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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3. 9. 금요일

너클볼러


 



 


 



 


트루먼 대통령이 원자폭탄을 능가하는 수소폭탄의 제조를 지시한 것이 1월, 조지프 매카시 의원이 주도한 빨갱이 사냥이 시작된 것이 2월. 한국전쟁 발발이 6월, 미국의 원자폭탄 기밀을 러시아에 넘겨주는 일에 협력한 죄로 줄리어스 로젠버그와 그의 아내 에셀 로젠버그가 각각 체포된 것이 7월과 8월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은 1950년의 일이다.


 


검찰은 에설 로젠버그의 남동생인 데이비드 그린글래스(이하 그린글래스)의 증언에 따라 로젠버그 부부를 기소했다. 그린글래스가 검찰조사에서 자신이 핵관련 기밀을 비밀리에 입수했고, 누이 부부, 즉 로젠버그 부부의 간곡한 요청으로 인해 자료를 넘겨줬으며, 넘겨받은 자료를 로젠버그 부부가 소련측에 전달했다 증언한 것이다.


 


당시 사건을 주도한 기관은 ‘지구대륙의 4분의 1과 전 인류의 3분의 1을 지배하는 무신론적인 공산당독재 정권’의 타도가 목표였던 J 에드가 후버(이하 후버)의 FBI였고, 재판을 담당했던 어빙 코프먼 판사는 후버와 절친(절친이라 쓰고 꼬붕이라 읽는다)이었으며, 당시 대통령 트루먼은 ‘트루먼 독트린’이라 하여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원조하는 ‘공산당도 싫고’ ‘소련도 싫은’ 정책을 펴던, ‘이쯤 되면 막 나가는’ 바로 그런 시대였다.


 



로젠버그 부부


 


광기로 가득 찬 1950년, 맨하튼 프로젝트(원자폭탄 개발)에 참여한 클라우스 푹스라는 독일출신 물리학자가 간첩죄로 체포되었다. 그 후 연락책인 해리 골드가 엮였고, 자료를 유출한 넘으로 그린글래스가 엮였다. 그리고 그린글래스는 자신의 누나와 매형, 로젠버그 부부를 자신에게 모든 것을 사주한 제일 나쁜 놈이라 지목한다. 게임은 그렇게 신속하게 끝났다.


 


클라우스 푹스, 데이비드 그린글래스 징역 13년형.


줄리어스 로젠버그, 에셀 로젠버그 사형.


 


 



 


복습. 1890년 8월 6일 윌리엄 켐러가 사형수 최초로 전기의자에 앉잤다. 집행관의 착오로 1000볼트의 전기가 켐러의 몸 곳곳을 쑤시고 들어갔다. 그러나 죽지 않았다. 당황한 집행관이 2000볼트로 몇차례 더 켐러에게 때려 부었다. 그렇게 켐러는 고통스럽게 죽어갔다. 반면교사라 했던가. 이런 잔인한 방식을 교훈 삼아 인간이 체득한 거라곤 덜 고통스럽게 보낸다는 명분으로 2000~500볼트로 2-3차례 가해 편안하게 쇼크사 시킨다는 참으로 휴머니즘한 전기의자 처형 프로세스의 정립 바로 그것이었다.


 


윌리엄 켐러가 죽어간 그곳에서 멀지 않은 싱싱교도소, 때는 1953년 6월 19일. 먼저 남편 줄리어스 로젠버그가 앉았다. 새롭게 개선된 처형 프로세스 대로 진행되었다. 다음으로 부인인 에셀 로젠버그. 그러나 그녀에겐 2-3차례 추가로 2000볼트가 가해졌다.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다시 눈 뜨고 보지 못할 고통스런 처형 장면이 연출된 것이다.


 


법정에서 후버의 절친 어빙 코프먼 판사는 ‘로젠버그 부부가 핵정보를 소련에 전달했기 때문에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한국전쟁이 일어났기 때문에 5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그렇기 때문에 살인보다 죄질이 더욱 흉포하다’는 덜 떨어진 판결문을 읽어 내려갔다. FBI와 법원, 권력이 함께 만들어낸 판결로 인해 로젠버그 부부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것이다.


 


당시 재판 중 어빙 코프먼 판사에게 한 장의 서신이 전달된다. ‘로젠버그 부부의 유죄는 확실한 증거에 의한 것이 아니며’ ‘설사 로젠버그 부부가 기밀을 전달했음을 시인했다 하더라도 데이비드 그린글래스보다 가혹한 형량을 받는 것을 납득하기 어렵고’ ‘과거 중요한 원폭 자료를 빼돌린 이들 중에도 사형에 처해진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으므로 사형은 부당하다’는 내용의 서한이었다. 그러나 어빙 코프먼 판사는 검토는커녕 FBI의 후버에게  곧바로 ‘조공’해 버린다. 그 서한을 보낸 이는 다름 아닌 ‘알버트 아인슈타인’이었다.


 



WIN-WIN의 좋은 예.


 


 



 


1918년 세계 1차대전에서 백기를 흔든 독일에선 빌헬름2세가 퇴위하고 바이마르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 주변국들이 그러했듯, 바이마르 공화국 역시 자유민주주의의 깃발을 내걸고 패전의 깊은 수렁에서 빠져나오려 했다. 그러나 높은 실업률과 인플레이션 등의 총체적 불황을 쉽게 극복하지 못했다. 이런 혼란 속에 등장한 이가 바로 아돌프 히틀러. 여차저차 1919년 나치스에 입당한 히틀러는 1923년 뮌헨에서 쿠데타를 시도했으나 실패로 돌아가 육군형무소에 투옥된다.


 


수감 중 출간한 ‘나의 투쟁’(나치사상 해설서)과 재판 과정을 통해 얻은 대중적 인기, 그리고 선동가적 기질을 바탕으로, 히틀러는 출옥 후 나치스를 재건했다. 나치스는 1930년 9월 시행된 총선거에서 사민당에 이은 제2당이 되더니, 1932년 4월의 대통령 선거에서는 히틀러가 37% 득표율로 미스’선’ 아니 대통령’선’에 올랐다. 같은 해 11월 진행된 총선거에서는 나치스가 608석 중 230석(33%) 의석을 차지, 독일의회의 최대 세력이 된 후, 본격적으로 유대인과 마르크스 주의를 패키지로 엮어 탄압하믄서 본격적인 게르만제국주의의 시동을 걸어제낀다. 당시 세계 최고의 물리학자로 인정받던 아인슈타인이라고 해서 유대인 탄압에서 제외될 수는 없었다. 아니 유대인인 이상 그 또한 주요 제거 대상이었다.


 


알버트 아인슈타인. 일단 그는 엄친아가 아니었다. 1879년 3월 14일 독일에서 매우 조용히 태어났으며, 엄친아의 기본조건인 수 개 국어 구사라는 기본 퍼포먼스도 갖추지 못했다. 그렇다고 니콜라 테슬라처럼 졸라 화려한 외모의 소유자도 아니었다. 더군다나 유럽 깊숙히 배인 반유대인 정서에 늘 괴롭힘을 당했다. 학교성적이 뛰어난 것도 아니었으며, 주변에 화려한 절친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일찌감치 그의 능력을 알아보고, 뻥튀겨주는 스캇 보라스 같은 슈퍼에이전트도 없었다. 그는 그냥 수학을 좀 잘했을 뿐이다. 한 가지 그가 유독 싫어했던 것이 있다. 바로 통제와 관리다. 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것, 징집을 거부하고 스위스로 뜬 것, 모두 그런 성격 때문이었다. 


 



엄친아는 아니었다능.


 


고등학교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 물리학, 그러나 물리학을 시작한지 스무 해를 조금 넘긴 1921년. 그는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하는 세계 최고의 물리학자가 된다. 광전효과, 브라운운동, 상대성 이론 등 가히 혁명에 가까운 이론을 발표한다. 동시에 양심적 병역거부, 무기개발 반대, 반나치 운동 등의 사회적 발언을 주저하지 않았다. 1932년 나치스의 유대인 탄압이 노골적으로 진행되자 아인슈타인 또한 더 이상 안전할 수 없었다. 독일군 총사령관은 ‘이제 더 이상 당신의 목숨은 안전하지 않다’는 내용의 서한을 통해 친절히 그 사실을 확인시켜준다.


 



유대인과 히틀러 반대자들 색출, 폭행 등의 활동을

서슴지 않은 히틀러의 보이스카웃 ‘유겐트’


 


수많은 유대인 지식인들이 독일에서 탈출하기 시작했다. 독일 내 유대인들이 약탈과 폭행에 시달리는 모습을 보며 아인슈타인 역시 불안해했으나 즉각 탈출 대열에 합류하진 않았다. 그 해 예정된 미국 프린스턴 대학의 초청을 준비하며, 고향에서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음을 예견하고 차분히 보낼 뿐이었다. 그러나 반대쪽 미국에서도 모두 그를 반긴 것만은 아니었다. 1918년 재력 있는 여성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이름조차 애국스러운 ‘여성애국단’은 아인슈타인의 초청이 확인되자 곧바로 공격하기 시작한다.


 



  • 달갑지 않은 외국인인 아인슈타인, 조지 버나드 쇼의 입국을 반대한다.

  • 아인슈타인은 공산주의자들과 연계된 불순한 사상의 소유자다.

  • 국가와 교회, 과학적 원리를 부정해 혼란에 빠뜨린다. 특히 교회.

  • 끝으로… 영어를 못한다.


 


여성애국단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만한 그 어떤 근거도 제시하지 못했다. 더구나 아인슈타인은 영어를 왠만큼 했다. 오렌지를 ‘어륀지’로 자연스럽게 발음하지 못하는 독일식 액센트의 소유자였을 뿐이었다. 이런 어이없는 비방에 의존한 미국무부가 아인슈타인 초청을 엎을 뻔도 했지만, 1933년 1월 12일, 아인슈타인 가족 일행이 탄 배는 캘리포니아에 무사히 도착한다. 미국에서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떠나온 독일에선 같은 달 30일 히틀러가 드디어 수상의 자리에 오른다.


 


 



 


수상에 오른 히틀러는 그 해 7월 일당독재체제를 확립한다. 세계2차대전의 서막이 오른 것이다. 1935년 군대의 현대화, 모든 남자사람의 군복무를 골자로 한 거대한 군국주의 프로젝트에 돌입한다.


 


당시 히틀러의 독일과 스탈린의 소련은 상대를 디스하기 바빴다. 히틀러는 공산주의를 증오했고, 스탈린을 독일을 자본주의 파시즘으로 규정했다. 헌데 뜬금없이 이 앙숙들이 1939년 상호 불가침조약을 맺는다. 그저 서로의 이해와 요구가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히틀러는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고, 프랑스를 중심으로 서쪽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동쪽 모두 조졌다간 조땔 수 있다는 사실을 세계1차대전을 통해 학습한 터였다. 그리고 소련은 영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연합과 손잡기보다는 차라리 독일과 일촌을 맺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었다. 해서 독일과 소련은 지들 사이에 낑겨있는 폴란드를 중심으로 유럽을 나누고 서로 사이좋게 나눠 갖자는, 대신 서로 싸우진 말자는 ‘쇼부’. 아니 상호불가침조약을 맺은 것이다.


 



쇼부치는 소련 외무부장관 몰트로브. 그리고 스탈린


 


모든 준비가 끝났다. 히틀러는 폴란드를 침공할 명분이 필요했다. 없는 명분을 만드는 방법은 하나다. 바로 ‘조작’하는 것. 히틀러의 지시에 의해 독일과 폴란드 국경에 위치한 글라이비츠 방송국이 털린다. 그리고 폴란드의 공격이라 공포. 침략자 폴란드의 동부를 친다. 기다렸다는 듯 러시아는 서부를 친 뒤, 나란히 폴란드를 나눠갖는다. (정확하게는 서쪽의 1/3을 독일이, 동쪽의 2/3을 소련이) 이에 영국과 프랑스가 ‘듣보잡 히틀러’를 외치며 개입을 선언한다. 1939년 세계2차대전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독일과 소련이 상호불가침 조약을 맺은 그해 8월,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에게 편지가 한통 전달된다.


 


 



루즈벨트 님하.


 


원고 형태로 나에게 전달된 페르미(E.Fermi)와 질라드(L. Szilard)의 최근 연구를 보고, 나는 우라늄 원소가 가까운 장래에 새롭고 중요한 에너지원으로 변화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발생한 상황의 특정 국면들은 예의주시되어야 할 것 같으며, 필요하다면 정부 쪽에서 신속한 조치를 취해야 할 것 같습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사실들과 건의안에 대해 당신의 주의를 촉구하는 것은 나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중략)


 


이 새로운 현상은 또한 폭탄 제조로 이어질 것이며, 따라서 보다 덜 확실하긴 하지만 새로운 형태의 극도로 강력한 폭탄이 제조될 수 있을 것입니다. (중략)


[출처] 1939년 8월 2일, 아인슈타인이 루즈벨트에게 처음으로 보낸 편지 (『C.F.H』역사의 진실을 찾는 카페(세계사 & 국사 전문 카페)) |작성자 세계사광



 



b) 현재 대학 실험실의 예산 범위 내에서 실시되고 있는 연구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그러한 연구기금이 필요하다면, 그 담당자가 이 사업을 위해 기부할 의향이 있는 민간인들과 접촉하여, 기금을 제공하고, 아울러 필요한 장비를 보유하고 있는 산업체 실험실들의 협력을 얻어내는 것입니다.


 


독일은 실지로 자신이 인수한 체코슬로바키아 광산들로부터 나온 우라늄 판매를 중지한 것으로 나는 알고 있습니다.(중략)


[출처] 1939년 8월 2일, 아인슈타인이 루즈벨트에게 처음으로 보낸 편지 (『C.F.H』역사의 진실을 찾는 카페(세계사 & 국사 전문 카페)) |작성자 세계사광



 


요약하자면 ‘독일이 우라늄 확보에 나서고 있다. 심상치 않다. 국가, 민간, 전문가가 나서서 핵무기를 개발하자’는 편지의 마지막엔 익숙한 이름의 서명이 들어가있었다. 아인슈타인이었다.


 



과연 원자폭탄은 이 편지 한 장으로 인해 만들어졌을까?


 


 



 


이렇게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이 시작되었다. 적어도 표면적으론 그랬다. 1939년 시작된 원자폭탄 개발은 1942년 암호명 ‘맨해튼 프로젝트’라 이름 붙으며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시기적으론 서유럽이 히틀러의 손에 들어갔고, 이탈리아와 독일이 대미선전포고를 했으며,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한 뒤였다.


 


1941년 컬럼비아대학 연구팀이 우라늄 조립을 완료했으나 이를 무기화하기 위해서는 톤 단위의 우라늄이 필요했다. 이에 별도의 우라늄 공급팀이 꾸려졌다. 미국의 주요 3개 업체가 참여했고, 그중 하나는 바로 에디슨과 전류전쟁을 펼쳤던 웨스팅하우스였다. 웨스팅하우스는 즉각 우라늄을 조공하란 정부의 요청이 있자마자 순식간에 공급망을 만들어 3개월만에 3톤의 순수우라늄을 공급했다.(웨스팅하우스는 얼마를 벌어제꼈을까. 도대체 무슨 수로 3개월만에 3톤을 퍼다 날랐을까? 상상 한 번 해보자) 우라늄이 준비되자 시카고 대학으로 옮겨진 연구소에서 그 해 12월 원자폭탄의 기반이 되는 핵분열 연쇄반응 실험에 성공한다.


 


 



맨해튼 프로젝트의 중심, 오크리지 공장에도 등장한 히어로 엉클 샘.


 


이후 우라늄을 가공해 핵분열을 쉽게 졸라 해대는 원소를 만들어냈고, 이 원소에게 지옥의 마왕을 뜻하는 플루톤을 빗댄 플루토늄이라 이름을 붙여준다. 풀루토늄이 준비되자 1945년 7월 16일, 미국은 뉴멕시코주 앨러배머 고도에서 최초의 원자폭탄 실험은 성공적으로 진행한다. 그러나 이미 독일은 패전의 기색이 역력한 터였다. 미국의 입장에선 독일은 물론, 전세계가 두려워 할 원자폭탄을 손에 쥐었는데, 꽂을 상대가 사라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흥분하지 않았다. 일본이 있었기 때문이다.


 


원자폭탄 실험 성공 직후, 독일의 패전 도시 포츠담에서 미국의 트루먼, 영국의 처질, 중국의 장제스는 ‘일본이 즉각 항복과 항복 하지 않을 시 조땐다’는 내용이 포함된 포츠담 선언에 서명한다. 사실 이때까지 소련은 일본을 때려눕히기 위해 참전하라는 미국의 요구에 쉽사리 응하지 않았다. 뒤늦게 포츠담 선언에 가담한 소련은 훗카이도 분할 통치를 요구했으나, 막 핵무기를 보유한 미국의 대답은 확실했다. ‘조까’. 8월 6일 히로시마에, 8월 9일 나가사키에 각각 리틀보이와 팻맨으로 이름 붙여진 원자폭탄이 투하된다. 포츠담 선언의 의거, 일본이 즉각 항복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첫 번째 원폭이 있은 후 많은 이들이 트루먼의 결정에 항의했다. 이미 일본은 항복 일보 직전이었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항의와 우려에도 불구하고 두 번째 원폭까지는 며칠이 채 걸리지 않았다. 이 두 번의 원폭으로 12만 명이 죽었다. 미국이 이런 무자비한 결정을 내린 이유로 많은 전문가들은 소련의 2차대전 참전을 꼽는다.


 


미국은 가열찬 ‘스파이질’로 소련의 참전 결정을 이미 알고 있었으며, 그로 인해 소련이 새로운 국제권력의 중심으로 떠오를 것을 예상했다. 그래서 미국은 사회주의 소련에게 원자폭탄이 있음을, 그리고 그 폭탄을 어디든 떨어뜨릴 수 있음을 확인시켜주고 싶었던 것이다. 철의 장막, 핵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동시에 소련의 스탈린 역시 전방위 ‘스파이질’을 통해 일본에 원폭이 떨어지기 전에 맨해튼 프로젝트의 상당 부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비밀리에 핵개발을 하고 있었다. 이렇듯 가열한 ‘스파이질’은 늘 그렇듯 쌍방향이었다. 트루먼은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았다. 후회는 원자폭탄의 위험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채 개발에 참여한 과학자들의 몫이었다. 아인슈타인도 그중 하나였다.


 


 



 


1949년. 8월 소련이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하자 미국에선 난리가 난다. 그렇게 빨리 ‘소련이 자체적으로 핵무기를 개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이유였다. 결국 이유는 온리 ‘정보유출’뿐이라 정부와 언론이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빨갱이 색출이야말로 부국강병의 기본옵션이라 온몸으로 부르짖는 후버에게 절체절명의 미션이 주어졌다. 후버는 곧바로 다음과 같이 ‘간첩소탕’이란 오다를 내린다.


 



닉이 많으면 내용을 적을 수가 없다는 게 진리


 


1950년 2월 초 클라우스 푹스가 간첩 혐의로 영국에서 구속된다. 증거는 영국 정보부 요원의 증언과 클라우스 푹스의 자백뿐이었다. 푹스는 미국에서 소련첩자와 접촉하였으나 이름도, 인적 사항도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고 했다. 근데 접촉한 넘도 모르는 넘을 FBI가 잡아낸다. 그리고 줄줄이 엮기 시작한다.


 


FBI는 우선 뻘건 색, 혹은 공산주의, 사회주의와 관련된 이를 추려내는 것으로 시작했다. 곧이어 수사, 감시하기 시작하는데, 그 중 한 명, 바로 그린글래스가 걸려들었다. 이유는 그린글래스의 맨해튼 프로젝트가 진행되었던 공장에 군인신분으로 참여한 기록과, 누이 부부가 ‘청년공산주의자동맹’ 회원이라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었다. 1950년 2월 FBI는 약식 조사 후 감시에 들어갔다.


 


그러던 중 몇 달 뒤인 5월, 드디어 FBI는 만난 넘도 잘 모르는 넘을 잡아낸다. 바로 푹스가 접촉한 적이 있다는 첩자. 바로 해리 골드였다. 해리 골드는 영장도 없이 들이닥친 FBI에게 친절하게 모든 것을 맡긴다. 결국 변호인도 없이 ‘내가 바로 첩자라능…’ 이러믄서 자백문서에 서명한다. (이 과정에 대한 내용은 여전히 비밀이다) FBI가 손쉽게 얻어낸 간첩 해리 골드의 진술엔 이런 내용이 있었다.


 


‘내가 옛날에 푹스랑 접촉할 때 결혼한 밀뤼터리맨도 한 명 있었다능’


 


‘생각해보니 그넘이 바로 그린글래스였다능’


 


수사는 클라우스 푹스에서, 해리 골드로, 해리 골드에서 그린글래스로 신속하게 넘어갔다. 그린글래스의 간첩 혐의 증거랍시고 제시한 건, 해리 골드의 진술과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했을 당시 공장에서 빼내온 우라늄 견본이 전부였다. 그러나 우라늄 견본의 경우 당시 참여한 이들 상당수가 기념으로 한두 개 정도는 빼내 오는 게 일상적 관행이었다. 허나 그린글래스 역시 친절하게 자신도 간첩이며, 이 모든 건 누이 부부의 사주 때문이었다고 진술한다. 곧바로 매형인 줄리어스 로젠버그가 구속된다. 이 과정에도 역시 결정적 증거는 없었다. 처남 그린글래스의 진술만이 유일한 증거였다. 줄리어스 로젠버그가 완강히 혐의를 부인하자 FBI는 부인 에셀 로젠버그를 구속하여 줄리어스 로젠버그의 자백을 유도하려 했다. 그러나 줄리어스 로젠버그는 자신이 스파이란 그 어떤 자백도 하지 않았다. 자백은 50년이 지난 2001년 그린글래스가 했다


 


 ‘검찰은 내게 구명을 약속했다. 그 약속을 믿고 난 거짓증언을 했다’ - AP통신


 


그러나 재판 당시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여러 과학자들, 특히 노벨화학상 수장자인 해럴드 유리의 ‘전달했다는 도면은 허접하여 정보로서의 가치가 없다’, ‘위증에 근거한 비상식적인 기소’라는 의견들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실제 로젠버그 부부가 스파이긴 했지만 전달한 자료는 핵과는 상관없는 전파탐지기와 수중 음파탐기지였다는 내용이 담긴 베노나 보고서(미국의 암호전문가들이 러시아 정보부의 통신문을 해독한 것)는 1995년이 되어서야 공개되었다. 후버와 미국에겐 그저 확실한 희생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연행되는 데이비드 그린글래스 (좌)


 


 



 


FBI의 후버는 졸라 기분이 나쁘고 쪽팔렸다. 마음이 편치 않아 잠을 잘 수도 없었다. 소련이 예상보다 빠른 시간에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한 데다, 그 원인을 ‘스파이’ 때문이라 떡 하니 설정해놓았는데, 그 시작이 될 클라우스 푹스가 영국에서, 영국정보원에게 잡혔기 때문이었다. 해서 후버는 클라우스 푹스와 연관되었을 ‘스파이’(?)를 색출하는데 몰빵했다. 공산주의와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게다가 외국인(유대인)인 모든 인사들을 쑤시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아인슈타인이 제법 적합해 보이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아인슈타인이란 거물까지 이어지기만 하면 ‘해품달’을 능가하는 전 국민적 관심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아인슈타인과 클라우스 푹스를 엮을 만한 한 가지 근거가 있었다.


 


클라우스 푹스는 1942년 캐나다 외국인 수용소에 억류되어 있었으나 아인슈타인의 천거로 석방되어 맨해튼 프로젝트에 결합하게 되었다는, 클라우스 푹스 부친의 증언이 바로 그것 것이었다. 결국 FBI의 최종타겟은 로젠버그 부부로 향하긴 했으나 그들의 ‘망’에는 늘 아인슈타인이 존재하고 있었다. 아인슈타인 역시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후버와 FBI는 증언 이상의 그 무엇도 밝혀내지 못했다.


 


아인슈타인은 나름대로 로젠버그 부부의 구명을 위해 움직였다. 트루먼 대통령에게 사면을 요청하는 탄원을 보냈고, 코프먼 판사를 설득시키기 위한 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이처럼 아인슈타인의 행동은 철저히 개인적이었다. 사면추진위원회 등 그 어떤 단체에 속하지 않았으며, 사회주의자들의 정치투쟁에 재판이 악용되고 있다는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다. 오랫동안 변함없었던 그의 성격이기도 했지만, FBI의 타겟이라는 부담이 작용했을런지도 모를 일이다.


 


 



 


1951년, 로젠버그 부부는 항소심이 끝나기도 전에 싱싱교도소로 이감되었다. 싱싱교도소는 사형수만이 산다는 ‘죽음의 집’이었다. 항소심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사형수가 되었던 것이다. 아니 클라우스 푹스가 구속되었을 때부터 이미 예견된 일일지 모른다. 시대는 진짜 스파이를 요구하기도 했고, 동시에 가짜 스파이를 요구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로젠버그 부부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그 해, 줄리어스 로젠버그의 나이 35세, 에셀 로젠버그의 나이 37세였다. 그들은 그렇게 떠났고, 남아있는 많은 이들 중 하나였던 아인슈타인은 죽기 전까지 매카시, 후버와 끊임없이 싸웠다. 많은 사람들이 뻘건 칠을 당하며 탄압받던 시기였고, 후버의 FBI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거대한 조직으로 확장하고 있던 광기의 시대였다.


 


아인슈타인이 간첩이라는 수많은 정보가 수집되었지만 확실한 것은 없었다. 로젠버그 부부의 처형이 부당하단 문제제기는 수십 년이 지나고 나서야 정당했음이 확인되었다. 로젠버그 부부는 자신들의 두 아들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에 ‘그들이 무죄임을 언제나 기억해 줄 것’을 부탁하였고, 맨해튼 프로젝트의 시작을 가능케 한 서한에 서명한 것을 두고 ‘내 인생에 있어 한 가지 큰 실수’라며 후회한 아인슈타인은 후학들에게 아래와 같이 당부했다.


 


‘인간의 창조력이 인류에게 재앙이 아닌 축복이 되도록 해야 하며 과학기술 연구에 있어 핵심문제를 풀기 위해 애쓰고, 노동과 재화의 분배의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아인슈타인은 로젠버그 부부가 처형 당한지 2년 뒤인 1955년 4월 18일, 자신을 초청한 프린스턴 대학의 인근 병원에서 조용히 생을 마감한다. ‘어느 곳이나 넘쳐나는 정치적 격정, 희생자를 요구한다’는 최고의 물리학자의 마지막 글 제목은 이처럼 정치적이었다.


 


 


그리고... 1392년 이성계를 문병하고 돌아오던 정봉주, 아니 정몽주는 선지교(훗날 선죽교)에서 처형, 아니 이방언에게 사주 받은 해결사에 의해 린치를 당하고 생을 마감하게 된다. 씨유레이러~


 


 


너클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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