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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11. 16. 수요일

춘심애비


 



 


0. 현재 상황 진단, 그리고 질문


 


야권의 마음은 급한데, 중도보수 진영과 진보 진영 그리고 아직도 확실한 위치선정을 보류하고 있는 신정치 심볼(안철수) 간의 밀땅은 이어진다. 대통합-중통합-소통합이라는, 감자탕집에서나 볼 법한 사이즈 분류기준이 등장하기도 한다.


이러한 판국에 대해 지루함, 그리고 그 지루함으로 인한 불안감을 느끼는 사람은 비단 필자 혼자만은 아니렸다.


그래서 생각해봤다.


게임의 흐름이 돌아왔을 때 이를 놓치지 않기 위한 포인트는 무엇인가. 돌아온 흐름에 자만하다가, 북산의 불안요소에 의해 결국 패배하는 능남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떤 것이 필요한가.


필자는 정치공학은 조또 모르고 철학적/이념적 사고방식은 필자보다 수만 배 뛰어난 분들이 많이들 있으므로, 지금까지와 같은 맥락에서 게임이론과 심리학을 기반으로 디벼보고자 한다.


 


1. 오늘의 테마. 학습된 무기력



엄마 ㅠㅠ


 


학습된 무기력. 영어로 learned helplessness라는 이 말은, 셀리그만이라는 아저씨가 고안한 심리학 용어이다.


 


꽤나 유명하고 현대인의 우울증에 대해 자주 언급되는 개념으로, 유명한 실험이 있다.


 



(출처 : 장근영의 무비+)


 


위 그림에 실험 내용이 축약돼있다. 설명하자면 이렇다.


 


개한테 전기 충격을 준다. 다치진 않고 그냥 졸라 짜증날 정도로. 그럼 개가 말 그대로 개지랄을 할거다. 그러다가 저 벽을 넘으면 전기가 안오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러면 그 후에 같은 장치로 전기 충격을 주면, 벽을 폴짝 뛰어넘어 안전지대로 간다.


 


그런데 전기충격 구역에 개를 꽁꽁 묶어 놓아봤다. 그리고 전기충격을 주는거다. 역시 개지랄을 졸라 한다. 하지만 벽을 넘을 수는 없기 때문에 전기충격을 계속 받는다.


그러다가 풀썩 주저 않는다. 전기충격을 그냥 받아들여 버린 거다.


한 번 그렇게 받아들인 개는, 줄을 풀어줘도 개지랄을 하지도, 벽을 넘지도 않는다. 그냥 계속 주저 앉아서 전기충격을 받아들이더라…는 실험 결과.


뭐 개라는 종의 습성이 원래 그런거 아니냐는 반론도 있을 거다. 실제로 있었다. 그래서 사람으로 실험을 해봤다. 물론 전기충격은 아니다.


 


A그룹은 약간 어렵지만 풀 수 있는 문제를 주고 풀게 한다.


B그룹은 풀 수 있을 거 같아 보이긴 하는데, 졸라 어려운, 풀 수 없는 문제를 주고 풀어보게 한다.


이후 그들을 어떤 방에 데려가는데, 그 방은 졸라 짜증나는 소음이 들리는 방이다. 그 소음을 없애려면, 손의 위치를 특정한 장소에 갖다놔야한다.


 


A그룹은 비교적 쉽게, 소음을 없애는 법을 찾아냈고,


B그룹은 소음을 없애는 걸 포기한 채 그냥 소음을 받아들이는 비중이 비교적 높았다.


즉, 사람은 <내가 아무리 지랄을 해도 없어지지 않는 불편함>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기제를 갖고 있다는 것. 일상적으로는 체념이라 할 수 있겠고, 심각하게는 우울증이라고 할 수 있겠다.


중요한 건, 고통이나 불편함에 대해 <내가 어찌 할 수 없는 상황>을 반복하여 제공하면 그 고통이나 불편함을 받아들이는 것이 정상적인 인간이라는 사실이다.


 


2. 한국 대중이 학습한 정치 무기력


한국의 근현대사를 통틀어 일반 대중들이 정치적으로 쾌거를 이룬 경험은 사실상 전무하다. 게다가 근대 이전에는 세계역사 전반이 신분제를 기반으로 한 사회구조를 기반으로 했고 한반도의 역사도 예외는 아니므로, 결국 한반도에는 대중들이 정치적으로 쾌거를 이룬 경험이 역사 내내 사실상 전무하다고 볼 수 있겠다.


 


일본 제국주의로부터의 해방도, 자력이 아닌 환경 변화 때문이었고 그나마도 일본에서 소련/미국으로의 사실상 이권양도라고 봐야하는 수준이었다. 근현대사의 유일한 ’혁명’수식을 받는 4.19도, 한맺힌 5.18 광주민주화항쟁도, 그 이후로의 지배/피지배 프레임을 완전히 바꾸지는 못했다.


 


폄하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실제 그랬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지배하던 이들이 지배해왔고, 당해야 하는 입장의 대중들은 계속 당해온 것이다.


 


한국 근현대사에는 직접 뭔가 해냈다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던, 프랑스 혁명, 미국 독립, 68혁명, 동구권 국가들의 공산주의 혁명, 그 반대의 자유화 등등과 같은 이벤트가 역사상 한 번도 없었다. 어찌보면 상당히 특별한 점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최근 중동권 일련의 자스민 혁명과 같은 경험도 없지 않았는가.


 


일본은 미국발 원자폭탄이 걷어냈고, 이승만은 떨궜어도 친일파와 기존 기득권은 잔존했고, 박정희는 엄한 놈이 죽였고, 전두환은 아직도 살아있다. 한반도의 대중들이 성취한 것은, 김대중 노무현 당선, 촛불시위를 통한 의사표현, 2002 월드컵 거리응원… 정도.


 


유럽, 미국에서는 일상이 되어버린 것들이 우리에겐 아직 <성취>인 셈이다. 이 간극만으로도 우리가 얼마나 <정치적 성취>와는 거리가 먼 역사를 지니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현대인들의 탈정치적 성향, 정치불감증이 최근까지 팽배했던 것은 우리가 무식해서도, 비열해서도 아니고, 우리의 노력으로 뭔가 씨바 얻어냈다는 성취감을 얻었던 적이 없다는 사실의 영향을 받는다는 거다. 정치사적으로 말이다. 그런의미에서 그 <정치불감증>을 <학습된 정치적 무기력>이라고 명명할 수 있겠다.


 


지난 글에서 <인지부조화>를 통해 언급했듯, <학습된 무기력>이라는 심리학 개념을 도입한 이유는 단 하나다.


 


그게 <정상>이라는 거다. 대중들이 뭐 대단한 문제가 있거나 무식해서가 아니라,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이런 역사 속에서 이렇게 되는 게 지극히 자연스럽다는 것.


 


이 사실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3. 운동권의 학습된 무기력


 



(위 이미지는 본 글과 별 상관이 없거나 말거나)


 


한반도의 근현대사만을 놓고 볼 때 소위 <운동권>이라 함은 다양한 함의를 갖는다.


>딱히 누가 규정한 건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대학교육은 받았음을 의미하니 지식인축에 끼면서도, 마땅히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는 건 또 아니다. 왜냐하면 운동권이란 말은 보통 <출신>이란 수식어가 붙는다는 사실로 볼 때, <대학생 시절>에 한정되는 표현이라는 특성을 갖기 때문이다. 대학생이면서 지식인 반열에 오르는 천재가 어디 흔한가. 하지만 운동권 대학생은 흔하지 않은가. 게다가 NL, PD라는, 학술적 의미에서는 절대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 사상적 계파가 따로 또 같이 갈등과 협력을 반복한다.


즉, <일반적인 좌파인지, 민족주의가 곁들여진 변종 좌파인지는 구분되지 않았지만 어쨌든 좌파적 사상을 견지하며, 이를 행동으로 옮기는 예비 지식인으로서의 대학생>이라는 졸라 긴 의미를 포함한다.


 


이들도 역시, 뭔가 성취한 적이 없다. 뭐 임수경 방북 정도 있다면 있겠다. 이는 지형을 바꾸는 수준의 성취는 조또 아니다. 68년도 파리의 대학생들이 느낀 성취감에 비하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미약하다.


 


역시, 폄하할 마음은 추호도 없다. 개인적으로는 대학시절을 불사른 민주화 투쟁의 산 증인들에게 존경과 감사함을 느낀다. 하지만 사실을 놓고 비교하면 그렇다는 거다. ’우리는 세상을 바꿨어 씨바’라는 성취감의 정도가 상대적으로 약했다는 것. 이건 사실이라고 봐야 한다. 열심히 했다거나 의미가 있다는 것과는 다른 관점의 얘기다.


 


게다가 이들은 소비에트의 정치적 몰락과 북한의 현실적 몰락을 실시간으로 지켜봐야 했다. 긍정적인 방향의 간접경험마저 한 적이 없다.


 


정리하면 이렇다.


 


한반도 역사상 누구보다 대중의 정치적 참여를 적극적이며 급진적으로 수행했던, 졸라 복합적인 한 무리가 있는데 이들은 그들의 열정에 상응하는 성취를 해본 적이 없다.


 


그들이 남들보다 훨씬 적극적이며 급진적으로 참여한 이유는, 많이 공부했고 그래서 현실에 더 많은 비관과 좌절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취를 해본 적이 없다.


 


남들보다 현실개선의 의지가 더 컸던 주체가 연속된 좌절감에 대해 반응하는 양식. 이는 2가지로 나뉠 수 있다. 


 


첫 번째는, 학습된 무기력에 빠지는 것. 즉, 좌절을 받아들이는 것. 운동권 출신의 투사가 자본주의의 선봉에 선다던가, 한나라당에 입당하여 수구꼴통과 한몸이 된다던가 하는 반응.


 


두 번째는, 아직 학습된 무기력에 빠지지 않고, 계속해서 전기충격을 피하려고 하는 것.


 


전자는 그냥 넘어가자. 결국엔 시간이 오래 걸렸을 뿐이지 그냥 평균적인 반응이니까.


 


후자. 계속해서 노력하는 운동권 출신들. 이들이 갖게 된 특성은 뭘까.


 


셀리그만의 실험에는 나오지 않지만, 상식적인 논리로 추론해보자. 평균적으로는 이제 체념했을 법한 지속적인 좌절을 아직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심리적 기제는 분명 <내가 이 좆같은 상황을 극복할 수 있다>는 컨셉이 평균 이상으로 훨씬 강하다는 의미일 거다.


 


일반적인 표현으로 하면, 자존감, 신념 이런 것들이 평균적인 인간보다 훨씬 강한 집단이 라는 것. 그렇기 때문에 남들보다 오래, 무기력해지지 않는 것이고, 일반적인 인간들 중 정치적 권력욕이 강한 인간들이 모여있는 집단인 보수 정당에 비해 진보정당은 <정치권력>을 매개로 한 협상에 시큰둥할 수 밖에 없는 거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권력을 너희에게 나눠주마> 정도의 현실적 보상이 아니라, 그들이 수십 년 동안 참고 벼텨왔던 전기충격이 멈춰지는, 훨씬 높은 스케일의 보상이다.


 


즉, 세상이 그들이 원하는 바에 가깝게 바뀌는 것만이 그들을 움직일 수 있는 동력이 된다. 의석수 채우고 정책 한두개 희석해주는 건 그들의 자존감과 신념에 비하면 너무도 미약한 미끼에 불과하다.


 


4. 변수의 출현


 



왠만한 컴퓨터 사용자에게 익숙했던 이 화면의 제작자는 뉴규?


 


안철수.


 


일개 개인이 한반도의 정치 지형을 바꾸고 있다는 점은 모두가 동의하고 있다.이건 그에 대한 정치적 지지나 평가와는 별개의 문제다. 모든 실질적 주요 정치 주체들이 동요하는건 사실이니까.


 


그가 정치적 차원에서 한 행동은 2개뿐이다.


 


1. 빛의 속도로 이뤄진, 박원순 지지.


2. 1500억 사회 환원.


 


이에 대한 정치계의 동요는, 아주 당연하게도 대중들의 동요에서 기인한다.


 


저 2가지 행동이 왜 이런 파란을 일으키는지에 대한 <이유>는 대중들의 <학습된 정치적 무기력>의 성질을 파악할 수 있는 바탕이 된다.


 


우선, 안철수의 박원순 지지.


안철수가 서울시장 재보선에 대해 언급한 시점까지는 여느 재야인사의 정계진출 모션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한나라당, 민주당에서 지들 조때로 논평을 할 수 있었다. ”나 이런 거 많이 봐서 알아”라는 식.


대중들의 반응도, 기존의 인기인 정계진출에 대한 반응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씨바 너무 빨리, 졸라 쿨하게 박원순 지지 선언을 한다. 이렇게 빠른 정치적 연대는 유사이래 본 적이 엄따. 좀 뻐대고, 지지도도 올리고 하다가 상대가 달달한 보상을 약속하면 그때 가오잡고 연대해주는 것이 자연스러운데 이건 뭐 정신차릴 틈도 없이 눈 깜짝할 사이에 전격 지지 선언.


 


그런데 그 이유가 더 충격적이다.


 


”박원순이 나보다 나아서”


 


내가 나가면 못 이길 거 같은데 박원순이 나가면 이길 수 있을 거 같아서도 아니고,시민들이 박원순을 더 원해서도 아니고, 사실은 내가 하고 싶은데 TV토론회에서 너무 발리는 바람에 쪽팔려서도 아니고 말이다.


 


이 사태의 특징은 딱 2가지다.


 


새롭고, 옳다.


 


늘 느끼던 전기충격과 졸라 다른, 새로운 자극이다. 근데 그게 기분이 좋다. 학습된 무기력에 빠진 개에게 졸라 맛있는 갈비살을 한 점 줬다던가, 아니면 들판을 뛰어다니는 파트라슈 영상을 보여준 거다.


 


잊고 있었는데, 졸라 옳은 무언가를 일순간에 봐버린 그 신선한 충격이다.


 


반대로 말하면, 대중들은 그동안 늘 보아오던 정치패턴, 도대체 어떤 가치로도 정당화할 수 없는 뻔한 정치논리라는 자극에 탈진될 정도로 지쳐있었다는 거다. 그 반대에 해당하는, 이데아에 가까운 자극을 받자마자 바로 반응하는 것이다. 아 맞다 씨바 이런게 있었지, 하고.


 


그런데 그 안철수가 1500억을 사회에 환원한다. 그것도 졸라 갑자기. 뜬금없는 타이밍에.


 


여기서 중요한건 1500억이라는 숫자다.


 


어떤 사람이 큰 돈을 기부하는 건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수십 억을 기부한 김밥 할머니, 수십 억을 기부한 연예인, 수 억씩 계속 기부하는 사회운동가, 수백 억을 기부한 척 하는 가카 등등.


 


근데 1500억이라니. 이런 숫자는 <기부>나 <환원>이란 개념과 매칭이 안 된다. 국민들은 이런 단위의 숫자를 그런 맥락에서 접한 적이 없다. 100,000,000,000 이라는 단위는 가카가 재임기간동인 삥땅친 세금의 총액이라던가, 전두환이 퇴임 후 받아온 뒷돈의 총합이라던가, 어떤 국가정책의 예산에서나 보던 숫자다. 그런데 이 숫자를 <기부>, <환원>에 매칭시킨 이 마법과도 같은 상황.


 


이건 안철수이기 때문이 아니라, 1500억이기 때문인 거라고 확신한다.


 


그 증거로, 일반적으로 누군가 얼마를 기부했다면 삶에 찌든 서민들은 ”그게 그 인간 재산의 몇%인데?”가 궁금해지기 마련이다.


 


어떤 인기배우가 한 100억 기부했다고 치자. 그런데 그 배우는 이미 50억 아파트 2개와 60억짜리 빌딩을 갖고 있다.그러면 서민들은 오히려 박탈감을 느낀다. 아 저 새끼는 100억을 기부해도 160억은 남네. 씨바.


 


그런데 1500억은 아예 맥락이 다른거다. 분명히 기사 1보부터 ”소유한 주식의 50%”라고 명시돼 있는데도, 아 저 새끼는 1500억을 기부해도 1500억은 남네 씨바, 이런 반응이 안 나온다. 그냥 졸라 놀라운 거다. 1500억? 1500억?


 


하물며 성룡이 전재산을 다 기부해도 이런 반응은 안 나오는 거다. 왜. 액수가 1500억은 안 되니까.


 


그냥 그 자체가 충격적인 거다. 1500억과 기부. 이런 자극은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옳다. 다시 한 번 새롭고 옳은 거다.


 


그러니까, 한반도의 대중들은, 저런 <천문학적>인 액수의 돈이 옳은 일에 쓰인 걸 본 적이 없는거다. 오로지 옳기만 한 일에 저런 액수의 돈이 가는 건 본 기억이 없다.


 


만약, 행정직인 대통령을 뽑는 게 아니라, ”대통령이라는 직책에 어울리는 덕목을 갖춘 사람을 고르시오”라는 질문을 지금 당장, 모든 국민에게 한다고 치자. 박근혜, 문재인, 안철수 놓고.


 


이런 질문은 안철수가 무조건 이긴다. 그러니까 다수 대중들의 현재 마음은 이런 거다.


 


”아 씨바 안철수 대통령 만들고 싶어 죽겠는데… 근데 대통령이라는 자리에서 직무를 잘 할 만한 인간인지는 모르겠네”


 


잘 생각해보면 이건 희한한 심리상태다. 역대 대선에, 저런 후보가 누가 있었나.


 


”다들 이래저래 맘에 안 드는데 개중에 그래도 이사람이 대통령에 어울리네. 얘로 하자.”


 


이게 일반적인 마음이었던 거다. 노무현 지지자들이 좀 욱할 수도 있겠지만, 대선 당시를 기준으로 생각해보자. 대선 당시에는 지금처럼 노무현 지지율이 감성적으로까지 일반화되진 않았었다.


 


보통은, 각 후보들이 대통령이 되면 안 될 거 같은 이유가 보이는데, 그게 제일 적을 거 같은 사람을 뽑는 과정이 대선이었는데, 안철수는 희한하게 대통령이 되면 안 될 거 같은 이유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그 자체가 너무 싫고 아쉬운 거다. 대통령까진 아닌 거 같은데도 그냥 확 시켜버리고 싶게 만드는 그 속성.


 


그게 바로, 새롭고, 옳다. 는 것.


 


전기충격에 신음해오던 무기력한 대중들을 단박에 일으켜 세워준 건 지금까지의 전기충격과는 정반대의 자극이면서, 옳고 바람직하고 기분 좋은 것.


 


그 속성이다.


 


5. 새롭고, 옳게.


 



영어로 New, Right라고 이걸 뉴라이트에 갖다붙이면

다 죽여버리겠다고 선언하노라.


 


안철수를 통해 얻은 키워드. 새롭고, 옳다.


 


학습된 정치적 무기력에 주저앉아있던 대중들이 ’어라 씨바?’라는 반응을 하게 해준 자극의 속성이다. 나꼼수의 폭발적 인기도, 좀 더 돌이켜보면, 효순이 미선이 촛불집회도, 같은 맥락의 속성을 지닌 것들이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새로운 것인데 그게 옳다. 아주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옳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중정치적 차원에서의 승리를 꽤하는 야권은 이 속성을 최대한 이끌어내야한다. 새롭고 옳다는 두 속성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대중들은 바로 등을 돌릴 수 밖에 없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역사 내내 짊어져왔던 학습된 무기력 때문이다.


 


정치에 관심을 가져주세요, 참여해주세요, 의견을 내밀어주세요 라는 언어적 부탁은 무의미하다. 계속 해오지 않았는가. 투표 독려, 정치 참여 유도. 언제 한번 성공한 적 있나. 그 맛을 느끼게 해줘야한다. 전기충격이 없는 평화로움. 학습에 의한 관성으로써의 안정감이 아니라 진짜, 참된 의미의 안정감. 그로인한 행복감.


 


역대 주요 선거의 투표율로 보면 절대 안 나오는 그 숫자가, 나꼼수와 촛불집회에는 나오지 않았던가.


 


감자탕스러운 대통합, 중통합, 소통합 이딴 되도 않는 단어 들이밀면서 ’대통합 해야되는데 진보진영 좀 혼내주세염’ 이딴 태도는 안 먹히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정치인의 그런 태도 자체가 전기충격이기 때문이다. 이미 평생 받아왔던 그 불편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중요한 것은, 운동권이라는 백그라운드를 가진 진보진영의 태도이다.


 


이 ’새롭고 옳음’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을 포퓰리즘이나 일시적 현상, 아이돌 현상 정도로 받아들이면 그들 자신의 미래도, 우리의 미래도 암담하다.


 


그들 자신이 생각하기에는 자신들이 버텨온 스트레스, 그리고 자신들이 생각하는 이상향이 대중들의 그것과 다르게 보일 수 있다. 자존감이 훨씬 세고, 신념도 강하지 않던가. 한창 때 졸라 고민하고 싸워봤는데, 지가 옳지 않던가.


 


하지만, 실상은 대중들도 같은 스트레스를 같이 버텨왔다는 것. 그리고 대중들도 그 전기충격이 없는 세상에 대한 열망을, 바로 지금, 진보정당이 아니라 안철수를 통해 재확인 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보진영이 그렇게 하고 싶었던 바로 그것이, 대중들이 진보진영의 이상향을 공유하는 것 아니었던가. 전기충격이 더 이상 없는 세상이 분명 만들어질 수 있다는 희망 아니었던가.


 


바로 지금, 대중들이 그 희망의 한 조각을 맛본 것이다. 이 씨바 이런 게 있었어.


안철수라는 한 돈 졸라 많고 졸라 착한 개인으로 인해서 말이다.


 


 


 


새롭고 옳은 그림.


범야권에 졸라게 촉구하는 바이다.


진짜 졸라 요구한다!


 


춘심애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