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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4. 28. 화요일

홍준호






주의 : 특정 작품의 스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한 달 전인 327. 나는 포항 시청 옆에 붙어 있는 대잠 도서관에서 몇 시간째 책을 읽고 있었다. 내 앞에는 이제 막 중년이 된 듯한 여인, 그것도 굉장히 열심히 공부하는 여인이 앉아 있었다. 논문과 책을 자기 주위에 몇 권씩 쌓아놓고 형광펜으로 펴 놓은 책에 죽죽 줄을 그으며, 공부에 매진하고 있더라.

 

흘끗 봤더니 책과 논문 모두 철학자인 발터 벤야민과 테오도르 아도르노에 관한 것이었고, 읽던 책은 그린비 출판사에서 2009년에 발간된 <세계와 역사의 몽타주 :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였다. 호오. 이 아주머니 대학 교수이신가 보구나. 나는 잠시 여인의 정수리에 있는 가마를 바라봤다. , 저렇게 가마가 생기면 대학교수가 되는 건가. 그렇게 한동안 쓸데없는 생각을 했는데, 내 관심사는 곧 그녀의 정수리가 아니라 형광펜으로 죽죽 긋고 있는 책을 향해 옮겨졌다.

 

그 책은 좀 이상했다. 책에 '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 장서' 임을 인증하는 도장이 찍혀져 있었기 때문이다. , 내가 다녔던 대학교도 교수의 책이나 도서관 장서, 거기서 소장했던 과월호 잡지를 도서관 로비에서 싼 값에 파는 경우가 있기는 했었다. 물론 장서를 헐값에 팔 경우, 도서관 측에서 대출 바코드를 제거하고 판매한다. 처음엔 앞에 앉은 교수로 보이는 여자도 그렇게 구매 했겠거니 싶었다. 의구심은 곧 사라졌다. 나는 대구에서 빌린 책을 포항의 시청 도서관까지 가져와서 공부를 하는 열정이 대단하구나. 허허허’, ‘이 시대를 이끌어갈 청년으로서 중년들에게 밀리지 않게 분발해야 되겠는 걸등의 생각을 하며, 석양을 향해 뛰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헌데 순간, 잠시 정신이 멍해지는 경험을 했다. 의자에서 일어나면서 잠시 흘끗 뒤돌아 봤는데, 그 여인이 책을 이리저리 뒤적거리고 있었다. 그 때 <세계와 역사의 몽타주 -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 책의 커버 부분이 드러났다. 그곳엔 계명대학교 도서관 대출 바코드가 찰지게 붙여져 있었다. 이 말은 (앞에 앉은 여자가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일단은 대학 도서관에서 책을 '대출' 했다는 얘기가 된다. 근데 그 책에다 노란색 형광펜으로 줄을 죽죽 긋고 있더라.

 

잠깐만 더 지켜보자 싶어 잠시 화장실에 갔다 왔다. 중년 여자는 아까 보던 책을 그대로 놔둔 상태에서 옆으로 밀어버리고, 다른 책을 꺼내서 보고 있었다. 그 책은 대출 바코드도 없었고 학교 도서관 장서임을 증명하는 도장도 찍혀 있지 않았다. 다만 서점의 도장이 찍혀져 있을 뿐이었다. 직접 구입한 책으로 보였다. 신기한 점이 자신이 구입한 책의 경우에는 한 번도 건드리지 않은 채 2~30 페이지를 집중해서 읽고 있었다는 것이다. 직접 산 듯 보이는 책에는 딱히 중요하게 밑줄 그을만한 문장이 없었던 걸까? 도서관 대출 장서는 페이지 넘길 때마다 활기차게 죽죽 형광펜으로 선을 긋더니만.

 

내가 어버버 하는 사이, 여자는 벤야민과 아도르노에 대해 다룬 석학들의 논문 뭉치를, 자기 딴엔 중요한 문장 기억하려는 듯 죽죽 펜을 그어댔던 '도서관 장서'를 가방에 넣고는, 누군가에게 폰으로 전화를 걸면서 도서관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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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 앉은 사람이 보던 책의 흔적. 솔직히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에서 조사 들어갔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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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이건 앞 사람이 소장한 판본이 아니라 포항 대잠 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판본이다. 그 사람이 가고 난 뒤, 내가 빌릴 책을 찾다가 문득 여기 도서관에 소장된 건 상태가 어떨라나 싶어 펴 봤다. 아니나 다를까 여기도.

 

솔직히 발터 벤야민과 테오도르 아도르노가 저술한 책들이 도종환 시인의 <접시꽃 당신> 마냥 한국 사람들에게 많이 읽히거나 하지는 않으리라고 본다. 하지만 적어도 그들이 자신의 저서 어디에든 '도서관 장서에 마음껏 낙서해라'고 하진 않았으리라. 도대체 내 앞에 앉은 사람, 그 사람은 어쩌면 그렇게 단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대출한 책에다가 그렇게 죽죽 줄을 그어댈 수가 있지? 심지어 그 책들은 자격증 참고서도 아니었는데.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그러다 문득 나도 책 한 권을 대출해야 하는데, 잠시 잊었음을 깨달았다. 내가 빌릴 책은 철학자 지두 크리슈나무르티의 저서인 <삶과 죽음에 대하여>였다. 찾아보니 대잠도서관 소장본은 상태가 다소 나빴다. 책장이 뜯겨져 덜렁덜렁 거리더라. 어째 좀 불안했다. 펴 보자마자 첫 장부터 누가 빌려갔는지 자기 생각 써 놓고 옆에 별표 한 번 그려준 게 보였다. 글씨체에선 사내다운 배포가 돋보였다. 호방한 글씨체만 보면 영웅이 될 재목 같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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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재목은 공부 따윈 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책을 휘리릭 넘겨보니 역시나. 주목할 만하다 싶은 문장들이 모두 주황색 형광펜으로 죽죽 그어져 있었다. 몇 권 더 없나 찾아 봤지만 빌릴 수 있는 건 오직 그 책뿐이었다. 다른 도서관에도 같은 책은 있었지만, 가기 번거로워 일단은 그걸 빌려다 읽었다. 읽는 동안 책이 아니라 여러 대출자들의 손에 의해 음란하게 농락당하고, 사지 절단된 사람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2015227일자 <KBS> 9시 뉴스에 이런 보도가 있었다. 전국의 도서관에서 버려지는 책이 한 해마다 160만 권이 넘는다는 소식이었다. 책 손상 때문이었다. 기본적으로 낙서를 하고, 화집이나 요리책 등은 아예 사진이나 그림을 오려가거나 페이지를 찢어서 가져가기 때문이란다.

 

반납자가 훼손했다는 증거가 드러나면 변상비를 물릴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잡아내기 무척 어렵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도서관의 사서들이 책을 직접 보수하는 선에서 끝나는데, 대부분의 사서들이 지닌 보수 기술은 그리 뛰어나지 않다. 오래된 책을 전문적으로 수집하는 수집가들 만큼 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결국 손상된 책은 그나마 최소한의 형태를 유지하는 선에서 다시 도서관 책장에 배치된다. 그러다 버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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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아래 사진은 대학도서관에 비치된 한 여행 가이드 책 할인 쿠폰을 오려가 버린 흔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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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부터 아도르노와 더불어 벤야민 책을 가지고 이야기했기 때문인지 <발터 벤야민의 공부법>이란 책에 있는 벤야민의 언급 중 일부가 문득 생각났다.

 


"내가 원하는 일은 새 것을 갖는 게 아니라, 오래된 것을 새롭게 만드는 일이었다. 새 주인이 된 내가 그 것을 내 것으로 만들어버리면 아무리 오래된 것도 새것이 되었다. 내 서랍에 쌓여있는 수집품들이 그것을 잘 보여줬다."


 

실제로 모든 물건들은 구매자의 손에 들어가는 그 순간부터 '오래된 것'이 된다. 그렇다면, 도서관에 비치되는 순간, '오래된 것'으로 변하는 책에다 몇몇 대출자들은 '새 생명'을 주고 싶었던 것일까? 줄을 죽죽 긋고, 빈 페이지에 글을 적으며 '내 것'으로 만들려 했을까. 그렇게 되면 새 것이 되니까. (물론 모든 사람이 발터 벤야민의 저작물을 읽지는 않겠지만) 도서관에서 빌린 책에다 펜으로 죽죽 줄을 긋고 칠을 하는 사람들은 정말 저런 신념을 가지고 있지 않겠냐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들의 의도는 알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 책만 만신창이가 됐다.

 

물론 밑줄 긋기, 책 여백 부분에 글 적어두기는 독서의 한 방법이다. 책을 깨끗한 상태로 놔두길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고, 책은 함부로 다뤄줘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듯이 말이다. 함부로 다루는 행위도 자기가 직접 구입한 책에다 하면 문제 될 게 없다. 그러나 '공공재', 혹은 제 것도 아닌 '빌린 책' 을 이렇게 함부로 다루게 되면 그 때부터는 난감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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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예시. 이건, 전에 자판기 커피가 맛있는 곳 중 하나라 했던 환호동 청소년 수련관에 배치된 김어준의 <닥치고 정치>에 가해진 저질 낙서의 흔적이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딴지 총수라고 해서 예외가 되진 않는다. 이거는 초, 중학생 때 학교 교과서에나 하는 짓을. (심지어 웃기지도 않다.)

 

참고로 사진은 찍지 않았지만, 이 책의 어떤 페이지에는 코딱지까지 붙어 있었다. 오래 전에 붙어 있었는지 말라 붙어버린 코딱지를, 손톱으로 긁어 떼어냈다. 남의 코딱지를 바라보는 기분도 더럽고, 떼어내는 기분도 더러웠다.

 

이에 대한 반박이자 자기 합리화랄까? 가끔 방대한 온라인의 바다를 헤매다 보면 도서관에서 대출한 책에다 밑줄 긋고, 여백에다 글 써놓는 행위에 대해 나름의 감성을 부여하는 글을 보기도 한다. 자기가 글을 써놓고 몇 주 뒤에 다시 펴 보면 다른 사람이 그에 대해 동감이나 반박의 논조를 펼쳐놓기도 해 새로운 독서의 경험이 된단다. 단언컨대, 도서관 책을 통해 그럴 확률은 많지 않으며(적어놓은 글에 답장 달릴 일이 별로 없다. 개무시하고 낙서를 더 했으면 했지.) 그게 화장실 낙서에 답글 다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이냐. 자신이 해당 문장이나 단락을 기억하기 위한 '의도' 적인 밑줄, 자신만을 위한 의도적인 요약정리와 독서법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꼴 밖에 되지 않는다. 그리고 마침내 자기가 후비던 코에서 코딱지를 꺼내 척 하고 붙여주심으로서 용의 눈동자. 이른바 '화룡점정'을 찍어주신다. 한 번 그어진 밑줄은, 결국 또 다른 누군가에 의해서 그래도 되나보다 싶어 죽죽 그어진다. 한 번 일부가 깨진 유리창에 기어이 다른 돌을 던져 완전히 깨먹어 버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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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장본인데도 책 제본이 뜯겨져 너덜거리던 지두 크리슈나무르티의 <삶과 죽음에 대하여>. 역시 형광펜이 죽죽.

 

외국이라고 크게 차이는 없겠지만, 가본 적이 없으므로 이런 풍경은 그저 '한국 도서관의 현실', '독서가 한국에서 받는 대접'처럼 보일 때가 있다. 물론 지금 세상에선 책 말고 지식을 얻을 수 있는 매체는 많다. 그러나 책은 다른 매체들에 비해 물리적인 제약이 적은 편이다. 짧은 인생 속에서 간접적으로나마 겪어보지 못한 세상의 수 만 가지 것들을 경험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으로서 책의 존재감은 여전히 유효하다. 글과 그림이 포함된 책이 여전히 지식의 보고라고 칭해지는 이유다.

 

허나 지식을 얻는 행위만큼, 지식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태도 역시 중요하다. 지식을 받아들이는 자가 인두겁을 쓴 짐승에 불과하다면 그 지식이 다 뭔 소용이겠는가. 결국 내게 있어 최악의 악당들은 도서관에서 빌린 책에다 낙서하고, 페이지를 북북 찢거나 뭐 먹다가 페이지에 흘리고, 물 쏟고, 총체적으로 볼 때 함부로 다루는 사람들이다.

 

흔히 남에게 피해 주는 삶을 살지 말라고 하지만, 어차피 살다보면 의도치 않아도 결국 남한테 피해 주게 되어 있다. 도움 줄 일을 만들어도 모자랄 지경이니, 살면서 애꿎은 사람 피해 가지 않게끔 '노력'하는 게 사람이다. 그러니까 빌린 책에다 멋대로 낙서하면 아직 인간 덜 된 거다. 아는 거 많은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석학일지라도 말이다. 공공재를 향한 가해를 스스로 하고 있지 않은가.

 

도서관 책에 낙서하는 사람들은, 빌린 물건은 깨끗하게 쓰고 갖다 줘야 한다는 최소한의 예의조차도 모른다. 아마 이들은 아마 벤야민의 '내 서랍에 쌓여있는 수집품들' = '도서관에서 빌린 책들 중 마음에 드는 페이지나 사진들을 잘라놓은 것'으로 이해할지 모르겠다. 타인에 대한 가장 기본적이고 최소한의 배려마저 지키지 못하는데, 지식이 많아봤자 같은 사람에게 잘 쓸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만약 발터 벤야민이나 지두 크리슈나무르티에게 독자가 당신네들 책으로부터 사유를 거쳐서 여백에다 글도 다 적어놓고, 밑줄도 쫙쫙 그어져 있다고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 세계적인 두 지성은 굉장히 흐뭇하게 듣지 않을까? 오오. 우리와 교감을 하고 있구나 하겠지. 하지만 '도서관에서 빌린 책에다 그렇게 했대요.'라고 말하면, 분명 한탄을 하면서 그 짓 한 사람의 강냉이를 털어버리러 갈 것이 분명하다. (총수는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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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그 날 처음 봤지만, 대출한 책에다 죽죽 줄 긋고 떠나간 중년 인간의 뒷모습이 마치 꿈 속의 여인마냥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빌린 책에 낙서하는 인간들아. 밥은 먹고 다니느냐. 너희의 소유물이 아닌 책들을 그렇게 능욕하고도 밥은 먹고 다니냔 말이다. 잠은 잘 자냐? 한국에선 이런 인간들이 밥도 잘 먹고 다니고 잠도 더 잘 자고 있을 거 같다. 아마 사회를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위치에도 올라가 있을지도 모르지. 그렇게 잘 나간다 할지라도, 이들이 악당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홍준호


편집: 딴지일보 coco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