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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현지 시각으로 6월 29일 아침, 신문들은 일제히 연방 대법원의 소수 인종 우대 정책(Affirmative Action) 위헌 판결 관련 기사로 도배되었다. 그동안 많은 미국 대학에서는 입시에서 소수 인종을 우대해 왔는데, 연방 대법원이 이에 대해 위헌 판결을 내린 것이다.

 

인종이 입시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쳐왔다는 사실이, 한국인의 감성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우리나라는 대통령까지 나서서 수능 문제 난이도에 대해서 훈수질할 정도로, 시험에 진심인 나라이다. 모두가 공정하게 경쟁하는 기회의 평등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미국 대학교는 결과적 평등을 추구한다. 입시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사회적으로 소외된 계층과 집단에게 더 많은 기회를 부여한다. 이번에 위헌판결을 받은 'Affirmative Action'은 한국어로 '적극적 우대 조치'라고 번역할 수 있다. 이러한 적극적 우대 조치로 혜택을 받아왔던 소수 인종은 주로 흑인, 히스패닉 그리고 미국 원주민들이다.

 

대학입시 위원회가 발표한 인종별 SAT(미국의 수학 능력 시험) 평균 점수는 다음과 같다(1600점 만점 기준).

 

아시아인: 1229

 

백인: 1098

 

히스패닉: 964

 

미국 원주민: 945

 

흑인:926

 

가장 높은 평균 점수를 받은 아시아인들과 가장 낮은 평균 점수를 올린 흑인들 사이에 상당히 유의미한 점수 차이가 존재한다. 만약 미국 대학교에서 인종을 고려하지 않고 학업 성취도로만 학생들은 선발한다면, 엘리트 대학교에서는 아시아인들이 넘쳐나고 흑인들은 찾아보기 힘들어질 것이다. 그래서 그동안 미국 대학교들은 소수 인종(여기서 소수 인종은 아시아계를 제외한 다른 소수인종을 뜻한다) 들에게 가산점을 부여하는 식으로 인종의 다양성을 확보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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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인종 다양성이라고 에둘러 표현한 것은, 대학교들이 공식적인 인종별 쿼터제(아시아계 학생들은 아시아계 학생들끼리 경쟁하는 건 아니라는 얘기다)를 운영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미 1978년도에 인종별 쿼터제는 위헌판결(vs Bakke)을 받아 금지되었다. 하지만, 그 뒤로도 대학교들은 입학원서 등을 통해 지원자의 인종을 체크했고, 계속해서 소수 인종에게 가산점을 부여해 왔다. 반대론자들은, 대학교의 정원이 이미 정해져 있는 상태에서 소수 인종에게만 가산점을 부여하는 것은, 사실상 백인들과 아시아계 학생들에 대한 역차별이란 주장을 해왔다. 이번 판결은 적극적 우대 조치 반대론자들의 손을 들어줬다. 앞으로 대학입시에서 더 이상 인종은 고려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많은 미국 언론들이, 이번 판결을 역대급 판결이라고 한다. 현지에서 워낙 핫한 주제다 보니, 한국 언론 / 커뮤니티에서도 이 소식이 많이 다뤄졌다. 아쉬운 점은, 대부분에 논의가 이번 위헌판결로 인해 한국 학생들이 입시에서 유리해졌으니 이번 결정이 잘 된 결정이란 식으로 결론 내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건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하고 넘길만한 주제가 아니다. 이번 사태 저변에 깔려있는 여러 가지 맥락들이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미국이라는 사회를 이해하는 데에 더없이 중요한 정보들이다. 하나하나 디벼보도록 하자.

 

미국 명문대, 적극적 우대 조치에 진심인 이유

 

한국도 그렇듯, 미국도 명문대에 입학하는 건 대단한 특권이다. 우리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인식의 차이다. 단순히 내가 잘났으니까 좋은 대학에 가는 게 아니다. 미국인들은 명문대에 입학해서 좋은 교육을 받을 기회를 얻는 것은 개인이 사회로부터 큰 혜택을 입는 것이라 본다. 이 말은 단순히 수사로써가 아니라 실제로도 그렇다. 미국에서 명문대가 왜 명문대냐면, 돈이 많기 때문에 명문대이다. 최고의 명문 학부로 꼽히는, 하버드대나 윌리암스대의 경우 학생 한 명당 쌓여있는 재단 지원금이 무려 2백만 달러에 달한다. 이런 명문대에 입학한다는 것은, 자산가로부터 수십억을 후원받는 것과 비슷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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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등록금이 비싸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일 년에 억 가까운 돈이 깨진다. 워낙 큰돈이다 보니, 많은 학교들은 한정된 학비 지원금을 어떻게 나눠줄 것인지 고민한다. 비슷한 성적이면, 등록금을 모두 자기가 낼 수 있는 학생을 먼저 뽑는다. 그렇게 아낀 지원금으로 저소득 계층에서 공부 잘하는 애를 한 명 더 뽑는 게 낫다고 본다(그런 의미에서 학비 지원을 받지 않는 외국계 학생들을 환영한다). 대학교가 속물이라서 그런 건 아니고, 한정된 자원으로 최대의 효과를 내려다보니 이런 현실적인 고민을 하는 것이다.

 

아이비리그 학교에서는 이딴 고민이 필요 없다. 재정 상태를 고려하지 않고 애들을 선발한 다음에, 등록금 지원이 필요한지 따진다. 입시와 재정 지원이 아예 분리되어 있다. 이걸 전면적으로 시행하는 학교는 몇 안 된다(부분적으로 시행하는 학교는 백 개 정도 된다). 예일대의 경우, 연 소득 7만 5천 불미만 가정으로부터는 한 푼의 등록금 / 생활비를 받지 않는다. 교육과 생활에 필요한 모든 비용을 학교가 지원한다. 연 소득 25만 불이 넘지 않는 가정의 학생들은 거의 대부분(79%) 학비 보조를 받는다. 명문대일수록 돈 걱정 없이 공부할 수 있다.

 

명문대의 자금력은 학비 보조 등을 통해 비용을 낮출 뿐만 아니라, 교육의 질도 높인다. 미국 명문대에서 노벨 수상자들이 계속 배출되고, 학문적 성취가 이뤄지는 근본적인 원인은 자금력에 있다. 아이비리그 중 하나인 유펜(UPenn, University of Pennsylvania)은 1년에 무려 2조 가까이 리서치에 쓴다. 이게 얼마나 큰돈이냐면, 우리나라 상장 제약 기업들이 연구 개발에 쓰는 돈이 2조 정도다. 학교 하나가, 우리나라 상장 제약 회사 전체와 맞먹는 돈을 연구 개발에 쓰는 것이다. 이렇게 많은 돈을 쓰기 때문에, 우수한 연구진이 모여 좋은 성과를 낸다.

 

게다가, 수업의 질 자체도 높다. 윌리엄스대의 모든 신입생은 '튜토리얼 수업'이라는 학생 둘과 지도교수 한 명으로 구성된 밀착 수업을 듣는다. 엄청난 재정적 지원이 없으면(윌리엄스대의 학생당 교수비는 7 대 1의 불과하다) 성립할 수 없는 구조의 강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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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스 대학의 튜토리얼 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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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비 보조, 연구 개발 그리고 환상적인 학생당 교수 비율. 전부 막대한 자금이 드는 일이다. 이 자금은 기부금과 각종 연구 지원금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이처럼 사회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아 운영되기 때문에, 미국 명문대들은 사회적 책무를 다하기 위해 노력한다. 적극적 우대 조치를 이러한 맥락에서 바라보아야 하는 이유다.

 

적극적 우대 조치는 나쁜가

 

전제되어야 할 것은, 인종에 따른 적극적 우대 조치가 선의로 만들어진 정책이라는 것이다. 적극적 우대 조치는 사회적으로 소외된 계층을 지원하기 도입된 정책이다. 그리고 미국 사회에서 더 많은 소외 인종이 대학에 진학하는 것을 돕고, 이들이 더 나은 사회적 / 경제적 지위를 얻도록 기여해 온 바가 크다.

 

문제는 디테일에 있다. 가장 큰 문제는, 명문대 입시 문제이다. 어느 나라나 명문대 입시경쟁은 치열하다. 지난 2019년도에 드러난 대규모 입시 부정 스캔들(미국 부유층 부모들이 입시 전문 업체에 거액을 지불하고, 뇌물과 서류 조작 등을 통해 자녀들을 명문대에 입학시킨 사건. 최소 750 가족이 연루되어 있고 53명이나 기소되었다)은, 미국인들도 명문대 입학에 진심이라는 걸 드러낸다. 경쟁이 치열한 천상계 입시에서, 인종에 따른 가산점은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한다. 비슷한 점수라면, 인종에 따라서 입시 난이도가 엄청나게 달라진다. 흑인 학생들은 시험 점수가 높은 것만으로도 매우 높은 확률로 명문대에 진학한다. 그에 반해, 아시아계 학생들은 성적이 높은 것은 기본이고, 그 외로 뭔가 특별한 과외 활동을 해야만 명문대에 진학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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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명문대에 지원할 정도로 스펙이 높은 흑인 학생들은 대부분 중산층 이상 가정에서 성장한 이들이라는 점이다. 적극적 우대 조치 덕에 명문대를 나온 엘리트 흑인 가정의 자녀들이, 대를 이어 제도의 혜택을 본다. 많은 미국인들이 현타를 느끼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실제로 내 주변만 봐도 알 수 있다. 내가 다니는 직장의 흑인 임원 자녀들은 아이비리그에 진학하지만, 백인 임원 자녀들은 비슷한 성적을 받고도 그보다 훨씬 못한 대학에 진학하는 경우를 많이 봤다. 반대의 역차별도 발생한다. 흑인들이 명문대를 졸업하면, 실제 그의 뛰어남이 어느 정도인지 상관없이 그저 흑인이라서 좋은 대학을 나왔다는 시선에 평생 시달린다.

 

나와 경제적으로 비슷하거나 더 잘 사는 가정의 아이가, 왜 인종 때문에 입학에서 혜택을 받아야 되는가.

 

바로 이것이 지금 판결 결과의 시작 지점이다. 적극적 우대 조치가 사회적 약자들을 돕기 위한 제도라면, 인종에 따라 기계적으로 가산점을 줄 게 아니라 소득 / 가정환경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서 가산점을 주면 된다. 이번 판결의 내용도, 적극적 우대 조치를 전면적으로 금지한 게 아니라, 인종을 기준으로 한 적극적 우대 조치에 대해선 위헌 판결을 내린 것이다. 지원자의 인종만 보지 뽑지 말고, 인종과 가정 환경이 지원자의 경험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를 고려해서 학생들을 뽑으라는 얘기다.

 

인종, 경제적 계층, 가정환경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서 학생을 뽑는다.

 

듣기는 참 좋은 말이다. 문제는 현실에서 이걸 시행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지원자 대비 인적자원이 풍부한 명문 사립학교에서는, 지원자들의 에세이를 여러 명이서 읽고 종합적인 판단을 하는 것이 가능하다. 지금도 이미 충분히 그런 단계를 통해 학생을 선발한다. 문제는 한 해에 수만 명을 뽑아야 하는 대형 학교나, 입학 과정에 많은 인력을 투입할 수 없는 학교들이다. 전체 비율로 치면, 여력이 되는 소수의 엘리트 학교보다 그렇지 못한 평범한 학교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다. 인종에 의한 가산점이 폐지된 마당에, 일반 대학교들이 앞으로 어떻게 다양성을 유지할지가 문제다.

 

연방 법원이 수상하다

 

적극적 우대 조치는 미국에서 보수와 우파를 가르는 하나의 기준이 될 정도로 민감한 정치 사안이다. 인종과 상관없이 경쟁의 기회를 얻어야 한다는 것까지는 모두가 동의한다(이걸 거부하는 순간 인종차별주의자가 된다). 대부분의 공화당 지지자들은 기회의 평등에서 멈춰야 된다는 입장이고, 민주당 지지자들은 적극적 우대 조치를 통해 결과적 평등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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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는 이렇게 첨예한 정치적 갈등이 발생할 때마다 등판하는 끝판왕이 연방 대법원이다. 한국에서 가장 큰 권력을 휘두르는 건, 누가 뭐래도 대통령이다. 헌법 재판소가 전 국민의 관심을 받았던 것도, 두 번의 대통령 탄핵 때였다. 그에 반해, 미국 사회를 뒤바꿔 놓은 결정적인 변화를 만들어 온 것은 미국 연방 대법원이다. 그 정도로 연방 대법원의 판결은 미국 내에서 큰 영향력을 지닌다. 게다가 대통령의 임기는 고작 4년이지만, 9명의 연방대법관들은 죽을 때까지 임기를 보장받는다. 그러니까 미국이란 나라를 지탱하는 진정한 철인은, 이 9명의 연방대법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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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기준 현직 미합중국 연방 대법관들.

보수 성향은 존 로버츠 대법원장(가운데)을

비롯해 여섯 명, 진보 성향은 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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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최근 연방 대법원이 수상하다. 작년 연방 대법원은 임신 15주 이후의 낙태를 전면 금지한 미시시피주 법에 대해 합헌 판단을 내림으로써, 많은 미국인들을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최근에는 소수 인종 우대 정책 폐기뿐만 아니라, 종교적 신념에 따라 동성 커플과의 비즈니스를 거부하는 것을 인정하거나 바이든 행정부가 그동안 추진해 온 학자금 대출 탕감 정책에 제동을 걸었다. 낙태, 동성애, 소수 인종 우대 정책 그리고 학자금 대출 탕감. 사안 하나하나가 미국 정치에서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초대형 떡밥이다.

 

미국 연방 대법원이 연이어서 보수파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그 근본적인 원인은 트럼프다. 트럼프는 고작 4년 집권하면서 3명의 연방 대법관을 임명했다. 이게 많은 건가? 졸라 많은 거다. 대법관의 임기가 종신이다 보니, 대통령 임기 내에 결원이 발생해야만 대법관을 임명할 수 있다. 카터 대통령을 비롯, 임기 내 대법관을 한 명도 임명 못 해본 대통령이 4명이나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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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링크>

 

최근 임명된 대법관 수를 살펴보자.

 

아빠 부시 때 2명, 빌 클린턴 때 2명, 아들 부시 때 3명, 오바마 때 3명

 

민주당과 공화당이 번갈아 집권하면서, 8년에 걸쳐(모두 재선에 성공했다) 두, 세 명의 대법관이 교체되었다. 그런데 운빨터진 트럼프가, 고작 4년 만에 3명에 대법관을 지명했다. 그 결과 대법원은 보수 득세로 바뀌었다. 만약 트럼프가 재선까지 성공했다면, 역대급으로 많은 대법관을 자기 사람으로 채워 넣었을 것이다.

 

이러한 여파가 최근 미국의 미래를 정하는 중요한 결정들이 보수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게 만들고 있다. 적극적 우대 조치 위헌 판결도 그 흐름에 닿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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