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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초등학생들이 내가 어릴 때 좋아했던 어린이 드라마 <천사들의 합창>의 아이들처럼 순수한 것만은 아니다. 나는 히메나 선생님이 아니고 아이들도 천사가 아니다. 6학년 아이들 사이에서는 내가 들어본 적도 없는 희귀한 육두문자가 오간다. 학생 몇몇이 작당을 해 특정 학생을 계획적으로 따돌리고, 화장실에 가두고, 카톡방에서 메시지로 괴롭힐 때 쓰는 기술(?)들은 상상을 초월한다. 6학년 아이들이 야동 이야기를 하는 건 놀랍지도 않다. 어떤 여학생은 따돌림을 당하는 남학생에게 ‘집에 가서 딸딸이나 쳐라’고 말할 정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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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넘치는 히메나 선생님도 우리 학교 6학년은 어려웠을 걸

 

그렇지만 이 덩치는 산만하고 툭하면 욕지거리를 내뱉는 아이들이 깜짝 놀랄 만큼 순진한 행동을 하거나, 나를 비롯한 많은 교사들에게 힘이 나는 말들도 해준다. 올해 나는 6학년 전체학급의 영어와 도덕교과 전담을 맡고 있다. 내가 수업하는 반의 담임선생님이 학생이 재미있는 글을 썼다고 사진을 찍어 보내줬다. 글에는 ‘나는 왜 영어 선생님이 도덕 선생님인지 알 것 같다’고 쓰여 있었다. 스승의 날에 다른 학생들에도 신기하게 같은 내용의 편지를 받았다. 본인들이 잘못을 해도 흥분하지 않고, 잘못된 행동에 대해서만 또박또박 이야기를 하니 안심이 된단다. 자신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내가 늘 기분을 솔직하게 말하는 모습이 신기하고, 시원시원 재미있다고 했다.

 

부족함 많은 사람을 좋게 보아주니 몹시 고마운 일이나, 내가 좋은 도덕 선생님이라고 하는 말은 당황스러웠다. 내가 담임을 할 때도 교과전담들이 도덕을 수업했기 때문에 올해 거의 처음으로 도덕 교과를 수업하게 된 나는, 그 끝에 결국 ‘도덕 교과를 하루바삐 폐지하고, 제대로 된 시민교육을 해야 한다’ 고 굳건히 결론 내렸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고맙게도 나의 어떤 측면들에 대해 ‘역시 도덕 선생님이야’ 라고 말하는 것은 많은 부분 오히려 내가 도덕 교과, 인성교육, 나아가 도덕의 의미에 품는 몹시 강한 의심과 회의 때문이다.

 

사실 수십 년 전부터 도덕 교과에 대한 반성은 학계와 사회에서 계속되어 왔다. 도덕 교과는 오랜 시간 동안 ‘국책 과목’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제2차 교육과정(1963~1974)에서부터 체제 지향적 성격이 본격화되었고, 제3차 교육과정(1973~1981)에서는 사회과로부터 독립해 주요 교과가 되며 그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1968년 박정희에 의해 반포된 ‘국민교육헌장’이 학생들을 괴롭혔던 것처럼, 세계적으로도 도덕 교육과 인격교육이 강화되는 시기는 전체주의가 부상하고 인권이 짓밟히는 시기와 정확히 맞물린다. 나치즘, 파시즘이 활개를 치던 시절에 지배 세력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이 인격교육이었고 이것이 그들이 추구하는 이념을 내면화한 체제 순응적인 인간을 기르고자 함이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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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런 시대는 지났다고 완전히 마음 놓기는 이르다. 2014년 12월, 한국에서 세계최초로 인성교육을 의무로 규정한 ‘인성교육진흥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이는 예(禮), 효(孝), 정직, 책임, 존중, 배려, 소통, 협동의 8가지 핵심가치 덕목을 중심으로 인성교육 프로그램, 학생 인성교육인증제, 인성교육 교원연수를 강화하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에 찬성하는 한국교원단체총연맹(교총)과 반대하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이 격렬히 충돌했다. 교총은 작년 캐나다에서 열렸던 국제교원노조연맹(EI) 총회에 인성교육 실천 긴급 결의안을 제안했다가 ‘어떤 가치를 학생에게 주입하기 위한 교육은 옳지 않다’는 연맹의 판단으로 결의안이 채택되지 못하고 국제적으로 망신만 당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전 세계적으로 ‘도덕’이라는 교과목을 가지고 있는 나라는 거의 없으며 오늘날 많은 민주주의 국가들은 그 나라의 역사와 철학에 맞는 시민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프랑스의 필수 교육과목인 ‘시민교육’은 노동자의 권리와 노동조합에 관한 내용을 놀라울 정도로 심도 있게 다룬다. 독일은 뼈아픈 나치즘의 역사를 반성하며 견해의 차이 속에서 합의점을 찾아가는 다원적 민주주의를 어릴 때부터 중점적으로 교육한다. 인종갈등과 청소년들의 일탈 행동 문제가 심각했던 영국은 서클타임(circle time)을 학교 수업으로 운영하며 민주적 의사소통 방식을 교육하고 있다. 교총이 ‘인성교육’이라고 번역하는 미국의 ‘character education’ 역시 비판적 사고능력을 가진 민주시민을 기르기 위한 교육일 뿐 한국에서와 같은 인성교육, 도덕 교육과는 완전히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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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에게 인성 교육? 미국에선 상상도 못해"


시민교육, 철학교육이 있어야 할 자리에 여전히 굳건히 서 있는 한국의 도덕 교과가 가지는 문제들은 심각하다. 이 교과는 배우면 배울수록 뇌가 다림질되어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법을 마법처럼 잊게 만든다. 내가 수업하는 6학년 교과서를 중심으로 살펴보자.

 


(1) 합리적인 판단 능력 성장을 방해하는 도덕

 

학생들은 교육을 통해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과 공동체에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 도덕 교과서는 그러한 힘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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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학년 도덕 교과서 42쪽, 교육부/ 2단원 주제: 절제

 

교과서 42쪽에 등장하는 정조는 몹시 더운 여름에도 서늘한 곳으로 옮기라는 신하들의 권유를 거절한다. “지금 이곳을 버리고 다른 서늘한 곳으로 옮기면, 그곳에 가서도 반드시 더 서늘한 곳을 찾게 될 것이다. 어떤 일이든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고 말한다. 폭염이 기승을 부렸던 지난 여름, 전기요금 누진제 논란이 일자 정부가 “하루 세 시간만 에어컨을 틀면 요금 폭탄 맞을 일 없다”고 한 일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주체와 맥락이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아무렇게나 끼워 넣고 본받으라고 종용하는 건 도덕 교과서의 주특기다. 정조는 왕이다. 그는 가장 큰 권력을 가진 입장에서 ‘선택’을 했다. 그 나름의 판단을 했을 것이니 정조를 비난할 일은 아니지만, 전국의 초등학생이 다 함께 이 이야기를 읽으며 ‘어떤 일이든 만족해야지’ 라고 다짐하는 건 오히려 아이들의 사고능력 발달에 방해가 된다.

 

아이들은 공부하는 교실이 너무 덥거나 추울 때, 급식의 질이 형편없을 때, 갖고 싶은 물건이 있을 때 ‘어떤 일이든 만족해야해’ 라고 되뇔 것이 아니라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를 고민해야 한다. 예를 들어 창문을 열고 닫거나, 학교에 건의를 하거나, 돈을 모으기 위해 어떤 전략을 세울 것인가 등 스스로 판단을 하고 실천을 하면서 합리적인 사고능력, 문제해결능력, 자존감을 기를 수 있다.

 


(2) 감정과 생각을 강요하는 도덕

 

6학년 도덕 교과서 35쪽에는 ‘절제하는 생활을 통해 진정한 즐거움과 기쁨을 느낄 수 있습니다’라는 문장이 있다. ‘마음의 편안함과 기쁨’, ‘즐거운 마음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기’,‘밝은 표정, 부드럽고 온화한 말과 눈빛’, ‘살만한 세상’ 등의 말도 자주 등장한다.

 

나 스스로에게 ‘절제를 했더니 진정한 기쁨이 느껴졌는가?’, ‘웃어른을 공경하는 생활은 나에게 즐거움을 주는가?’ 라는 질문을 했다. 나는 작년까지 엄청나게 매운 음식을 배가 찢어지는 느낌이 날 때까지 많이 먹은 적이 가끔 있다. 요즘은 그렇게까지 먹지 않는다. 다음 날 아침 화장실을 격렬하게 들락거리며 느끼는 불편함과, 이러다 피똥을 싸겠다 싶은 두려움이 매운 음식을 먹으면서 느끼는 쾌감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왜 이제 불닭볶음면에 청양고추를 넣어서 먹지 않는가?’ 라는 질문에 ‘설사를 너무 많이 해서 피곤하다’ 라고 밖에는 대답할 수 없다.

 

내가 에어컨을 오래 켜지 않는 것은 전기요금이 많이 나올까 봐 무서워서다. 돈을 아껴 쓰는 것은 쓸 돈이 많이 없어서이고, 타인에게 감정을 조절해 표현하는 것도 뒷감당이 두려워서다. 가끔 몸이 힘들면 버스에서 웃어른 공경이고 뭐고 그냥 자리에 앉아있고 싶다. 난 종일 서서 수업해 피곤한데, 어떤 어르신들은 산에라도 다녀오신 건지 맑은 공기를 가득 머금고 계신다. 실제로 요즘은 자리를 양보하면 극구 마다하시는 노인들도 많이 계시고. 그래도 왜인지 모를 부끄러움과 우리 엄마도 무릎이 안 좋지 하는 생각에 주섬주섬 일어난다. 그렇지만 절제하고, 배려하고, 웃어른을 공경하니 인생의 진정한 기쁨이 느껴진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는 도무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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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니 잘못이야 (feat.고용노동부)

 

도덕 교과서는 매번 ‘진정한 즐거움과 기쁨’을 운운하며 감정과 생각을 개인에게 강요한다. 경험과 고민을 통해 스스로 성장할 기회를 멋대로 박탈해 놓고 ‘진정한 기쁨과 즐거움’이라는 개 풀 뜯어 먹는 소리를 운운하는 것이 과연 도덕적인지 묻고 싶다. 컴퓨터 게임을 더하고 싶지만 부모님 잔소리에 못 이겨 늘 제지당하는 아이가 도덕 시험지에는 ‘게임 시간을 절제하니 진정한 즐거움과 기쁨이 느껴진다’ 고 적도록 하는 것은 세뇌와 자기검열, 심각한 인권침해가 아닐 수 없다.

 


(3) 낡고 불완전한 관념을 강요하는 도덕

 

도덕 교과가 추구하는 여러 가치 덕목들은 한없이 불완전해 어떤 맥락에 쓰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메시지를 가진다. 예를 들어 1단원에는 탈무드에서 인용된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승자가 즐겨 쓰는 말은 ‘다시 한 번 해보자’이고, 패자가 즐겨 쓰는 말은 ‘해 봐야 별수 없다’ 이다」. 생각하기에 따라 1단원에서 강조하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정신’은 2단원에서 적당히 만족하라는 ‘절제’와 상충한다. 가치 덕목들이란 실제 맥락 속에서만 의미를 지니고, 인간의 사유와 과학적인 연구로 끊임없이 도전을 받아 마땅한 불완전한 관념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절제능력에 관한 가장 유명한 연구로는 ‘스탠퍼드 마시멜로 실험’을 들 수 있다. 1970년에 미국 중산층 가정의 네 살배기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으로 ‘마시멜로 이야기’(Don’t Eat The Marshmallow Yet)라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를 낳기도 했다. 이 연구에서 아이들은 마시멜로를 하나씩 받는다. 15분간 이것을 먹지 않으면 상으로 1개를 더 주겠다는 제안을 하고 실험진행자는 방 밖으로 나간다. 30%가량의 아이들이 15분을 기다리고, 마시멜로 1개를 더 받았다. 반면 나머지 70%의 아이들은 그렇지 못했다. 14년 후, 연구자들은 실험대상이 되었던 아이들을 추적해서 놀라운 결과를 얻는다. 마시멜로 2개를 먹은 30%의 아이들이 대학수학능력시험(SAT)에서 훨씬 높은 점수를 받았고, 기다리지 못한 70%의 아이들은 정학 처분을 받거나 폭력적인 아이로 성장한 확률이 훨씬 높았다. 이는 절제력의 중요성에 관한 매우 강력한 증거로 오랫동안 사용되었다.

 

그러나 최근 수년간 이 실험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공격받고 있다. 네 살 아이의 절제력이 인생을 결정짓는다면 개인의 노력과 환경의 영향은 무의미한 것이다. 절제능력을 길러줘야 한다는 메시지 자체에 오류가 있다. 또 어떤 이들은 실험과정에서 무슨 기준으로 15분이라는 시간을 정했으며, 이상적인 기다림의 시간을 결정하는 요인이 무엇인지 묻기도 한다. 미국의 웹진 슬레이트(Slate)는 ‘Everything is Crumbling’(모든 것이 허물어지고 있다) 기사에서 의심의 여지 없이 받아 들여져 온 영향력 있는 심리학 연구들의 타당성과 신빙성에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하기도 했다(관련기사 링크).


도전받고 있는 가치 덕목은 이 외에도 많다. 마음과 행동의 관계를 설명하는 심리학 이론인 ‘마음이론(theory of mind)’은 정직과 거짓말에 대한 우리의 오랜 관념을 돌아보도록 한다.

 

거짓말을 할 때 사용하는 ‘마음을 읽는 능력’(mind-reading ability)과 ‘자기통제력’(self-control)은 발달의 중요한 지표다. 거짓말은 애초에 ‘나는 알지만 당신은 모른다’ 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에 상대방의 마음을 읽는 능력이 필요하다. 또 거짓말을 하기 위해 얼굴 표정과 몸동작을 조절하며 자기통제력을 발휘한다. 이러한 능력들이 부족한 것은 ADHD, 자폐 등 발달문제와 관련이 있다. 발달심리학자 캉 리(Kang Lee)는 아이가 거짓말을 시작하는 것을 발달의 신호로 보고 편안히 받아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발달심리학에서 보면 성장 과정에서의 거짓말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아이는 상대방의 마음을 읽으려 노력하고, 자신의 말과 행동을 조절하는 경험을 통해 자연스럽게 공감능력과 상상력, 자기통제력을 기른다. 절제력이 중요하지 않다거나 거짓말을 하도록 마구 격려하자는 의미가 아니라 관점의 폭을 넓히자는 뜻이다. 의심의 여지 없이 받아들여지던 도덕적 가치 덕목이 끊임없이 도전받고 있는 현실에서, 불완전하기 그지없는 관념을 강요하는 것은 그 자체로 비도덕적일 뿐만 아니라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4) 자기계발, 정신승리, 과도한 긍정을 강요하는 도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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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학년 도덕 교과서, 19쪽, 교육부/ 1단원 주제: 자긍심과 자기계발

 

도덕 교과서는 교육과정 내용 전반에 걸쳐 자기계발, 정신승리, 긍정적인 마음가짐을 강조한다. 그 이면에 숨어있는 인간의 수단화, 불합리한 구조의 지속, 낙관편향의 위험성에 대한 고민이 조금도 없다.

 

1단원 ‘자긍심과 자기계발’의 주제를 위해 교과서는 닉 부이치치의 예를 들고 있다. 1982년 호주에서 태어난 그는 태어날 때부터 팔다리가 없는 선천적 장애를 가지고 있다. 처음부터 그의 사례를 자기계발의 주제로 다루는 것이 몹시 께름칙했지만 3월에는 나 스스로가 얼떨떨하기도 했고, 어쩌면 아이들은 나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텍스트를 읽지도 않을까 하는 생각에 교과서 내용을 읽고 영상을 시청했다.

 

다리가 없는 그가 짧은 발가락에 펜을 끼워 글씨를 쓰거나, 수영이나 농구를 하는 장면이 나올 때마다 아이들은 “와! 나보다 잘 쓴다!”, “야, 저 사람이 너보다 낫다! 너보다 공도 잘 던진다!”라고 말하며 웃었고, 신기해했다. 수업한 다섯 개의 모든 반이 그랬다.

 

나는 진땀이 났다. 아이들의 반응은 사람들이 서커스의 원숭이나 돌고래가 공 던지기, 장애물 넘기, 악수 등을 할 때 웃으며 박수를 치는 것과 본질적으로 같다. ‘영상을 보며 여러분이 신기하게 느끼는 것은 당연할 수 있지만, 만약 이 자리에 닉 부이치치가 있었다면 지금 여러분이 뱉는 말과 행동이 굉장한 실례이지 않을까요.’ 결국 수업은 편견, 상처, 예의에 관한 이야기로 자기계발의 주제와는 아무 상관 없이 흘러갔다.

 

교과서는 ‘팔다리가 없는 닉 부이치치도 노력으로 꿈을 이뤘다’, ‘몸이 불편한 것보다 마음의 상처가 더 불행하다’고 말하며 학생들에게 용기를 가지고 자기를 계발하라고 말한다. 이것은 마치 ‘부모 없는 아이들도 노력으로 꿈을 이뤘다’, ‘부모가 없는 것보다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는 마음을 가진 아이들이 더 불행하다’고 말하는 것처럼 배려 없고, 천박한 사고방식이다. 그들이 평균에 이르지 못하면 ‘역시 장애인이라(역시 부모가 없어서) 어쩔 수 없어’ 이고, 이들이 평균을 넘어서면 ‘위대한 인간승리’ 다. 모욕과 미화가 아슬아슬 한 끝 차이다.

 

당사자들은 그들의 의지와는 전혀 무관하게 평균보다 힘든 조건에서 태어났다. 이들의 노력과 의지는 존경할만한 것이지만 ‘노력만 하면 뭐든지 할 수 있어’, ‘너는 이보다 좋은 환경에서 태어났으니 감사한 마음을 가져라’ 는 메시지는 힘든 조건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모욕일 뿐 아니라, 그들이 처한 어려움을 개인의 문제로만 국한시킨다는 점에서 지극히 위험하다. 작가 이원석이 그의 책 ‘거대한 사기극’에서 자기계발 열풍을 비판하며 ‘자기계발 문화는 민영화, 비정규직, 사교육 등 국가, 기업, 학교가 담당해야 할 몫을 개인에게 떠넘기며 사회유지의 동력을 확보한다’ 고 말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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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에는 물론 나오지 않았지만 닉 부이치치는 어린 시절에 수차례 자살 충동을 느꼈다. 아이들이 생각 없이 괴물, 외계인이라고 외치는 것에 수없이 상처받았고 열 살 때 욕조에 물을 받은 후 빠져 죽겠다고 결심을 했다고 한다. 그가 느꼈을 깊은 절망은 깨끗이 표백되고, 교과서 글의 제목은 ‘몸은 불편하지만 마음은 행복한 사람’이다. 몸이 불편해서 마음까지 불편한 장애인들도 분명히 존재하는 현실에서 우리는 어떻게 함께 살아가야 하나라는 고민은 어디에도 없다.

 


(5) 현실과 맥락이 없는 공허한 도덕

 

마음의 거울이 맑아지면 더욱 바르게 행동하게 된다고 말하는 퇴계 이황을 시작으로 도덕책에는 위인들이 많이도 나온다. 공자, 간디, 황희, 키케로, 예수, 부처, 테레사 수녀 등이다. 그들은 사소한 것들로 싸우거나 불평하는 속 좁은 중생들을 조용히 바라보다가 늘 온화한 눈빛으로 빙그레 웃으며 해답을 제시한다.

 

동식물들도 자주 등장한다. 물고기가 나무 위의 다람쥐를 부러워하고, 공작새가 자신의 목소리에 대해 불평하고, 곰이 나무에 매달린 돌덩이를 적으로 생각해서 계속 치다가 쓰러지고, 나무가 아낌없이 주고도 행복했다거나 하는 식이다.

 

위인과 동식물이 등장하는 것 자체가 문제는 되지 않겠지만 덕분에 도덕 교과서는 어딘가 모르게 허황되고, 현실성이 전혀 없다. 그 덕에 예민해질 수 있는 주제도 두루뭉슬하게 넘어갈 수 있고 말이다. 등골이 휘도록 자식을 키우고도 결국 남은 거 하나 없는 부모의 모습은 영 다루기 불편하겠지만, 나무가 사람에게 끊임없이 주다가 밑동이 밖에 안남아도 행복했다는 이야기는 쉬운 법이다. 멍청한 곰이 화나는 감정을 절제하지 못해 돌덩이에 맞아 죽는 것은 괜찮아도, 권력욕을 절제하지 못한 대통령이 시민들의 성난 돌팔매질을 받는 이야기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은유라 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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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학년 도덕 교과서, 171쪽, 교육부/ 7단원 제목: 성인들의 위대한 가르침

 

7단원에는 ‘사랑과 용서’를 주제로 장 발장을 용서해주는 신부의 이야기가 제시되어 있다. 아이들에게 ‘여러분이 신부였다면 장 발장을 어떻게 대할 것 같습니까?’라고 묻는 교과서 집필진에게 ‘그러는 당신은 어떻게 했을 것 같냐?’ 라고 묻고 싶다.

 

낯선 사람과는 이야기하지 말라고 배우는 아이들 입장에서는 행색이 남루한 낯선 사람이 문을 두드리면 당연히 겁을 먹을 것이고, 호의를 베풀었더니 물건을 훔쳐 달아났다면 괘씸한 생각에 경찰에 신고를 할 수도 있다. 이 사람이 배고픈 조카들 때문에 빵 한 조각을 훔쳤다가 19년을 감옥에서 보낸 지지리도 운 없는 사람인지, 사람 같지도 않은 파렴치범인지 독심술이 있지 않는 한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아이들의 삶과 맥락이 전혀 닿지 않는 상황에 이렇게 도덕의 잣대를 들이대며 터무니없는 죄의식을 느끼게 해도 되는 걸까?

 

사랑과 용서라는 말을 어떤 어른들은 제멋대로 사용한다. 동생과 싸운 아이에게 ‘너는 별것도 아닌 장난감 하나 부러뜨린 동생을 용서하지 못하니? 신부님은 비싼 은식기를 훔쳐간 도둑 장발장도 용서해줬는데!’ 라고 말한다. 막상 새로 사준 비싼 운동화를 친구에게 준 아이에게 칭찬은커녕 ‘네 것 하나 챙기지 못해서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래?’라고 말할 거면서.

 

레미제라블을 처음 읽었던 열 살 무렵에 내게 깊은 인상을 남긴 부분은 부조리한 사회와 사람들의 인색함이었다. 그러나 내가 자라면서 내 안에서 레미제라블도 함께 자랐다. 어릴 땐 자베르가 괴물인 줄로만 알았는데 살다 보니 세상에 자베르가 한 가득이다. 그는 괴물이 아니라 나, 나의 부모, 형제, 이웃, 동료처럼 가장 평범한 사람이었다.

 

은식기를 훔쳐간 장 발장을 대하는 신부의 행동은 어린 내게는 크게 기억되지 않았다. 명색이 신부라면 은식기를 훔쳐 간 장 발장에게 은촛대까지 쥐어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느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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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막상 살아보니 그렇지가 않더라. 내가 본 많은 성직자들은 거룩한 사랑을 베풀기는커녕, 신의 이름을 이용해 자기 배만 불리기 바빴다. 동네에서 가장 크고 멋진 집에는 목사님이 살았고, 그들은 가난한 이웃들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어디 성직자들만 그런가. 어렸을 때 나는 내가 나이가 들어 많은 것을 가지게 되면 그만큼 많이 나눠주는 사람이 될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어른이 되어보니 조그만 것 하나 나누는 것도 쉽지 않다. 그래서 2012년 영화로 다시 보게 된 레미제라블 속의 신부는 내게 천근만근의 무게였다.

 

장 발장 예화의 두 번째 질문은 신부의 ‘사랑과 용서’가 장 발장을 ‘새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는 데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묻고 있다. 마치 신부의 용서가 근본적으로 악했던 장 발장이라는 인간을 개조하기라도 한 것 같다.

 

레미제라블의 신부는 비뚤어진 장 발장을 ‘새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용서’를 한 걸까? 어쩌면 신부에게는 처음부터 은 촛대와 은 식기가 자신만의 물건이 아니었기 때문에 용서할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많이 가진 탓에 장 발장처럼 못 가진 사람이 있으니까. 그게 너무 미안해서 은식기뿐만 아니라 은 촛대도 가져가라 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신부는 스스로를 장 발장보다 고귀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거나, 그를 새 사람으로 만들어 ‘교화’하려고 한 것은 아니지 않았을까. 어쩌면 신부도 젊은 시절에는 우리들이 그렇듯 작은 것에 집착하고, 잘못한 사람에게는 반드시 벌을 줘야 직성이 풀리는 소인배였을지도 모르고 말이다.

 

내가 레미제라블 속 신부에게 감동을 느끼는 것은 그가 장 발장에게 하해와 같은 은혜와 용서를 베풀었기 때문이 아니다. 치졸한 욕망으로 들끓는 세상에서 꿋꿋이 인간에 대한 연민을 지켜낸 노인의 모습이 보이는 것은, 막상 내가 어른이 되었지만 도무지 쉬운 게 없고 여전히 혼란스럽기 때문이다. 내가 어린 시절에는 느끼지 못했던 노신부에 대한 깊은 존경과 감동의 맥락은 거기에 있다. 난 아이들도 자기만의 이야기와 맥락을 스스로 찾는 감동을 느껴봤으면 한다. 어른들이 멋대로 휘두르는 도덕의 잣대에 휘둘리지 않고 말이다.

 


우리에게 존경스러운 인간의 모습은 자신의 삶을 더 큰 삶의 일부로 이해하고 감당하는 기질이다. 그것은 시대의 요구다. 나를 특별한 삶으로 끌어들이면서, 다른 여러 요구와 더 넓은 지평에도 눈을 뜨라는 요구다. 인격을 갖춘다는 것은 (때로는 서로 상충하는) 여러 부담을 인식한다는 뜻이다.


마이클 센델, ‘정의란 무엇인가’ 中


 


우리는 스스로의 도덕성에 만족하는 순간 도덕적으로 퇴화한다.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끊임없이 돌아보며 나 자신의 도덕성을 의심하려는 노력 속에서 완성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진정한 도덕은 예쁜 말로 포장된 도덕책 속이 아니라, 우리가 서 있는 현실에 있다. 그것은 나약한 위선으로 덮을 수 없을 만큼 강건하고, 아무리 어린아이들이라도 느낄 수 있을 만큼 유연하다.

 

아이들은 드라마 속에 나오는 천사들이 아니고, 우리 역시 고귀하고 완성된 인격의 어른들이 아니다. 이런 우리가 지금보다 조금이라도 나은 인간으로 성장하는 길에 현재와 같은 형태의 도덕 교육이 정말 도움이 될지 고민하는 사람들이 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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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딴지일보 coco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