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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비등하게 이민자를 보유한 나라?

 

통상적으로 이민자의 나라를 꼽으라 하면 미국을 떠올린다. 국가의 기틀이 마련되기 시작한 때의 배경을 보면 알 수 있듯, 유럽 각지에서 모인 이들이 원주민들 몰아내고 땅따먹기하며 형성된 국가이니, 사실상 본국을 떠나 새로운 땅에서의 삶을 선택한 이민자들이 형성한 국가는 미국이다. 때문에 ‘이민 국가’하면 ‘미국’이 먼저 생각나는 건 어쩔 수 없는 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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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출발 때문이었을까. 현재까지도 다양한 민족들이 서로 모여 살고 있다는 것은 통계로도 쉽게 알 수 있다. 미국의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19년 이민자의 수가 4천 4백만 명을 넘어섰다. 우리나라 인구와 근소한 차이 정도의 수가 이민자 신분으로 미국에 거주하는 셈. 이러한 이민자의 수가 미국 전체 인구의 약 1/6가량인 것을 감안하면, 굉장히 높은 수치다. 비율적으로 비교해볼 때, 우리의 경우 서울 인구의 80% 정도가 이민자라고 생각해 보면 체감이 쉽다. 

 

게다가 해당 숫자는 미국이라는 국가가 형성될 때 모인 이주민들의 국적 혹은 출신에 대한 정보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결국, 온전한 이민자에 대한 계수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뜻인데, 이렇듯 ‘이민자의 나라’라는 수식어와 가장 어울리는 나라는 아마도, 미국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이와 비등한 수준의 이민자를 보유하고 있는 국가가 있다. 

 

‘영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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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연합뉴스>

 

영국문화원(링크)의 조사에 따르면, 영국 내에는 300개 이상의 언어가 사용되고 있다. American Community Survey(링크)에 따르면, 2018년 미국에 약 350개의 언어가 혼용되어 사용되고 있다고 하니 거의 비슷한 수준인 셈이다(미국에서 70% 이상이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지만, 350가지의 언어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대단한 수치다. 엄청나게 다양한 인종들이 모여 살고 있는 것이니까). 

 

물론 이민자들이 살고 있는 국토의 면적이나 절대 인구수를 감안할 때, 이민과 관련하여 미국과 영국이 비등하다고 평가하기엔 무리가 있다. 미국은 영국의 50배에 달하는 영토에 이민자들이 골고루 살고 있고, 전체 인구수는 4배가량 차이가 난다. 또한 미국이 애초에 이주민에 의해 형성된 국가라는 것과 달리, 영국은 켈트/앵글로-색슨의 브리튼 정착 역사가 1,000년이 넘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영국이 민족국가 치고 이민을 좀 받아들이는 정도가 아니라 애초에 이민 국가로 형성된 국가와 이런저런 자료를 비교해볼 수 있을 정도로 이민을 많이 받아들이고 있단 점이다. 

 

 

이민이 중요할 수 있는 이유 

 

그래서 이민이 뭐 어쨌다고, 그게 중요해? 라고 물을 수 있겠다. 

 

세계화(Globalisation)를 통해 전 세계가 하나의 긴밀한 끈으로 연결된 지금(다시 분리되는 조짐도 보이긴 하지만), 인적자원의 교류만큼 중요한 가치는 없다는 평가가 많다. 물론 결과론적인 접근이기는 하나, 과거 지역 생산으로 생계 유지가 가능했던 1, 2차 산업 시대와 달리, 이제 3차를 넘어 4차 산업에 이르게 되었으니 물적/인적 자원의 교류 차원에서 이민은 분명히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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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급관리망(Supply Chain)만 보더라도 세계시장은 거미줄처럼 엮여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지역마다, 국가마다 환경과 기후 등 다양한 차이가 존재하는 만큼, 해당 지역에서 얻어질 수 있는 자원이나 물자에 한계가 있다. 이 한계를 넘어설 수 있도록 해 준 것이 바로 세계화이다. 남미나 호주, 지중해와 같이 기후가 상대적으로 따뜻한 곳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을 북유럽이나 러시아와 같은 북반구, 춥고 상대적으로 일조량이 적은 지역에서도 동일하게 공급받을 수 있는 이유. 반도체를 비롯하여 자동차와 같은 제조업도 마찬가지. 인건비가 저렴한 지역에서 대량으로 생산된 부품으로 공정을 할 수 있어 제품의 단가를 낮추는데 있어서도 세계화는 큰 공헌을 한 바 있다. 

 

수에즈 운하가 막혔을 때, 전 세계 경제가 엄청난 타격을 입었던 것을 기억해보면, 국가 간, 기업 간, 지역과 시간을 뛰어넘어 얼마나 많은 물자와 자원이 교류되는지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이처럼 세계화라는 단어 자체가 일상이 되어버린 지금, 물적자원을 넘어 인적자원의 이동은 인류에게도 큰 이익을 가져다주고 있다. 결국 현대사회에서 이민은 무역만큼이나 중요한 이슈가 되는 사안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영국은 오래전부터 이러한 시류의 원조 격이 되어 자리매김하고 있다. 

 

 

영국 이민 역사의 시작

 

영국이 현재의 이민 국가 면모를 갖추게 된 시작은 아름답지 못했다. 영국이 다인종, 다민족 국가를 형성하게 된 배경에는 자신들이 말하는 범세계적인 차원에서 지구촌의 번영과 세계화를 위한 것이 아닌, 철저하게 자국의 이득을 위해서 시작된 이민정책이 큰 역할을 했다. 영국의 과거 역사를 알고 있는 이들이라면, 영국이 내걸고 있는 캐치프레이즈, 다양성을 존중하고, 인권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표면적인 포장지가 불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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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대전 중 독일의 폭격으로 무너진 런던 시가지 건물들

출처-<New York Time>

 

영국이 본격적으로 이민을 장려하기 시작한 것은 1, 2차 세계 대전 이후이다. 군 복무를 해야 했던 10대 후반부터 20대 남성들의 수가 급감하여 전쟁 후 폐허가 된 본국 재건사업에 투입될 만한 인구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10-20대 남성들이 없다고 재건을 못 하는가? 라도 물을 수 있겠지만, 그 외 사람들과 그 시기 남성들의 물리적 효율성이 확연히 차이 나기도 하고, 당시만 하더라도 여성은 막 참정권을 얻어 겨우 투표에 참여할 수 있던 시기였고, 그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재산의 일부분으로 치부되어왔다. 적극적으로 여성들을 재건사업에 투입할 사회적 동의가 되어 있지 않았을 때다. 때문에 가장 활발하게 사회생활을 할 수 있는 혈기 왕성한 남성들이 필요했다. 

 

2차 대전이 끝난 후 집계된 자료에는 영국군(남자) 사망자 수가 40만 명에 달했는데, 1940-45년, 5년 동안 성별 관계없이 태어난 아기들의 총수가 총 25만 명 정도 되었던 것을 감안하면, 얼마나 많은 영국 남성들이 사라졌는지 알 수 있다. 

 

젊은 영국 남성이 너무 없어서 당시 영국에 주둔했던 7만 명의 미군들과 영국 여성들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가 전체 출생한 아이들의 40%를 차지했을 정도라고 한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영국은 국가 재건사업을 실시하기 위해 과거 영국의 식민지였던 국가들, 대표적으로 인도와 파키스탄 지역을 비롯해 아프리카의 나이지리아, 남아프리카 공화국 등의 국민들을 대상으로 이민을 장려하기 시작했다. 영국으로 와 재건사업에 참여하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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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영국으로 들어오는 이민자들

출처-<The Guardian>

 

1950년대 초반엔 이민자 수가 2천여 명에 불과했지만, 1955년부터 4만 명을, 그러니까 2-3년 만에 약 20배에 가까운 이민자가 유입되기 시작했고, 해마다 2-5만 명씩 꾸준히 이민자를 받아 1961년에는 13만 명까지 증가하였다. 매년 엄청난 숫자의 이민자를 받아들였다. 

 

급작스런 이민자 수 급증은 여러 가지 부작용을 가져오기도 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이민정책이 문제가 되고 있는데, 과거 영국의 1950-60년대에 혹독하게 겪었던 일이다. 

 

“이민자는 범죄율이 높아 치안을 악화시킨다, 국내에서 벌어들인 돈을 자국으로 보내기 때문에 '국부'를 유출시킨다, (당시만 하더라도 성공회를 국교로 엄정하게 지키고 있었지만) 힌두, 이슬람 문화권 사람들이 영국 고유의 정체성을 사라지게 할 것이다.” 

 

등의 이민자에 부정적인 목소리들이 쏟아져 나왔다.  

 

1958년 8월엔 이민 문제로 인한 갈등이 폭발한 사건이 있었다. 노스켄싱턴(North Kensington)과 노팅힐(Nottinghill) 지역에서 발생한 흑인 폭동이 일어났다. 백인과 흑인 간의 갈등으로 빗어진 이민 문제의 인종화(racialization) 현상의 대표적인 예다. 

 

당시 백인들은 이민자들이 영국 사회의 안정에 위협이 된다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이런 시류는 절대적으로 이민자를 필요로 하는 사회적 배경 속에서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이러한 목소리는 식민 지배를 받던 속국 출신들과는 식탁을 마주할 수 없다는 저렴한 가치관으로 인한 것이라 본다. 

 

이런 목소리가 계속 나오며 사회적 갈등을 일으키자 영국 정부와 의회가 행동에 나섰다. 사람의 생각을 바꾸고 의식을 전환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 중 하나가 법이고, 영국은 불문법의 나라이니만큼 즉각 관련 법을 개정했다. 

 

1962년에 처음 영연방이민법(Commonwealth Immigration Act)이 제정되었고, 1968년, 1971년, 1981년 총 세 차례에 걸쳐 개정되어 진화를 거듭했다(지금도 지속적으로 시행령 변경을 통해 법이 개정되고 있다). 이러한 법적 근거는 서서히 자리 잡아가며 지금 영국의 이민문화를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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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이민법 반대 시위

출처-<The Guardian>

 

 

70년의 이민 정책 그리고 현재의 영국

 

지난 70년간, 꾸준하게 실수와 실패를 경험하며 만들어진 영국의 이민정책은 실도 많았지만, 결과적으로는 영국에 큰 득이 되었다. 인문, 사회, 문화, 과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이들의 상당수가 해외에서 유입이 된 이들이다. 

 

이러한 시류는 과거 18-19세기에도 존재하긴 했다. 가령 타임(TIME)에서 선정한 20세기 최고의 사상가로 손꼽히는 마르크스의 경우, 독일인이지만 실상은 영국에서 연구를 실시했고, 그의 생가와 무덤 등도 영국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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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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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북부 하이게이트 공동묘지에 있는 마르크스 무덤

출처-<연합뉴스>

 

그렇게 조금씩 변화를 거듭해 온 영국은 세계화의 선두 주자로 발돋움했고, 경제, 금융, 문화, 교육 분야에 있어 성과를 계속 내고 있다. 실질적으로 영국은 교육부의 방침을 통해 다양성(Diversity), 공정성(Equity), 포용성(Inclusion)을 강조하며 초등학교를 비롯, 중/공등학교와 대학교에서 해당 아젠다를 주된 과제로 실천할 수 있도록 권고하고 있다. 

 

‘성장’을 해야만 유지가 되는 자본주의의 특성상 새로운 시장 개척은 필수적이었고, 과거 제국주의 때에서는 교역이라는 명목하에 강제적으로 실행시켜왔던 일을 이제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한 것 뿐이라는 비난의 목소리도 있다. 하지만 앞에서 잠깐 언급했듯, 여러 문제를 감수하면서도 끝까지 이민자 정책에 대한 법 개정을 바탕으로 새로운 인재 영입과 함께 인적자원의 흐름을 끊지 않았다. DFID(국제개발부/관련 기사 링크)를 통해 영연방 국가에 지원하는 것뿐 아니라 영연방 국가 사람들이 영국으로 쉽게 이민 올 수 있도록 이민정책을 수정했다. 

 

그 결과, 2011년 발표된 인구조사에 따르면, 지금 런던 인구의 70%가 원래 영국인이 아니었다고 한다. 영국을 대표하는 도시이자 수도 런던은 이민자들로 구성된 도시가 된 것이다. 서울 인구의 70%가 외국인 출신이라고 가정해보자. 상상이 어렵다. 영국이 영연방 국가들을 상대로 얼마나 개방적인 이민 정책을 펼쳤는지 짐작해볼 수 있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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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INSIDER>

 

그렇다고 영국 고유의 정체성이 사라졌느냐? 그렇지 않다. 

 

정체성이라는 건 변화하는 환경에 함께 맞춰가는, 공동체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변형되어 가며, 그 중심에서 변화하지 않는 정신을 갖는 것이다. 종교, 문화적으로 다름이나 생활 수칙이나 방식의 차이는 사실 정체성과는 거리가 있다. 기존 영국인들은 그들의 특징과 문화를 여전히 잘 유지하고 있고, 이민자들의 문화도 같이 즐기고 있다. 이민자들도 기존 영국인의 문화에 동화되어 세대가 거치며 기존 영국인들의 특징을 가지고 살기도 한다.

 

길게 말을 늘어놨지만, 결국 하고 싶은 얘기는 단순하다. 어쩔 수 없이 이민자 정책을 수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영연방 출신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등 지속적인 변화를 거듭한 끝에, 영국은 과거 씻을 수 없는 과오가 있고 영향력이 줄었음에도 과거 영연방에 속했던(지금도 속하는) 국가들과 여전히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관계는 지금까지도 영국이 영연방이라는 거대한 세계기구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다음 편에선 영국에 이민자가 많은 것이 왜 영연방 유지에 도움이 되는지, 더 구체적으로 디벼보겠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