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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숙의 작은 승리

2011-11-10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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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11. 11. 금요일
데니 크레인


우선 이거부터 보고 시작하자. 여기 두 장의 사진이 있다.

첫 번째 사진은 2010년 김진숙씨가 무기한 단식농성(최종 24일)에 돌입할 때의 사진이다.

두 번째 사진은 2011년 11월 10일 오늘 크레인 아래로 내려오기 전 모습이다.

두 사진의 시간차는 불과 일 년. 달라진 김진숙씨의 머리카락을 보라. 그녀의 나이는 불과 50대 초반이다. 그런데 몇 달 사이에 흰머리가 많아져버린 그녀.



2010년의 김진숙


2011년의 김진숙


먼저 309일이라는 사상 초유의 고공농성을 승리로 마감하고 내려오신 김진숙씨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그녀가 지샌 저 309일이라는 숫자 속에 어떤 고통과 인내가 깃들어 있는진 크레인 아래 우리로선 상상조차 불가능한 일이다.

활짝 웃으며 85호 크레인을 내려오는 김진숙씨 모습을 보니 기쁨과 더불어 왠지 모를 슬픔 또한 밀려온다. 금년 1월 6일 김진숙씨가 올라갈 때만 해도 검디 검던 그녀의 머리카락이 309일의 고공농성 사이 하얗게 변했다.

한 인간이 감내했어야 할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미루어볼 때, 그녀가 얼마나 힘든 시간들을 저 위에서 보냈을지. 1년새 너무도 변해버린 새하얀 머리카락만 봐도 느껴진다.

우리가 잊어선 안 될 것은 김진숙은 늘 그 자리에 있었다는 거다. 그녀가 갑자기 일 년 사이 이전과 다른 삶을 산 것이 아니라, 그녀는 언제나 85호 크레인 근처, 한진 노동자, 비정규직, 해고노동자들과 함께 있었다. 많은 분들이 금년 일 년 동안 있었던 김진숙과 희망버스의 뉴스만을 대부분 기억하시겠지만.



불과 2년 전 김진숙 씨가 2010년 1월 13일부터 무기한단식(최종 24일)을 감행하며 목숨을 내걸고 악독한 한진자본과 치열하게 싸워왔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치 않을게다. (군부독재 시절 김영삼이 세운 23일 간의 단식투쟁 기록을 능가)

그때 상한 위 때문에 309일의 고공농성 중에도 죽 외에는 먹을 수 없다던 그녀의 말을 기억한다. 하긴 그 죽마저 못 올리게 방해질했던 악랄한 이 정권과 자본의 비열함 또한 잊지 않고 기억한다.

구사대와 용역이 크레인 아래 친 그물
김진숙 지도위원이 그물을 내려다보고 있다
(출처 : 트위터 @spiritdino)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것이다.

김진숙은 85호 크레인 고공농성 전에도. 희망버스로 전국적인 아니 전세계적인 관심을 끌기 전에도. 늘 20여 년을 한결같았다는 것이다. 85호 크레인 아래에서, 때론 해고노동자들의 장기투쟁사업장에서, 때론 비정규직들과, 늘 그 자리에서 싸워왔다는 거다. 똑같은 사안을 가지고 불과 1년 전인 2010년에도 그녀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크레인이 아닌 그 아래서 천막을 치고 목숨을 건 24일의 단식투쟁을 했다.




헌데 왜 우린 그땐 몰랐을까?

결국 김진숙 같은 이들, 그리고 진보의 가치란 우리가 발견해 주어야 하는 게다. 이 사회의 소수자들이 아무리 연대를 부르짖으며 목숨을 걸고 싸운다한들 우리가 발견하지 못하고 외면하면, 그들은 저 김주익 열사처럼 또 저 곽재규 열사처럼 좌절하고 절망하며 크레인 아래로 몸을 던질 수밖에 없는 거다.

우리가 그나마 이제라도 희망버스를 통해 김진숙을 '발견'하고 함께 슬퍼하고 자신의 일인양 가슴아파하며 발을 동동 구르며 고양이 손이라도 보태지 않았다면, 오늘 우린 저 김진숙의 환한 웃음을 다시 볼 수 없었을 것이다.

난 그녀가 어떤 마음으로 저 크레인 위로 올랐는지 느낄 수 있었다. 지난 6월 그녀와 통화해보고 느낄 수 있었다.

"이분은 정말 죽을 각오로 올라가셨구나"

그런 생각이 드니 더욱 불길한 생각이 엄습해왔다. 이러다 진짜 시간이 더 지나면 극단적인 선택을 하진 않을까 하는. 당시는 농성 155일차였는데 그때만 해도 희망버스가 시작되기 전이라 사측/경찰의 침탈위협이 수시로 있던 때라 긴장감이 고조되던 때였다.


그러다 다행히 희망버스가 시작되었고 1차 희망버스 이후 그 모습이 SNS를 통해 퍼저나가며, 그때부터 서서히 사람들이 김진숙이란 사람을 그리고 한진중공업의 문제를 발견하고 바라봐 주기 시작했다.

그 힘이 아니었으면 아마 그녀는 저 뜨거운 여름 철판 속에서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군시절 콘테이너 안에서 근무를 선 적이 있었는데 상상을 초월했다. 난방이 없는 상태에서는, 겨울엔 밖보다 더 춥고 여름엔 5분 이상 그안에 있기가 힘들 정도다.)


그렇게 우리가 늦게나마 김진숙을 '발견'하고 그녀의 가치와 삶을 인정하고, 타인의 문제를 자신의 고민으로 함께 받아안았기 때문에 그 많은 난관을 뚫고 이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게다.


오늘 하루 김진숙과 희망버스 참가자분들 그리고 그 외 참석은 못하지만 멀리서 함께 맘 아파하며 트위터로 페이스북으로 그리고 기타 게시판을 통해 고양이 손 한손이라도 보태려 애쓰셨던 분들께, 감사와 더불어 오늘 하루 정도는 우리 서로를 격려하고 자축하는 의미에서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수고들 하셨다.

이 기억, 지난 여름을 우리는 얼마나 뜨겁게 지샜는가. 그 기억을 평생 간직하며 살자. 모두 고맙고, 사랑한다.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그녀가 내려온 지금 우린 또다른 거대한 싸움인 한미FTA통과 저지를 앞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녀가 몸을 채 추스리기도 전에 다시 앞줄로 나설까 하는 생각이 걸린다. (그녀의 성정을 알기에) 어쩌면 우린 그런 분들께 그동안 너무도 많은 짐을 떠넘기며 세상일을 외면한 채 살아온 건 아니었을까.

흔한 말에 '치우는 사람 따로 어지르는 사람 따로'란다. 누구는 일생을 고생하며 지금도 자신의 안위가 아닌 타인의 권리를 위해 목숨을 내던지며 싸우는데, 우린 패배의식과 이기심으로 자기합리화하며 이기적으로 살아온것은 아닌지. 그 이기심과 무관심이 가카를 불러냈고 오늘날의 이 파국을 맞게된 건 아닌지. 한 번쯤은 자문해 볼 일이 아닐까.








마지막으로 그녀와 함께 크레인 위 계단에서 온몸을 쇠사슬로 묶고 끝까지 저항하며 함께 연대 농성을 했던 박영제, 박성호, 정홍형씨. 그리고 건강악화로 중간에 크레인 아래로 내려와야만 했던 신동순 씨. 이분들도 우리가 잊지 않고 박수와 격려를 보내드려야 할 분들이다. 그 외 희망버스 관계자분들이나 김여진 씨, 김꽃비 씨 등 감사와 박수를 보낼 분들이 너무도 많다. 모두 가슴 뜨겁게 안아드리고 싶다.

왼쪽부터 박성호, 박영제, 신동순, 정홍형 씨

희망버스 인파


행복한 두 사람, 김여진-김진숙

왼쪽부터 김꽃비, 김조광수, 여균동

"레드 카펫에서 작업복을 입었던 어떤 여배우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부당하게 해고당한 한진중공업 노동자들과 아직도 크레인 위에서 투쟁 중이신
김진숙님을 잊지말고 지지해 주십시오." - 김꽃비 트위터 @kkobbiflowerain




다시 한 번 이 싸움을 잊지 않고 기억하며 맘과 행동으로 지지하고 연대해주신 여러분들께 감사 드리며, 김진숙 씨가 2010년 목숨을 건 단식 직전 남겼던 인터뷰 중 한마디를 남겨본다.


"싸우지 않으면 진다"
<김진숙>





故 이소선 여사의 영전에 바치는 한 노동자의 글


편집하다 울었습니다. 나는 비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