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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카와나카지마 전투'라고 하면, '4차 카와나카지마 전투'를 의미한다. 영화 <천과 지>도 4차 전투를 배경으로 했다. (1, 2, 3차 카와나카지마 전투에서 신겐과 겐신이 충돌하긴 했지만, 커다란 임팩트가 있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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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천과 지> 中 (이하 동일)

 

왜 1561년의 4차 전투가 널리 알려진 걸까? 가장 격렬했기 때문이다. 겐신이 끌고 온 병력이 13,000여 명, 신겐이 끌고 온 병력이 2만 명 내외. 총 3만 3천여 명의 병력이 삼각지에서 전투를 벌였고, 대다수는 살아서 돌아가지 못했다. 

 

겐신 병력의 72%, 신겐 병력의 88%가 ‘피’를 봤다. 죽거나 다쳤다는 의미다. 멀쩡한 사람이 전체 병력의 2~30% 수준이었으니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하필 4차 전투가 이렇게 치열했던 걸까? 간단하다. 둘 다 목숨을 걸 정도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1561년은 겐신과 신겐, 그리고 일본 전국시대에 이정표가 세워졌던 시기다. 정확히 말해서 제4차 카와나카지마 전투 전후 1년 정도의 기간이. 

 

카와나카지마 전투 1년 전인 1560년, 일본 전국이 한 번 뒤집어진다. 오와리(尾張国 : 지금의 아이치현)의 멍청이 오다 노부나가 전국에 이름을 날린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의 목을 자른 것이다. 

 

3만 명(자료에 따라 다르지만 2만 5천~3만 명) 병력을 이끌고 상경(上京)길에 오른 이마가와 요시모토를 불과 3천 정도의 병력으로 기습했다. 일본 역사에 길이 남을 전투인 ‘오케하자마 전투’다. 한 번의 기습으로 오와리의 멍청이는 일약 전국이 주목하는 무장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시대가 요동치기 시작한다. 1년 뒤인 1561년 3월, 우에스기 겐신은 관동관령이 됐다. 관동관령(関東管領)이 된 겐신은 호조 가문을 제압하기 위해 호조 가문의 본거지인 오다와라 성(小田原城) 공략에 나선다.

 

(오다와라 성은 난공불락으로 유명하다. 우에스기 겐신, 다케다 신겐이 공격했으나 끝까지 버텨냈다. 결국 이 성을 함락한 건 도요토미 히데요시였다. 호조 우지마사는 할복했고, 히데요시의 천하통일이 완성된다. 오다와라 전투에 관해서는 히데요시를 설명할 때 자세히 다루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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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에스기 겐신은 ‘본격적으로’ 호조 가문에 쳐들어갔고, 호조 우지야스(北条氏康)는 겐신의 기세를 보고 움찔한다.

 

“우에스기 겐신을 상대로 야전에서 싸웠다간 불리하다! 병력을 성으로 물리고, 농성에 들어간다!”

 

우에스기는 호조 가문의 본거지라 할 수 있는 거성 오다와라 성을 목표로 병력을 밀어붙였다. 오다와라 성 뿐만이 아니라 호조 가문의 다른 성들을 포위하며 기세를 올렸다. 

 

이 때 호조 우지야스가 다케다 신겐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호조와 동맹을 맺고 있던 신겐은 흔쾌히 요청을 받아들였다. 음모와 계략으로 똘똘 뭉친 신겐이 단순히 ‘선의’로 호조를 도왔던 걸까? 아니다. 명확한 계산 끝에 나온 한 수였다. 

 

“겐신의 뒤통수를 치는 동시에 우리의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타이밍은 지금이다!”

 

신겐은 겐신이 호조와 싸우는 와중에 카와나카지마에 가이쓰 성(海津城)을 완성시켰다. 신겐의 '한 수'는 무엇을 의미할까?

 

“가이쓰 성을 발판으로 북시나노를 완벽하게 점령하겠다.”

 

일거양득이라고 해야 할까? 대외적으론 호조에게는 나름의 의리를 지키고, 그 이면에서는 실질적인 이득을 챙긴다. 

 

급해진 건 우에스기 겐신이었다. 호조의 본거지인 오다와라 성까지 치고 들어간 건 좋았지만, 관동의 무사들 중 일부가 장기화된 원정에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사타케 요시아키를 주축으로 철병을 요구하며 진을 물렸다). 결국 오다와라 성 포위는 무너졌고, 겐신은 에치고로 말머리를 돌려야 했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1561년 5월과 6월에 걸쳐 다케다 신겐은 본격적으로 북시나노로 병력을 이동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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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노를 완전히 평정하겠다.”

 

우에스기 겐신으로서도 결단을 내려야 했다. 틈만 나면 자신의 발목을 낚아채는 신겐과 결판을 내야 했다. 음모와 계략으로 등에 칼을 꽂는 신겐을 더 이상 좌시할 순 없었다. 신겐이 2만 병력을 휘몰아쳐 카와나카지마에 진출한 것에 맞춰 겐신도 1만 3천의 병력을 이끌고 남하하기 시작했다. 

 

이 정도의 병력을 이끌고 왔다는 건 양측 모두 사생결단의 각오를 하고 있다는 뜻이다. 당시 기준으로 한 국가를 멸망시키거나 상경(上京)을 해 천하통일을 생각해볼 만한 숫자다(불과 1년 전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3만의 병력으로 상경했던 걸 생각해보라). 신겐과 겐신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병력을 이끌고 싸움에 뛰어들었다 할 수 있다.

 

(오다 노부나가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천하인의 자리에 오르겠다고 병력을 동원했던 것과 비교하면 1만~2만이 대단치 않아 보이지만 1561년엔 전국의 다른 다이묘들을 위협할 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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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겐과 겐신의 1차 진출과 포진이 상당히 특이하다. 신겐은 남쪽에서 올라오고, 겐신은 북쪽에서 내려오는 형국이었는데, 신겐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더 올라가 진을 쳤고, 겐신은 남쪽으로 더 내려가 신겐이 만든 가이쓰 성(海津城)을 공격할 수 있는 위치에 진을 쳤다. 그리곤 가만히 바라만 봤다. 

 

서로의 퇴로를 끊어버리겠다는 걸까? 서로의 본거지를 찾아가 일전을 벌이겠다는 걸까? 우연인지 의도였는진 모르지만, 서로가 상대방의 본거지에 진을 친 형국이 됐다. 뱀이 자신의 꼬리를 무는 '우로보로스(Ouroboros)'의 형국이랄까?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건 두 라이벌의 ‘의도’가 반영된, 계산된 행동이라고 본다. 군략에 있어서는 당대 누구와도 견줄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두 명의 장수들이었기에 서로의 목줄을 물어뜯을 수 있는 곳으로 달려갔던 거였다.

 

“겐신의 퇴로를 끊고, 이 안에서 결착을 짓는다.”

“신겐의 퇴로를 끊고, 이 안에서 결착을 짓는다.”

 

카와나카지마는 산맥에 둘러싸인 분지로, 가운데에 강이 흐르고 있다. 한 마디로 대규모 부대가 회전(會戰)을 하기에 딱 좋은 지형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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깎아지른 듯 한 산맥이 둘러싸여 있기에 한 번 진이 무너지면 그대로 흩어져서 초격(抄擊, 적을 습격하여 쳐부숨) 당하기에 딱인 상황, 일생의 라이벌이 붙기에는 최고의 무대였다. 

 

다케다 신겐과 우에스기 겐신은 이 무대에서 그야말로 '혼신의 힘'을 다해 싸웠다. 지략과 용기를 다 토해낸, 후회 없는 전투라고 해야 할까? ‘죽을 힘을 다해’란 말이 일상적인 관용구처럼 들리는 지금, 4백 여 년 전의 두 장수는 말 그대로 죽기 일보 직전까지 모든 힘을 다 끌어내 싸운다.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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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천과 지(天と地と)>는 전국시대 팬이라면 꼭 봐야할 영화다. 6만 명 이상의 인원과 2만 필 이상의 말을 동원해 찍은 이 영화는 버블경제 시절이 아니었다면 찍지 못했을 ‘명작’이다. 당시 돈으로 50억 엔을 때려 부었으니 할리우드 영화 제작비에 버금, 아니, 능가한다.

 

캐나다 올 로케로, 모든 스태프와 장비, 말까지 캐나다로 공수해서 찍었다(당시 일본에서 전투를 할 ‘평야’를 찾지 못해서였다). 이 영화는 전투 규모 하나만으로도 봐야 할 이유가 충분하다. CG없이 실사로 이 정도 규모의 전투장면을 만들어 내는 영화는 앞으로는 볼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