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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본 기사는 가급적 식후 읽는 걸 권장함]



1. 아프다


통증을 호소하는 환자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어느 정도 아픈 것일까요?


아픈 정도를 평가하기 위해 가장 흔하게 사용하는 평가 도구로 'Visual analogue Scale'이라는 게 있습니다. 시각 유사 평가 도구라는 어려운 명칭이지만, 실상은 이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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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아픈 정도를 아프지 않다 0점. 매우 아프다 10점으로 해서 평가해 보세요

출처 - Eric L. Lin, MD


환자가 아프다는 주관적인 호소를, 의사가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도록 수량화하는 도구 중의 하나가 이 VAS입니다. 통증의 특성상 주관적 요인이 많이 개입할 수밖에 없지만, 이 도구로 매우 간단하게 우리는 어떤 사람의 아픈 정도를 수치화해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시계나 좌표계, 온도계 등 많은 현대의 도구들은 주관적이 될 수 있거나 언어로서 모호한 상태들을 특정 값을 가지는 숫자로 보여줌으로서 직관적으로 인식을 할 수 있게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이 VAS는 참 간단한 도구이지만, 의학현장에서 이 간단한 도구는 어떤 사람이 어느 정도로 아픈지, 어느 정도로 좋아졌는지 평가하기에 가장 간편한 도구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만약 누군가 이 ‘도구’가 현대에 개발된 것으로, 한의사들이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면 어떨까요?


이 ‘도구’ 덕에 우리는 전통적으로 ‘통증’이라는, 가장 원초적인 몸의 반응을 치료한다고 알려진 ‘침술’이라는 치료 기법이 실제 통증을 개선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AJ Vickers, 2012] 단지 어떠한 정도를 숫자로 기입해 놓는 것만으로도, 누적된 결과들을 통해 비교해보고 평가할 수 있는 자료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방법들을 정교화한 것이 흔히 말하는 ‘과학적 방법’입니다.


물론 이 ‘측정’은 간단한 행위가 아닙니다. 장하석 교수의 ‘온도계의 철학’에서 읽을 수 있듯이, 무언가를 측정하기 위한 방법을 개발하는 데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노고와 학문적 논쟁이 뒤따르게 됩니다. 온도를 측정하기 위해 동원된 고도의 열에 관한 이론과 많은 실험들이 있었고, 바로 그 덕에 우리는 그 토대 위에서 그러한 고민들 없이, 손쉽게 ‘온도’를 받아들이고 적용하고, 활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누적된 지식의 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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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최근 진행된 한 연구를 봅시다 [Bensoussan A et al, 2015]


‘과민성 대장 증후군’에 대해 ‘한약’의 효과를 ‘평가’했다는 연구를 보겠습니다. 이 연구는 한의학 연구일까요? 적어도 한국에서 진료를 업으로 삼고 살아가는 한의사는 ‘과민성 대장 증후군’에 대한 의료보험 청구가 가능하고[K58], 이는 곧 이 질환에 대한 진단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과민성 대장 증후군이란 무엇일까요? 이 질환을 ‘정의’한 ROME 위원회의 기준을 보면 이렇습니다.



반복되는 복통이나 불편감(여기서 불편감이란 통증이 아닌, 불편한 감각을 말한다)이 적어도 매달 3회 이상, 최근 3개월 다음 항목의 2개 이상사건과 연관된 경우를 말한다.


1. 배변 후 증상이 개선됨 

2. 배변 빈도의 변화와 관련되어 증상이 나타남

3. 변의 형태의 변화와 관련되어 증상이 나타남


진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이러한 기준을 만족시키고, 진단 시점으로부터 최소 6개월 전에 증상이 발생했어야 한다.



한의과대학 교과서에도 쓰여 있는 말입니다. 적어도 ‘한의사’와 ‘한의학계’에서는 이러한 개념들이 한의학을 구성하는 이론들의 일부라고 봅니다. 우리는 합의된 개념의 정의를 통해서, ‘과민성 대장 증후군’이라는 것이 대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한약’은 무엇일까요? 설명에 herb라고 되어 있으니, 적어도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단일화학성분의 약은 아닐 것이 확실합니다. 이 ‘과민성 대장 증후군’ 환자들에 대해 투여한 약품은 ‘작약’, ‘지실’, ‘후박’, ‘진피’, ‘자감초’, ‘대황’, ‘창출’이었습니다. 적어도 한국 한의사들이나, 일반적 ‘상식’으로는 한약인 것은 틀림없어 보입니다(물론 한국에서는 가끔 상식 밖의 일들이 벌어지고는 합니다. 이를테면 쑥(총백)을 주수상반전(알코올 추출)한 약품이 양약이 된다거나 하는...).


기능성 소화장애(이 질환에 대한 정의 역시 ROME III기준을 따릅니다)를 치료하는 효과가 여러 임상시험을 통해 확인된 ‘평위산’이라는 한약에 추가적으로 ‘작약’, ‘지실’, ‘대황’이라는 본초를 가미하여, 이것이 특히 변비 증상으로 나타나는 과민성 대장 증후군 환자에게 효과가 있는지, 가짜 약을 먹는 사람과 비교하여 효과를 확인한 이 임상시험에서는, 환자 스스로가 증상을 평가하는 VAS와 같은 자기 기입식 평가표와 ‘브리스톨 스툴 평가표’라는 그럴듯한 이름의, 하지만, 우리가 늘 아쉬워 한 번씩 돌아보는 ‘그것’이 과연 ‘어떤’ 놈인지 따져보는 평가표를 통해 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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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그놈’ 은 안녕하십니까?


8주의 투여와 16주의 평가를 통해, 환자의 증상을 수치화한 도구를 통해 그 증상 개선이 뚜렷하게 확인되었고, ‘그것’의 형태가 많이 풀어진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임상 시험과는 관계없이, 평위산에 여러 약재를 더한 이 ‘한약’은 효과를 가지고 있겠지만, 우리는 이 시험을 통해 ‘엄밀하게’ 한약의 효과가 어떠한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확실히 알고 있는 지식이 더 늘어난 것이죠. 이미 앞선 연구들을 통해 쌓아올려진 여러 개념들을 우리는 배우고,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여기에 새로이 발견한 지식들을 검토를 통해 조심스럽게 쌓아올려 가는 일련의 과정을 과학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연구도 그렇습니다. 여러 학자, 전문가들의 합의를 통해 정의된 개념들, 이러한 정의에 대해 기존에 확인된 한의학에서의 지식들을 조심스럽게 쌓아본 결과, 더 넓어진 지식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소화장애를 개선하고, 위장관 운동을 돕는 한약을 과민성 대장증후군 환자에게 8주간 주게 되면 최소한 가짜 약에 비해서는 16주 동안은 증상이 개선된다는 것 말입니다.


이런 게 한의학을 하는 방식입니다. 적어도 한의사들은 그렇게 믿고 있고, 한의학의 개념도 그렇습니다. 다른 물리, 화학, 생물학의 그것과 다른 점은 그 실험의 대상이 사람이라는 것이고, 그들에게 하는 행위가 다른 과학연구에서의 기법과는 약간은 다른, 의료행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반적인 과학실험과는 조금 다르기에, 우리는 의료행위에 면허제도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면허제도는 의료행위를 ‘잘’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제도입니다.


물리학 실험실의 장비들은 화학 실험실에서도 사용합니다. 몇몇 물리학 실험실의 측정값들은 화학 실험실에서도 같은 의미로 사용됩니다. 물리학과 화학은 서로 구분되지만, 많은 공통점도 공유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누군가 물리학의 실험기법을 화학에서는 사용해서는 안 된다, R. Boyle의 저서에 의해 쓰여진 그대로 만을 사용해야 한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3. ‘역류성 식도염’으로 의심되는 환자가 진료를 받으러 왔습니다


전형적으로 흉골 뒤에 타는 듯한 증상을 호소하고, 밤이 되면 신물이 올라온다는, 역류성 식도염의 전형적인 증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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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도 40대시고 특별히 최근 체중이 줄었다거나, 물을 삼키기 어렵다는 등의 경고 증상도 없으셨고, GERD-Q라는, 상당히 신뢰도가 괜찮은 설문 검사에서 11점이 나오신 이분은 변증진단상 허증이 아닌, 실증으로서, 육군자탕[JSGE, 2015]이 적합하지 않았고, 식도 외 증상이 심하지 않아 반하후박탕[世旺, 2014]이 효과가 적을 것으로 평가되었습니다. 따라서, 프로톤펌프 억제제라는 약보다 내시경상 식도병변의 개선도가 높고, 재발율이 낮은 것으로 메타분석[郭震浪, 2015]을 통해 확인된 한약인 반하사심탕에 여러 다른 증상들을 참고하여 약재를 가미한 맞춤 한약을 처방했습니다.


반하사심탕은 전통적으로 ‘간위불화’증(연구에 따라 차이는 있으나, 미란성 위식도역류질환 환자의 30-40%를 차지)이라는, “정서적으로 울체(鬱滯)가 심하여 간기(肝氣)의 소설(疏泄)이 안 되므로 위(胃)가 영향을 받아 화강(和降)작용이 안 되는 병리상태”로 인해 ‘속이 타는듯하다’(燒心), ‘치밀어 오른다’(上逆)는 등의 소화기계의 증상을 호소하는 환자들에게 수백 년간 사용되어온 약입니다.


2주 경과관찰에도 좋아진 이분은 4주 후에는 증상이 크게 좋아지셔서 1달 더 투약하지 않고 중단해도 좋을 정도였고, 질병의 특성상 다시 재발하기 쉬우니 몇 가지 수칙과 다시 내원하시는 것 등에 대해 간단히 설명 드렸습니다.


하지만, 한의사인 나는 이 분이 실제 논문에서 본 바와 같이 표준검사에 비해서는 민감도, 특이도가 떨어지는 설문검사만이 아니라 내시경상 병변이 완전히 소실되었는지, 혹은 다른 병변은 없는지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만약 증상이 심하고, 몇 가지 의심되는 부분이 있어 좀 더 전문적인 진료가 필요한 분으로 생각되어 한방병원의 한방내과전문의에게 전원하고 싶어도, 그분 역시 본인이 직접 24시간 pH검사나 위내시경 검사를 시행할 수가 없습니다.


위내시경상 현재의 LA분류법보다 더 환자의 증상을 반영하는, 한의학적 변증치료에 특화된 별도의 기준을 만들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습니다. ‘간위불화’증과 ‘비기허한’증 역류성 식도염 환자들이 증상에서만 차이가 나는지, 실제 식도의 병변에서도 차이가 나는지, 식도의 내압변화에서 차이가 있는지, 산 감수성과 염증 반응에 차이가 있는지, 지속적인 연구를 하고 싶어 하는 한방내과 전문의가 있어도 그는 그럴 방법이 없습니다.


이미 그렇지만, 앞으로도 중국이나 일본에서 위식도역류질환에 있어 객관적인 내시경검사를 통해 치료 효과가 더 나은 것이 판명된 새로운 한약 처방이 발명, 사용되어 보고되더라도, 한국의 한의사는 그 한약을 처방은 할 수 있을지언정 그것이 한국 환자들에게서도 그정도 효과가 있는지, 객관적으로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진료를 하다가 특별히 효과가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처방이 정말로 유의성 있는 치료방법인지 판단할 수단 역시도 없습니다.


정말 효과적인 처방이어서, 한약 신약으로 개발하고 싶어도, 식약처의 임상시험 승인을 받기 위한 계획서에 들어가야 할 필수적 검사들을 저나, 동료 한의사들이 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환자들의 부담을 덜기 위해, 건강보험공단 건강보험 급여약제로 한약이 등재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역류성 식도염에 효과적인 한약이라 입증하기 위한 표준적 검사들이 한의사에게는 금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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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대한한의사협회>


제가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한국의 어떠한 한의사 선생님도 지금과 같은 제도하에서는 그럴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는 사이, 한국 한의사는 해외에서 발표되는 양질의, 효과 좋은 치료를 그저 받아쓰기만 하는, 무력한 존재가 되어갑니다. 정말 좋은 한의학의 치료법도, 한의사가 표준적 진단 장비를 사용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기에, 환자들이 그 존재조차 모르게 되는 경우가 계속 쌓여갑니다.


이것이 환자를 위해서 정말 좋은 일일까요? 더 나은 치료법의 개발, 더 정확한 진단, 예후판정이 잘못된 의료의 방향일까요? 모든 한의사가 내시경을 CT나 MRI 판독을 모든 분야에서 다 잘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군가는 할 수 있어야, 그리고 본인의 전문분야에서만큼은 잘할 수 있도록 숙련될 ‘기회’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한의사들이 요구하는 것은 ‘더 좋은’ 한방의료를 제공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일 뿐입니다.






가리봉동 닥터P


편집: 딴지일보 coc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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