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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시절 ‘집창촌’이 엄청나게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일본 정부의 ‘정책적 개입’ 덕분이다. 일본은 조선 땅에 ‘공창제’를 착근시키기 위해 의욕적인 투자와 단속을 벌였다. 경술국치 직후부터 일본은 사창 단속에 전력을 다했다.

 

“개별적으로 몸을 파는 행위를 근절해야 한다!”

 

“언제든 합법의 틀 안에서 몸을 팔 수 있는 기회는 열려 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로 일본은 의욕적으로 공창제 정책을 추진했다. 개별적으로 몸을 파는 여성들과 포주들에 대한 단속이 이어졌고, 성매매는 정부 주도 하에 그 몸집을 계속 키워나갔다. 지금의 시점으로는 국가 차원에서 성매매 산업을 육성한다는 게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당시 일본으로서는 국가의 ‘운명’과 직결된 중차대한 사안이었다. 당시 일본은 공창제를 통해 두 가지 정책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

 

첫째, 성병의 관리

 

둘째, 일본의 기준에서 바라본 불령선인(不逞鮮人 : 일제 식민지 통치에 반대하는 조선인. 독립운동가를 지칭)들을 단속하기 위한 방법

 

성병의 관리는 공창제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페니실린이 나오기 전까지 매독은 인류에게 절망을 안겨 준 성병이었다. 사회적으로도 문제가 많았지만, 만약 이 성병이 군대에 파고 들어간다면 국가의 운명 자체가 흔들릴 수 있었다. 제국주의 막차를 타고 침략 전쟁에 뛰어든 일본으로서는 성병 관리에 국가의 모든 가용 자원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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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욕적인 사창 탄압의 결과 공창제는 확장일로를 걸었고, 덕분에 성병 검사를 받는 ‘전문여성’들의 숫자도 꾸준히 늘어났다. 1911년 4,475명(일본 여성 3540명, 조선 여성 937명)이었던 수는 해마다 증가해 1915년이 되면 5,137명으로 늘어나게 된다. 이 통계에서 유의미한 건 조선 여성들의 숫자가 해마다 증가해서 일본 여성의 숫자를 어느 시점, 그러니까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조선에서 본격적으로 수탈 작업에 들어가고, 일본 이주민이 농장 사업에 뛰어든 순간에 폭증하게 된다(1910년대 후반부터 조선 안에서 활동하는 매춘부의 숫자는 일본인 보다 조선인들이 더 많아지게 된다).

 

토지를 잃은 농민들의 딸과 아내들이 손쉽게 돈을 벌 수 있는 매춘의 세계로 넘어온 경우다.

 

불령선인 단속에 대해서도 생각해 봐야 하는데, 당시 총독부는 독립운동가들이나 일제의 식민지 정책에 반감을 가진 이들이 비밀리에 유흥업소에서 회합을 가질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가지고 있었다(일제 강점기 시절, 기생들이 독립운동을 지원했던 경우가 있기도 했다). 이 때문에 일제는 기생이나 창부들을 직접 관리해 이들의 동정을 살피려 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일본은 사창을 규제하고, 대규모 집창촌 형성을 유도했던 거다(관리의 편리성을 위해).

 

1915년까지 공창제와 집창촌 형성, 성병 관리, 사창의 단속을 의욕적으로 실행한 일제는 1916년이 되면 이를 한반도 전체로 확산시키기로 결정하게 된다. 1916년 3월 31일 경무총감부령으로 발표된 ‘유곽업 창기취제규칙과 요리점, 음식점 영업취제규칙’이 그것이다. 그 내용을 잠깐 살펴보자.

 

● 숙박소 영업자 또는 동거하는 호주나 가족은 같은 가옥 내에서 요리점, 음식점, 예기, 기생치옥의 영업을 금지하고, 예기, 기생 또는 작부를 부르게 해서는 안된다.

 

● 요리점, 음식점 영업자는 손님을 숙박시켜서는 안 된다. 조선의 기생인 예기는 요리점에 나가서 영업을 하되 손님을 예기치옥이나 자택에 유인하여 매음하면 안된다.

 

● 작부는 요리점에는 거처할 수 있으나 숙박소, 음식점에서 거처하면 안 된다. 작부는 객석에서 무용을 하거나 음곡을 연주하는 것을 금지한다.

 

영업 시행 규칙이라고 볼 수 있는데 기생들에게 있어서 이건 사문화된 규칙이라고 할 수 있다(기생들은 기방이나 요릿집에서 거처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규칙이 가지는 ‘역사적 의의’에 대해서 쉽게 간과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 규칙은 지난 500여 년간 한반도를 지배해 온 조선의 ‘성매매 문화’를 박살 내고, 자본주의에 입각한 ‘신개념 성매매’를 한반도에 토착화 시킨 혁명적인 정책이다.

 

“일본식 집창촌의 전국 확대”

 

1916년을 기점으로 일본식 집창촌은 조선 팔도에 침투하기 시작했다. 이전까지의 정책이 서울을 중심으로 한 정책 검증과 초기 정착단계였다면, 이때를 시작으로 일본식 성매매. 아니, 자본주의에 특화된 성매매가 이 땅에 파고들게 된다.

 

직격탄을 맞은 건 전통적인(?) 조선식 성매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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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막에서 국밥 한 그릇과 탁주 한 사발을 들이키고, 주모의 궁둥짝을 두들겼던 나그네들. 은근슬쩍 눈짓 교환이 이어진 후에 치마를 올리던 주모와 작부들은 이제 그런 ‘특별영업’을 할 수 없게 됐다.

 

“밥을 팔지 몸을 팔지 하나만 결정해서 업태를 신고해라.”

 

아니, 이렇게 업태를 신고하지 않더라도 이미 그 경쟁력은 바닥을 뚫고 지하로 내려갔다. 기차가 개통되면서 도보로 이동하는 이들은 거의 다 사라졌고, 설사 손님을 받더라도 일본식의 ‘특화’된 성매매를 경험한 이들에게 주모는 흥미의 대상이 아니었다.

 

대형마트와 재래시장? 아니, 동네 슈퍼와의 경쟁이었다.

 

연령대별로 고를 수 있는 수많은 여성과 균질한 서비스. 보기에도 좋은 집창촌 앞에서 토속적 성매매는 설자리를 잃었다. 아니, 설사 한다고 하더라도 나라에서 이를 허가하지 않았다. 일본 정부는 이들의 성매매 자체를 금지시켰다.

 

“국가가 인정하지 않는 성매매는 불법이다!”

 

국가의 허락을 받지 않는 이상 이들은 법적으로 밀매음(密賣淫)을 하는 것이고, 밀매음은 단속의 대상이었다. 일본은 착실하게 이들을 제거해 나가기 시작한다. 1918년 밀매음으로 단속돼 처벌된 사람의 수만 4,518명에 달한 걸 보면 당시 시대 상황을 엿볼 수 있다(1910년대 내내 단속되는 사람들의 수는 해마다 증가했다).

 

시대는 변했고, 사람들은 더 좋은 걸 찾았다. 잔술을 팔고, 야외에서 돗자리 깔고 몸을 팔던 시대는 이제 과거가 됐다.

 

정책적으로 사창을 단속하고, 밀매음을 처벌하면서 공창은 비온 뒤 죽순이 솟아오르듯 쭉쭉 뻗어 오르기 시작했다. 1920년대가 되면, ‘집창촌’은 더 이상 낯선 문화가 아니게 됐고 술 한 잔 걸치고 찾아가거나, 술을 마시지 않더라도 ‘유흥’으로 찾을 만한 곳이 됐다.

 

조선시대에도 색주가가 있어서 여자를 살 수는 있었지만, 이렇게 많은 여자들을 이렇게 쉽게 살 수는 없었다. 자본주의의 힘이랄까? 아니면, 일본 문화의 힘이라고 해야 할까? 조선인들은 금세 집창촌에 빠져들었고, 수치심이나 자괴감, 도덕적 이물감 따위는 벗어버리고 당연하단 듯 집창촌을 찾게 됐다.

 

처음에는 일본인만을 대상으로 만들어진 집창촌이었지만, 이제는 조선인들까지 상대하게 됐다. 아니, 조선인들의 수요가 더 컸다. 이렇게 되자 조선인들만을 상대로 하는 집창촌이 등장하게 된다. 그것도 서울의 한복판인 서울역 뒤편과 용산에 말이다.

 

여기서 주목해 봐야 하는 게, 조선인과 일본인의 분리 정책이다. 용산에 있는 대도정과 서울역 뒤편에 있던 미생정은 원래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영업을 했다. 대도정이 등장하자 미생정은 일본 여성을 고용해 일본인들을 상대로 하는 ‘일본인 전용 유곽’으로 영업 방침을 바꾸게 된다. 이는 다른 업소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같은 지역이라도 일본인과 조선인들이 드나드는 ‘업소’의 위치가 다르거나(자연스럽게 뭉치게 됐는데, 조선인은 동쪽 일본인은 서쪽... 이런 식으로 분리가 되기 시작한다) 상대하는 여성의 국적, 손님의 국적도 갈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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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 또 하나 주목해 봐야 하는 게 ‘홍보의 과열’이다. 지금은 거의 사라졌지만, 10여 년 전만 하더라도 청량리나 미아리에 가보면 ‘유리방’이란 게 있었다. 영화 <노는 계집 창>에 잘 나와 있는데, ‘전문여성’들이 유리방 안에 ‘진열’된 것처럼 앉아서 손님들을 기다리는 거다. 손님 입장에선 자신들의 취향에 맞게 여자를 고를 수 있기에 이런 유리방을 좋아했다. 여기에 더해 여성들이 직접 거리에 나가 호객 행위를 하는 경우도 늘어났다. 이 말은 달리 말해 ‘업소’들끼리 홍보를 해야 할 만큼 그 숫자가 늘었다는 의미이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조선총독부는 풍속을 지키기 위해 호객 행위를 금지시킨다. 또한 ‘영업용 건물’은 밖에서 못 보는 형태로 규제에 들어가게 된다(즉, 유리창을 못 달게 한 거다).

 

상황이 이렇게 돌어가자 업주들은 벌떼처럼 들고일어났고, 결국 타협점으로 찾은 것이 실물 여자 대신 ‘사진’으로 한다는 거였다. 이렇게 해서 1920년대 집창촌에는 여자 사진이 진열돼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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