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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3. 7. 수요일

블루칼라


 



 




 


데브리(Debris)


 


2장. 콕핏(Cockpit) - B


 


라이스의 머신은 쏟아지는 빗줄기를 가르며 거침없이 질주했다. 서킷의 젖은 노면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듯 했다. 머신에 장착된 레인 타이어는 노면을 움켜잡듯이 빠르게 회전하고 있었고 그 뒤로 뿜어져 나오는 물보라는 TV 화면 너머까지 쏟아질 것 같았다.


 



 


라이스는 가전 매장의 쇼윈도를 양손으로 짚은 채 TV 화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 화면 속에는 라이스가 꿈꿔왔던 가장 이상적인 주행이 있었다. 라이스 자신이 한계점이라고 생각한 지점을 넘어서까지 브레이킹을 늦추며 빠른 속도로 코너에 진입한 머신은 그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 코너를 공략한 뒤 포효하는 엔진 소리와 함께 직선 코스로 빠져 나갔다.


 


저 정도 속도로 코너에 진입했다면 아무리 레인 타이어를 장착했다고 해도 머신의 후미는 미끄러질 수밖에 없을 터였다. 아니, 비에 젖지 않은 마른 노면에서라도 저런 주행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화면 속의 머신은 라이스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물리의 법칙을 벗어난 듯한 주행으로 서킷을 질주하고 있었다. 해설자 역시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본 사람처럼 소리를 질러댔다.


 


[놀랍습니다! 어제 치러진 예선 기록에 따라 5위로 출발한 라이스 선수! 차근차근 선두권의 머신들을 추월하더니 결국 마흔 번째 랩에 이르러 맥라렌의 크로닌 선수를 제치고 선두로 올라섰습니다! 그리고 선두로 나서자마자 폭우를 뚫고 믿기지 않는 속도로 역주하고 있습니다! 이번 시즌 한 번도 선두권에 나서지 못했던 라이스 선수였습니다만 이건 정말 대단합니다! 보십시오! 그간의 치욕을 되갚아 주겠다는 듯 상파울루 서킷의 직선 코스를 질주하고 있는 라이스 선수! 진정한 왕의 귀환입니다!]


 


하지만 머신에 타고 있는 건 왕이 아니었다. 늙고 쇠약해진 왕을 밀어내고 왕좌를 차지할 이름 모를 드라이버. 그가 지금 보여주는 주행은 F1에서 여러 시즌을 헤치고 나온 노장의 그것이 아니었다. 무리의 늙은 우두머리 숫사자를 쫓아내는 젊은 사자처럼, 저 머신의 주행은 무모하리만큼 망설임이 없었다.


 


하늘은 구멍이라도 뚫린 듯 비를 퍼부어댔다. 가전 매장의 쇼윈도는 빗물이 흘러내려 화면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고 서킷의 엔진음도 빗소리에 가려져 들리지 않았다. 라이스는 비틀거리며 가전 매장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홀린 듯한 얼굴로 가장 큰 TV 앞에 섰다. 하지만 매장 안에 전시된 TV들이 다 그러하듯이 그의 앞에 놓인 TV에서도 화면만 보일 뿐 소리는 꺼져있었다.


 


“볼륨을..... 볼륨을 높여.”


 


매장 직원은 비에 젖어 물을 뚝뚝 흘리며 가게 안으로 들어선 라이스가 술 냄새까지 풍기며 중얼거리자 얼굴을 찌푸렸다.


 


“손님, 죄송하지만 매장에 전시된 TV들은 여러 채널을 보여주기 때문에 소리를 키울 수가 없습니다.”


 


라이스는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다시 한 번 지갑을 꺼내들었다.


 


“이 TV를 살게. 그러니까 볼륨을 높여.”


 


이번엔 그의 지갑이 부리는 마술이 먹혀들었다. 직원 입장에선 12,000 헤알이 넘는 80인치 샤프 TV를 팔 수만 있다면 그게 술주정뱅이든 마약 중독자든 상관없었다. 직원은 군말 없이 TV의 볼륨을 높였다. 그러자 서킷을 질주하는 F1 머신들의 굉음과 해설자의 흥분된 목소리가 TV에서 터져 나왔다.


 


[마흔한 번째 랩에서도 선두를 지키고 있는 라이스 선수! 완만한 굴곡의 말발굽(Ferradura) 코너를 직선 도로와 다름없이 질주합니다! 하지만 그 다음은 오렌지(Laranja) 코너입니다! 그가 선두로 나선 뒤 최초로 맞이하는 이 코너를 어떤 형태로 공략할지 기대됩니다!]


 


라이스는 상파울루 서킷의 오렌지 코너를 ‘밍기뉴 코너’라고 불렀다. 바스콘셀로스의 소설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Meu pe de Laranja Lima)’에서 어린 주인공이 오렌지 나무에 붙인 이름이 밍기뉴였는데 라이스는 아무 뜻 없는 그 단어의 뉘앙스가 좋았다. 하지만 지금 선두의 머신이 진입하려는 코너는 오렌지, 혹은 밍기뉴라는 귀여운 이름에 걸맞지 않게 180도의 급격한 굴곡이 연이어 등장하는 난코스의 시작이었다. 시속 350km의 속도를 자랑하는 F1 머신들도 이 코너에 진입할 때는 급격히 속도를 줄이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젊은 사자는 코스 진입 직전까지도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라이스 선수! 오렌지 코스에 진입하는 속도가 너무 빠릅니다!]


 



 


마른 노면에서라도 저런 속도로 오렌지 코너에 진입하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라이스의 대역은 그 아슬아슬한 한계치 너머로 진입한 뒤 급격하게 브레이킹을 했다. 그리고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뽑아낸 레코드 라인(Record Line. 서킷에서 가장 빠른 기록을 낼 수 있다고 여겨지는 가상의 라인)보다 더 깊숙하게 코너를 공략하고는 오렌지라 이름 붙여진 지옥을 빠져나왔다. 그림으로 그린 것 같이 매끄러운, 하지만 그 코너의 무서움을 아는 라이스로서는 경악할 수밖에 없는 주행이었다. 도대체 저런 주행을 할 수 있는 드라이버가 누구일지 그는 도무지 떠올릴 수가 없었다.


 


라이스의 대역은 오렌지 코너를 통과하며 2위인 맥라렌 팀의 크로닌과 거리를 벌렸지만 그 차이는 금새 다시 좁혀졌다. 선두와 한 바퀴 차이로 벌어진 로터스 팀의 머신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경우 백마커(선두와 한 바퀴 차이로 벌어진 머신)는 선두의 머신에게 추월할 길을 터줘야 하는 것이 F1의 룰이었지만 급격한 코너가 연달아 나오는 지점이라 길을 터주기가 어려웠다.


 


[아깝습니다! 역주하던 라이스 선수의 머신이 백마커에 가로막혀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2위인 크로닌 선수, 선두와의 거리를 좁혀갑니다!]


 


빗속에 벌어지는 레이스는 비에 젖어 미끄러운 노면의 상태도 문제였지만 튀는 물보라에 머신의 사이드미러가 가려져 후미에서 추격해오는 다른 머신의 상황을 파악하기 힘들다는 것도 문제였다. 하지만 F1에서도 선두를 다투는 드라이버라면 눈으로 보지 않아도 추격해오는 드라이버의 움직임을 느낄 수 있는 법. 고막을 터뜨릴 것 같은 자기 머신의 엔진 소리 너머로 추격자의 심장 박동까지 느낄 수 있는 것이 F1의 괴물들이었던 것이다.


 


라이스의 팀 동료인 타일러는 맥라렌 팀의 드미트리에게 가로막혀 8위로 떨어져 있었다. 드미트리는 크로닌에게 선두 경쟁을 맡기고 자신은 철저하게 타일러를 마크하는 임무를 맡았다. 크로닌 입장에선 드미트리의 희생을 생각해서라도 어떻게든 선두를 차지해야 했다. 하지만 시즌 내내 퇴물 취급을 당하던 라이스가 이렇게 선두까지 치고 올라올 줄은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크로닌은 조금 전 라이스에게 선두를 빼앗겼을 때를 생각했다. 그것은 상식을 뛰어넘은 주행이었다. F1의 전설로 불렸던 노장의 투혼이라고 치부하기엔 너무나 무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라이스의 각오가 그렇다면 선두를 탈환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었다. 승부를 건다면 라이스가 백마커에게 가로막힌 지금 밖에 없었다.


 


[크로닌 선수! 라이스 선수의 머신 후미에 붙어 공기 저항을 최소화하며 숨을 고르고 있습니다! 다음 코너 끝에서 백마커가 길을 터줄 때 승부를 걸 생각인 듯 합니다!]


 


해설은 정확했다. 180도짜리 급격한 코너를 빠져나온 백마커가 바깥쪽으로 빠지며 길을 터줄 낌새를 보였을 때 이미 크로닌은 가속을 시작하고 있었다. 젊은 사자의 이빨은 날카로웠으나 경험이 부족했던 것이다. 라이스의 대역은 크로닌에게 안쪽 라인을 빼앗기며 동시에 선두까지 빼앗겼다.


 


[한 차례 선두를 빼앗겼던 크로닌 선수! 기막힌 가속 타이밍으로 라이스 선수를 추월하는 데 성공합니다! 이렇게 되면 마흔한 번째 랩도 크로닌 선수가 선두로 통과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TV 중계를 지켜보는 라이스로서도 이번 랩은 크로닌이 선두로 통과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접합점(junção)이라고 이름 붙여진 90도짜리 코너를 빠져나오면 상파울루 서킷은 거의 직선과 다름없는 코스가 1km 넘게 펼쳐진다. 이번 랩이 끝나기 전에 선두를 탈환할 기회는 접합점 코너뿐이었으나 90도짜리 코너란 공략할 수 있는 라인이 거의 정해져 있다고 봐야 했다. 다른 라인을 이용한다면 결과적으로 기록이 늦어지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그 코너는 추월할 길이 없는 일차로를 달리는 것과 다름 없었다. 선두를 달리는 크로닌이 실수를 하지 않는 다음엔 거의 추월이 불가능한 코너였다.


 


하지만 그것은 늙은 사자의 생각일 뿐이었다. 크로닌이 접합점의 안쪽을 파고들기 위해 교과서적인 아웃 인 아웃(Out in Out)의 바깥쪽 라인으로 접어드는 순간 TV 화면 속에서 라이스의 머신이 사라졌다. 카메라가 미처 따라잡지 못할 정도로 빠른 움직임이었다.


 


‘설마 안쪽으로?’


 


간신히 카메라가 사라진 머신을 따라잡았을 때, 라이스의 놀라움은 더욱 커졌다. 라이스의 머신이 빗길에 미끄러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무모한 도전 끝에 실패해 허우적거리는 꼴사나운 모양새가 아니었다. 정확히 계획되고 통제된 환상적인 드리프트였다.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노면과 타이어의 접지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F1 경기에서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드리프트 주행을 시도하는 라이스 선수!]


 


해설자의 목소리는 놀라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해설자보다 더 놀란 것은 접합점 코너를 공략하는 유일한 라인을 차지하고 있다고 자신했던 크로닌이었다. 그는 자신의 눈 앞에서 매끄럽게 코너를 미끄러져가는 라이스의 머신을 경악하며 바라봤다. 크로닌은 자신의 안쪽 코너로 드리프트하고 있는 라이스의 머신 때문에 자신이 달리려고 했던 라인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다급히 크로닌이 스티어링 휠을 꺾었을 때, 그의 머신은 젖은 노면 위를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은 크로닌이 통제할 수 없는 미끄러짐이었다. 크로닌의 머신은 코스를 벗어나 격하게 가드에 부딪쳤다. 그 충격에 전복된 크로닌의 머신은 몇 차례 크게 뒹굴고서야 코스 밖에서 멈춰섰다.


 


[크로닌의 머신이 미끄러지며 전복됐습니다! 머신도 크게 파손된 것으로 보이는데 크로닌 선수는 괜찮을까요? 아, 다행입니다! 크로닌 선수 자신의 힘으로 머신에서 걸어 나오고 있습니다! 라이스의 머신이 드리프트하며 크로닌 선수의 머신보다 먼저 라인을 파고들었기 때문에 정상적인 추월로 인정! 경기는 계속 진행됩니다!]


 


TV 중계를 보고 있는 라이스는 온몸이 떨렸다. 그가 레이스를 지켜본 건 고작 두 바퀴, 시간으로 따지면 3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에겐 인생을 통틀어 가장 전율을 느낀 순간이었다.


 


다른 사람이 아닌 라이스였기 때문에 더욱 뼈저리게 알 수 있었다. 이제 자신이 쌓아온 전설은 사람들의 뇌리에서 지워질 것이다. 진정한 제왕은 저 화면 너머에 있었다.


 


라이스는 휘청거리며 매장을 걸어 나왔다. 뒤따라 나오며 TV를 어디로 배달할지 묻는 직원의 목소리도 그에겐 들리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하나뿐. 자신을 대신해 머신에 탄 드라이버를 만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라이스는 쏟아지는 빗속에 서서 자신의 주머니를 뒤져 셀룰러폰의 전원을 켰다. 전원을 켜자마자 수십 통의 부재 중 전화와 메시지가 들어왔었음을 알 수 있었다. 거의 모두 단장에게서 온 것들이었다. 그는 메시지를 확인하지도 않고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한 번 울리자마자 단장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라이스! 자네 지금 어디 있나? 지금 자네 대역이 우승을 할지도 몰라! 헬멧 쓴 대역을 시상대에 올릴 순 없잖나! 지금 당장 경기장으로 와! 어서!]


 


“단장님, 전 제 대역을 맡은 드라이버를 만나봐야겠습니다. 제가 도착하기 전까지 그 친구를 절대로 빼돌려선 안 된다는 얘깁니다. 아시겠죠?”


 


“일단 와서 얘기해! 어서 이쪽으로 오라고!”


 


라이스가 택시를 타고 상파울루 서킷에 도착한 건 그로부터 30분 후였다. 레이스는 마지막 바퀴를 남기고 있었지만 라이스가 TV 중계를 통해 본 41번째 랩 이후로 그의 대역은 한 번도 선두를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모자를 깊이 눌러쓴 라이스가 지켜보는 가운데 그의 대역은 2위인 페라리 드라이버와 반 바퀴 이상 차이를 벌린 채 골인했다. 팀 동료인 타일러는 자신을 마크하던 드미트리에게 발목이 붙잡혀 6위에 머물렀다. 라이스의 대역이 펼친 역주가 아니었다면 컨스트럭터 챔피언은 맥라렌 팀에게 빼앗길 뻔한 것이다. 덕분에 레드불 팀은 드라이버즈 챔피언과 컨스트럭터 챔피언 양부문을 모두 석권할 수 있었다.


 


단장이 은밀히 라이스를 불러 말했다.


 


“자네의 대역이 지금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네. 곧 시상식이 있을 거니까 얘긴 짧게 끝내도록 해.”


 


라이스는 자신의 대역을 만나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상대의 얼굴을 보게 된다면 무슨 말이든 떠오르리라 생각했다. 그는 잠시 심호흡을 한 뒤 대기실의 문을 열었다.


 


단장의 말대로 라이스의 대역은 대기실에서 혼자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라이스의 기대대로 얼굴을 마주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 사이 드라이빙 슈트를 벗고 캐쥬얼한 옷으로 갈아입은 상태였지만 여전히 헬멧을 쓴 채 얼굴을 감추고 있었다. 라이스에게조차 자신의 얼굴을 보이지 않겠다는 완고한 표현이었다. 소매 밖으로 드러난 손의 피부색을 보건대 백인에 가까운 혼혈이 아닐까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다.


 


“얼굴을 감추는 건 혹시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이란 뜻인가?”


 


“아닙니다. 당신은 절 알지 못합니다.”


 


헬멧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는 서른이 넘지 않은 젊은 사내의 것이었다.


 


“그래, 자네 말이 맞을 거야. F1은 물론이고 F2나 F3에도 자네와 같은 주행을 하는 드라이버는 없으니까. 그런 드라이버가 있었다면 이미 나나 이 바닥 관계자들의 눈에 띄었겠지. 그런데 도대체 자넨 어디서 그런 실력을 키울 수 있었던 건가?”


 


“제 과거를 당신에게 말할 이유는 없다고 보는데요. 제가 라이스 씨 대신 레이스에 참가한 건 어디까지나 제 필요에 의해서였습니다. 그리고 말씀 들으셨겠지만 오늘 이후로 제가 F1 머신을 모는 일은 없을 겁니다.”


 


헬멧을 쓴 사내의 말에 라이스는 냉소 짓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건 자네 뜻대로 되지 않을 걸. 자네처럼 엄청난 주행을 보여주는 드라이버를 놓칠 만큼 F1 관계자들이 멍청하진 않아. 내 대역으로 뛰어서 우승했다는 이야기는 공개할 수 없겠지만 그 실력이면 어느 팀에서라도 거액을 들여 자네를 스카웃할 걸세.”


 


사내는 헬멧을 쓴 채 고개를 저었다.


 


“죄송하지만 전 F1 드라이버를 꿈꾸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 저랑 만나고 싶다는 이유가 제 장래에 대한 이야기라면 그건 당신이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제가 원하는 건 당신의 대역을 맡은 대가를 받는 것뿐입니다.”


 


라이스는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대가라고? 그게 얼마인지는 몰라도 자네 실력이면 단장이 약속한 금액보다 수백, 수천 배는 더 벌 수 있어! 자네가 원하기만 한다면 내가 다른 팀을 소개해줄 수도 있단 말이야!”


 


하지만 사내는 라이스의 제안을 무시했다.


 


“돈이나 명예 따위는 제 관심 밖입니다. 제가 레드불 팀의 단장님에게 요구한 대가는 브라질을 벗어날 수 있는 위조 여권 하나뿐이었습니다. 전 당신처럼 카메라 플래쉬 세례를 받는 세상에선 살아갈 수 없는 녀석이니까요.”


 


위조여권을 구하며 얼굴을 드러낼 수 없는 사내라니. 자신의 대역으로 그 엄청난 드라이빙을 보여준 사내가 범죄자였단 말인가? 그리고 F1의 드라이버들은 고작 그런 사내에게 농락당했단 말인가? 라이스는 토할 것 같은 역겨움과 분노를 느꼈다.


 


하지만 사내는 그런 라이스의 기분을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옆을 지나쳤다.


 


“더 이상 하실 말씀이 없다면 전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시상식에 오르려면 라이스 씨도 어서 슈트로 갈아입으셔야 할 테니까요.”


 



 


사내는 전 세계인이 선망하는 F1 우승의 자리 따위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자신이 이뤄낸 성과를 라이스에게 던져버리고 대기실을 나갔다. 사내가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라이스로서는 견딜 수 없는 치욕이었다.


 


라이스는 천천히 그 치욕을 곱씹으며 드라이빙 슈트로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시상대에 오르면서도 그의 분한 표정은 풀어지지 않았다. 그는 시상대 위에서 자신의 두 번째 은퇴 선언을 했고 두 번 다시 서킷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공언했다. 은퇴를 선언하는 그의 표정이 너무나 비장했기 때문에 기자들은 그의 눈에서 살기마저 느꼈을 정도였다.


 


실제로 기자들의 느낌은 틀린 것이 아니었다. 만 하루 넘게 모든 사람들의 눈을 피하고 있어야 했던 라이스는 서킷을 나올 때부터 자신의 경호원을 찾았다. 5년 째 라이스의 경호를 맡고 있는 과묵한 경호원은 마피아 출신이었다. 그것도 전세계 마피아 중에서 가장 잔인한 것으로 악명이 높은 러시아 마피아 출신이었다. 그리고 라이스의 상처 입은 자존심을 치유할 방법을 의논하기엔 가장 좋은 상대이기도 했다.


 


라이스는 호텔로 돌아가는 자신의 차 안에서 운전석의 경호원에게 말했다.


 


“실력 좋은 히트맨(Hit Man. 암살자)을 구해줄 수 있겠나?”


 


 


=다음 편으로 계속=


 




 


**연재 3회분부터 잠시 F1 레이싱 경기를 소재로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터불패 슈피겔 방장님이 조언해 주시길 F1이라는 명칭을 소설이나 영화에 쓰려면 반드시 허가를 받아야 한다네요. 더구나 F1의 실제 팀이름을 가져다 쓰는 경우는 문제가 더 커진답니다. -.-


일단 앞에서 F1 얘기를 썼으니 어쩔 수 없이 그 소재로 마무리를 짓긴 해야 하니까 원래 써놨던 원고의 내용을 수정하고 최대한 줄여서 4회를 넘겼습니다. 그래서 연재가 며칠 늦어졌는데 양해바랍니다. 나중에 책을 낼 땐 F1이 아닌 ‘가상의 카레이싱 경기(?)’로 설정이 바뀌게 될 겁니다.


 


블루칼라 bluecollart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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