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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03. 05. 수요일

김재홍 + 정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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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소백과사전]두 명의 중앙정보부장 김형욱, 김재규<3>


[공지]딴지 Books 1탄 '박정희소백과사전' 전격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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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에 많은 관심 부탁드린다.  






사.생.활


김재홍 1970년에 한 20대 여인이 한강변 도로에서 피살당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단순한 사건이 아니기 때문에 신문에 대서특필되고 여러 이야기가 퍼져나갑니다. 범인이 누구다, 이유가 뭐다 등등. 이 사건은 당시 권력층 부패?비리의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말하자면 성추문사건이지요. 다른 나라에서 그 정도 성스캔들이 터지면 당연히 정권이 퇴진해야 할 일인데 우리나라는 권력기관이 나서서 공작하고 덮어버렸고, 그 때문에 오랫동안 의문을 낳습니다. 이 사건의 실체는 아직도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시 법무장관이 국회에 나와 이 사건에 대해 해명을 합니다. 아무 의원도 질의를 하지 않았는데 해명을 해요. 어떤 센스 있는 야당 의원이 '대정부 질의도 안했는데 스스로 나와서 길게 얘기한 이유가 뭐요?'라고 묻자 '항간에 여러 가지 유언비어성 말들이 나도니까 해명하기 위해서다'라고 답변을 해요. 거기에 대해 다른 분이 ‘봄이 되면 꿩이 스스로 우는 것 같다, 춘치자명(春雉自鳴)이다’라고 합니다. ‘때가 되면 울 것이 스스로 우는구나.’ 그렇게 하면서 웃었던 장면이 있어요. 그런 사건이 있었음을 알면 좋겠고, 오늘 주제인 박정희의 사생활을 시대 순으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정운현 젊은 시절 이야기를 제가 먼저 하겠습니다. 남자가 여자를 좋아하고 여자가 남자를 좋아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죠. 그 자체를 탓할 것은 아니지만 서로가 사랑해서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돈이나 권력이 개입한다면 문제 아니겠습니까. 권력과 권력을 앞세운 성폭력이 오늘의 주제가 될 텐데요. 박정희도 젊을 때 사춘기도 있고 성장기, 청년시절, 결혼시절도 있었죠. 그런 점에서는 보통사람과 다를 바 없어요.


박정희 삶에 여자가 공식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대구사범 4학년 때 아버지가 강제로 결혼을 시키면서입니다. 방학 때 구미 집엘 왔는데 강제로 결혼을 시켜요. 이게 초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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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첫부인 김호남



김재홍 강제성이 있었는지 어떻게 아나요?



정운현 여러 증언과 자료에 의하면 부친의 강권에 의해 결혼했다고 합니다.



김재홍 그 때는 우리나라에 조혼 풍습이 있었죠.



정운현 조혼이긴 한데요. 박정희 본인이 동의하거나 기뻐하거나, 그런 게 아니라 아버지의 강권에 의해 결혼한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첫 부인하고는 사이가 좋지 않았어요. 만주군관학교 다닐 때 휴가를 나왔는데 집으로 가지 않습니다. 그 때 이미 딸도 있었는데요. 1~2년 동안 가족과 떨어져 있으면 가족이 얼마나 보고 싶겠어요? 그런데 가족을 만나러 구미 본가로 가지 않고, 문경에 교사로 있을 때 하숙하던 하숙집에서 한 달간 지내다가 갔단 말이죠. 경위야 어쨌든 박정희는 첫 부인과는 사이가 원만하지 않았어요.


교사로 문경에서 홀로 하숙하면서 지낼 때 박정희는 주변에 아내와 아이가 있다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변에서는 박정희가 총각인 줄 알았어요. 심지어 혼담이 오가기도 했습니다. 37년에 부임했으니까 만 20세인데요. 지금 20세랑 바로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나이 20세가 어른이라고 하기에는 어렵잖아요. 당시 학생들 중에는 늦게 입학하거나 학교 다니다가 쉬거나 해서 5~6학년 된 여학생들은 16~17세 정도 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박정희도 나이 많은 여제자들에게 연정을 느꼈고, 학생들도 몇 살 차이 안 나면서 총각으로 알고 있는 박정희에 대해 연정을 느꼈습니다. 그런 건 순수한 것이죠. 제자들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실지로 박정희를 두고 혼담이 오갔다고 해요. 당시 문경에서 목재소를 하던 집의 딸과 혼담이 오갔는데, 그 집에서 박정희를 ‘사위’ 비슷하게 부르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게 박정희의 20대 초반까지 여성과의 관계인데요, 제 책 「실록 군인 박정희」 에도 실린 내용입니다.


당시 박정희는 어찌 보면 정직하지 않은 겁니다. 혼담이 오갈 정도였다면 자신이 기혼자임을 솔직하게 얘기해야 했는데 이를 얘기하지 않은 것은 비겁한 것이죠. 또래 여제자들에게 호의를 가진 것만을 놓고 뭐라 하기는 좀 그렇지만 결혼 얘기가 나올 때의 행동은 비겁했다고 봅니다.



김재홍 첫 부인은 전쟁 중에 이혼한 후 비구니로 살았습니다.



정운현 얼마 전에 이런 보도가 나왔어요. ‘박근혜 조카’ 한유진과 남편이 무슨 기업 특혜가 있다는 기사가 나왔는데요. 박정희 가족사를 알고 있는 저도 그 기사를 보고 박근혜 조카 한 씨가 누구인가 잠시 생각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박정희 첫 부인은 김호남이고, 김호남과 사이에서 낳은 딸은 박재옥입니다. 박재옥은 박정희 전속부관 출신 한병기와 결혼했어요. 한병기와 박재옥 사이에서 낳은 딸이 바로 한유진입니다. 따라서 박근혜가 박정희의 ‘장녀’라는 표현은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박정희의 차녀입니다. 박정희와 육영수 사이의 장녀라는 표현은 맞지만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장녀라는 표현은 호적상 정확한 표현이 아닙니다.


첫 부인하고는 한국전쟁 중인 1950년 11월에 합의이혼을 했습니다. 1948년 박정희가 좌익으로 끌려가서 재판을 받고 난 후 풀려나 육군 정보국 문관으로 있다가 6.25가 터졌죠. 전쟁 중에 소령으로 복귀했는데요.6.25 초반에는 남한이 밀려서 대구까지 밀려가서 그 곳에서 육영수와 결혼을 합니다. 1950년 8월, 충북 옥천 출신의 송재천 소위가 부산 피난지에서 육영수를 박정희에게 소개했죠. 그 해 12월 대구에서 육영수와 결혼을 했습니다. 첫 부인과는 앞서 합의이혼을 하고 관계를 정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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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영수와의 웨딩마치




1948년 11월 남로당 연루로 체포되다 -> 1949년 직위해제 당하다

 

1950년 6월 한국전쟁 발발하다 -> 1950년 8월 육영수 소개받다

 

1950년 11월 첫부인 김호남과 이혼하다 -> 1950년 12월 육영수와 결혼하다





김재홍 그 사이에 있던 동거인 이현란은 혼인신고는 안 했나요?



정운현 혼인신고는 안 했죠. 그 얘기도 할까요?


방금 말한 대로 박정희의 첫 부인은 김호남, 두 번째는 육영수입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동거녀가 한 명 있었는데요. 만난 기간이 그리 길지는 않습니다. 박정희가 춘천 8연대에서 근무하다가 육사 교관 겸 중대장으로 가게 되는 것은 지난번에 말씀드렸습니다. 춘천 8연대에 있을 때 박경원이라는 경리장교가 춘천에서 결혼식을 합니다. 박정희는 신랑 박경원의 들러리로 결혼식에 참석했는데, 신부 들러리들도 한 패거리가 왔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한 젊은 아가씨가 박정희 눈에 띈 거예요. 이후에 사람들이 용산에 있는 박정희 관사에 놀러가니까 그 아가씨가 박정희 관사에 살고 있더라는 겁니다. 그 아가씨가 바로 여대생 이현란입니다.


이현란은 원산 루시아여고 출신으로 해방 후 공산정권을 피해 온 가족이 월남했습니다. 박정희를 만날 당시에는 이화여대 1학년이었습니다. 김재춘 씨 증언을 들어보면 ‘멋지고 신식여성에 새침하다’고 했는데, 어쨌든 박정희가 이현란을 아주 좋아했습니다. 첫 부인과 관계가 좋지 않은 것에 대한 반작용일 수도 있고, 어쩌면 박정희도 ‘폼생폼사’의 기질도 있어서 그랬던 것 같아요. 아무튼 이후 박정희는 이현란에 푹 빠져서 관사에서 함께 지냈는데요. 이현란은 북에서 공산주의가 싫어서 내려왔는데 박정희가 좌익으로 잡혀갔다는 것을 알고 정이 떨어졌다고 합니다. 이현란이 박정희와 헤어진 이유가 바로 이겁니다. 그래서 이현란은 여러 차례 집을 뛰쳐나갔고, 그때마다 박정희는 찾으러 다녔습니다. 그만큼 박정희는 이현란을 아끼고 좋아했던 것 같아요. 제가 김재춘 씨한테 듣기도 했고 또 다른 분이 쓴 책에도 일부 나와 있기는 한데요. 이현란은 공산주의가 싫어서 북에서 내려왔는데 만나는 남자가 공산주의자라 도망쳤다고 합니다.



김재홍 둘 사이에 아이를 하나 낳았죠?



정운현 예 그렇습니다. 이 사실은 지난 2011년 5월 16일에 제가 단독 보도한 특종인데요. 우연히 집에서 자료파일을 뒤지다가 98년에 받은 편지 한 통을 발견했어요. 박정희 관련 취재하는 중 만주군관학교 후배이자 박정희에게 역(逆)쿠데타 제의를 받은 최주종 장군 집에 간 적이 있습니다. 최 장군과 부인인 이 여사와 함께 여러 이야기를 나누면서 군인 중 좌익으로 처형된 사람들 이야기도 하게 됐습니다. 그 때 우연히 김학림 씨 얘기도 나왔는데, 이 여사께서 하는 말이 김학림 씨 부인 강 여사가 일본에 살고 있다는 겁니다. 그녀의 근황을 알고 싶어서 연락처를 알려달라고 하니까 알려주더군요. 연락처를 받아 편지를 보냈는데 저는 주로 좌익 군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물었어요. 혹시 박정희 좌익 얘기도 좀 들을 수 있을까 싶어서요. 그런데 답장이 와서 보니 그런 내용은 거의 없고 박정희와 이현란 사이에서 아이가 하나 있었다는 얘기를 장황하게 소개했어요.


둘 사이에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생후 6개월 만에 죽었다더군요. 이현란이 광화문에 있는 모 산부인과에서 아들을 낳을 때 자신이 동행했고, 또 아이가 죽자 용산 관사 뒤에 같이 가서 묻었다는 겁니다. 그 사람이 나한테 특별히 거짓 증언할 이유도 없고, 충분히 근거있는 사람의 증언이라고 생각해서 보도했습니다. 그 얘기를 왜 하냐면 박정희와 이현란 사이가 애정적으로 깊은 사이였다는 겁니다. 어찌 보면 처음으로 여자에게 빠지고, 사랑을 느끼고, 그러다 아이까지 낳은 사이라는 겁니다. 박정희는 아이 낳은 것을 몰랐을 수도 있어요. 숨겼던 것 같아요. 나중에야 아이 얘기를 들었다는 말도 있습니다. 이현란은 ‘좌익 박정희’에게 심한 혐오감을 가졌고 그래서 집에서 도망치면 박정희가 찾아서 데려오곤 했는데 마지막에 도망갔을 때에는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김재춘 씨가 말하기를 전쟁 이후 5.16 전, 아직 박정희가 현역군인일 때 둘이 모처에 갔다가 우연히 이현란을 만났다고 합니다. 박정희의 두 번째 여자가 어찌 보면 이현란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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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조갑제옹이 공개한 이현란의 사진



재홍 동거녀 이현란이 자취를 감춘 시기는 박정희가 남로당 사건에 연루돼 구속됐을 때입니다. 이한림 장군의 회고에 따르면 1948년 박정희가 조사받고 어려운 일을 당하고 나왔다기에 위로하려고 만났어요. 용사 관사로 갔는데 같이 살던 여자가 없길래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물으니 사라졌다고 해서 위로해줬다고 해요. 조사받는 사이에 자취를 감췄고, 그 이후로 찾을 수도 없었고.



정운현 이 때는 박정희가 첫 부인과 이혼은 안 한 상태입니다. 서류상 이혼은 아니지만 별거한 지는 오래됐어요.



김재홍 그 뒤에도 계속 이현란을 찾아다녔는데 못 찾다가 우연한 기회에 조우하게 됐어요. 난 요정이라고 들었는데 조우한 이후로 박정희가 실망하고 다시는 찾지 않은 것 같아요.



정운현 난 구체적으로 어디라고 얘기를 안 했는데 김 선배가 얘기를 다 했네요.



김재홍 우리는 어디까지나 법정에서 나온 증언 진술에 근거해야 하는 것이고 인용해서 말을 할 수 밖에 없는데요. 두 가지 증언이 있습니다. 하나는 중정에서 관리하던 궁정동 비밀 연회장의 책임자가 중앙정보부 소속 사무관입니다. 박정희가 살해된 10.26 후 군사법정에서 밝혀지는데요, 검찰관 신문과 변호인 반대신문에 대한 피고인의 진술, 그리고 재판장의 인정신문을 통해서 모든 것들이 밝혀졌습니다. 당시엔 비공개 재판이 많아서 언론에 보도되지 못했고 그래서 기록도 남겨지지 못했지요. 훗날 기자들이 뒷얘기를 취재해서 부분적으로 썼는데, 결정적으로는 제가 그 비공개 군사재판의 녹음테이프 전량을 입수하게 돼서 공개했습니다. 그 녹음테이프에 나오는 법정 진술을 보면 10.26 당일 그 중앙정보부 안가의 비밀요정 직원들이 자기들끼리 앉아서 ‘아무리 대통령이지만 너무 심하지 않느냐?’는 얘기를 했다고 해요.


또 하나는 ‘채홍사’ 박선호 의전과장의 최후진술 부분인데요. 변호인들이 계속 밝히라고 요청했지만 진술을 하려고 하면 검찰관이 중지를 시켜요. 국가 안보와 관련한 부분은 얘기하지 말라는 겁니다. 나중에 박선호가 그래요. ‘지금 제가 명단을 밝히면 시내에서 탤런트, 가수로 활동하는 일류 연예인들이 온통 난리가 날 것이다. 사회적으로 문제가 생길 것이다’라며 명단을 밝히지 않습니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났는데 언젠가는 실체가 밝혀지지 않겠어요? 물론 정확한 명단을 밝히면 권력에 희생당한 여성들이 또 피해를 보기 때문에 밝혀서는 안 되는 점도 있어요. 다만 10.26 사건 현장에 갔던 두 여인은 밝혀져 있죠. 불가피한 일이지만 살인 사건의 현장에 있었기 때문에 또 다른 피해가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밝혀졌습니다. 두 사람은 술자리에서 노래 부르고 술 따르기만 했지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깊은 관계로 가지는 않았기 때문에 아까 말씀드린 대로 우리가 권력자, 공직자, 대통령으로서의 박정희, 권력을 이용한 사생활을 비판하고 정리하자는 것이죠. 더 이상 깊이 들어가는 것은 다른 피해자가 나올 수도 있기 때문에 신중하게 접근하는 게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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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현 저도 한 마디 할게요. 민간인의 반대 개념은 공직자나 군인일 텐데요. 공직에 있는 사람에게는 공생활과 사생활이 있다고 봐요. 우리는 오늘 사생활이라고 하지만 사생활이지 않은 공생활을 얘기했습니다. 예를 들면 미국은 공직자의 사생활에 엄격합니다. 반면 유럽은 상대적으로 자유롭습니다. 보도를 통해 많이 보셨겠지만 프랑스나 유럽의 대통령 후보자나 대통령, 총리 등 국가 지도자가 이혼 한 두 번은 문제가 안 되고, 의회 진출한 사람들 중에 성소수자들도 더러 있습니다. 그 사회에서는 개인의 사생활로 존중받는 것이죠. 흠잡지 않습니다. 그런데 만약 한국 대통령, 국회의원 후보 중에 성소수자가 있다면 어떠한 꼬투리를 잡아서라도 흠을 낼 겁니다. 우리 사회는 그런 면에서 사회 전반적으로 보수적인 분위기가 있고, 다양성을 별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죠. 유럽은 상대적으로 자유롭고요. 우리나라나 일본, 중국 등 한자문화권은 아무래도 유교의 영향 때문인지 사생활에 대한 것이 엄한 편입니다. 엄한 것이 문화적인 전통일 수 있는데요. 단순히 그것을 예부터 엄하다, 엄하지 않다 차원이 아니라 지금의 시각에서 본다면 인권의 차원이라는 것이죠. 예를 들어 지하철에서 낯선 남자가 남모르는 여성의 엉덩이만 만져도 성추행 범으로 바로 잡혀가잖아요. 이 정도까지 인권의식이 신장됐는데, 이런 것들에 대한 박정희의 사생활이면서도 공생활인 측면은 지난 역사 속에서 되짚어보는 것이 미래의 지도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나 지도자나 우리 사회 전반의 의식을 환기하고 교훈으로 삼기에 토론할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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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 연애도 하고 그러는 겁니다 '프랑수와 올랑드'



반인반신 '박정희' 


김재홍 <박정희 소백과사전> 시리즈를 마무리하면서 정치사적으로 중요한 이야기를 하면 좋겠네요. 박정희 우상화와 권위주의화, 권력 강화와 그 의미를 짚으면 좋겠습니다. 우상화는 다른 사람들이 시켜주는 거지만 박정희 본인이 자기 권력을 강화할 의지가 강해 스스로 한 부분도 많죠.


몇 가지로 나눠서 정리할 수 있는데, 첫째로 정치학에서 카리스마적 권위라고 얘기하는 것이죠. 오랫동안 식민 통치를 받다가 그 체제에 저항해서 해방된 후 돌아온 정치인들이 전형적인 첫 번째 사례인데요. 우리나라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있죠.


두 번째는 총칼의 카리스마, 군사 쿠데타인데요. 무서움의 카리스마, 공포정치의 카리스마죠. 박정희는 두 번째 유형 공포정치의 카리스마에 해당합니다. 세 번째는 우리나라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민주화 투쟁 역경을 겪으며 형성된 카리스마가 있습니다. 3김 정치도 그 중 하나일 수 있어요. 그런 카리스마적 권위의 문제점은 국민들이 선거를 통해 지지하고 표를 주기 전에 이미 국민들 마음속에 이들이 일정한 위치에 올라와 있다는 거죠. 국민들이 선택하기 전에 독립하는 과정이나, 총칼의 무서움으로 얻은 권위나 민주화 투쟁에 목숨을 걸고 했기 때문에 보통 사람으로 하기 어려운 일을 해내서 얻어지는 것이 ‘카리스마적 권위’거든요.


처음 박정희의 권위는 목숨을 걸고 군사 쿠데타, 자기들 용어로는 ‘혁명’을 했다는 것에서 나오는 것이죠. 그런데 쿠데타로는 정치적 정통성이 부족했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는 어려움이 많았어요. 국민들이 제대로 인정하지 않고 관망했을 때 치러진 1963년 10월 15일 민정이양 대통령 선거. 그 선거를 제대로 했으면 이후 박정희 군사 정권은 없는 겁니다.


당시 대통령 선거를 보면 박정희 공화당 후보, 윤보선 민간인 야당 후보, 오재영, 변영태, 장이석 등 5~6명 후보가 나왔는데 득표를 보면 박정희 470만 표, 윤보선 454만 표, 오재영 40만 표, 변영태 22만 표 정도 나왔어요. 2위와 3위나 2위와 4위가 연대만 했더라도, 지금처럼 야권 단일후보가 아닌 통합만 했더라도 충분히 이길 수 있었다는 것이고요. 그걸 좀 더 크게 얘기하면 당시 민심이나 국민 의사는 쿠데타 세력의 집권을 원치 않은 것입니다. 박정희에게 표를 주지 않은 더 많은 수의 유권자들은 쿠데타 정권의 탄생을 원치 않았던 거예요. 그게 야권이 분열됨으로써 표를 모으지 못해서 박정희 대통령이 탄생한 것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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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대 대통령선거 득표율

 


야권 단일후보를 말하기 전에 선거제도만 제대로 만들었어도 됐어요. 예를 들면 결선투표제가 있다고 생각해 봐요. 결선투표제는 1, 2위를 놓고 재투표를 하는 겁니다. 나머지 후보를 지지한 유권자들이 박정희를 지지하겠습니까? 윤보선을 지지하겠습니까? 쿠데타 주모자에게 권력을 주기 싫어 다른 후보를 지지한 것이거든요. 당연히 박정희 정권의 등장은 없었을 텐데 야권 후보들의 연합 정치가 미숙했고, 근본적으로 선거제도가 잘못된 문제가 있었습니다. 국민 의사를 정밀하게 반영하는 선거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선거인 67년에는 1위 박정희와 2위 윤보선의 표차가 많이 벌어졌어요. 야권 연합 정치를 해도 뒤집을 수 없는 표차가 났는데 그 동안에 박정희 우상화 작업이 정치공작적으로 단행이 된 것이죠. 그 중 중요한 것이 군대 동원입니다. 무서움의 정치, 공포정치의 일원은 비밀경찰을 만들어서 국민사찰 감시, 불법구금, 고문 이런 것 아니겠어요? 의문사, 어디서 했겠습니까. 바로 중앙정보부지요. 이게 바로 비밀경찰이에요. 나치 독일에서의 게슈타포와 다를 게 없습니다. 당시 저는 대학생이었는데 중앙정보부를 칭하는 ‘남산'은 두려운 존재였습니다. 끌려가면 두드려 맞고 고문당하는 것뿐만 아니라 신원조회 당하고, 해외여행이나 공직 취임이 안 되는 거고. 인생이 망가지는 정도의 공포감이 있었고요.


두 번째는 군대동원인데 야당, 언론, 학생운동이 비판하며 나오는, 정치적으로 어려운 계기마다 군대를 동원했어요. 박정희 18년 통치 기간 동안 군대를 직접 동원한 게 몇 번인 줄 아십니까? 서울 후방지역에 병력을 동원해 탱크를 세우고 무장군인들이 총들고 나와 위세를 과시하고 거리를 시위하는 것이 다 군대 동원이죠. 유신 때도 국회 앞에 탱크 두 대를 세워놓고 총검 차고 위세를 과시하며 국회를 해산시켰고 무력을 과시한 것이거든요. 18년 동안 공식적으로 조사된 것만 7차례입니다. 7차례 이상 동원해 정치권이나 대학가에 군을 투입해서 학생들 진압하거나 무력시위로 공포감을 조성한 거예요. 18년 동안 7번이면 2년 반마다 동원한 꼴이거든요. 선거로 대통령이 됐지만 자기 뜻대로 안 되면 언제든지 군대를 동원해서 탄압하고 권력을 과시하는 것을 본 국민들이 그 정권을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두려움의 대상이죠. 감히 넘보지 못할 대상이죠. 야당 정치인이나 학생운동 간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집권기간 동안에 집권세력 내부는 물론이고 반대편인 야당에서도 어떤 도전자도 존립하기 어려웠다는 것이고요. 그것이 박정희 자신의 권위를 형성하는 데 일종의 우상으로, 카리스마적 권위로 만드는 데 직접적인 배경이 됐다고 생각을 합니다.


또 하나는 이념인데요. 박정희는 63년 선거의 형식을 거치지만 민의에 기반을 두지 않은 사실상의 대통령이 된 뒤에 내세운 구호가 ‘조국 근대화’와 ‘민족중흥’입니다. 한국적 민주주의를 내세우면서 자기 자신을 민족주의자로 포장했어요.


우리가 생각하는 민족주의자라면 식민통치에 저항하고 독립운동을 하면서 자기희생을 감수한 사람을 말하는데, 박정희는 <친일인명사전>에 들어가는 사람이에요. 일제 황군의 장교였고요. 그런 사람의 정치적 구호가 ‘민족중흥’이야. 유명한 정치인 중 한 사람은 그런 박정희를 ‘단군 이래 최고의 민족 지도자’라고 찬양을 하기도 했고. 그것이 우상화의 레토릭이라는 말이죠.


우리나라 사람들의 심리 속에 민족주의에 대한 애착이 있어요. 오랫동안 이민족 일제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고, 주변 열강들에게 침탈을 많이 받아서 시달려왔기 때문에 민족공동체의 가치랄까, 민족국가를 수호하자는 의지랄까, 이런 것들이 민족주의거든요. 물론 배타적 민족주의라고 비판하기는 하지만. 그런데 엉뚱하게도 친일 전력이 있는 사람이 이걸 자기 것으로 만들었어요. 국민들의 감성에 영합한 것입니다. 민족주의라는 이념을 내세워서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것이 박정희의 권위죠. 민족주의라는 말 속에 애국자, 애국주의자라는 개념도 포함된 거예요. 굉장히 애국자인 척 했어요. 국가와 민족을 위해 결단을 내리고 굉장히 열심히 일하는 지도자로 묘사를 한 거죠. 그래서 카리스마적 권위를 만들어 간 것입니다.


북한의 김일성도 민족을 많이 내세웠습니다. 공산주의자, 마르크시스트는 민족주의하고는 대칭점에 있거든요. 민족 대신 계급을 내세우죠. 민족 개념 속에는 자본, 유산계급, 중간층, 무산자 계급을 다 포용하고 있어 공산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 무산자들을 중시하고 민족주의에 대해서는 지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김일성은 상당히 민족주의적인 얘기를 많이 했어요. 보편적인 공산주의자와는 차이가 있죠.



정운현 김일성식, 북한식 민족주의죠. 박정희가 박정희식 민족주의라면.



김재홍 우리식 사회주의라는 말을 실제로 썼으니까요. 북한은 80년대 중반 이후로 주체사상을 김일성주의로 발전, 개념화 했어요. 김일성주의가 마르크스-레닌보다 우위에 있다고 하면서 공식 문헌에서 마르크스란 이름을 지우기 시작했죠. 그렇게 해서 얻은 것 중의 하나가 세계적으로 공산주의가 다 몰락할 때 막아낸 근거로 우리식 사회주의는 다른 나라 공산주의와 다르다는 거예요.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아니라 김일성주의이다 그랬죠. 김일성이나 박정희나 우리나라 사람에게 있는 ‘민족’이라는 개념을 잘 이용한 거죠.


우리나라 사람들의 심성이나 가치에 민족공동체를 수호해야 한다는 가치관, 민족주의에 대한 애착이 있는데 박정희는 자신의 정체성과 전력에는 맞지 않는 것이지만 공작적으로 잘 이용했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자기 권력을 만들어 갔고, 주변에서도 단군 이래 최고?최대의 애국자, 민족적 지도자로 찬양을 하면서 우상화 길을 갔다고 봅니다.


우리의 역사에 대해 폄하하거나 우리 민족이 열등해서 일제에 먹혔다고 하는 것은 주체의식이 없는 것입니다. 자신이 조국 근대화, 민족중흥의 기수라는 것을 내세우기 위해 민족사를 비하한 것은 아닌가 점검해봐야 할 부분이고요.


일제 치하에서도 민족비하 논설로 물의를 빚은 예가 있습니다. 일제 치하인 1925년 우파 민족주의 진영의 한 논객, 이광수지요. 이 분이 쓴 논설이 있어요. ‘민족적 경륜’이라는 글이죠. 민족지라 내세우는 신문이 세 번에 걸쳐 연사설(連社說)로 실었어요.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우리 민족은 아직 완전한 독립을 얻기에는 역량이 모자란다. 열등한 민족이다. 실력을 길러야 한다. 실력을 기를 때까지는 완전한 독립을 할 것이 아니라 일본 대동아공영권, 일본 제국주의 틀 내에서 자치권만 얻어도 좋다’ 이런 논설을 썼단 말이죠.



정운현 우파 민족주의자들이 일제 때 이른 바 소극적인 저항의 한 형태로 내세운 ‘자치론’ 같은 겁니다.



김재홍 이런 흐름을 얘기하면서 역사적 사실이 무척 중요한 데, 중요할 때는 사람 이름도 근거를 대야하겠지만 사람 이름을 쫙 나열하다보면 어릴 때부터 배워온 훌륭한 문학인, 역사가, 학자들이 쭉 나옵니다. 창피하고 부끄러워서 내놓을 인물이 없어요. 그래서 일부러 사람 얘기는 안 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 언론, 모 인사라고 주로 표현을 합니다만, 여기서는 한국현대사를 공부하는 사람은 대개 아는 역사적 사실인데 어물어물 할 수 없네요.


일제 치하에서 나온 유력 신문에서 나온 사설과 그런 사람의 논설 주장 내용이 박정희의 <국가와 민족과 나>에 나오는 내용과 비슷한 민족비하적인 내용으로, 보수 우익 진영의 공통성이죠. 자기들이 최고라는 것과 자주, 독립, 민족적 자존의식, 역사의식에 대해서 인식하지 못하고 민족의 한계를 내세우면서 자기들의 역할을 강조하는 거예요.


경제건설도 세 번째로 볼 우상화의 배경이죠. 경제건설, 성장이지만 국민들이 좋아하는 용어로는 ‘가난 추방’ 혹은 ‘빈곤으로부터의 해방’이었어요. 그것을 해낸 지도자라서 박정희에 대한 우상화가 된 것인데요. 제가 논문에도 쓰고 책에도 썼기 때문에 인용을 하자면, 박정희 정권 시대에 이룬 경제 성장은 ‘1%를 위한, 1%의 번영’을 가져온 경제성장입니다. 대다수 국민과 서민층의 피와 땀 위에 대기업, 1% 부유층을 만들어 낸 경제성장이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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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우면서 이룩하는 경제발전



정운현 ‘민족중흥회’라는 박정희 추모단체가 있습니다. 그 단체에서 <위대한 생애>라는 책을 펴냈는데, 박정희 휘호집입니다. 이 책에 따르면, 박정희는 약 1,200건의 글씨를 썼습니다. 연 66건을 쓴 셈이에요. 물론 여기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어요. 박정희는 유교 문화의 끝자락이라 한문을 많이 쓴 세대이기는 해요. 요즘 세대하고는 차이가 있죠. 그러나 상대적으로 보자면 이승만, 윤보선 등 다른 전직 대통령들에 비하면 엄청나게 많은 글씨를 남긴 차이가 있어요. 이승만은 12년을 재임하면서 주로 개인에게 써줬습니다. 그런데 박정희는 건설 현장, 토목 현장에 주로 썼죠. 심지어 유인석 장군 유적지 성역화 사업을 한 곳에도 박정희 글씨가 써져 있습니다.



김재홍 유인석 장군은 항일 의병장인데 거기에도요?



정운현 유인석 선생은 의병장임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자신의 글을 썼단 말이죠. 남산에 있는 안중근 의사 기념관 입구에도 ‘민족정기의 전당’이라고 비석을 새겨놓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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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기념관 <민족정기의 전당>

 


김재홍 일기당천, 총력안보, 유비무환 같은 것도 많이 써놨죠.



정운현 이런 식으로 해서 곳곳에 가면 박정희를 접하게 되는 것이죠. 제가 평양엘 취재 차 가봤는데요, 작은 마을 입구에도 김일성 동상이나 흉상이 서 있더군요. 더러는 김정일 동상과 같이 서 있거나 어록들도 있어요. 박정희는 흉상이나 동상까지는 아니지만 곳곳에 가는 곳마다 글씨로 박정희를 만나게 됩니다. 무학재 고개 올라가는 왼편에 ‘무학재’라고 박정희가 쓴 글씨가 있고, 이대 쪽에서 넘어오는 금화터널에도 박정희 글씨가 있어요.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도로나 현충사같이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절, 이런 요소요소에 박정희 글씨가 많이 있죠.



김재홍 이렇게 많이 쓴 것을 보면 본인이 서예에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던 모양이죠? 어느 정도 수준이라 봅니까?



정운현 제가 평가하기에는 별로입니다. 개인적인 이야기지만 제 블로그에 박정희가 대구사범 다닐 때부터10.26 직전에 쓴 글씨 200여 점을 분석해서 파악을 해봤습니다만, 글 솜씨는 별로 없습니다. 이것은 비하가 아닌 평가입니다.


박정희는 유명한 서예가인 소전 손재형을 초빙해서 글씨를 배웠습니다. 5.16 초기의 글씨를 보면 형편없어요. 궁금하신 분은 제 블로그에 방문하셔서 박정희 코너에 있으니 한 번 살펴보세요. 물론 갈수록 조금씩 나아지긴 합니다. ‘광화문’ 현판 글씨가 원래 글씨로 돌아왔잖아요? 그 전에는 박정희가 한글로 쓴 것이었죠. 그 광화문 현판 글씨조차도 처음 쓴 글씨는 시원찮아서 나중에 다시 바꾼 것입니다.



김재홍 그래도 비교 평가하는 게 중요하지 않겠어요? 기준이 있어야 하는 것인데, 예를 들면 김재규 중정부장이 군사재판과정에서 박정희와 이승만 대통령을 비교한 적이 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4.19가 일어나서 학생, 시민들이 물러나라고 하자 물러갔다. 그러나 각하는 절대 물러설 사람이 아니다.’ 말하자면 이런 식으로 비교를 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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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현판. 맨 위의 것은 박정희가 1968년에 쓴 것이며, 

가운데 것은 이후에 다시 쓴 것.

맨 아래 것은 2010년에 새로 교체된 간판

 


어느 정치권 인사가 해준 말입니다. 어느 건물에 가보니 이승만 전 대통령의 휘호가 있고, 그 옆에 현직 박정희 대통령의 휘호가 걸려있더라는 겁니다. 마침 곁에 권위 있는 서예가가 있었는데, 이승만 대통령의 휘호를 가리키면서 “선생님, 이 대통령의 글씨는 상당히 잘 쓴 글씨지요?”라고 묻자 서예가가 “여기는 상당히 서예에 일가가 있는 분입니다”라고 평가를 했대요. 그러자 옆에 있는 박정희 현 대통령의 글씨를 가리키며 “이 글씨도 잘 쓴 글씨 아닌가요?”라고 묻자 그 서예가가 “…예.”라며 ‘아니다’고 말할 수도 없고 해서 막 웃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요점은 뭐냐면, 이승만 대통령은 서예에 일가견이 있고 알아주는 글씨인데도 여기저기 함부로 글씨를 남기지 않았다는 것이죠. 여러 곳에 현판을 걸거나 하지 않았어요. 자기와 가까운 사람이 휘호 하나 써달라고 청을 하면 가려서 써줬는데, 거기에 비하면 박정희 대통령은 서예 수준과는 맞지 않게 너무 여러 곳에 눈에 띄게 썼죠.



정운현 그것이 바로 우상화입니다.



김재홍 대통령이 글씨를 꼭 잘 써서 기념 휘호를 쓰는 건 아니겠죠. 꼭 필요한 자리에 써주면 되는 것인데 너무 남발한 것이 자기 권위를 과신한 것 아니냐.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웃은 적이 있습니다.



정운현 이게 글씨를 쓴 사람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뭐가 있으면 쪼르르 청와대에 가서 각하의 어필(御筆)이라고 하는 박정희 친필을 하나 받아옵니다. 그러면 그걸 액자로 잘 만들어서 기관장 방에 걸어 놓으면 그 기관장의 권위가 서는 식이죠. 지방에 다리 개통식 때 지자체장이나 지역의 명망가가 쓰면 될 것을 박정희에게 써달라는 것이냐는 거죠. 비단 박정희만의 문제는 아니에요. 그런 것을 통해 눈도장도 찍는 아부꾼들도 문제가 있어요. 그 점을 같이 봐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 국민 의식이랄까 정치문화가 그런 수준이었죠. 박정희 우상화의 또 하나의 근거는요. ‘조국 근대화, 산업화를 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개발 독재 방식으로 한 것이고, 다른 후진국에서도 독재를 했지만 경제 성장을 이룩하지는 못했다’는 것입니다. 흔히 박정희는 사리사욕을 챙기지 않고 청렴하게 살았고, 반부패로 관리들을 잘 다스렸기에 성공했다고 해요.


전두환?노태우가 1995년에 내란과 부패로 구속됐죠. 재판관이 전두환에게 ‘피고인, 대통령이 청와대에 앉아 기업인들에게 돈을 받으면 되느냐?’고 묻습니다. 전두환이 받은 돈이 수천억에 추징금이 2천억이 넘어요. 전두환의 답변은 이겁니다. “나는 청와대에 앉아있는 대통령의 관행대로 했을 뿐이오.” 그 관행이 뭐겠습니까. ‘앞사람이 한 대로’예요. 박정희가 청와대에서 했던 관행에 따라서 기업인, 재벌들이 와서 바치는 것을 받았을 뿐이라는 거죠. 따로 뇌물을 받으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는 겁니다.



정운현 설마 최규하를 말한 것은 아니겠죠?



김재홍 최규하는 대통령 시절 청와대에 살지도 않았어요. 총리 공관이 있는 삼청동에 살다가 물러났습니다. 대통령 대행으로 취임했지만 총리 공관에서 살았어요. 좌우간 그래서 박정희가 반부패, 청렴, 사리사욕이 없었다는 것은 허구라는 걸 전두환이 ‘증언’한 바 있습니다.


또 하나 이정희 후보가 대선 TV 토론 때 말한 내용으로 저를 포함해 많은 사람이 글로 쓴 내용이지만 대통령 후보가 TV토론에 나와서 한 말이기 때문에 널리 확산이 된 것인데요. 내용인 즉, 10.26사건 직후 합수부에서 청와대를 수색했습니다. 박정희 집무실도 수색했는데 집무실 금고에서 현금 9억 6천만 원이 나왔어요. 그 중 6억 1천만 원을 박근혜에게 줬습니다. 재판 기록에 있는 공개된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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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현 그 내용에 대해서는 박근혜 후보도 시인을 했죠.



김재홍 나머지를 계엄사에 보고하고 합수부 수사비로 1억을 썼다는데 이정희 후보가 따지니까 박 후보가 뭐라고 했습니까. 그 내용을 시인하면서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했어요. 아버지 돌아가시고 유족들이 살기 막막해서 받았다고 하는데 여기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 대통령 집무실에서 현금으로 9억이 나왔다면 지금 돈으로 치면 아무리 보수적으로 계산해도 100억은 됩니다. 계산방식이 다 다르겠지만 물가 오름 지수로만 따지면 수십억이라는 것이고, 아까 얘기한 대로 실질임금이나 집값에 대비하면 수백억이 되는 것 같아요. 그런 현금이 대통령 집무실 금고에 있었다는데 그 돈이 과연 어디서 낫겠습니까? 정부 예산도 아니고 대통령 활동비도 아니에요. 그 돈이 바로 재벌?대기업이 바친 돈이니까 불법적인 로비자금이고 검은 돈이거든요. 박정희가 부패하지 않고 청렴하다는 것이 거짓말로 드러나는 근거가 되겠죠.


또 박근혜 후보가 TV토론에서 이를 시인하고 사회 환원하겠다고 했는데 불법적인 ‘검은 돈’이기 때문에 사회 환원의 대상이 아닙니다. 당시 합수부가 불법행위를 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불법자금이면 국고에 귀속해야 하는 겁니다. 형사소송법 상 수사기관이 불법적인 자금을 발견했으면 국고 귀속시켜야 하는데 그것을 떼어서 유족이라고 6억을 주고, 나머지는 수사비에 보탠 것은 불법을 저지른 것이거든요. 그러니까 사회 환원이라는 말은 맞지 않아요. 사유재산을 내놓는 것이 환원이나 기부고, 장물이나 불법 자금을 받았으면 사과하고 국가 귀속시켜야 합니다.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박정희 우상화 관련 부분과 애기하면 사리사욕이 없고 부패하지 않았고 축재하지 않았다는 것에서 비롯된 신화화가 있는데 이것은 허구였음이 드러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외 경제학자들은 ‘박정희는 전두환?노태우와 달리 개발 독재자이지만 경제성장을 시켰고, 거기에서 사리사욕을 취하지 않았고, 반부패정책을 잘 썼다’ 이렇게 평가하는 게 답답합니다. 수박 속을 보지 못한 채 겉면만 보고 수박은 파랗다고 얘기하는 것 아니겠어요?



정운현 거기에는 이유가 있겠죠. 모르긴 해도 박정희 시대부터 한국에 유학 오거나 해외에 있는 한국연구소에 국가가 경비지원을 하잖아요? 언제부터 했는지 자세히는 모르지만 이런 영향을 받아 박정희 우상화에 가담하는 학자들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모든 학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요.



김재홍 미국의 학자들 중에 친한파라고 하지만 사실은 친(親)박정희파가 있었고요. 반한파로 찍힌 학자도 있지만 사실 반(反)박정희 운동을 했던 학자도 있는데요. 아까 말한 브루스 커밍스 같은 학자는 한국 기업이나 중앙정보부 외곽 역할을 한 국제교류재단이 주는 연구비나 여비는 일체 거절한 사람입니다. 박정희 정권 시절 미국의 아시아?한국 학자들은 중앙정보부나 그 산하기관에서 공작적으로 뿌린 로비자금이나 연구비를 많이 받았어요. 그래서 박정희 정권에 대해서 자유롭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습니다.


박정희 우상화의 근거를 하나하나 깨자면 경제성장, 가난추방, 빈곤해방이라는 게 너무 허구적인 것이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즉, 이는 박정희의 공이 아니고 국민의, 민중의 피땀 위에 세워진 것이지 박정희 정권의 지도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관련해서 소개할 게 하나 더 있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만든 ‘백년전쟁’이라는 영상이 있어요. 1편이 이승만이고, 2편이 박정희인데, 그것을 보면 아주 적확하게 근거를 대놨는데, 박정희 쿠데타 정권이 초기에 만든 경제개발계획은 엉터리였습니다. 초기 경제개발계획은 내수시장?내수경제를 일으키기 위한 내용이었는데 그게 문제가 많았고 이론적으로 엉터리였어요. 미국이 그 내용을 보니 민족주의와 결합하면 자기들의 전략이 위험하다고 판단했습니다. 후진국들 중에서 민족주의가 많이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곤란하다고 본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 계획이 세계 경제동향과 자신들의 경제개발 이론과 맞지 않기 때문에 박정희에게 계속 압박을 넣었습니다. 내수시장 경제가 아닌 수출주도형, 해외 의존형으로 가야한다,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수출주도로 가야 한다고 종용했습니다. 그런데 박정희가 계속 거절하니까 그러면 미국은 더 이상 한국의 경제개발정책에 경제 원조를 줄 수 없다고까지 했어요. 그래서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대폭 수정하면서 수출주도형 경제개발정책으로 나가게 됩니다. 그것이 세계 경제동향, 세계 시장과 부합돼서 성공을 거둔 셈인데요. 미국이 경제자문관 파견도 하면서 코칭을 많이 해줬고, 자기네 말을 안 들으면 경제 원조를 할 수 없다는 식으로 협박을 하기도 했어요. 그것이 미국의 세계전략과 관련이 있지만 그렇게 했기 때문에 세계 시장과 부합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 백년전쟁의 ‘박정희’ 편을 보면 잘 설명이 되어있습니다.


두 번째 허구는 민족주의자, 애국주의자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더 이상 길게 얘기할 필요가 없겠죠? 친일파 박정희를 정치적으로 공작, 이용해 민족주의자로 포장했다는 것이고요.


세 번째는 개발독재 방식을 쓰면서 반부패를 잘 관리했다고 하는 것은 순 허구라는 것입니다. 박정희 우상화의 권위는 군대에 있었어요. 친위대인 ‘하나회’를 육성했고 정치적으로 어려울 때마다 군 병력을 동원해서 야당, 비판 언론, 학생 운동권에 대해 무력시위하거나 탄압하거나 군 수사기관을 이용했습니다. 유신 쿠데타 때는 야당 국회의원을 군 수사기관에 잡아놓고 두들겨 패지 않았습니까? 중앙정보부뿐만 아니라 헌병대 같은 군 수사기관에 잡아놨어요. 그것이 어떻게 보면 공포통치의 카리스마라고 할까, 권위주의의 기반이 된 것인데요. 이런 것들 대부분이 허구적인 것이고 후진적이고 원시적인 방법이었다는 것이죠.



정운현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정희에 대한 우상화, 미화작업은 대통령 시절에만 있던 것이 아니라 그의 딸이 대통령 후보로 나온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고, 앞으로도 이어지겠죠. 제가 박정희 취재하는 과정에서 박정희와 관련된 곳을 두루 다녀봤습니다. 구미 생가나 문경 하숙집도 가보고 만주군관학교도 가봤는데요. 일전에 박정희의 ‘만주행’을 얘기하면서 문경 하숙집을 잠시 언급했는데요. 97년에 취재차 갔을 때 보니 입구에 ‘청운각’이라는 팻말이 걸려 있더군요. 문경 하숙집은 박정희가 3년간 하숙하던 곳입니다. 최근에 청운각을 들어가 보니 박정희가 사용했다던 방 한 칸에 박정희?육영수 부부의 사진을 걸어놓았더군요. 박정희에 대한 존경심이 가득한 분이 관리를 새로 맡으셨더라고요. 그분은 그럴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세종대왕을 좋아해서 그 사진을 방에 걸어놓은 것을 비판할 수는 없습니다. 청운각 관리인이 그 정도 하는 것까지는 별 문제가 없다고 봐요.


그런데 문경시와 경상북도에서 17억을 투자해 하숙집 옆에 있는 공간을 헐고 큰 사당 같은 것을 지어놨습니다. 제가 그 안에까지 들어가 보지는 않았습니다만 지역 언론에서 보도한 사진을 보니 큰 법당 같은 건물을 지어놓았더군요. 박정희에 대해 호기심이 있거나 박정희 팬이 문경에 가는 길에 들렀거나 여행하는 사람들이 지나가다가 하숙집을 알고 있다면 가볼 만 할 거예요. 하숙집이 있는 곳에 가본다는 것이 그를 좋아하는 사람의 추억일 수 있겠죠. 그런데 하숙집 마당에 별도로 사당 같은 건물은 왜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건 누가 봐도 뜬금없다고 느낄 만합니다.


그 다음 1962년, 박정희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시절에 울릉도를 방문한 적이 있어요. 이명박 대통령이 독도 가는 길에 들른 것을 빼면 국가원수가 울릉도를 방문한 것은 박정희 당시 의장이 유일했습니다. 그 때 울릉도에서 하루를 머물렀는데요, 당시 울릉도에 호텔이 있겠습니까? 할 수 없이 울릉군수 관사에서 하루 묵었습니다. 그럴 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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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 오징어와 박정희



민선 울릉군수는 울릉도 섬 안에 사는 사람이 되기 때문에 굳이 관사가 필요 없습니다. 본인 집에서 출퇴근하면 되죠. 그래서 옛날부터 있던 울릉군수 관사가 폐쇄되었어요. 폐쇄한 관사를 울릉군 역사관 같은 것을 만들면 참 괜찮았을 거예요. 그런데 이 자리에 ‘박정희 기념관’을 만들고 있어요. 쉽게 말하자면 각하께서 하루 주무신 곳이라는 거죠. 대체 뭐하는 짓이냐는 거예요. 공사비로 14억인가를 들인다고 해요. 관계자와 통화해서 제가 기사로 보도하기도 했는데 이 분 얘기가 박정희가 왔다 간 이후로 울릉도 발전이 획기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하더군요. 그럴 순 있겠죠. 그런데 나중에 A라는 대통령이 다시 울릉도를 방문해서 주민들에게 이것저것 해주면 A기념관, B대통령이 그래주면 B기념관 만들 것인가요? 그건 아니잖아요. 박정희 시대를 산 사람들 중에는 우상화나 미화에 마취가 돼있거나 세뇌가 돼 있는 것 같아요. 그 예산이 박정희 사비입니까? 아니잖아요, 국고잖아요.


구미에 있는 박정희 생가도 다른 전직 대통령 생가 복원하는 정도로 한다면 비난하지 않습니다. 생가 옆에 ‘박정희 기념공원’을 별도로 만들어 5미터짜리 동상을 세우고 하는데 대체 그게 뭡니까? 네티즌들이 이를 김일성 동상과 비교하면서 비난하는 것은 그들 스스로 자초한 것입니다. 박정희 추종자들이나 그와 연고가 있는 곳에서 그를 기리는 것까지 반대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들로서는 그럴 수도 있다고 봅니다. 다만 그것이 과도하지 않아야 하는데 좀 심하죠.



다음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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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홍 + 정운현

정리 : 전자책나무


편집 : 너클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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