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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힘든 시대다. 어딜 가나 불안한 마음을 달래주는 심리 상담 콘텐츠가 가득하다. '아프니까 청춘이고, 멈추면 비로소 보입니다', 요 정도 두루뭉술하게 해서는 요새 씨알도 안 먹힌다. 금쪽같은 내 새끼를 어떻게 키워야 우리 아이가 달라지며, 철없는 남편은 어떤 대화로 풀어야 정신을 차리게 될 거며, 가상으로 결혼했다가 이혼했다가 환승했다가 정도는 보여주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 앞에 전문가들의 '마음 처방전'이 나온다.

 

바야흐로 불안 마케팅의 시대. 그 서가에 책 하나가 나왔다.

 

책은 이렇게 시작한다.

 

혹시 '정신과 의사가 어떤 좋은 말을 해주나~' 하고 찾아오신 분이 있다면 잘못 오셨다. 이 책에서 여러분은 좋은 말이나 교훈을 얻기보다는 록커(우리)가 내민 과거와 현재를 그냥 물 흘러가듯 각자의 방식으로 느끼고 생각할 것이다.

 

서문을 읽고, 생각했다. 이건 페이크라고.

 

일단 저 록커라는 사람이 누군가. 홍대 인디 신의 단군 할배. '조선 펑크'의 화신. 폭도 맹진하는 바다사나이 노브레인의 이성우 아닌가. 그가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 상담을 한다? 이건 뭐 뻔한 거지.

 

개썅마이웨이 언터처블 롸큰롤 정신으로 젊음을 불사른 롹커가, 반대급부의 무언가가 결핍되어 축 처진 어깨와 지친 마음으로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는 스토리. 거기서 얻는 위안, 안심. '괜찮아 잘될 거야' '낙담마 네 잘못이 아니야'로 귀결되는, 선생님의 심금을 울리는 위로와 응원!

 

이럴 거면서. 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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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이 책 표지를 함 보시라. 소금 얻으러 온 오줌싸개 마냥 모서리에 엉거주춤 선, 삐죽한 머리의 홀로그램 사내. 이건 뭐 결정적인 증거 아닌가.

 

정신과 전문의의 레전드 롹커 내면 정밀 분석! 알고 보니 엉망진창!

 

이런 포인트로 불안 마케팅 대세 시장에서 한몫 단단히 챙겨 보려는 출판사의 야심 찬 기획..

 

결론부터 말하자면, 페이크가 아니었다. 한덕현 교수의 서문은 진심이었다. 진짜, 별말을 해주지 않는다. 아니... 마케팅이고 야심이고 간에, 인간적으로 누가 답답해서 찾아왔다는데, 의사로서 뭐라도 좀 우쭈쭈 해줄 법도 한 거 아닌가. 별말 안 해준다. 끝까지. 이상하다.

 

찾아간 록커는 더 웃기다. 애써 의사를 찾아갔으면, "쓰앵님. 이래서 힘들어요. 저래서 뒤질 거 같아요. 저 어떡해야 하죠?" 할 법도 한데, 뭘 딱히 묻질 않는다. 그냥 자기 하고 싶은 말만 줄창 한다. 진짜 이상하다.

 

록커가 어릴 때 먹던 짜장 국수, 처음 샀던 가죽 잠바, 케틀벨 중량 올린 이야기 등등 그냥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아무 말이나 하면, 의사는 이에 질세라 유학 시절 먹었던 도너츠의 맛과 공보의 때 잔디밭에서 짜장면을 먹고 누워 세던 별을 이야기한다. 뭐지 이거?

 

만나서 물어보기 했다.

 

아저씨들, 대체 지금 무슨 얘기들을 하고 있는 거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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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날 결심

 

근육병아리(이하 '근'): 롹커님은 어쩌다가 정신과 선생님을 만나 볼 생각을 한 건가?

 

이성우(이하 '이'): 언젠가는 한 번쯤 받아보고 싶다 생각했다. 마침 주변에 정신과 의사 친구가 있어서 속 이야기를 해보기도 하고 그랬는데, 깊은 이야기까진 안 나오더라. 왜냐면 친한 사이니까.

 

근: 가까운 사람에게는 내보이기 어려운 내면이 있었던 것일까?

 

이: 나한텐 그런 게 있다. 나의 슬픔과 고민이 남에게 전이될까 봐, 함부로 말하지 못하는 습성.

 

근: 롹커님 또한 그래서가 아닐까. 타인의 슬픔과 아픔에 쉽게 공감하는 사람이라서.

 

이: 그런 거 같다. 그렇게 그럭저럭 살다가, 어느 날 잠을 못 자겠는 거다. 다음 날 공연인데!! 리허설 시간이 다음 날 오후 1시~2시쯤이었는데 전날부터 잠이 안 들고 대여섯 시간을 계속 누워있자니 미치는 줄 알았다. 아침에 약국이 문을 열자마자 수면 유도제 사 먹고 조금이라도 자려고 했는데, 그것마저 실패했다.

 

근: 처음 있는 일이었나? 그 정도로 잠을 못 잔 게?

 

이: 그 정도까지는 처음이었지.

 

근: 위기감 같은 게 느껴진 건가?

 

이: "와~ 좆됐다 오늘 어떻게 해?"그 생각뿐이었다. 멤버들한테 미안해서 단톡방에 "야~ 미안해. 나 오늘 좆 된 것 같아."라고 메시지를 보냈는데, 나중에 보니 수면유도제 먹고 헤롱헤롱해서 맞춤법도 다 틀렸더라. 그때, 의사 선생님을 만나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황재균 선수랑 친한데, 도움을 많이 받고 있는 선생님이 있다는 말이 번뜩 떠올랐다.

 

근: kt wiz 황재균 선수?

 

이: 맞다. "야구 선수들도 이렇게 도움을 받는데, 나도 어떻게 보자면 노래 선수니까 이런 게 필요하지 않을까?"라는 생각했다. 번호를 받아 선생님께 연락을 했다. 그때 보낸 문자도 지금 보면 개판이다. 수면 유도제에 취해 있어가지고. 다행히 공연은 어떻게든 잘 넘기긴 했지만, 안심이 되지 않았다. 나에게 뭔가 큰 문제가 생긴 것 같다는 생각뿐이었다. 계속 놔두면 점점 나를 옭아 맬 거 같았다.

 

근: 본인이 판단하기에 일종의 응급 상황이었나 보다.

 

이: 그런 거 같다.

 

근: 전문의의 관점에서, 이런 자가 판단과 조치를 어떻게 보나? 빠른 편인가, 늦은 편인가?

 

한덕현(이하 '한'): 그냥 딱 평균이다.

 

근: 오? 이 정도면 제법 빠른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닌가 보다.

 

한: 불안 불면 우울같이 심리적인 문제가 있는 사람들은, 본인이 너무 힘들다. 니병, 얘병, 쟤병 중에 누구가 제일 힘드니? 그럼 항상 내 병이 제일 힘들다고 한다.

 

근: 그건 그렇다. 당연히. 내 거가 젤 아프지...

 

한: 특히나 못 자고, 막 불안하고, 막 걱정되고 이런 것들이 힘든 분은 자기가 제일 힘들다. 근데 조금 괜찮아질 것 같으면, 정신과의 문턱을 스스로 높이면서 찾아가는 거를 자꾸 뒤로 미루게 된다.

 

근: 맞다. 나에게 찾아오는 위기감들. 다른 사람이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고, 나조차도 그게 불안인지 우울인지도 모르겠는 것들. 이 세상에 없는 괴랄한 모양의 퍼즐을 나 혼자 쥐고 있는 느낌. 근데 이게 병원 갈 정도인가? 싶기도 하고.

 

한: 그래서 만약 독자들이 이 책을 읽고, 병원에 가면 대충 이런 거를 하는구나, 의사랑 이런 대화가 오가는구나 한번 가도 괜찮겠는데, 이런 느낌이 든다면 이번 책은 대성공이다. 병원 문턱을 낮추고 싶어 쓴 책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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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식의 몽타주 : 아버지의 얼굴, 말의 몸통, 사자의 다리

 

근: 책 속에 대화들이 실제 상담과 비슷한가?

 

한: 많이 다르다.

 

근: 역시 그런가?

 

한: 일단, 내가 말을 너무 많이 했다. 실제 치료에서는 이 책의 한 3분의 1로 내 분량이 줄어들어야 한다.

 

근: 내담자, 즉 이성우 씨의 말과 분량은 이 정도가 실제와 비슷한가?

 

한: 그렇다.

 

근: 두서없이 주고받은 말들을 정말 그대로 놔뒀더라. 편집자가 어떻게 참았지? 싶을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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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에 동석 중인 출판사 편집자가 먹던 도넛을 툭 떨어뜨리고 그렁그렁한 눈망울로 고개를 끄덕인다. 동업자 공감력이 통한 건가..

 

한: 두서없는 게 면담의 철칙이다. 상담받으러 오는 사람 중에 이런 사람이 있다. '내가 오늘 의사 선생님 만나가지고 무슨 얘기 해야지' 다 준비해서 줄거리를 짜고 와서 문 열고 딱 들어와 딱 앉아서 "선생님 제가 말이죠." 웅얼웅얼 딱 50분 동안 하고 이제 얘기 끝. "저 갑니다" 하고 나가는 사람들. 우리는 그걸 '저항'이라고 부른다.

 

근: 저항?

 

한: 레지스턴스. '당신은 치료받으러 온 게 아니라 치료자인 내 앞에서 좋은 환자 역할을 하고 가려고 작정하고 온 거다.' 딱 그렇게 해석한다. 내담자가 정말 자기에 있는 어떤 무의식이라든지 자기 마음 안에 있는 거를 내보내고 있다면, 전문의가 아닌 사람에게는 "뭐야?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거야?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거야?" 싶은 대화로 보인다. 하지만 치료에서 그 대화는 무의식에 있는 이야기들을 계속 끄집어내는 과정이다. 무의식이 왜 무섭냐면, 추상화 같은 거다. "내 무의식 속에 호랑이가 있어, 말이 있어, 아버지가 있어." 그런 게 아니다. "내 무의식 속에는 머리는 아버지, 몸은 말, 다리는 사자같은 게 있어." 이런 게 진짜 무의식이다. 그러니까 두서가 없을 수밖에. 그런 게 밖으로 표출돼서 나오면 옆에서 보고 있는 사람은 두서가 없이 보이지만 그 사람 안에 있는 무의식적인 어떤 갈등이라든지 감정이 이런 것들이 막 나오게 되는 거다.

 

이: 정말 그런 환자들도 있나? 쫙 대본을 딱 쭉 읽는 것처럼.

 

한: 있다. 상담은 받아야 한다는 강박 증상이 있는데, 가서 나의 안에 있는 걸 내보내기 싫은 거다. 나 면담을 하러 왔어. 내 얘기는 해. 그러다 혹시 내가 무의식중에 뭔가 약한 면을 보여줄까 봐 요건 하지 말고, 요건 하고, 요렇게 요렇게 이야기를 하면 의사가 되게 재밌게 듣겠지? 그럼 한 쫙 쫙 쫙 그냥 13시간 딱 준비해 놓고 자~ 저 여태 상담받았으니까 이제 안 와도 될 거 같습니다. 저 좋아졌습니다. 이러고 가는 사람도 있다.

 

이: 그럼 거의 이거는 연기네. 연기?

 

한: 그렇게도 볼 수 있다. 자기가 대본을 쓰고 연기를 한 거니...

 

죽은 논겜블러의 사회

 

근: 무의식에 대해서 말해보자면, 나에겐 반복되는 꿈이 있다. 뭐냐면, 고등학교 대학교로 돌아가서 중간고사, 기말고사를 보고 있는 거다. 근데 그게 준비가 안 돼 있다. 당장 시험인데. 공간과 상황만 바뀌고 비슷한 게 자주 반복된다. 정신적으로 좀 지쳐있을 때 꾸는 거 같기도 하고...

 

이: 나도 비슷한 꿈을 꿀 때가 있다. 무대 위에 올라가는데 모르는 노래를 연주해야 되는 거.

 

근: 맞다. 그런 거.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 처한 그 느낌. 스무 살 이후부터 자주 꾼다.

 

한: 겜블링 좋아하나?

 

근: 내기 걸고 노는 건 좋아하긴 하는데, 쎄게 하는 건 피하는 거 같다. 그러니까 이게 즐기는 수준을 벗어나면 재미를 못 느끼는?

 

한: 친구들이랑 포커를 치면 어떤 스타일인가? 몰빵하는 스타일? 아니면 뒤에 가서 한끝이라도 안 붙어 있으면 죽어버리는 스타일?

 

근: 그때그때 다른데. 5천 원을 잃었다 치면, 일단 5천 원을 다시 확보하고 그 다음부터 지르는 스타일인 거 같다.

 

한: 그건 진정한 겜블러가 아니다.

 

근: 그런 거 같다. 후달리는 기분을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한: 그럼 겜블을 못 한다. 그건 겜블러 스타일이 아니다. 내가 청소년 환자들을 많이 보는데, 여기서 한국 교육의 아쉬운 면 중에 하나를 본다. 학생들이 하나의 트랙 위에서 괴로워하는 것. 아이들한테 기회를 줄 때는 투 트랙이 있어야 한다. 그니까 겜블러 스타일인 애들이 성공하는 트랙 하나, 겜블러가 아닌 아이들이 성공하는 트랙 하나. 두 개가 필요한 거다. 그래서 어떤 트랙을 타든 간에 파이널에 자기 노력한 거에 대해 비슷한 결과를 얻을 수 있어야 한다. 많이 보정되긴 했지만 우리나라 교육 시스템은 아직도 겜블러 스타일이다. 수능이라는 한 방에 초중고 12년을 몰빵해 놓는 거다. 그 한 방으로 얘는 똑똑한 애, 안 똑똑한 애. 이렇게 이제 나눠지는 구조다.

 

내가 청소년들한테 얘기할 때 자주 하는 말이,

 

"대학은 너의 능력을 객관적으로 증명하는 게 아닌 것 같다. 대학을 뛰어넘자. 대학에 가서 네가 진짜 공부하고 싶은 게 있거나 네가 사회적으로 제대로 된 평가를 받고 싶으면 그때 제대로 노력해보자."

 

그러면 얘네가 진짜 어른들이 얘기하는 아무 대학에나 들어간다. 그때부터 얘들이 각자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하는데, 기가 막히다. 그걸 이해한 애들은. 특히 겜블러 스타일이 아닌 애들에게,

 

"야! 아무 대학에 들어가서 그다음부터 네가 하면 돼."

 

이런 말이 크게 작용한다. 왜냐하면 그 다음부터는 그 아이가 평소에 하던 대로 자기가 쌓아가는 노력들이 점수화되면서 얘를 나름대로 사회적 성공의 길로 가게 만들게 되니까.

 

사실은 기자분도 아직까지 이 논겜블러 스타일에 매몰되어 있는 거다. '내가 노력을 하게 되면 그거에 대한 파이널 골을 언제 얻지? 그 리워드를 언제 받지?'에 대한 것들을 생각하고 있는데, 순간 일이 많아지면 '와~ 이 일을 다 해서 내가 언제 리워드를 받지? 언제 평가를 받지?"라는 걸 못 느낄 때, 그런 꿈들이 반복해서 나올 거다.

 

엄훠나 식겁 도사님 인줄.

 

근: 현실에서 아웃풋이 잘 안 느껴질 때, 꾸게 되는 꿈이라고 보는 건가?

 

한: 그렇다. 왜냐하면 그 스트레스가 계속 쌓이면서 언젠가는 이게 어떤 리워드를 얻어야 할 때가 오는데 그게 언제야? 근데 내가 그 리워드를 얻는 순간을 놓쳐버리면 어떡해라는 것들이 자꾸 떠오르기 시작하는 거다.

 

뭐지? 이래서 도사님, 법사님들에게 껌뻑 죽게 되는 건가...

 

근: 그런 거 같다. 취재도 해야 하고, 기사도 써야 하고, 필진들 원고도 체크해야 하고, 편집도 해야 하고, 노량진도 가야 하고, 회도 썰어야 하고. 연차가 쌓이면서 하는 일도 늘다 보니, 그런 스트레스가 있다. 놓치고 있는 거 없나? 어디 빵꾸난 거 없나?

 

이: 그런 걱정은 근데 누구나 하지 않나?

 

근: 오늘만 해도 두 분이 차를 가지고 오신다고 해서, 오실 때까지 주차 공간이 계속 남아있어야 할 텐데... 그러고 있었다.

 

한: 그래서 미안한 이야기지만 기자님은 수능을 잘 못 봤을 거다. 수능을 못 보는 논겜블러 스타일의 가장 큰 특징이 뭐냐면 버리질 못한다.

 

갑자기 콧잔등이 시큰해진다. 엄마가 보고 싶다.

 

한: 정보가 조금 중요하고 많이 중요하고 아주 중요하면, 뒤로 가면 갈수록 조금 중요한 것들은 다 버릴 수 있어야 한다. 심지어 내 머릿속에서 빡빡빡 밀어내 버리고 아주 중요한 것만 갖고 가야 한다. 근데 논겜블러 스타일은 다 가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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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도 논겜블러 스타일인 건가?

 

한: 사람 대인 관계에 있어서.

 

이: 아~

 

두 사람이 대화를 이어간다. 잠자코 있어 보자.

 

한: 대인관계에 있어서 이 사람하고 딱 여기까지만 딱 해주면 돼. 이 사람하고 나의 관계는 10점 만점에 7.5 이상이면 괜찮아. 별 3개 반 이상을 맞을 수 있어. 근데 이 사람한테 별 네 개를 맞으려고 죽어라고 노력을 하니까 이게 사람이 망가지고.

 

이: 맞다. 맞다.

 

한: 근데 그게 노래 부를 때 똑같이 나타난다. 노래 부른 것도 그거를 다 감으로 기억해서 감으로 외치는 스타일의 사람이 그걸 하나의 감도 잊어버리지 않게 그 노래를 다 하려고 하니까 돌아버리는 거야.

 

이: 요즘 좀 약간 그런 거에 좀 많이 편해졌다. 그러니까 그래 이거 조졌어. 다음 꼭 잘하면 되지. 이런 식으로.

 

한: 그렇다. 그러면 된다.

 

이: 선생님이 말씀해 주신 거를 계속 생각했다. 모든 사람한테 다 잘할 필요는 없다는걸. "그냥 얘가 이래? 어~ 그럼 그래. 그럼 너 그렇게 해." 이렇게 되게 겸허하게 그냥 받아들이라고. 근데 이거 인터뷰하고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인데 괜찮나?

 

근: 아니 뭐 괜찮다. 책이 이미 그러고 있으니까...

 

타인은 외계인

 

한 교수의 일침에 모든 전의를 상실하고 이미 또 하나의 내담자가 되어버린 논겜블러 근병. 준비해 온 질문지를 내던지고, 무의식의 세계에 허우적대본다. 나도 아무 말이나 막 하게 되었단 소리.

 

근: 책에 <성숙한 인간이란> 챕터를 보고, 내 어릴 적을 생각하게 되었다. 또래보다 덩치도 크고 그러니 친구들 사이에서 군림하려고 하는 이기적인 아이였다가, 어느 순간 그게 스스로 되게 별로라고 느껴진 순간이 있다. 그걸 기점으로 또 남한테 좀 좋은 사람이고 싶어 하는 욕망이 강해졌던 거 같기도 하고. 친구들 쌈하면 말리고, 뭐라도 있으면 쪼개서 나눠먹고, 먼저 양보하고. 진짜로 착해서 그랬던 거 보다, 착한 아이로 보이고 싶어서 그랬던 거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 이 부분을 보고 거기까지 생각했다고?

 

근: 그게 아마 이 책의 노림수가 아닐지...

 

다시 한번 크게 끄덕이는 동석의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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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 아무튼. 책에 선생님이 '보편타당성'이라는 걸 언급한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누구든지 그 정도의 일과 사람을 만나면 일정한 정도의 감정을 느끼고, 예상되는 행동을 하는 것'. 최근 그 보편타당함에 대해 깊게 고민해 봐야 할 일이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의 행동이 보편타당한 것 같은데, 상대방에겐 전혀 그렇지 않았던 것. 일단, 충돌은 피해야 할 거 같아 사과하긴 했는데, 솔직히 마음에 없는 거였다. 그렇게 상황을 넘기고 나니 시간이 지날수록 억울하고 화가 나더라. 근데 이미 이야기는 끝나버렸고. 지나간 일이니 털어버리려고 할수록 빡치고, 나중에는 그 사람을 닮은 연예인이 티비에 나오는 것마저 보기가 힘들었다. 시간을 더 흘려보내고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타인이라는 것은 그런 건가 싶었다. 나의 보편타당함이 닿지 않는 다른 세계. 즉, 언제든지 그렇게 부딪힐 가능성이 높은 또 다른 외계.

 

한: 맞다. 그러니까 어른이다.

 

이: 이런 경우에는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한: 그러니까. 여기서도 어떻게 해야 된다라는 걸 생각하는 것 자체가 벌써 나를 괴롭히는 거다. 그런 경험이었던 거지 뭐 어떻게 하겠나. 왜냐하면 그 상황이 기자님이 옳았던 건지. 그 사람이 옳았던 건지 모르는 거니까.

 

이: 그렇다. 맞다.

 

한: 근데 그 일은 벌어졌고. 어쨌든 기자님 생각에 "나는 어떻게 보면 좀 굴욕을 당했어. 그래서 이 굴욕을 취소하고 싶어. 그런데 취소가 안 돼서 나는 참 힘들어." 지금 이걸 느끼는 거잖나. 그런데 한편으로는 좀 짓궂게 말해보면 그런 굴욕 좀 당하면 안 되나?

 

근: 일종의 교통사고 같은.

 

한: 당할 수도 있지 뭐. 인생 살면서. 어디 길 가다가 불량배한테 귀싸대기 맞을 수도 있지. 내가 지지리 못나고 바보 같아서 불량배한테 당하고, "다시 그 불량배를 경찰에 신고하면 안 돼요?" 10년 지난 다음에 그 생각 해서 뭐 하나. 그냥 그때 정말 재수 없었고 지금은 어떻게 됐을지 모르는 불량배한테 한 대 맞았다. 그렇게 그냥 과거의 일을 생각해야지 어떻게 하겠나. 그거를.

 

근: 책 중 '콤플렉스'를 다룬 부분을 보고, 이런 생각도 들었다. 어쩌면 나도 타인의 보편타당성을 대차게 침범했었던 것일 수도 있겠다 라고.

 

한: 길 가다가 갑자기 어떤 놈이 귀싸대기를 한 대 때렸다고 치자. 오늘 재수 되게 없네. 그리고 또 그다음 날 갔는데 또 한 대 맞았어. 뭐야? 이틀 연속 드럽게 재수 없네. 근데 그다음 날 또 맞았어. 그러면 거울을 봐야 한다. 내 얼굴에 뭐가 묻었나? 그래서 상담이 필요한 거고 그래서 객관성이 필요한 거다.

 

근: 그러니까. 그 점이 마음에 걸렸다. 내가 객관화를 못 시키고 있나? 나의 보편타당한 것이 틀렸나?

 

한: 그런데 객관화는 혼자서 죽어도 안 된다. 그래서 뭐 친구랑 해보든지 그래도 안 되면 전문가하고 얘기해야 된다. 그거를 전문용어로 갈등 컴프렉트라고 얘기한다. 그 컴프렉트는 레피티션, 반복된다. 왜냐하면 나의 반복되는 생활 패턴이나 나의 반복되는 생각, 나의 반복되는 잘못된 감정 때문에 그렇다. 근데 이건 이미 반복되는 나의 루틴이 됐기 때문에 그게 잘 됐는지 잘못됐는지를 살펴볼 수 없다. 그래서 전문가의 상담이 필요하다.

 

드레스 입고 장화 신은 풀메이크업 롹커

 

근: 롹커님을 처음 만난 날이 기억나나?

 

한: 제대로 처음 만난 건 병원이 아니었다. 음식점이었다.

 

근: 식사하면서?

 

한: 왜냐하면 이 사람은 연예인이고 또 황재균 선수에게 소개를 받았고 그래서, '환자와 의사의 관계보다는 그냥 카운셀링 하는 입장에서 만나야 되겠다.' 그렇게 세팅을 했었다. 사실은 정식 환자, 의사와의 관계였으면 책이 나올 수 없다. 정신과 의사의 윤리 때문에. 치료가 아닌 카운셀링인 관계로.

 

근: 어땠나. 이성우라는 사람은.

 

한: 첫날 식당에서 봤을 때부터 딱 알았다. '아이쿠! 이래서 힘드시군요.'

 

근: 단번에?

 

한: 우리가 한 두 시간 만났나 그때?

 

이: 그랬던 거 같다.

 

한: 그 식당에 어떤 자리에 앉고, 음식이 나오는 순서까지 2시간 중에 1시간 50분을 다 세팅을 해서 왔더라.

 

근: 단골 식당이었나?

 

이: 맞다.

 

한: 나오는 술까지. 야~ 그래서, 이래서, 힘들구나.

 

근: 풀 세팅을.

 

이: 누군가를 만나면 뭔가를 잘 해줘야 되겠다는 그런 생각이 많았다. 지금 많이 버려졌다.

 

근: 누군가라면, 꼭 상담을 요청한 선생님이 아니더라도 다 그랬다는 거?

 

이: 누구든. 게다가 나를 위해서 와주신 선생님이니까 더더욱 더 내가 뭔가를 해줘야 된다는 생각이 막 들면서. 만족시키고 보내야 된다라는 그런 게 있었었다.

 

근: 사실 그러려고 만난 게 아닌데.

 

한: 바로 그거다.

 

이: 지금은 좀 그게 많이 편해졌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요즘 금주 기간인데, 예전 같았으면 누가 술 마시자 그러면 어! 나 술 지금 못 마시는데 어떡하지? 어떡하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텐데 이제 안 그런다. 그냥 편한 마음으로 나중에 보자고 한다. 나는 지금 금주 중이니까.

 

근: 아이고 그런 말도 못 하셨구나... 일본 가서 욱일기를 막 찢으셨던 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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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런 말을 해서 상대방을 불편하게 만드는 게 싫었던 것 같다.

 

근: 듣는 상대방이 빈정 상할까 봐.

 

이: 그런 것도 있고. 예전에는 누군가가 호의를 가지고 이야기하는데, 자르는 게 쉽지 않았다. 지금은 내 상황을 이야기하고, 양해를 구하는 이야기를 조금씩 할 수 있게 되었다.

 

근: 선생님 보기에, 그 식당에서 풀 세팅을 하고 나온 그때 이성우와 지금의 이성우는 변화가 있다고 보나?

 

한: 그럼. 당연하다. 편한 친구를 만나러 나갈 때 풀 메이크업에 드레스 입고 장화 신고 여기저기 별 반짝이 붙이고 나가던 사람이 이제 청바지에 편한 티셔츠 입고 운동화 신고 나가게 된, 그 정도 차이가 있다고 본다.

 

이: 책을 쓰게 되면서 치유가 많이 되었다. 그래서 비슷한 고민을 하는 주변 사람들에게 그냥 글을 써보라고 많이 권한다. 너라는 사람에 대해 적다 보면 거울처럼 자기를 볼 수 있다고. 그래서 난 정말 치유가 많이 됐다고. 잘 쓰고 못 쓰고는 상관없고 그냥 일기 같은 거를 쓰라고. 독자들에게도 꼭 말하고 싶다. 뭐든 써보라고. 자기에 대해서.

 

씨발, 넌 이대로 하니?

 

근: 사실 롹커님은 제 인생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친 사람이다.

 

이: 내... 내가 뭘?

 

근: 왜 보통 사람은 어릴 때 듣던 음악과 보던 영상이 그 사람의 취향을 지배한다고 하지 않나. 97년도 인가로 기억하는데, 초딩이었던 내가 봐버린 거다. 뮤직비디오 <바다사나이>를. 막 생긴 케이블TV 엠넷 27번과 KMTV 43번을 달고 살 때였는데, 굉장히 충격적이었다. 뭐 이런 인간들이 다 있지?

 

이: 개판이었지 뭐.

 

 

근: 야 이 형들 어디서 뭐 하고 사는 형들인지는 몰라도, 장난 아니구나. 짱이다. 미쳤구나. 그렇다고 막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 까지는 아니었고...

 

이: 그러다 인생 조지지.

 

근: 그다음 뮤비는 더 충격적이었는데, 청년 폭도..?

 

이: 청년폭도맹진가.

 

 

근: 저래도 경찰한테 안 잡혀가나? 싶었다.

 

이: 왜 안 잡혀가. 많이 잡혀갔다. 경찰서에 (웃음)

 

근: 이렇게 폭발적으로 개썅마이웨이를 살았던 뮤지션이, 젊은 시절 에너지를 다 소진하고, 축 처진 어깨와 지친 마음으로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는 스토리. 그런 내용으로 생각했다. 책 표지만 봐서는. 그런데 이렇게 담백한 대화가 오가는 내용으로 채워진 건 정말 예상 밖이었다. 일단 기존 '괜찮아. 다 잘될 거야, 괜찮아. 네 잘못이 아니야'류의, 마음/정신 관련 콘텐츠와는 확실히 다른 길을 가는 책 같다.

 

한: 목표한 바다.

 

근: 처음에 실제 상담 치료에선 책에서보다 의사의 말이 훨씬 적다하셨는데, 말수가 적어지면 질문과 답변을 좀 더 임팩트 있게 답변을 하는 건가? 예컨대 "당신은 겜블러 체질이 아니고 그래서 수능을 못 봤을 거예요."같은.

 

한: 아니다. 더 두서없게 얘기하게끔 계속 끌어내기만 한다.

 

근: 아까 논겜블러라고 해서 되게 놀랐다. 선생님께 외람된 말일 수도 있으나 뭐 어디 도사님인 줄..

 

한: 사실 그건 기자님과 제가 충분히 감정을 끌어내고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없으니 한 말이다. 상담을 그렇게 하면 돌팔이다. 보통 환자들은 마음을 졸이고 온다. 의사한테 네가 옳아, 틀려 이런 말을 듣게 될까 봐.

 

근: 병원에서 네 마음이 틀려먹었다는 소리를 들으면 좀 무서울 거 같다.

 

한: 그 얘기를 하는 게 진짜 돌팔이 정신과 의사다. 상담에 도덕적인 옳고 그름이 어딨나. 내가 이런 경험을 했고 이런 감정을 느껴서 내가 힘들다는데. 그러면 "어! 그래 그래서 네가 힘든가 보다. 근데 지금 네가 느끼는 거는 맞아? 지금 네가 느끼는 게 옳아? 내가 느끼는 거는 이게 맞는 것 같은데. 어! 그럼 그런가 보다." 그냥 그런 게 진짜 상담의 묘미인 거지. "야~ 내가 정신과 전문의로서, 박사로서 볼 때 너는 그렇게 느끼면 안 돼. 너 그건 바보야." 이렇게 나오는 순간 사실은 정신과 의사로서 자격이 없다. 세상에 제일 쓰레기 같은 책이 자기 계발서다. 그런 책을 읽고 처음에 딱 든 느낌이, "씨발! 넌 이대로 하냐?" 이거야. 그래 잘났어. 너는 이대로 하냐? 나는 이대로 못 해. 근데 왜 이거를 하라고 그래. 그건 비현실적인 거잖아. 그럼 할 말이 없는 거 아닌가. 여기 동석하신 출판사 차장님과 많은 작업을 해왔는데, 그동안 낸 책을 냉정히 분석해 보면, 처음에는 완전 자기 계발서였다. 스포츠 정신과 의사로서 딱 보면 이렇게 살면 좋아요. 이게 정답일 수 있어요. 이렇게 써놓은 거다. 책에서 교육적인 지시적인 내용을 계속 빼려고 노력했다. 이번 책에선 다 빠졌다. 그런 게.

 

근: 어쩐지... 답답해서 찾아왔다는데, 의사쌤이 뭐 속 시원하게 말을 안 해줘!!!!

 

한: 부탁인데, 제발 <이 책은 절대 자기 계발서가 아닙니다>라고 신문 기사에 빨간색으로 테두리 좀 쳐 달라.

 

이 책은 자기 계발서가 아니다. 그렇다고 한다.

 

양몰이 개와 함께하는 아무말대잔치

 

근: 그런데 실제 상담실에서도 정말 그런가? 답답해서 찾아왔다는데 별말을 안 해주고?

 

한: 그것보다 더 답답하게 만든다.

 

근: 솔직히 이 책에서 한덕현 교수의 역할은 그저 굿 리스너인 것 같다. 왜인지 나도 할 수 있을 거 같은.

 

한: 그러면 나는 대성공한 거다. 사실은 저자에서도 빠지고 싶었다. 뭔가 저자에 정신과 교수가 딱 박혀 있으면, 뭔가 문제를 해결해 주는 책 같아 보일까 봐. 그런 책은 너무 끔찍해서.

 

이: 그런데 나는 선생님의 대화를 통해서 위안을 얻고 약간의 해답을 찾았다. 아마 독자들도 우리의 대화 속에서 어떤 각자의 느낌표들이 찍혀지지 않을까. 그동안 힘들고 그럴 때 선생님이 쓴 글을 뒤져서 찾아 읽고 그랬다. 아마 나 같은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 나와 바로 맞닿아 있는 게 아니더라도, 문장들을 읽으면서 뭔가 답답했던 게 쓱 하고 사라지는. 머리 아플 때 먹는 두통약처럼, 즉효약 까진 아니더라도 상비약 정도는 되는. 우리 책이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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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 우리 주변에 많은 굿 리스너가 필요한 게, 답답한 사람은 결국 남에게 자기 얘기를 털어놓을 때 자기 생각이 비로소 정리되는 거 같고, 그걸 밖으로 꺼냄으로써 이미 문제가 아닌 경우도 있는 거 같다. 굿 리스너는 의사를 어느 정도 대신할 수 있나?

 

한: 정신과 상담에 가장 기본적인 테크닉이 2개가 있다. 하나는 프리 어소시에이션. 그거는 말을 하는 사람이다. 자유 연상. 각본을 짜거나 생각을 해 오는 게 아니라 떠오르는 대로 그냥 생각을 막 말하는 거. 그냥 떠오르는 데로 막 가는 거다. 그러면 치료자는 얘가 이렇게 강물에서 낙엽처럼 떠내려가면 같이 따라간다. 이걸 프리 플로팅 아이디어라고 한다. 프리 어소시에이션에 대응하는 프리 플로팅으로 같이 따라가는 거지.

 

근: 쉽게 말해 아무말대잔치...

 

한: 맞다. 환자의 의식 흐름에 같이 떠내려가는 거다. 환자는 계속 간다. 치료자가 중간중간에 아니면 아닌 것 같은데? 잠깐만요. 잠깐 쉬었다가 갈게요. 양 떼들이 옆으로 가는 거를 탁탁탁탁 쳐서 길을 잡아주는 개처럼...

 

근: 양몰이 개.

 

한: 양몰이 개는 절대 양의 목을 물고 우리로 가지 않는다. 양은 막 여기저기 뛰어다니면 계속 옆에서 킁킁 짖어주면서 길을 잡아준다. 결국 양이 자기 우리 속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의사가 해줘야 하는 역할이 그거다.

 

때려치우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

 

근: 이쯤 해서 물어보자. 솔직히, 상담 중에 어? 이건 좀 아닌 거 같은데? 싶은 거 없었나?

 

이: 생각 외의 대답이 올 때는 있었다. 선생님이니까 넘어갔지, 다른 사람이면 아니 이 사람이? 할 정도로 깜짝 놀랄만한 (웃음)

 

근: 털어놔 주시라. 좋은 기회이지 않은가.

 

이: 나한테 음악 그만두라고 했을 때. 이렇게 힘들게 붙잡고 있냐고. 첫 만남에 하신 말이다. 그때 깜짝 놀랐다. 아니 이분이 대체 나한테 왜 이런 이야기를 하지?

 

근: 책에는 그게 의도된 질문이었다고 나오던데. 어떤 반응을 끌어내려고.

 

이: "좋아하는 거일수록 버릴 수 있어야 된다." 부처님이나 하실 법 한 말이 선생님 입에서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거든. 이분은 나를 치료를 해 주러 온 사람인가? 뭐지 이 사람은?

 

한: (웃음) 생각보다 불신이 강했군.

 

이: 정말 충격적이었다. 머릿속에서 몇 달 동안 떠나지 않고 생각을 많이 하게 만든 말이었다.

 

근: 스님의 선문답 같은.

 

이: 근데 이게 생각할수록 맞는 말이었다. 여태까지 당연하게 가지고 있었던 그런 것들이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다른 생각들로 뻗어나가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 말이.

 

근: 혹시, 꼭 선생님이 아니었어도 타인의 말에 잘 말려드는 타입인 건 아닌가?

 

이: 근데 그 말을 그 누구도 해 준 적이 없었다.

 

근: 그랬겠지. 누가 감히 노브레인한테 음악 때려치라는 말을 하나. 청년폭도맹진가를 부르는 사람들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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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진짜 내가 음악을 때려치우게 된다면?'을 처음 상상하게 된 거다. '근데 그것도 나름 재밌긴 하겠네. 근데 약간 막막하긴 하고.' 이런 식으로.

 

근: 근데 정말 가수에게 음악을 때려치라!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선생님밖에 없었겠다. 일반인이 아무리 좋은 상담자의 자질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노브레인 보컬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 이미지를 다 떼내고, 그냥 인간 이성우에게 질문을 던지긴 힘들 테니까. 친구나 지인은 그런 조언을 하기에 너무나 큰 용기가 필요하고 사실 그럴 이유도 없는 거 아닌가.

 

이: 어우~ 맞다. 정말 그렇다.

 

근: 뭔 미친 소리야? 니가 뭘 알아? 그런 얘기 듣기 딱 좋지. 내가 우리 사장님한테, "힘들어 보이시는데, 거 이제 총수 자리 내려놓으시고 고만 쉬시죠"이렇게 말할 수 없지 않나.

 

이: 못하지 못하지. 선생님이라서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던 거고. 주변 사람들도 저한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고 싶긴 한데, 선생님처럼 편하게 말 못 하는 거 일 거고. 선생님과 대화 중에 그런 순간이 정말 많았다. 나를 다시 되돌아볼 수 있는 그런 그런 질문과 생각과 답변들.

 

원숭이들을 위하여

 

근: 지금 롹커님의 소감을 들어보면, 거의 간증 수준이다. 재밌는 건 롹커님이 이런 설레는 체험담을 아무리 늘어놔도 선생님 표정은 무덤덤하시다. 뭐 당연한 거라서 그러신지?

 

한: 그랬나 보다 그런 거지. 뭐. 또 반대로 진짜 별로 도움을 못 받았다고, 뭐 그렇게 불친절하냐고 하는 분들도 있다. 나 힘들다고 그러는 데 무덤덤하게 있다고 "피곤하세요?" 물어보는 환자도 있고.

 

근: 우리가 사는 세상에도 별의별 사람이 다 있지 않나. 하물며, 마음이 아파서 찾아오는 병원에서는 어쩔까 싶다. 인간 한덕현으로서는 그런 걸 어떻게 관리하나?

 

한: 그래서 동료들끼리 서로 코멘트도 많이 해주고 상담도 하고 그런다. 나는 특히 그런 면에서 맷집이 강한 게 정말 어려서부터 정신과 병원에 살았다. 아버지 정신과 의사라서.

 

근: 오! 대를 이어.

 

한: 뭐 아버지가 휴일이나 주말에 당직하러 이제 병원에 가실 때 따라가면, 병동 안에 탁구대도 있고 놀 것들이 많았다. 그러면서 환자들하고 같이 밥 먹고, 같이 탁구 치고 놀고 그랬다. 그래서 그분들과 생활하고 그런 것들이 무섭거나 뭐 그런 건 사실 별로 없었다.

 

근: 제가 사범대를 나와서 주변에 교사하는 친구들이 많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선생님들도 아이들에게 상처를 많이 받고 사는 거 같다. 교생 실습 때를 떠올려 보면, 그 무시무시한 중2 반을 맡았었는데. 말하는 원숭이들 같았다. 나야 뭐 잠깐의 경험이었지만, 그게 직업이 되면 사명감만으로 해내기에 어려운 일들이 많을 거 같다.

 

한: 내가 소아청소년 정신과 의사다. 아까 그 표현에 따르면, 나는 말하는 원숭이가 아니라 까불며 말하는 원숭이를 보고 있는 거다. 하루에 30에서 50명 사이를 까부는 원숭이를 보는 게 내 일상이다.

 

근: 오쒵.

 

한: 내가 트레이닝을 받을 때 우리 스승님이 놀이 치료를 시켰다. 까부는 원숭이들이랑 놀이 치료를 하려면 이놈 저놈이 머리 끄댕이 붙잡고 막 장난감 내던지고 난리가 난다. 근데 걔네를 하루에 11명을 놀이 치료한 적이 있다. 일주일 동안.

 

이: 혹성탈출인가..

 

한: 하다 하다 스승님에게 "이게 인간이 할 짓입니까?" 물었더니 교수님이 "야! 이 무식한 놈아. 애를 그냥 보지 왜 해주려고 그러냐?" 그러셨다. "봐 인마 그냥! 네가 걔한테 해줄 게 뭐가 있어? 걔가 뭐를 집어던지든 뭐 하든 간에 일단 지켜봐. 그리고 네가 지켜본 다음에 의사로서 그 부모한테 얘는 내가 지켜보니까 뭐가 되고, 뭐가 안 되니까 어떻게 해봅시다. 그 얘기만 해줘도. 그게 치료지 인마. 네가 걔하고 백날 놀아봐라. 걔가 치료가 되는지." 이 얘기를 해 주시는 거다. 명목은 놀이 치료였지만 사실은 놀이를 통한 아이의 관찰 그리고 애가 하는 행동에 대한 벤틸레이션(환기)였던 거다. 그러니까 학생들 등쌀에 괴로워하는 그 교사 지인분들도 말하는 원숭이들한테 뭘 해주려고 하니까 미치는 거다. 일단은 관찰하고, 지켜봐 주고 걔네들의 어떤 행동이나 뭐가 어떻다는 것만 그냥 표현만 하게 해줘도 그게 선생님의 역할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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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거는 친구들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겠다. 친구가 막 야~ 나 너무 힘들어. 막 이러면서 막 이러면. 뭔가를 해주려고 하는 게 아니고 그냥 그 이야기 들어주고.

 

한: 그냥 그거 힘드네. 그걸로 끝.

 

불안의 필요

 

근: 불안이란 대체 뭔가.

 

한: 생물학적으로 말하자면, 파충류 뇌가 있고 그 위를 포유류 뇌가 덮고 있다. 그리고 포유류 뇌 위에 인간 뇌 부위가 있다. 불안이 어디서 느껴지냐면, 파충류 뇌 쪽에서 느껴진다.

 

근: 진화가 일어나기 전부터.

 

한: 프리미티브(primitive) 한. 가장 원초적인 뇌 쪽에서 느끼는 게 불안이다.

 

근: 진화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에 그런 건가?

 

한: 그렇다. 불안이 없으면 생존이 없다.

 

근: 하긴 그렇다. 천적으로부터 도망가고 그래야 하니까.

 

한: 파충류든 뭐든 간에 왜 알 밖으로 나오겠나. 따뜻하고 보호막이 있는데, 그냥 가만히 있지. 왜 껍질을 깨고 나오겠냐고. 불안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어쨌든 세상과의 접촉의 시작은 그 불안이 일으키는 거다.

 

근: 불안은 안전해지려는 방향성이라고 볼 수도 있다. 새로운 안정을 찾기 위한.

 

한: 그것도 심리학적으로 보면 두 개다. 안전-안전-안전-안전-안전을 추구하다가 빵 터져서 느끼는 게 불안이라고 얘기할 수도 있고, 방금 얘기한 거처럼 안불안-안불안-안불안-안불안-안불안 하려고 꾹 누르고 있는 텐션 자체를 불안이라고 하기도 하고.

 

근: 롹커 님은 언제 그 불안이라는 단어에 직면했다고 느끼는지?

 

이: 뭔가 싹 올 때가 있다. 아~ 나 오늘 뭐가 되게 일진 안 좋을 것 같은데. 무대에서 틀릴 것 같은데. 가사 틀릴 것 같은데. 오늘 컨디션 너무 안 좋은데. 노래를 잘 못할 것 같은데. 이런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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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 불안을 잘 느끼는 놈들이 결국 살아남아 된 게 우리고. 무언가를 잘하게 만드는 동력도 되고. 책을 읽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불안은 나쁜 건가?

 

한: 아니다. 불안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 파충류 때부터 나오는 신호를 대뇌 쪽이 얘를 어떻게 관리하느냐. 그게 되면은 불안이 안정화되는 거고 이게 못하고 막 활성화되면 이제 우리가 소위 말해서 불편을 느끼는 거다.

 

근: 불안감을 느끼고 산다는 건 어느 정도 내 정신적 면역체계가 잘 돌아가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건가?

 

한: 불안감을 안 느끼는 것도 문제다.

 

근: 그게 어느 정도여야 적당할까?

 

한: 내 일상생활에 방해가 안 될 정도.

 

근: 애매하다. 애인하고만 헤어져도 며칠을 맛탱이가는 게 사람인데. 적당한 불안감은 대체 어느 정도인가?

 

한: 내 규칙적인 생활이 깨지지 않는 거. 아침 일곱 시에 일어나서 회사에 출근하고 오후 회사에서 일하고 다섯 시쯤 퇴근해서 TV 보고 뭐 하고 한 11시, 12시쯤 자고 이게 이제 내 루틴인데. 잠 못 자, 새벽 3시가 되고, 4시가 되어도 잠 못 자. 그리고 아침에 막 허겁지겁 지고 6시에 잠들었으니까 8시, 9시에 일어나서 지각해. 또 회사에 가서 일을 못하고 꾸벅꾸벅 졸아. 그 집에 오다가 자꾸 이제 술 마시게 되고 그러니까 또 늦게 자게 되고. 그럼 일단 일상생활이 파괴되지 않나. 그럼 병적인 상황인 거다.

 

일단 던지는 게 중요하다

 

근: 책에서도 그렇고, 방송에서도 그렇고, 롹커님은 요리에 관심이 많으신 거 같다.

 

이: 요리하는 순간순간이 좋다. 재료를 사러 가고, 재료를 손질하고, 조합하고, 그래서 결국 성공적으로 해냈을 때 우와~ 하면서 오는...

 

근: 만족감.

 

이: 그렇다. 만족감. 그런데 이게 음악에서는 솔직히 이제 더 이상 그런 큰 만족감을 얻기 어렵다. 어느 정도 해온 게 있기 때문에. 만족치라는 게 꽤나 높아져 버렸다. 하지만 요리는 다르다. 아직 해보지 않았던 것들이 투성이니까. 조금만 노력해도 큰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노브레인의 음악에서는 그러기가 힘들다.

 

비슷한 이야기를 박중훈 선배도 해주신 적 있다. 우리가 단역으로 <라디오스타>를 찍었을 때.

 

"야~ 나하고 성기형? 우리는 이거 그냥 또 연기한 일뿐인 거야. 근데 너네는 이거 나오잖아. 대박, 대박 칠 거야!"

 

"에이~ 저희가 뭘요!"

 

"아니야~ 우리는 그냥 한 거고, 너네는 새로운 애들이 나와서 뭔가를 한 거기 때문에 사람들이 엄청나게 좋아할 거야"

 

그땐 어릴 때라 몰랐다. 그 말뜻을. 이젠 알 거 같고.

 

근: 하긴 <라디오스타>가 벌써 옛날 영화가 되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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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러니까. 시간이 확 지나고 나니까 우리는 그냥 그렇게 음악 하는 사람들이 된 거다. 그런데 요리는 다르다. 나라는 사람이 요리하면 완전히 다른 게 되어버리니까. 거기서 오는 만족감. 뭔가를 해내려고만 급급하니까, 문제가 생기는 것 같다. 음악이든 요리든 뭔가를 배출한다고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이게 나는 이게 진짜 웰메이드인데 사람들이 야! 병신! 이러면서 이럴 때도 있고, 어떤 건 나 이거 진짜 대충 한 건데 이걸 사람들이 좋아해? 그럴 때도 있다. 그러니, 그냥 계속 던지는 수밖에 없는 것 같다. 폭투든 스트라이크든.

 

근: 일단 던지는 게 중요하다.

 

이: 던진 공이 폭투가 될 수도 있고 뭐 볼이 될 수도 있고 그게 파울이 될 수도 있고 홈런 맞을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계속 던져야지. 투수니까. 계속 안 던지면 어떡할 건가.

 

제가 스트라이크를 못 던지는 투수에게 가장 많이 해주는 말이 '투수는 공 던지는 사람입니다'라는 말이고, 슬럼프에 빠진 타자에게 가장 많이 해주는 말이 '타자는 공치는 사람입니다'라는 말입니다. 너무도 당연한 말인데, 선수들이 이 말을 좋아하는 이유는 평소 이 말에 한 글자를 더해서 경기를 해왔기 때문입니다. 바로 '잘'이라는 글자죠.

 

<답답해서 찾아왔습니다> p.19 한덕현 교수의 답변 中

 

터널을 통과하는 방법

 

근: 롹커님은 '한덕현 상담 교실'의 모범 수료생인 거 같다.

 

이: 사람은 살면서 분명히 터널 같은 곳을 지나쳐야 될 때가 오는 것 같다.

 

근: 공감하는 바다.

 

이: 누군가에겐 아직 희망 고문 같은 말일 수 있는데 결국엔 다 지나가게 되는 거 같다. 이 터널을 어떻게 잘 지나가느냐, 그게 정말 중요하지 않나.

 

근: 옆에 계신 선생님은 그때 출동해 주는 보험회사다?

 

이: 그렇다. 맞다. 다른 사람들도 마음이 힘들 때 덕현 선생님처럼 이런 분들을 만나서,

 

근: 보험을 다 가입하자.

 

이: 거기에 주변에도 좋은 역할을 해주면 더 좋고. 사람들이 맘속에 있는 걸 함부로 표현을 못 하기 때문에 불안감이든지 병이라든지 하는 게 생기는 거 같다.

 

근: 터널에 들어갔을 때 꼭 보험회사를 찾고.

 

이: 그렇지. 그리고 지나가는 차한테 도움을 구할 수 있으면 꼭 구하고. 진지하게 이야기할 때, 아! 이 새끼 약점 잡았다 하면서 그런 사람 거의 없지 않나.

 

근: 사실 약한 모습을 드러내는 게 불안한 거는 그냥 그 사람의 불안인 거지, 남들은 누가 넘어져 있으면 도와주려고 하지.

 

이: 그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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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

 

사진 - 고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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