으로 끝났다.

 

모래톱에 주저앉은 병국의 얼굴을 시원한 바닷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바다는 서편으로 기운 햇살을 받아 은빛을 띠고 있었다. 바다는 점점 은빛에서 주황색으로, 붉은색으로 변했다. 병국은 바다가 붉은빛에 반사되어 금빛 어룽으로 번질 때까지 멍하니 앉아 바다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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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오마이뉴스>

 

병국은 도요새가 돌아오는 것이 혹시 실향민인 아버지가 꿈꾸는 통일만큼이나 부질없는 짓은 아닐까 하는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바다와 하늘이 완전히 어둠에 묻혔다. 멀리서 등대 불빛만이 보였다. 

 

그때였다. 병국의 눈앞에 그토록 찾아 헤매던 도요새 한 마리가 홀연히 날아올랐다. 도요새는 상승기류를 타고 공중 높이 올랐다가 바람을 옆으로 받아 활공으로 미끄러져 내려왔다. 도요새의 자유롭고 아름다운 율동이 병국의 눈앞에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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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새야, 너는 동진강 하구를 떠나 어디에 새로운 도래지를 개척했어? 병국이 중얼거리며 도요새를 쫓아갔다. 그러자 도요새의 비행은 눈앞에서 곧 사라졌다.

 

 

다가올 인생에 대한 의무와 책임

 

오늘도 당신은 힘겹게 출근을 합니다. 부족한 잠과 누적된 피로로 몸뚱이는 돌처럼 무겁지만, 그것을 참고 출근을 합니다. 언제나 앉을 자리가 없는 전철까지 이겨내고 회사를 향해 걸어갑니다. 그때 구역질나는 냄새가 코를 찌릅니다. 당신의 앞에서 걷는 누군가가 소위 ‘길빵’을 하고 있습니다. 무개념도 저런 무개념이 없습니다. 민폐도 저런 민폐가 없지요. 피곤한 몸이 더욱 분노하게 합니다. 이때 당신은 흔히들 말하는 ‘살인 충동’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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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이런 민폐를 조심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누군가에게 피해되는 행동임을 알면서도 일부러 이런 행동을 하지 않죠. 그러나 건강한 시민의식을 장착한 개념 가득한 당신의 존재와 당신의 인생 자체는 사실 민폐입니다. 

 

당신은 의식 있는 시민으로서 환경도 생각하며 가급적 자가용은 주말에만 이용하고 평상시에는 대중교통을 이용합니다. 그러나 의식 있는 당신이라도 당신이 전기를 사용하거나 가스를 사용하는 것, 커피를 마시고 가끔 돼지고기에 소주 한 잔 하는 것, 즉 당신의 평범한 생활만으로도 1년에 2톤의 이산화탄소가 발생합니다. 당신이 75세까지 산다고 가정하면 당신은 평생 150톤의 이산화탄소를 발생시키는 것입니다(출처 링크). 그래서 당신의 인생 자체가 민폐인 것입니다.

 

요즘 가장 많은 관심을 끌고 있는 이산화탄소의 예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한 인간의 삶을 위해 배출되는 것이 이산화탄소만은 아닐 것입니다. 바다에 엄청난 규모의 쓰레기 섬이 있을 만큼 수많은 쓰레기 등도 배출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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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에 있는 우리나라 15배 면적의 쓰레기 섬

 

현재 전 세계 인구는 대략 80억 명이라고 합니다. 80억의 사람들이 살기 위해 필요한 자원의 양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할 것입니다. 80억 명의 삶을 위해 배출되는 오염 물질들과 이산화탄소 등의 양은 상상을 초월할 것입니다.

 

더군다나 인간은 생존에 필요한 만큼만 물질을 소모하지 않습니다. 작금의 인간이 원하는 건 생존이 아닌 ‘풍요’입니다. 80억 사람들이 원하는 물질적 풍요에 필요한 모든 것들의 원천은 오직 지구입니다. 앞으로는 어떨지 모르지만, 여태까지 어떤 것도 지구가 아닌 외계로부터 뚝 떨어지는 건 없었고, 기술이 발전하여 달 등 우주로부터 자원을 채취할 수 있다 하더라도 대부분 것은 지구에서 구해야 할 것입니다. 결국 인류가 자랑하는 현대 문명은 지구에 대한 착취를 바탕으로 건설한 것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오히려 인간은 환경에 적응한다는 핑계로 사악해지고, 음란하고, 권력욕에 차 있다. 자연의 환경을 파괴하고, 끝내 너희들을 파멸의 길로 이끌 물질 문명의 노예가 되지 않았는가......

 

그래서 80억이 살아가는 지구, 80억 명의 삶에 필요한 모든 에너지를 제공하는 지구, 80억 명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지구, 달리 말하면 80억의 이기적인 생명을 보듬고 있는 지구가 새삼스럽게 위대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동시에 의문점도 하나 듭니다.

 

“도대체 지구는 언제까지 우리를 품어줄 수 있을까?”

 

“모든 것이 바닥나는 끝은 언제쯤일까?”

 

어쩌면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이미 알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구가 버틸 수 있는 한계를 현재 목격하고 있는 중일 수도 있습니다. 이미 눈으로 보고 있는 것들은 더 이상 새롭지 않고 진부합니다. 앞으로 4년 남은 2026년까지 지구의 온도가 산업화 이전에 비해 1.5도 이상 높아질 것이라는 사실, 녹아떨어지는 북극의 빙하, 가여운 북극곰 사진 등이 더 이상 우리에게 충격적으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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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결책을 고민해보지만 딱히 떠오르는 것은 없습니다. 종말은 피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간은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소비해야만 하기 때문이고,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종말이 예견된 것이라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이자 유일하게 해야 할 일은 그것을 가급적 늦추는 것뿐입니다. 

 

“우리에게 남겨진 자원을 최대한 보전하고, 생성 과정을 지배하는 자연의 리듬을 최대한 존중하는 길은 우리보다 앞서간 생명과 우리 뒤에 올 모든 생명에 대해 무한한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다.”

 

- 제레미 리프킨 저, ‘엔트로피’ 中 -

 

현재 우리의 인생은 온전히 내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나간 인생으로부터 물려 받은 것이며, 다가올 인생에 물려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 의무와 책임감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우리는 떠나야 할 때를 안다. 여름 동안 자란 새끼도 날개를 손질하며 출발의 한때를 기다린다. 우리의 여행은 생존에 필요불가결한 자유를 찾기 위한 고통의 길고 긴 도정이다.

 

이 위대하고 아름다운 생명체를 죽일 권리가 인간에게 없다는 것, 인간의 탐욕을 위해 다른 생명 종들을 멸종시키도록 지구가 허락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우리는 만물의 영장이 아니라 지구라는 거대한 생명체의 한 구성요소일 뿐이라는 것. 이것을 자각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다음에 올 인생들을 위한 우리의 의무를 다하는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

 

푸른 바다 너머로 힘차게 먼 여행을 떠나는 도요새를 떠올려 봅니다. 그 도요새가 멸종의 위기를 이겨내기를 바라며, 미안한 마음과 응원의 마음을 함께 보내며, 22번째 인생탐구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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