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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1. 27. 화요일

sydney






편집부 주


이 글은 필자가 자신의 남아공에 거주 중인 한인 부부를 만나

경험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들 부부는 한국에서 모든 것을 잃고 

맨손으로 남아공으로 건너 가 

고국 땅에서는 꿈도 못 꿀 일들을 이뤄낸 이들로, 

그들과 2주간 머물며 나눈 

남아공 사회에 대한 분석, 토론이 

한국과 남아공, 두 사회를 이해하고

새로운 공동체 생활 양식을 고민해 보는 일에 

도움이 될 것 같다, 

마, 이 정도 의도를 깔고 시작하는 연재라 하겠습니다.

 





세계에서 제일 곤란한 표정


요하네스버그에서 600Km 떨어진 남아공 안에 있는 또 하나의 나라, 레소토라는 곳을 가봤다. 남아공보다도 경제 형편이 더 어려운, 백인들이 전혀 없는 인구 200만의 왕국이었다. 남아공 안에 있는 조그만 왕국일 뿐인 이 곳을 어째서 백인들이 건드리지 않고 곱게 놓아두었던가 궁금해서 알아보니 땅이 워낙 험한 산지라서 먹을 것이 없고 가난해서 건드리지 않았을 거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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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소토의 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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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소토의 위치


레소토의 수도는 '마세루'라 한다. 한 눈에 둘러보면 다 보이는 손바닥만 한 크기다. 마세루의 한 레스토랑에서 점심식사를 하는데 웨이터가 한 명 뿐이었다. 초보자임에 분명해 보였다. 주문을 받으러 온 그의 얼굴을 보니 내가 곤란할 정도였다. 말 한 마디라도 잘못하면 금방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은, 지구상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착하고 선량한 인상이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19 세기에 갓 시골에서 올라와 서울역에 떨어진 사람과 같은 표정이었다. 그 웨이터는 식사가 다 끝나고 계산을 끝낸 다음에도 다른 손님도 없어서인지 내 테이블을 떠나지 않고 우물쭈물 서 있었다. '아마 팁을 바라는 모양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1,000원의 팁을 주었다. 그랬더니 입으로는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땡큐"라고 하기는 하는데 더욱 더 아주 곤란한 표정을 하고는 자리를 떠나는 것이었다. 나중에 일을 마치고 돌아온 '바람'에게 웨이터 이야기를 했더니 폭소를 터트리면서 "아마 왜 팁을 주는지 몰라서 그랬을 것"이라 했다. 그러면서 "시골에 가면 그런 얼굴 많아요"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말이다.


흑인들의 얼굴을 보면 과장된 느낌을 갖게 된다. 그들이 과장을 한다는 것이 아니다. 무표정이 국제적 상표와도 같은 한국인의 얼굴에 비하면 흑인들의 얼굴은 슬프면 더 슬프게, 기쁘면 더 기쁘게, 화나면 더 무섭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아마 그들에게는 한국 같은 내숭 문화가 없기 때문일 거다. 


외국에 나가 보면 한국인의 안면 근육이 얼마나 뻣뻣한지를 당장에 느끼게 된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안면 피부조직이 원래 그렇게 뻣뻣했던가? 아니다. 3,000만 인구 중에 1/10인 300만이 희생된 6.25 전쟁을 치룬 후 인심이 흉흉했던 탓일 것이다. 아니, 그 이전 100년 전에 2,000만 인구 중 5,60여 만 명이 희생당한 동학 혁명에서부터 일제 강점, 6. 25 내란까지 한시라도 인상을 펴고 살 수가 없었던 근세 한국의 역사들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얼굴에 표정을 보이지 말아야 만수무강에 지장이 없던 세월을 몇 대에 걸쳐 살아오던 조상들의 생활 습관이 형질로 굳어져서 마치 원래 유전자가 그런 것인양 한국인들의 얼굴이 굳어버린 것은 아닐까? 한국인의 무뚝뚝하게 굳은 얼굴 표정은 처절한 근대사에서 비롯된 만성적 긴장증후군이 아닌가 싶다.


세계의 온갖 민족이 사는 호주에서 제일 인상이 더러운 민족은 레바논계이다. 이들은 60년대 레바논 내전 때 대거 호주로 피난 온 사람들인데 그 때 찌그러진 인상이 아직도 안 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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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자신의 감정을 외부에 노출해도 다치지 않을 만한 환경에 있을 때에만 자신의 감정을 본능적으로 드러내는 법이다. 무능한 가장이 술 먹고 집에서 가족들을 상대로 마음 놓고 주정을 하는 것은 자신의 내부세계와 외부세계가 충돌하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즉 감정표출을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확신이 있을 때인 것이다. 흑인들은 자기들의 생존 기반이 너무도 약하기 때문에 주변의 모든 것에 대하여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이 그들의 표정에서 타나나는 셈이다. 마치 신병 훈련소에 갓 입소해 어리버리한 신병들처럼.


나에게 인상적으로 남아 있는 흑인들에 대한 기억이 또 하나 있다. 2006년 월드컵 본선에서 한국과 첫 게임을 치르던 토고 선수들이다. 아프리카의 가난한 나라인 토고 출신의 선수들에게는 분명히 그 경기가 자기 생애에 중대한 경기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게임이 불리하게 되어도, 골킥이 아슬아슬하게 실패를 해도, 마치 감정 없는 로봇처럼 그냥 무덤덤한 표정들이었다. 


이렇게 한국인인 나에게는 신선하게 다가온 흑인들의 얼굴이지만 솔직히 이방인 입장에서는 그 얼굴이 그 얼굴 같다. 누가 누구인지도 구분이 잘 안 간다. 그런데도 남아공 경찰은 얼굴만 보고도 남아공사람인지 아닌지를 구분을 해서 다른 나라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들을 잡아 간다고 한다. 형식상 법으로는 외국인 고용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바람'네 회사의 외국인이 잡혀가면 돈을 주고 빼온다고 한다. 흑인들의 표정을 읽고 자존심 상하지 않게 관리를 하면서 보호해주고 앞길을 열어주려는 '바람' 부부의 노력은 끝이 없어 보였다. 


'바람'의 직원들은 얼굴만 보고 잡혀가도 빼줄 사람이 있지만 남아공에 들어온 다수의 외국인 노동자들은 그렇지 못할 것이다. 이런 삶을 오래 살다보면 이들도 한국인들 못지 않은 무표정을 갖게 될지 모른다. 그래서일까. 내가 남아공을 떠난 뒤에도 한 동안은 사회초년병이었을 레소토에서 보았던 웨이터 청년의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은 그 뒤로도 오랫동안 눈 앞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어쩌면 남아공에서 내가 본, 유일하게 아직 문명화되지 않은 얼굴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백만장자 예언자


인간은 동물들과는 달리 어느 문화권에서나 조상에 대하여 존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강력한 유교적인 영향으로 조상 숭배가 일종의 종교의 형태로 자리잡기도 했다. 아프리카의 흑인들에게는 주술적인 경향으로 많이 나타난다. 죽은 조상들의 삶이 살아 있는 가족들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고 하는 생각은 현대인들이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흑인들의 조상 숭배는 여전히 그들의 삶에 강한 영향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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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남아공 젊은이들은 그들의 씨족과 가족들을 뒤로 한 채 더 나은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떠나야만 한다. 전통적 구조가 도시화로 인해 붕괴되면서, 도시의 흑인들은 원래 그들의 정체성과 공동체의 개념을 확립하기 위해 다른 방법을 모색해야만 했다. 그런 면에서 조상숭배가 흑인들로 하여금 백인들의 압제에 대해 대항적 모습을 취했다는 면에서 자신들을 통합시키는 장치(mechanism)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시각이 있다. 백인들에게 밀리면 밀릴수록 조상숭배는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더욱 더 절박한 성격을 띠었을 것이며, 19세기 서구 세력의 위협으로 무너져가는 현실 앞에서 그들 자신의 전통과 국가를 지키기 위해서 영적 닻(anchor)의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생각된다.


그런가 하면 완전 날라리 순 사기꾼 야바위 종교가 사람을 홀리는 것은 한국과는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이다. 호주 ABC 방송에서 남아공의 한 백만장자이자 자칭 예언자에 대한 BBC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토착 종교와 혼합 종교가 무성한 아프리카이지만 정말로 별난, 이 자칭 예언자는 매주 고급 양복점에 가서 양복을 새로 사서 입고 손가락에는 큰 다이아몬드 반지를 끼고 고급차를 타고 항상 기관단총으로 무장한 4 명의 경호원들을 대동하고 대단한 연예인처럼 요란뻑적지근하게 다녔다. 그러면서 교회 안에서는 예언자가 축복했다는 각종 물품을 팔아서 돈을 벌었다. 실제로 그의 모든 행동은 대형 연예인 급이어서 가는 곳마다 사람들을 모으고 전혀 권위적이지 않고 아무하고나 잘 어울리고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쇼멘쉽을 발휘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대형 교회 안에 가득 찬 신자들이 한 손으로는 새로 산 가장 좋은 팬티를 머리 위로 높이 흔들면서 한 손으로는 자기의 성기에 손을 대고 축복하는 장면이었다. 정말 상상을 뛰어 넘는 연출이 아닐 수 없다. 조금만 상식을 가지고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사기꾼 같아 보이는 사람을 어떻게 수많은 젊은이들이 추종하고 가난한 신자들이 헌금을 바치고 있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 나를 납득하게 만든 것은 다큐 속 한 교인의 인터뷰였다. 그것은 리포터의 비판적 질문에 대해서 그 교인은 "그는 특별하다. 그가 우리와 똑같이 가난하고 힘이 없다면 우리가 왜 그를 믿겠는가"하는 답이었다.


그것을 보고서 나는 어째서 이미 한국 사회에서 윤리적으로나 법률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판단이 끝난 김홍도, 조용기 목사 같은 이를 따르는 신자들이 아직도 많은가 하는 의문이 비로소 이해가 될 수 있었다. 인간이 미개할수록 약자에 대한 연민 보다는 강자 편에 기대고 싶은 마음이 큰 법이다. 예수는 "열매를 보아 나무를 알라"고 했지만 인간은 여전히 열매를 보지 못하고 무성한 나뭇잎만을 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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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남아공에서는 아직도 흑인들을 위해 희생적으로 섬기고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목사나 선교사들이 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주변에 소수의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대중은 관심을 갖지 않는다. 오히려 어떤 사람들은 기회만 있으면 약한 그들을 약탈하거나 밟아주려들 것이다. 하지만 대형교회 목사는 두렵고 섬길 대상인 것이다.


아직 흑인들 대부분은 마법, 주술, 요술 등의 신비적 힘이 자신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줄 알고 있다. 그들은 마법적 힘이 존재한다는 믿고 이러한 힘에 접근하게 해주는 수단, 즉 의식, 주문, 부적 등을 믿고 그런 마술적 힘을 조상으로부터 물려받거나 개인적 능력으로 이루어낸 특별한 사람이 있다고 믿는다. 이런 초능력이 그들의 필요를 충족시켜줄 능력이 있다는 본능적 믿음을 가지고 이에 의지하는 것이므로 남아공의 사이비와 신도들은 상호의존적 관계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대형교회 목사와 신도들의 관계 또한 마찬가지로 상호의존적이다. 나도 예수를 세게 믿으면 무언가 남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할 수 있다고 믿어서 허송세월을 보낸 일이 있었다. 그래도 그렇게 믿는 사람들의 숫자가 점차 줄어드는 한국은 그나마 남아공 보다 수준이 낫다고 스스로 위로를 받아야할까?




최후의 만찬


떠나기 전 날 저녁, 함께 살고 있는 '바람'네 식구들과 가정부, 운전사, 정원사, 관리인 모두 함께 바베큐 파티를 했다. 말 없는 가정부인 메기는 남아공 사람이지만 다른 3명은 말라위에서 온 영어를 잘 못하는 이들이었다. 다함께 대화를 하려면 영어로 해야 하는데 영어 못하는 이들은 말없이 밥만 먹고 우리끼리만 마음껏 떠드는 것도 어색한 일이라서 그만 엄숙한 수도원 식사가 되고 말았다. 애초에 '바람'이 그들끼리 편하게 먹도록 하자는 것을 내가 차별하는 것 같이 생각이 되어서 굳이 같이 먹자고 한 것이 본의 아니게 그만 어색한 식사 자리를 만들고 만 것이다. '바람' 부부는 평소에 말 없는 흑인들과 함께 생활을 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기에 이상할 일이 전혀 없을 터이지만 나로서는 마치 주인과 하인들이 함께 밥을 먹는 것처럼 매우 이상한 식사자리였다. 고용인과 고용자의 관계에다 인종적인 차이도 있고 언어소통의 한계도 가진 관계이니 결코 흑인들에게 편한 자리일 수가 없는 것이다.


말이 잘 안 통한다는 것은 내 쪽에서만 아니라 상대편에서도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말이 통하지 않을수록 우리는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하여 온 관심을 집중시켜 표정에서라도 상대의 뜻을 파악하려고 노력한다. 영어를 잘 못하는 흑인들과 이야기를 할 때 조금이라도 더 잘 알아들으려고 긴장해서 듣는 그 모습에서 나는 호주에서 백인들과 이야기를 할 때의 내 모습을 발견했다. 

 

한국에 있을 때 한 번은 미국 선교사와 잘 안 되는 영어를 하느라고 애를 쓰는 내 모습을 보고 옆에 있는 친구가 "참! 영어가 객지에서 고생 많이 하네"고 해서 배꼽을 잡았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영어가 '객지에서 고생을 하는 것'이 아니라 '본토에서 고생을 하는' 셈이다. 이민자들은 언어의 부자유라는 절대적 약점을 가진 채 매일 매일 체격, 피부, 문화의 차이를 느끼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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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공에서 나는 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차별의 세계와 조우하면서 일종의 세계관 혼돈을 경험했다. 왜냐하면 남아공에서 직면한, 한 눈에 봐도 결코 평등할 수가 없는 사회는 산전, 수전, 한국전, 월남전, 온라인전을 거친 나도 이제까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세계였기 때문이다.


나와 네가 서로 다르다는 차이는 참으로 미묘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 차이라는 것이 우월한 강자의 입장에서는 차별로, 약자의 입장에서는 열등의식으로 발전되기 때문이다. 나는 호주에서 백인들 사이에서 어떻게 하면 꿀리지 않느냐 즉, 약자로서 열등의식을 갖지 않고 그들과 나 사이의 차이를 극복하느냐, 하는 과제를 안고 산다. 물론 호주 같은 서구 사회에서는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소수자에게 위해를 가하거나 차별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심각하게 받아들여지는 범죄이다. 아동 관련 범죄가 가장 용서받지 못할 것으로 취급되며, 성적 소수자나 이민자, 타 인종을 차별하는 모든 언어적 신체적 표현은 사회적, 법적 지탄의 대상이 된다. 물론 이렇게 되기까지 흑인들이 오랜 시간동안 피 흘리며 쌓아온 것들, 아일랜드 이민자들과 중국인들이 목숨과 바꾼 것들, 게이들, 여성들, 장애인들이 악착같이 싸워서 만들어온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이해와 관용은 선물로 받은 것이 아니라 그들의 피와 땀과 눈물의 두께만큼 법 혹은 사회가 베풀게 되는 것이니까.


최근 한국이 UN으로부터 인종차별주의 국가라는 의심을 받고 있단다. 많이 출세했다. 모이기만 하면 갈라지고 싸우는 국민이면서도 꼴에 단일민족이라고 다른 인종을 우습게 보는 경향(백인은 빼고)이 나타났다니. 오래 전에 이주노동자들이 시위를 하면서 '살색을 없애주세요'라는 피켓을 들었던 것이 인상 깊다. 그렇다. 인간의 피부색은 총천연색인데 어떻게 크레용의 한 가지 색만을 살색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것은 우리끼리만 살 때의 이야기인 것이다.


물론 차이가 차별로 존재할 수밖에 현실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적어도 양식이 있는 인간이라면 이 점은 최대한 3년 굶은 과부를 상대하는 심정으로 예민하게 신경을 써야하는 문제인 것이다.


남아공에 가기 전에 가장 궁금했던 점은 '바람' 부부가 결코 동등할 수 없는 조건 속에서 과연 흑인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맺고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막상 와보니 아무리 흑인들을 위한다고 해도 그들과 공동생활을 하는 것은 의식의 차이, 문화의 차이, 소득의 차이 때문에 불가능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면서 왜 구한 말 조선에 온 선교사들이 조선인들과 분리되어 자기들끼리 선교사촌을 이루어 살았고 학교를 세웠는지 그 이유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역설적이게도 남아공에 와서, 한국에 들어와 각종 문화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모진 노력을 했던 선교사들에게 감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비록 한국 교회에 근본주의적이고 교파적인 해악을 남기기는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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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가 남아공 사회에서 내가 본 것들이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운 남아공에서 시계 바늘이 돌아가듯이 모든 것이 안정되고 정연한 호주로 돌아와 보니 마치 청룡 열차에서 방금 내린 느낌이었다. 남아공에 짧은 기간 체류하면서도 남아공 사회를 심층 분석할 수 있었던 것은 방문 기간 전후에 리서치를 많이 한 덕도 있지만 지난 20 년간 '오고 가는 현금 속에 싹 트는 타협', 게김, 엉김, 막무가내, 약자를 등치는 법 등등을 아프리카식 문화 속에서 겪은 '구름'이 쉬지 않고 이야기를 해준 덕에 가능한 일이었다. 둘이 앉아서 한 이야기 뿐 아니라 차를 타고 오가며 했던 이야기들을 한 번에 모두 기억할 수 없기 때문에 휴대폰에 모두 녹음을 해두었다가 들으면서 글을 쓰기도 했다. 


연재를 끝내기 전에 몇가지 하고 싶은 얘기를 해보고자 한다. 


남아공으로 갔던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성공을 하는 것도 아니다. 백인들 중에도 불안한 남아공을 떠나서 일자리를 찾아 호주로 온 이들이 적지 않을 정도다. 그러나 '바람'과 '구름'처럼 한국에서 절망했다가 남아공에서 희망을 찾은 사람도 있다. 그들은 한국에서 이루지 못한 꿈을 남아공에서 이루었다. 어떤 이들에게는 위험이 기회이기도 한 것이다.


일요일에 남아공 노천 시장에 가본 적이 있다. 중국 사람들이 전 세계 인구를 먹여 살리고 있지만 남아공은 중고품이 먹여 살린다. 없는 중고품이 없었지만 흥미로운 것은 일상 생활용품 뿐 아니라 철근 등의 건축 자재도 판다는 것이다. 그 무거운 것들을 트럭에 실고 와서 팔다가 안 팔리면 도로 싣고 가는 것이다. 선진국에서는 상상을 할 수가 없는 일이다.


'바람' 부부도 처음에는 한국에서 무게로 달아서 파는 재고 의류를 사다가 남아공 노천 시장에서 파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해서 그들은 소자본을 만들었고 한 달에 한 번씩 중국에 가서(한국에서 중국에 갔다는 게 아니라 지구의 정반대 편인 남아공에서 중국을 오갔다는 얘기) 안경테를 사 매주 남아공 일대에 팔러 돌아다니는 보따리 장사를 했다. 한국에서 중국으로 보따리 장사를 하는 이야기는 들어보았어도 남아공에서 지구의 정반대편인 중국으로 보따리 장사를 해 본 사람은 그렇게 흔치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은 일주일 중 대부분의 시간을 비행기가 아니면 차 안에서 지낸 샘이다. 


지금 '바람'네는 30여 명의 직원이 있는 회사를 운영할 만큼 살만해졌다. 물론, 아직도 중고품을 많이 쓰긴 한다. 돈 때문이라기보다는 환경 때문에. (심지어는 기르는 3마리의 개도 나름 중고품이다. 유기견 센터에 후원금을 내고 버려졌던 개들을 데려다 기르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 도저히 할 일을 못 찾겠는가? 사방을 둘러보아도 첩첩산중이고? 그런데 불행 중 다행으로 영어는 좀 하고? 다행히 모아 놓은 쩐은 조금 있고? 거기다가 목숨도 걸겠다고? 그렇다면 지금 즉시 남아공으로 떠나라. 그곳에서 어떤 환경과 조건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훈련을 시켜줄 숙달된 조교가 기다리고 있다. 이미 말했잖은가? 외인부대 지원병을 붙잡아서 평생 써먹고 있다고.


정신만 똑바로 박혀 있다면 그들에게서 배울 것, 얻을 것이 많으리라고 보장해줄 수 있다.


물론, 이 글을 읽고 '바람'부부와 함께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남아공 사회를 이해하는 정도로 만족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런 분들에게도 끝까지 읽어 준 것에 감사를 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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