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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8. 24.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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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재는 반 세기를 역사의 변두리에서 살아온 

필자의 경험과 생각을 통해 

뜻을 지닌 민초들이 지난 반 세기를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기획되었습니다.

  





미운 오리 새끼

 

87년 말에 대선이 다가오자 첫토 기도회에 호남 출신 목회자들이 무더기로 가입하면서 애초의 순순한 기도 모임에서 김대중 씨를 위한 선거 운동을 하는 전국적 목회자 조직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나는 김대중 지지 목회자 조직이 생기면, 김영삼 지지 목회자 조직이 생길 것이고 그렇게 되면 상호반목이 벌어질 것이 뻔한 일이기에 반대 의견을 밝혔지만 통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어서 더 이상 모임에 나가지 않았다. 김대중 씨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고 김 씨를 대통령 만들기 운동을 하는 목사들의 조직을 만드는 것을 반대한 것이다. 그 조직은 결국 김영삼 지지 목회자 단체와 다툼을 벌이고 급기야 김영삼 씨 통일교 관련이라는 음모성 폭로라는 추태를 벌여서 선거판을 시끄럽게 만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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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수호실천협의회는 김영삼 후보가 지난 80년 통일교주 문선명 목사로부터

민주화 헌금이라는 명목으로 5억원을 받아 횡령했다고 주장했다.

출처 - <경향신문> 1987년 12월 11일자


내가 속한 교단은 나를 항상 껄끄럽게 대했고 심지어는 신학교 동기생 중 가장 가까운 친구들과도 대화가 단절되었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소식이 깡통인 신학대학의 학장은 독재 정권 때문에 학생들이 데모를 하는 것을 내가 배후조종을 해서 학생들이 데모를 한다고 교단에 나를 징계해 달라고 요청을 하는가 하면, 미국 비자를 받기 위해서 목사 재직증명서가 필요해서 발급 받으러 갔더니 교단의 목사로 인정할 수 없다면서 증명서도 떼어주지 않았다. 나는 교단에서 완전히 미운 오리 새끼이었다.


일단의 목회자들이 '군부독재타도를 위한 목회자 삭발 단식 기도회'를 했다. 주변에는 교인들이 모인 것이 아니라 전투 경찰 1개 중대가 모여서 지켜보는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삭발을 했었다. 엄숙을 넘어서 침통하게 한 사람 한 사람 차례로 삭발을 하는데 내 차례가 다가올수록 나는 고민에 빠졌다. 단식이야 소문 안 나게 나 혼자 하면 되지만 융통성 있는 감리교, 장로교 소속 목회자들과 달리 꽉 막힌 보수교단인 출신인 나에게 드러나는 삭발은 매우 곤란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경찰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교단이 무서운 존재였다. 경찰은 수첩에다 이름을 적는 것으로 끝이 나지만, 그렇지 않아도 교단에서 유일하게 들어 내놓고 민주화 운동을 하는 내가 삭발까지 했다가는 왕따를 더욱더 자초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마음속으로 갈등을 하면서 내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데 자기들처럼 교단적인 배경이 없는 나의 외로운 입장을 잘 이해하고 있었던 모임의 좌장격인 고 허병섭 목사님이 "아무래도 지 목사는 안 깎는 것이 좋겠다. 성명서에 이름도 넣지 말고"라고 정리를 해 주었다. 나는 머리를 깎지 못하고 단식에 참여해서 단식을 마치고 기념사진을 찍을 때도 스스로 빠져야 했다.


이렇게 왕따에 자따가 겹친 세월을 보냈지만 아주 예외적인 사건도 있기는 있었다. 한 번은 동기생이기는 했지만 나이 차이가 많이 나서 평소에 가깝게 지내지는 못했던 사람이 불치의 병이 걸려서 희망이 없는 투병생활을 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렸다. 소식은 들었으나 오랫동안 동기생들과 자발적인 소외상태에 있던 나로서는 병문안을 가기에도 뜬금이 없어서 가지를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동기생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의외의 전화에 어쩔 줄을 몰라서 병문안을 가지 못한 변명을 늘어놓자 동기생은 "병은 다 나았고 만나서 할 말이 있으니 꼭 한 번 만나보자."고 했다. 마지못해 약속을 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이 사람이 병상에서 내가 모른 척한 것에 대하여 섭섭한 마음이 들어 전화를 했구나!'하는 생각이 들어 죄를 지은 심정으로 약속 장소로 나갔다.


그런데 막상 만나보니 그는 전혀 예상 밖의 이야기를 했다. 병상에서 죽음을 앞에 두고 회개를 하면서, 고생하고 있는 나를 돌아보지 못한 것이 떠올랐다는 것이다. 그래서 회복을 하고서 병상에 있는 동안 격려의 뜻으로 받았던 돈 중에서 십일조를 떼어서 가져왔다며 봉투를 내미는 것이 아닌가? 그의 행동에 나는 할 말을 잃어버렸고 너무도 부끄러웠다.


그러니 교단의 괄시가 나쁜 결과만 본 것은 아니었다. 내가 속한 집단으로부터 왕따가 되면서 할 수 없이 NCC(교회협의회)에 속한 작은 교단에 적을 둘 수밖에 없었다. 세계기독교협의회(WCC) 산하에 각 국가별로 조직된 교회협의회는 명실공히 한국의 기독교를 대표하는 조직으로 70년대부터 민주화운동의 핵심 역할을 해왔다. NCC에는 각 교단에서 파송된 목사들로 인권위원회가 조직되어 있었고 나는 그 교단의 파송을 받아 인권위원이 되었다.


인권단체가 전무한 상황이었던 당시에는 NCC 인권위원회가 유일한 인권단체였다고 할 수 있다. 인권위원회는 아무 힘도 없는 위원회였지만 그래도 주거래처인 경찰, 안기부, 보안대 등에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는 기구였다. 그래서 때로는 내가 NCC 인권위원이라는 것이 힘없는 방패 노릇을 하기도 했었다. 왜냐하면 인권위원회의 존재를 아는 형사들이 간혹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권위원회 같은 것이 있는지도 모르는 무식한 경찰을 만나면 소용이 없었다. 당시에는 인권이라는 것을 떡 해먹는 것으로 아는 경찰이 많았기 때문이다.



잠망경을 올리다


1989년 제 13대 총선에 빈민운동의 대표 선수이었던 고 제정구 선생이 재야세력의 현실 정치진출이라는 실험적 성격을 가지고 시작한 한겨레민주당은 당시 수면 아래 잠겨 있는 재야세력의 잠망경 같은 입장이었다. 어느 날 제정구가 같이 밥을 먹자며 만나자고 해서 갔더니 생글생글 웃는 얼굴의 새파란 청년을 소개했는데 풀무원을 시작했던 원혜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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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견 정치인이 된 원혜영 의원

출처 - <한겨레>


제정구는 원혜영이 이번에 한겨레민주당 선수로 부천에서 출마를 하기로 했으니 전폭적으로 도와 달라고 지시(?)를 했다. 나는 제정구를 전적으로 동지이자 스승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에 그의 부드러운 부탁은 강력한 지시로 받아들였다. 마침 처남댁이 갑자기 세상을 떠난 탓에 집사람이 아이들을 데리고 처남댁으로 가서 집이 비었기 때문에 나는 우리 집에서 원혜영의 사무실과 별도로 선거캠프를 차리고 청년, 학생들을 모아서 본격적인 선거운동을 시작했다.


원혜영의 출마는 정치 실험이라는 성격이 있었기 때문에 선거 사무실은 운동권 인사들의 출입이 빈번했다. 도와주러 왔다고는 하지만 부천지역에 연고가 없는 이들이라 큰 도움은 되지 않았고, 말 동냥이나 해주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문제를 일으켰다. 당시 부천 지역 후보 중에 당선 가능성이 가장 높은 후보는 김영삼의 비서실 차장 출신으로 인천시장을 지낸 최기선이었다. 어느 날 원 혜영의 서울대 출신 선후배들이 선거 사무실을 찾아왔다가 서울법대 출신인 최기선의 선거 팜프렛에서 '민주화를 투쟁하다 수차례 제적 및 투옥'이라는 문구를 발견했다.


이호웅이 “야, 최기선이 언제 감옥 갔다 왔냐?”고 했다. 그 자리에서 감옥전과가 있는 선후배들이 이리저리 따져보더니 최기선은 감옥에 간 일이 없는 것이 밝혀졌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넘어가는 줄 알았는데 며칠 후 선거 전날 사무실에 들렀더니 ‘최기선의 투옥은 사실인가?’라는 내용의 인쇄물이 쌓여 있는 것을 보고 나는 순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이미 20대에 국회의원 비서로서 선거를 치러본 경험이 있어 선거판의 생리를 정치 초년생인 그들 보다는 비교적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이야 선거법이 발달되어 있어서 그럴 일이 없지만 당시만 해도 투표 전날 결정적으로 불리한 흑색선전을 당하면 상대방에서 해명할 시간적 여유도 없기 때문에 당황하고 흥분해서 이성를 상실하고 폭력을 휘두르는 경우가 흔히 발생했다. 그래서 나는 모두 식사를 하러 간 자리에서 원혜영을 화장실로 불러냈다. “최기선의 과대포장이 폭로된다고 해서 당신이 당선되는 것이 아니고, 이번 선거는 민정당 후보가 당선될 것 아니겠소?" 원혜영은 웃으면서 “나는 그럴 생각이 없었는데 선배들이 해온 겁니다. 목사님 생각대로 처리하세요.”라고 했다. 원혜영은 본래 품성이 좋은 사람이기도 했지만 당시는 아직 30대 후반의 전혀 때가 묻지 않은 사람이었다.


나는 일행이 식사를 하는 동안 인쇄물이 한 장이라도 유출되면 안 되기 때문에 청년들을 시켜서 인쇄물을 우리 집으로 옮겨서 증거물로 몇 장만 남겨 두고 드럼통에 넣어 불을 태워버렸다. 더 이상 선거운동을 할 수 없는 밤 12시가 넘어서 비로소 최기선에서 전화로 사실을 설명하고 나중에 원혜영에게 감사하고 인쇄비를 갚으라고 하고 사람을 보내어 증거물을 가져가도록 했다.


최기선은 고맙다며 밤 12시에 자기 처남을 비밀리에 나에게 보내서 인쇄물을 가져갔다. 그야말로 투표 전날 심야의 007 작전이었다. 선거결과는 최기선이 근소한 표차로 민정당 후보에 앞서 당선이 되었다. 만일에 인쇄물이 배포되었다면 최기선의 당선은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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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 남구 13대 총선 결과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 부터였다. 괘씸하게도 최기선은 그 사건에 대하여 말 한마디 없었다. 우연히 그의 비서를 전철에서 만나서 최 의원에게 전해주라고 한 번 주의를 환기해 주었고 그 후에 부인을 만난 자리에서(최 의원 아들은 우리 집 큰아들과는 한 학급의 친구였고 최 의원은 나의 중학 2년 선배로서 평소에도 자주 만나는 사이이었다.) 또 한 번 그 이야기를 했다.


최 의원 부인은 “목사님! 최 의원 성격이 남에게 고맙다는 말을 잘 못 해요. 이해해 주시고 미워하지 마세요.”라고 호소를 했다. 그러나 내가 용서를 하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라 문제는 원혜영에게 당연히 사례를 하고 인쇄비를 갚아야 해결되는 것이었다. 최기선은 끝내 답이 없었다.


세월이 흘러 4년 후 14대 총선 시기가 되자 최 의원에게서 비로소 연락이 왔다. 무슨 이야기나 나오나 기대했더니 예의 사건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없고 오히려 뻔뻔하게 “지 목사가 이번에 나를 좀 크게 도와주어야겠소.”라고 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형님! 4년 전의 일을 잊었습니까? 내가 왜 형님을 도와야합니까? 이번에는 형님 낙선을 위해서 노력할 겁니다.”라고 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 후 하루는 고교 선배인 부천에 있는 17사단의 사단장인 서경석 장군이 부대로 동문들을 초청했다. 그 날의 모임에서 서 장군은 덕담 삼아서 “이번에 동문들이 힘을 모아 최기선을 꼭 재선시키자.”고 해서 나는 정색을 하고 “사단장님! 지금 그 말 취소 안하면 군인의 정치개입으로 선거법 위반으로 고소하겠습니다.”라고 했다. 내가 이의를 달고 나오자 노련한 서 장군은 웃으면서 농담으로 돌렸다. 사실 나도 그럴 뜻까지는 없었지만 최 의원의 귀에 들어가라고 일부러 한 번 그래 본 것이었다.


14대에서는 바라던 대로 최기선은 낙선했고 민주당으로 위장귀순(?)을 한 전 민정당 후보 박규식이 당선이 되었다. 우습게도 어제까지 적이었던 자가 아군이 되자 안동선 의원의 주선으로 상견례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가 나를 만나자마자 하는 말이 걸작이었다. “아시다시피 나는 신발에 흙을 안 묻히고 살 수 있는 사람 아니오? 그런 내가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정치를 하겠다고 나섰는데 나 같은 사람에게 왜 욕을 하는 겁니까?”였다. 그러나 선수는 선수답게 놀아야 하는 법이다. 나는 그 자리에서 전향 신고비로 200만 원을 갈취(?)해서 당시 내가 대표를 맡고 있던 부천민주단체협의회의 사무실 경비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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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MBC>


그러나 박규식과의 인연이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재선의원으로 야당 몫의 상임위원장을 요구하던 박규식과 야당 총재인 김대중과의 거래가 틀어지자 그가 다시 보수 정당으로 월북(?)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대선이 다가왔고 노무현을 단장으로 하는 새물결 유세단이 역곡역에서 유세를 하게 되었다. 원래 선관위에 등록된 연설원만이 연설을 할 수 있었지만 노무현은 내가 인사를 한다는 명분으로 올라가서 5분간 연설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나는 그 시간을 이용해서 집중적으로 박규식을 규탄하는 연설을 했다.


그런데 그날 저녁 오랫동안 거래를 온 탓에 미운 정 고운 정이 많이 들어 있는 노련한 정보계장(이름이 노련한이 아니다)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날 낮 유세가 있던 시각에 박규식이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자기에게 전화를 걸어서 내가 선거법을 위반하고 연설을 했다고 고발을 한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가 “의원님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제가 가서 접수를 받겠습니다.”하고 물어서 직접 찾아 가서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다시 한 번 생각을 해보시는 것이 어떠시냐고. “유세장에서 몇 사람 듣지도 않았는데 고발을 하면 지 목사는 잘되었다고 더 시끄럽게 떠들지 않겠느냐?”라고 설득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 조심하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해 주었다. 정보계장이 이런 정보를 주는 것은 나에게 고마운 일인 것 같지만 그런 것만도 아니다. 만일에 박규식이 나를 고발하고 우리 쪽에서 반발하면 지역 내에서 시끄러워져서 자기의 일거리가 하나 더 늘어나기도 하고 여당의원을 개인적으로 한 번이라도 더 만나야 촌지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부천시민신문


1989년 언론이 부분적으로 자유화 되어 지역 신문을 발간할 수 있게 되었다. 부천에서도 국민들이 성금을 모아 시작한 한겨레신문처럼 시민들이 돈을 모아 만든 부천시민신문을 발간하기로 하고 석왕사의 영담 스님이 사장을 내가 실무 책임을 맡았었다. 영담이 사장을 맡게 된 이유는 단순히 석왕사가 돈을 제일 많이 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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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석왕사에서 있었던 범민족 대회 참가단 발대식 사진


영담은 신문뿐이 아니라 항상 우리들 배고픈 민주세력의 든든한 후원자역할을 해주었다. 신문 창간을 앞두고 우리는 아침 시간에 자주 모여서 회의를 하고 식사를 해야 했다. 한 번은 회의를 마치고 메뉴를 설렁탕으로 통일해서 시켰는데 영담이 종업원에게 자기 것은 고기를 빼고 달라고 했다. 그래서 내가 농담으로 “아니? 스님! 설렁탕에 고기를 빼면 무슨 맛으로 먹습니까?”라고 했더니 영담이 천연덕스럽게 “국물에 고기 맛이 다 울어 납니다.”라고 응수를 해서 일동이 포복절도를 했다.


가난한 신문이었지만 기자들만은 최고의 인재들이 모여들어서 선택하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신문사가 사무실을 얻어 입주를 하고 난 다음 같은 건물에 있는 지하 이발소에 인사 겸 찾아 가서 이발을 했다. 이발소 주인이 내가 신문사 편집국장이라고 소개를 하니까 무슨 대단한 사람인 줄 알고 자기 고객 중에 힘 있는 사람들도 있다는 뜻으로 “귀동이 형님도 우리 집이 단골이셨다."고 했다. 내가 ”누구요?“ 라고 하니까 ”문귀동 형사요.“라고 했다. 몇 해 전에 권인숙 양 성고문 사건으로 유명했던 부천서 문귀동 형사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 사건이 세상을 그렇게 크게 뒤집어 놓았어도 그 사건의 의미를 이발소 주인처럼 전혀 모르는 인생이 있는 것이다. 이발소 주인은 성의를 다하여 머리를 깎고 면도를 준비했지만 나는 사양하고 자리를 떴다. 문귀동이 앉았던 의자에 더 이상 앉아 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부천시청에서 세금 문제를 실수한 일이 있어서 보도를 하려 하자 보도를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을 해왔다.?안 된다고 하니까 시청 직원 가운데 교회 장로이면서 나를 잘 아는 분이 밤에 우리 집으로 봉투를 가지고 찾아왔다. 그 분은 기사를 싣지 말아 달라고 부탁을 하면서?‘목사님이 잘 모르셔서 그러시는데 으레 그렇게 하는 것’이라며 점잖게 훈수까지 두었다. 그러나 당시 자존심과 긍지 하나로 버티고 있었던 우리 신문에 그런 공작이 먹힐 리가 없었다. 물론 신문은 얼마 못 가서 돈이 없어서 문 닫고 말았지만. 세상은 그런 것이다. 양심적으로 산다고 하는 것은 때로는 비타협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어느 추석에는 부천에 공장이 있는 삼성반도체 인사팀장 명함이 붙어서 선물용 비싼 갈비세트가 집으로 배달이 되어 왔다. '다른 집으로 갈 것이 잘못 왔는가 보다. 곧 찾으러 오겠지'라고 생각하며 며칠간 그냥 내버려 두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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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네이처오다


그러다가 며칠이 지나도 찾으러 오는 사람이 없고 더 이상 두면 고기가 부패할 것 같아, '일단 먹고서 내가 부패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고는 맛있게 먹어 버렸다. 궁금증을 못 이겨서 나중에 다른 경로를 통해서 그 선물이 정말 나에게 온 것인지를 확인을 해보았다. 정답은, 우선, 삼성이 어떤 곳인데 그런 실수를 하겠느냐 하는 것이고, 선물도 등급이 있는데 그 정도면 삼성 반도체 쪽에서 상당히 신경을 쓰는 것이니 아무 소리 말고 잘 드시라고 하는 것이었다.


결론은, 나 같은 사람도 지역사회에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삼성반도체에서 관리차원으로 갈비 세트를 정례적으로 보내는 것이었다. 그 후, 우리 집사람은 명절 때마다 십여 년을 꾸준히 ('세상에, 어느 효자가 그렇게 정성이 지극할까?'싶을 정도로) 보내오는 갈비 세트로 식탁을 꾸려왔다. 나중에는 명절이 되면 은근히 기다려지기도 했다. 삼성이 그렇게 관리하는 인물이 전국적으로 20만 명이라는데 영광스럽게도(?) 나도 그 20만 명 중의 한 명으로 지명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쪽에서 먼저 아는 체를 했는데, 내가 모른 체하고 넘어갈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갈비 세트로 맺은 인연을 그대로 썩힐 수가 없어, '어떻게 하면 삼성반도체와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할 수는 없을까'하고 궁리하던 차에, 드디어 껀수가 생겼다.


당시로는 내가 관계하고 있던 단체는 모두가 비합법(불법이 아니고) 단체여서, 삼성으로부터 지원을 받을 길이 없었다. 그런데, 아는 환경운동 단체에서 행사를 하는 데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기에 삼성 반도체에 지원을 부탁했더니 1,500만 원을 지원해 주었다. 말 한 마디에 우리 집 전세값인 1,500만 원이 생긴 것이다. '참 좋은 세상도 있다'는 것을 그때서야 알았다.


선물을 주고받는 관계는 이렇게 좋은 것이었다. 고스톱 판에서 '오고 가는 현금 속에 싹트는 우정'이라는 금언이 있지만, 오고 가는 선물 속에 이런 훈훈한 관계(?)가 맺어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회가 이런 훈훈한 관계를 맺는 사람들끼리만 부드럽게 돌아갈 때, 그 관계 속에 끼어들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썰렁한 찬바람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주고받는 습관을 가진 사람들은 오고 가는 것이 없을 때 어쩐지 허전한 법이다.



김용철 변호사와의 만남


‘삼성’ 하면 자동으로 떠오르는 인물이 김용철 변호사이다. 2009년 12월에 일시 귀국했을 때 부천에서 옛 동지들이 그야말로 마치 예비군 군가에 나오는 '어제의 용사들이 다시 뭉친' 기회가 있었다. 그날 그 모임을 좀 더 뜻깊게 만들고 싶어서 인근에서 빵집을 하고 있는 김 변호사와 자리를 같이 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는 우리와 만나고 싶어 하지도 않았고 사람들이 자기를 찾아간 것에 대한 불쾌감까지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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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집 사장님이 된 김용철 변호사

출처 - <오마이뉴스>


그는 수없이 많은 매체들과 인터뷰를 했었다. 그런 그이기 때문에 혹시 우리가 영향력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서 귀찮게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나도 구태여 만나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을 만날 필요를 느끼지 않아서 빵 가게 앞에서 돌아서려 했지만 중간에서 연락을 맡았던 사람이 그러면 자기 입장이 난처해진다고 해서 할 수 없이 가게에 들어가 어색한 만남을 가졌다. 그의 태도는 웅크린 채 잔뜩 경계를 하는 동물 같이 피해의식에 쌓인 방어적인 모습이었다.


삼성이라는 거대 세력과 치열한 전투를 치른 사람으로서 너무 의외의 모습이었다. 그는 잔인한 법률게임을 했던 냉혹한 법률가였다. 그런 그가 그렇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이해되기가 어려웠다. 한국 최대 재벌과의 건곤일척의 싸움을 벌인 싸움꾼을 찾아갔다가 너무 초라한 모습을 보고 실망해서 돌아왔다.


물론 거대한 조직과 힘과의 싸움에서 개인의 심신이 피폐해졌을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한국 사회 최상류층으로서의 특권과 이익을 누리다가 급전직하 바닥으로 떨어져 맨몸으로 추위와 더위를 견디어야만 하는 훈련을 낮 설고 어려웠을 것이다. 내가 아는 한 그의 폭로는 우여곡절 끝에 벌어진 의도하지 않았던 사건이었다. 그는 평소에 정의를 위해서 싸우는 훈련이 된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오직 일신의 출세와 돈을 위해서 수직 상승을 길을 오르다가 어떤 기회에 수직 낙하하는 경험을 하게 된 사람이었다.


나는 김 변호사가 받았을 고통을 절대로 과소평가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그동안 살아오면서 동지들 가운데서 맞을수록 짓밟힐수록 더 강해졌던 많은 사람들을 보아왔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이 아니고서는 절대로 오늘 우리사회가 이만큼 발전할 수 없었을 수많은 무명의 용사들을…….


김 변호사를 보고서 80년대 후반 재벌의 토지 소유 문제를 폭로해서 민주사회로의 발전의 길에 큰 공로를 세우고 이후에도 오랫동안 그 분야의 전문가로서 공헌을 했던 감사원 출신 이문옥 감사관이 생각났었다.



진보의 씨앗


아직 지방자치가 시작되기 전의 국회의원 선거 때였다. 내가 살던 부천의 두 군데 선거구에 신철영, 임동석 두 진보 후보가 입후보를 했다. 지금도 진보 쪽은 가난하지만 아직 정당도 없을 때인 당시에 자기 먹을 것도 변변치 않을 이들이 진보 정치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 출마를 한 것이다. 나는 '선거를 치르려면 돈이 많이 드는데 저 사람들 어쩌려고 저러나?'하는 생각이 들어 그들을 도울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다가 시장을 찾아갔다.


관선 시장의 입장에서는 여당이 당선이 되어야만 한다. 그래서 나는 진보 후보들이 돈이 없어서 너무 고생을 하는데 시장님이 좀 도와주면 어떻겠느냐고 제안을 했다. 물론 내 말의 뜻은 여당 후보에게 돈을 받아서 도와달라는 뜻이었다.


물론 당시 진보 후보들은 선거의 당락에 영향을 끼칠만한 영향력은 전혀 없었지만 비서 시절의 선거 경험으로 보아서는 후보자의 입장에서는 한 표가 아쉽기 때문에 야당으로 갈 표가 진보 후보에게 간다면 자신에게 유리할 것이라고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결과적으로 실제로 당시 여당 후보가 실제로 그렇게 생각했는지 시장이 부탁하니까 그냥 주었는지는 모르지만 액수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작은 액수의 돈이 왔다. 원래 정치자금이란 그런 것이다. 받은 쪽에서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나는 배달 사고 없이 두 군데 진보 후보들에게 시민들이 모아 준 돈이라고 하고 전달을 했다. 돈의 액수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당사자들은 내가 돈을 전해 준 것을 기억도 못할 수도 있겠지만 기억한다고 해도 지금까지 내가 전해 준 돈이 누구의 돈이었을지 전혀 모르고 있을 것이다.


이런 유의 정치자금 거래는 아마도 이미 공소시효도 지났겠지만 아마 모르긴 몰라도 당시로서는 불법이 아니었을 것이다. 후보가 다른 후보에게 돈을 받고 사퇴를 했다면 후보 매수죄가 되겠지만 돈의 액수도 소액이고 설사 큰돈을 받았다고 해도 절대로 사퇴를 할 후보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당선이 목적이 아니라 진보 세력의 존재를 알리는 의미에서의 출마를 한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진보 정당들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세력이 작지만 그나마 그런 이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존재하는 것이다.



P.S.


25일 일시 귀국 한다. 26일 오후 7시에 부천 YMCA(032-325-3100. 원미구 중1동 1167-4)에서 ‘포스트모던 시대의 영성’에 대하여 강연이 있을 예정이다. 혹시 부근에 사는 딴지스들 가운데 주제에 관심이 있다면 한 번 들려 보아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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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딴지일보 coco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