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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7. 31. 금요일

너클볼러

 

 

 

 

 

 

 

 

 

"이건 왕의 업적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왕을 탄생시킨 시대에 관한 이야기다."

 

 

 

미국은 1970년대부터 ‘마약전쟁’이라는 형태로 마약에 대한 단속 정책을 실시해 왔으나 큰 효과는 보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미 당국의 마약 단속국(DEA)은, 마약을 단속하는 것보다도 멕시코와 콜롬비아의 마약조직을 돕는 일에 힘을 써왔기 때문이다.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적인 마약단속은 군사위주였다. 콜롬비아나 멕시코, 아프카니스탄 등에 미군을 파견하여 마약 조직과 연결되어 있는 무장 세력과 싸우거나 현지의 군대를 훈련시켜 싸우게 해 왔는데, 실제로는 마약 문제를 구실로 미국이 군사적 개입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영구화되도록 마약 조직이 미국(이나 유럽)으로 마약을 팔아 세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했고, 그로인해 마약 전쟁은 끝나지 않는 구조가 되어버렸다. 미 당국이 테러리스트라고 비난하면서, 배후에서는 ‘알카에다’를 지원 강화함으로서 영구히 끝나지 않는 ‘테러전쟁’을 만든 것과 같은 구조였던 것이다.

 

2002. 11. 05. 다나카 사카이 (전 교도통신 기자, 현 국제정세 전문가)

 

 

 

 

 

 

마약왕 Druglord

 

얼마 전 최고 수준의 보안이 갖춰진 교도소로 알려져 있는 멕시코의 알티플라노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던 세상에서 악명 높기로 둘째 가라면 서러워서 몸서리 칠, 미국을 상대로한 멕시코 불법 마약거래의 25%를 장악한 시날로아 카르텔의 두목인 호아킨 구스만이 삼엄한 경비를 뚫고 탈옥에 성공했다. 탈옥 방법은 간단했다. 가로세로 50cm, 깊이 10m, 교도소 샤워실에서 인근의 건물을 잇는 총 길이 1.5km 달하는 땅굴을 판 뒤 지 맘대로 '쿨'하게 출소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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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뚫었다는 게 말이 되냐?

 

멕시코 신문 <밀레니오>는 최소한 4명의 인부가 동원됐고, 6.5t 크기의 트럭이 토사를 하루에 한 차씩 352일간 실어 날라야 탈옥에 이용된 땅굴을 파냈을 수 있을 것이라 전했다. 다시 말해 17개월 동안 수감되어 있던 한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이뤄낼 수 없는 '땅굴 오브 더 땅굴'이라는 말. 교도소 내부(교도관등)와 외부(땅굴 장인 등)를 잇는 강력한 협조자들이 있어야만 가능했을 땅굴. 이게 사실이라면 이 땅굴은 상상도 못할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지역 주민에게 영웅으로 칭송 받으며 때론 정부보다도 막강한 권력과 폭력을 휘두르는 마약왕이었기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겠다.

 

탈옥 후 '로스 카 보스' 인근 해변의 저택에 숨어 호의호식을 하고 있을거라 전해진 호아킨 구스만의 이름은 매년 포브스지에서 뽑는 억만장자 리스트에 2009년부터 2012년까지 4년 연속 오르게 되면서 많은 이들의 머릿속에 마약왕으로 각인되었다. 

 

하지만 1989년 7월 쿠바의 상황을 살펴보면 보면 진짜 마약왕은 따로 있음을 알 수 있다. 

 

1989년 7월 7일 쿠바. 피델 카스트로의 혁명 동지이며 30년간 쿠바군에 몸 담아 온 아르날도 오초아 산체스 장군이 마약 밀매 및 부패 혐의로 사형을 선고 받았다. 오초아 장군은 쿠바 역사상 6명만 받은 공화국 영웅훈장을 포함 쿠바 정부가 수여하는 거의 모든 훈장을 수여받은 영웅. 쿠바 국민들은 쿠바가 마약 밀매에 반대하고 있다는 일종의 징표로서 사형을 선고해야 한다는 의견과 혁명가로서의 공헌으로 보아 정상참작해야 한다는 의견으로 나뉘어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언도된 것은 '사형'. 오초아 장군을 사형에 이르게 한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콜롬비아 마약밀매조직인 메데인 카르텔이 코카인과 마리화나를 미국으로 반입하기 위한 중간 기착지로 쿠바를 경유케 해주고 그 대가로 뇌물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17년간 피델 카스트로의 경호원을 지낸 후앙 레이날도 산체스가 지난 5월 출간한 '피델 카스트로의 이중생활'에는 피델 카스트로 역시 마약거래에 관여했으며, 미국이 눈치를 챈 것 같자 오초아 산체스를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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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신문 1989. 07. 09

 

이렇게 쿠바의 국민 영웅을 마약 밀매의 협조자로 가뿐히 전락시킨 메데인 카르텔의 두목이자, 1987년 억만장자 리스트 7위에 오른 '역사상 가장 강력하고 비정한 마약왕'이라 불렸던 사나이. 바로 파블로 에스코바르 가비리아Pablo Escobar Gaviria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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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블로 에스코바르

 

 

파블로 에스코바르 Pablo Escobar Gaviria(1949~1993)

 

콜롬비아 중부 안티오키아주의 수도이자, 해발 1500m 고원 도시인 메데인Medellin은 콜롬비아 수도인 보고타 다음으로 큰 도시이자, 적도에서 멀지 않은 고원지대여서 연중 20℃ 정도의 기온이 유지되는 탓에 ‘영원한 봄의 도시’라 불려진다. 많은 이들에겐 화가 페르난도 보테로의 고향으로도 알려져 있다.

 

메데인은 한때나마 섬유, 의류사업으로 번창하기도 했다. 섬유, 의류사업이 노동집약적 산업인 탓에 풍부하고 값싼 노동력과 미국과 인접한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번창할 수 있었다. 하지만 1950년대 말경 부터 섬유, 의류를 기반으로 한 지역경제는 아시아국가들이 경쟁자로 등장하면서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지역경제 몰락으로 인해 거리로 쏟아져 나온 주민들이 선택한 것은 바로 밀수, 정확히 금, 보석 등의 ‘사치품 밀수’였다. 이 역시 지리적 특성에 기반해 손 쉽게 시작할 수 있었고, 그 지역의 독특한 문화적 특성인 파이사스(Paisas : 돈을 벌려는 모험적인 생활을 사랑하는 사람)가 더해지면서 밀수의 메카로 성장하게 된다. 이 즈음 파블로 에스코바르(이하 에스코바르)는 메데인의 한 가난한 노동자의 자식으로 태어나 성장하며 절도와 밀수로 잔뼈가 굵는다.

 

70년대 반전운동과 히피의 등장으로 미국의 마리화나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메데인의 밀수 품 중 마리화나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그로 인해 사치품 밀수 종사자들이 대거 마약 밀매로의 전직을 시도하게 되는데 25세의 에스코바르 역시 마약 운반 차량을 안전하게 이동하도록 경찰을 매수하는 일명 ‘Clean The Way’로 마약 밀매 세계에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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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코바르가 손 댄 마약은 마리화나가 아닌 코카인이었다. 70년대 말 마약 최대 시장인 미국의 선호가 마리화나에서 코카인으로 넘어가기 시작했고, 1978년 콜롬비아 경찰과 군에 의해 콜롬비아의 마리화나 최대 경작지인 구아히라 반도의 박멸작전이 진행되는 등 대외적인 요건들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더불어 1973년 칠레에서의 군사구데타로 인해 칠레산 코카인 정제 장인들이 콜롬비아로 이주한 탓도 있었다. 게다가 마리화나의 수익성은 코카인에 비하면 새발의 피였다.

 

당시 메데인에서는 수많은 군소조직들이 마약을 밀매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종식시키고 마약 조직을 조직적이고 잔인한 ‘카르텔’화 시켜 전세계 코카인 시장을 장악해 버린 이가 바로 에스코바르다. 에스코바르는 군소조직 두목들에게 코카인의 제조, 운반, 판매에 이르는 조직적인 연합 ‘카르텔’을 제안해 메데인 마약 시장을 주도하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잔인하기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호세 가차, 아버지가 마약 밀매자였던 탓에 판매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었던 오초아 형제, 오랜 보석 밀매로 자금과 인맥, 자유로운 영어구사가 가능했던 운송의 달인 카를로스 레데르가 결합하면서 조직의 진용을 갖춘다. 그리고 그들 중 에스코바르가 두목으로 나서게 된다. 이유는 간단했다. 수완이 좋았고, 존나 잔인했기 때문이다.

 

 

 

먹을래 아님 죽을래 Plata o Plomo

 

원래 잔인했던 (1977년 코카인을 밀매하던 자신을 체포했던 연방 경찰관 두명을 살해하고 몇 해 뒤에는 자신을 체포하는데 협조한 DAS<Departomento Administrativo Seguridad : 콜롬비아 FBI> 메데인 지부장도 암살했다.) 에스코바르가 주도하는 조직인 ‘메데인 카르텔’이 마약 시장에서 우뚝 서게 된 계기는 바로 1981년 11월 콜롬비아 도시 게릴라 M-19가 오초아 형제의 누이인 마르타 오초아를 납치한 사건이다. 납치가 벌어지자 오초아 형제의 소집으로 메데인의 많은 마약 밀매자들이 모여 MAS(Muerte a Secuestradores : 납치자에게 죽음을)를 결성하게 되고, 이 MAS가 메데인 카르텔의 모체가 된다. 40여일간 서로를 향한 납치, 보복처형, 도심전투가 벌어졌고. 결국 양 조직간의 비밀 협정 후 마르타 오초아가 석방되면서 마무리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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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초아 형제들

 

이렇게 납치사건을 계기로 모여든 마약 밀매자들의 연합을 기반으로 ‘메데인 카르텔’이 등장했다. 두목은 에스코바르. 이때부터 에스코바르는 콜롬비아 자국내에서의 권력은 물론, 전세계 코카인 시장을 지 꼴리는데로 주무르며 마약 시장의 ‘왕좌’에 오른다.

 

마약왕은 마약왕 다웠다. 닥치는 대로 포섭하고, 포섭에 응하지 않으면 제거했다. ‘플라타 오 플로모’(Plata o Plomo : 은<뇌물>이냐, 납<총알>이냐)가 바로 그의 슬로건. 포섭과 제거의 대상은 광범위했다. 라이벌 마약조직은 물론 자국의 정치인, 각료, 군 경찰, 그리고 자신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미국의 마약 단속국 요원들까지 닥치지 않고 포섭하거나 제거하며 32살(1982년)이 되던 해엔 하루에 코카인 밀수를 통해 50만달러(한화 5억원) 씩 벌어들이기도 했다. 

 

에스코바르는 마약 밀매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는지 고향인 메데인에 병원과 운동장, 그리고 빈민 가족 1,000명에게 무상 주택을 제공했고, 메데인 신문(Medellin Civico)에 자금을 지원함으로서 마약왕이 아닌 구원자, 혹은 영웅으로서의 이미지도 구축해 나가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에스코바르는 1982년 자유당 예비국회의원에 선출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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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유세 중인 마약왕

 

하지만 마약왕은 마약왕. 1983년 법무장관인 라라 보니아가 에스코바르의 당선이 마약자금이 투입된 부정선거였다고 고발하고, 콜롬비아의 유력 일간지(El Espectador)가 에스코바르를 코카인 밀매자라 보도하자 결국 그는 그 해 9월 의원직을 상실한다. 의원직을 상실한 에스코바르는 바로 법무 장관 라라 보니아에게 현상금 50만 달러를 걸었고 이듬해인 1984년 라라 보니아는 2인조 오토바이 암살범(시카리오 Sicario)에 의해 살해당한다. 그의 범죄를 폭로한 일간지 편집국장은 1986년 피살당했고 그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는지 1989년 일간지의 건물에 폭탄테러를 자행하기도 했다.


마약왕 본연의 자리로 돌아온 에스코바르의 끔찍한 업적은 이루 말할 수 없다. 1984년 콜롬비아 정부와 미국 마약단속국(DEA)이 함께 메데인 카르텔의 운송지, 제조지 등을 덮쳐 13톤의 마약을 압수해 불태워 단일 마약 압수 세계 신기록을 세웠으나 에스코바르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13톤을 압수당하고도 그 해에만 20억 달러를 벌어들였다. 결국 1989년 포브스지가 선정하는 억만장자 순위에 당당히 7위에 오르고야 만다. (당시 250억 달러 추정) 1987년에는 콜롬비아 정부의 부채 3,540억 달러(360조)를 갚아주는 대신 사면을 요구하기도 했다. 


에스코바르가 사면에 매달린 이유는 미국으로의 송환이 가장 두려웠기 때문이다. 1985년 미국의 요청과 콜롬비아 정부의 협조로 마약 밀매자를 중심으로 한 강제송환자 리스트가 작성되기 시작했다. 1984년 법무장관 라라 보니아가 암살당하자 전국에 계엄령을 내린 정부가 미국과의 범죄인인도조약 실행 선언 후 내린 후속조치였다. 이에 에스코바르는 수도 보고타에 있는 법무부 청사를 공격. 200명을 인질로 잡는 최악의 인질극을 펼친다. 콜롬비아 군대와 경찰이 청사를 탈환하기 위해 26시간을 대치하며 전투를 벌였으나 결국 12명의 판사를 포함한 95명의 인질이 사망하는 역사상 최악의 참사로 이어지고 말았다. 물론 강제송환자 명단을 파기하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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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염에 휩싸인 법무부 청사


그뿐이 아니다. 1989년 루이스 카를로스 갈라를 포함한 대통령 후보 3명의 암살은 물론(후보 한 명을 더 암살하기 위해 100명 이상 타고 있던 여객기를 폭발시켜 탑승객이 전원 사망하는 최악의 테러를 저질렀으나 그 후보는 타고 있지 않았다), 보고타와 메데인에서 연이어 자행한 폭탄테러로 300명 이상이 사망하기도 했다. 1986년 콜롬비아의 살해 건수는 사상 최대치였는데 메데인에서만 무려 3,500명이 살해당했다. (하루 평균 10명꼴) 일등공신이 메데인 카르텔의 두목 에스코바르였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소설 ‘백년의 고독’으로, 애칭인 ‘가보’로 우리에게 낯익은 콜롬비아 출신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1990년 콜롬비아에서 벌어진 10명의 저명인사(대통령 딸도 포함된) 납치사건을 바탕으로 한 소설 납치일기(1996년)를 발표한다. 그는 이 소설을 통해 콜롬비아의 범죄와 권력의 부패가 얼마나 깊은 수렁에 빠져 있는지를 신랄하게 고발했다. 마르케스 스스로 '49년 작가 생활 중 가장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라 말했던 이 작품을 통해 많은 이들에게 콜롬비아의 현실을 전했다. 하지만 정작 작가 본인은 콜롬비아 마약 카르텔과 정부에 대한 냉철한 비판을 담은 이 책으로 인해 1997년 고향인 콜롬비아를 떠나 망명길에 오른다. 《납치일기》의 소재였던 납치사건을 주도한 이는 바로 파블로 에스코바르였다.




마약왕의 최후


1990년 콜롬비아의 새로운 대통령으로 취임한 세자르 가비리아 대통령은 메데인 카르텔과 협상을 시작했다. 코카인으로 대표되는 마약 문제가 아닌 마약 조직이 자국에서 자행하고 있는 테러와 범죄의 심각성 때문이었다. 가비리아 대통령은 미국과의 '범죄인인도협정' 폐기와 투항 시 형량 감량이라는 떡밥으로 메데인 카르텔을 유혹했다. 결국 1991년 1월 메데인 카르텔의 창립 멤버인 오초아 형제가 자수, 같은 해 7월 에스코바르도 자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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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혔지만 나쁘진 않다.


에스코바르의 수감생활이 시작됐지만 불편함은 없었다. 에스코바르가 수감된 감옥은 호화 별장을 방불케 하는 숙소와 다름없었고 운동장과 수영장, 연회장까지 갖춘 그야말로 마약왕을 위한 맞춤형 감옥이었다. 이는 에스코바르가 직접 감옥을 설계할 수 있도록 정부가 승인했기 때문이었다. 에스코바르가 자수한 이유는 명확해졌다. 콜롬비아 자국에서의 수감생활은 에스코바르에게 일종의 휴가였던 셈이다. 

 

하지만 그는 마약왕답게 감옥 안에서도 자유롭게 메데인을 시찰하며 마약사업을 관장했고, 1993년 두 명의 남자를 고문, 살해하기에 이른다. 콜롬비아 정부는 더 이상 방관할 수 없었다. 수감 후의 에스코바르는 여전히 마약왕이었고, 미국의 압박도 점점 커졌기 때문이다. 콜롬비아 정부가 에스코바르의 별장과 다름없던 교도소가 아닌 다른 곳으로 이감을 추진하자 에스코바르는 함께 수감 중이던 지인들과 함께 유유히 감옥을 빠져나갔다. 이때 교도소 간수들은 묵묵히 지켜보기만 했다고 전해진다. 간수들도 에스코바르가 직접 선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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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블로 에스코바르가 직접 설계한 그의 감옥


평화로운 탈옥에 성공한 에스코바르는 메데인에 마련된 아지트에서의 은신을 시작한다. 에스코바르는 메데인이 낳은 영웅 중의 영웅. 주민들의 각별한 보호가 그의 은신 생활을 더욱 평화롭게 도와줬다. 하지만 그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미국과 콜롬비아 정부가 현상금 8백만 달러를 거는 등 적극적으로 그를 찾기 시작했고 경쟁 마약 조직의 보복 공격이 거세지기 시작한 것이다. 


은신 중이던 에스코바르는 결국 가족을 걱정한 나머지 보고타에 있던 아들과의 20초간 통화로 인해 위치가 발각되고 만다. 자신의 생일 파티를 마친 직후였다. 위치가 파악되자 즉각 미국의 특수부대 델타포스와 콜롬비아 특수부대가 투입됐고 기관총을 들고 탈출하던 에스코바르는 결국 3발의 총알을 맞고 사망한다.

 

1993년 12월 2일. 역사상 가장 악명 높았던 마약왕은 이렇게 최후를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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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시대

 

"Sometimes I am God. If I say a man dies, he dies that same day." Pablo Escobar


그렇다면 메데인에 거주하며 고작 밀수나 일삼던 어린 에스코바르는 어떻게 불법과 폭력으로 국가권력과 맞먹는 마약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일까. 이유는 피로 얼룩진 콜롬비아의 현대사와 최대 마약 소비국인 미국과의 관계를 통해 확인 할 수 있다. 이런 ‘시대와의 조우’가 있었기에 에스코바르는 젊은 나이에 왕좌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에서 이름을 따 국호로 정한 콜롬비아는 1848년 자유당이, 1849년 보수당이 창당되는 등 아메리카대륙에서 가장 오래된 정당정치의 역사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유구한 양당 역사는 안타깝게도 폭력의 역사로 전이된다. 두 정당 사이의 경쟁은 빈번히 유혈사태로 이어졌고, 천일전쟁(1899~1903)과 폭력시대(La Violencia 1946~1957)을 거치면서 각각 10만 명, 30만 명이 희생되는 최악의 참사를 경험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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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데인 출신의 화가 페르난도 보테로의 '콜롬비아에서의 학살'(Masacre en Colombia)


하지만 내전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콜롬비아 정부의 후원으로 분쟁 피해를 조사한 ‘국립 역사적 기억 위원회'(NCHM)가 2013년 내놓은 보고서엔 폭력시대가 끝난 1958년부터 2013년까지 좌익반군, 우익 민병대 등과의 내전으로 인해 총 22만 명이 숨진 것으로 나타났다. 언론들은 도시 근교에 매장된 시신의 규모로 따지면 콜롬비아가 세계 최대 규모일 것이라 관측하기도 했다.


콜롬비아는 피로 얼룩진 정치, 오랜 내전으로 인해 불안과 공포가 일상화 되어 있었다. 이런 시대는 폭력이 언제든 수단이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에스코바르가 손 쉽게 '뇌물을 먹든지 죽든지'Plata o Plomo라고 외치며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폭력이 만연한 시대에 가장 효과적은 수단은 곧 '폭력'이었던 것이다.


계속되는 경제불황과 그로 인한 불법 지하경제 활성화 역시 에스코바르가 왕위에 오르는 데 한몫했다. 1970년대 오일 파동에 따른 1975년 세계 경제위기의 상황 속에서 콜롬비아는 커피와 마리화나로 위기를 극복했다. 범죄가 정치, 경제와 엮일 수 있는 구조가 자연스레 조성된 것이다. 게다가 콜롬비아를 대표하는 커피를 통해 얻어진 수익은 '고수익'을 찾아 마약제조에 흘러들어 가기도 했다. 마약을 통해 얻어진 수익의 일부는 마약 조직의 근거지인 지역 기반시설비용으로 쓰이며 지역경제 활성화에 이바지(?)하기도 했다. 정부가 해주지 못한 일을 마약범죄자들이 대신해 준 것이다. 


그야말로 당시 콜롬비아는 폭력과 불황의 시대라는 마약왕 탄생의 최적화된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미국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미국 법무부 산하기관인 마약단속국(DEA : Drug Enforcement Administration)는 반전운동과 히피의 등장으로 미국 내 마리화나 소비량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던 1973년 7월 1일 리처드 닉슨의 서명으로 설립되었다. 마약전쟁(War On Drugs)을 상징하는 기관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마약퇴치 프로그램에 '전쟁'이란 화끈한 수사가 붙게 된 것은 1986년 레이건 행정부 시절이다.(1986년 4월 '마약전쟁'이란 용어가 국가안보결정문 221호에 등장) 1980년대 초 콜롬비아를 중심으로 남미-미국으로 이어지는 마약 시장이 거대해지자 본격적인 마약퇴치 프로그램을 발동시킨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마약 전쟁'의 핵심은 바로 자국의 수요가 아닌 공급의 무력화에 초점을 맞췄다는 것이다. 말 그대로 일방적인 전쟁이었던 것이다. 남미 각국과의 공조는 무시되었고 모든 결정은 워싱턴에서 이뤄졌다. 공급을 차단하기 위한 원조의 대부분은 군사지원이었다. 군사지원으로 인한 군부와 반군 간의 폭력은 더욱 격화되었고, 그로 인해 남미 각국의 공권력은 무기력해졌으며, 수많은 인권피혜 사례들이 발생했다. 더불어 코카를 재배하는 농민들의 재활을 위한 원조가 빈약한 탓에 재배지에 대한 제초제 대량 살포에도 불구하고 경작지는 꾸준히 늘어만 갔고(1999년 4만 헥타르의 경작지에 제초제를 살포했으나 이듬해인 2000년에 코카 경작지는 오히려 8만 헥타르로 늘어났다) 공급지에서 연일 벌어지는 작전으로 인해 수십만 명의 농민들이 생업을 잃기도 했다. (2001년 기준 347,00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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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미국의 입장에서 군사지원을 통해 콜롬비아를 중심으로 남미 각국의 군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 발전해 나가는 것 만큼이나 중요했던 것은 바로 마약전쟁을 빌미로 한 직접적인 군사개입과 내정간섭이었을 것이다. 쿠바의 공산화가 남미 각국에 떨칠 파급력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부시 행정부 시절에는 마약 자금 세탁에 관여했다는 이유로 파나마의 노리에가를 무너뜨리기 위해 직접 침공을 감행했고, 콜롬비아의 경우 정부의 허락도 없이 콜롬비아 영해에 미국함대를 보내 항의를 받기도 했다. 그런 지점에서 마약전쟁을 끝나지 않는 테러전쟁에 비유한 다나카 사카이의 지적은 설득력을 갖는다.


2012년 돈 윈슬로는 소설 《개의 힘》을 통해 남미 국가들의 장악력을 높이기 위해 마약 조직과 손을 잡은 미국 정부를 비판하기도 했다. 2008년 11월 볼리비아의 모랄레스 대통령은 "DEA(마약단속국) 요원들이 마약퇴치가 아닌 정부전복을 위한 보수우파 정치세력의 음모에 가담해 스파이 활동을 벌이고 있다"며 자국 내 DEA 요원들의 활동금지와 강제출국을 명령하기도 했고, 2012년 미 법무부는 콜롬비아에 파견된 DEA 요원들이 현지 마약조직으로부터 주기적으로 성접대를 받아왔다는 감찰 보고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물론 정보수집을 위한 일환으로 인정 정직 2-10일, 혹은 무혐의 처분에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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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콜롬비아 정부는 폭력조직이 아닌 국가의 자금원으로서의 마약 조직이 필요했고, 미국은 남미를 장악,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마약 조직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런 입지조건을 바탕으로 파블로 에스코바르는 마약왕이라는 왕좌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똑똑한 바보들》의 저자 크리스 무니는 "광기란 같은 일을 반복하면서 결과가 달라지기를 바라는 것"이라 말했다. 파블로 에스코바르가 사망한 지 십수 년이 지난 지금 또 다른 마약왕 호아킨 구스만이 탄생한 이유도 어쩜 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는 그 '광기'라 할 수 있겠다. 


이렇게 광기의 시대는 마약왕 '파블로 에스코바르'를 만들어내고, 제거했으며 또 다른 마약왕을 왕좌에 올리기 위해 애쓰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참고자료

- 미국의 對콜롬비아 마약전쟁 : 현실주의 외교 논리의 문제점(이성형)

- 콜롬비아 메데인 카르텔의 부상과 몰락의 원인분석 (이베로아메리카 제6권 : 조성권)

- 콜롬비아와 美國의 痲藥戰爭 (한국국방위원회 : 엄태암)

 

 

PS.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다음 시간엔 증여왕, 협상왕, 건축왕, 정치왕... 혹은 정자왕, 피구왕, 복면가왕 중 꼴리는 거 하나 집어 찾아 뵙겠다.

 

 

 

 

 

 

너클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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