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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사리판이 뭐가 좋다고 가나?

 

일이 갑작스럽게 돌아갔다. 그렇게 원할 이뤄지더니, 마음정리하고 나름의 미래계획을 변경하고 나니, 갑작스럽게 다시 기회가 주어졌다. 서울시에 제출해야 마지막 보고서를 작성 중이었고, 12월  소비자리포트를 마감해야 했다. 다른 연구원들도 보고서 마감 기한이 다가오긴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어쩌다 보니 제일 신입인 필자 제일 보고서 마감이 빨랐다.

 

회계내역에서 오류를 보인다거나, 가공 자료를 복잡하게 만들 일이 없어, 회계 맞춤도 쉽게 끝이 났다. 인수인계 일도 없어서 급하게 퇴사하는 데서 오는 미안함이나 마음의 부담을 있었다. 그날따라 말을 나눠야 사무총장이 사무실에 들어오지 않는 바람에 메일로 먼저 알렸다. 연말이었기 때문에 하루라도 빨리 퇴사 의사를 알려야 했다. 그래야 대략의 사정을 아는 사무총장이 다음 사무실에 출근하면 마주 앉아 자세한 이야기를 나눌 있을 같았다.

 

소비자리포트를 같이 담당했던 연구원이 다음 호를 생각하고 일의 연장을 이야기 하는 바람에 동료에게도 빠르게 퇴직 사실을 알려야 했다. 동료 연구원도 대학원 공부를 제대로 하겠다며 다음 퇴사 일을 잡아 놓고 있었는데, 정작 퇴직은 필자 먼저 하게 됐다.

 

사무총장과 아무도 없는 회장실에서 회의 탁자를 가운데 두고 마주 앉았다. 솔직한 속마음, 구질구질한 사정까지 일일이 이야기 수밖에 없었다.

 

ㅇㅇ씨 갑자기 어쩐 일이야. 어떻게 거야?”

 

사실은 일도 이제 익숙해졌고, 나름 보람도 있는데요, 4 보험이  되는 가장 문제가 큽니다. 여기 있는 동안은 직장생활을 하는 어머니의 회사에서 가입한 의료보험에 같이 가입되어 있었는데, 어머니 퇴직이 사실상 밖에 남았어요. 이후부터는 제가 장녀라서 부모님을 제가 책임지던가 해야 해요. 그리고 다시 기자일 열심히 해보고 싶어요.”

 

그래, 여기가 4 보험도 되고, 복지랑 처우 문제가 너무 열악해서, 그동안 나간 사람들도 많아. 알겠어. 그리 하는 걸로 해요.”

 

아주 쿨하고, 쉽게 말이 끝났다. 12 30일이 금요일이었고, 그날은 종무식이 있었다. 오후 4시까지 근무였다. 종무식에서 마지막 인사를 하고 나오는 뒤통수에 대고 회장이 말이 잊혀 지지 않는다.

 

그대! 어쨌든 가요. 아사리판이 뭐가 좋다고 간다고 그래?”

 

실장이 사주는 점심을 먹고, 컴퓨터 정리와 자리 정돈을 끝낸 4 회사를 나왔다. 생각보다 간단하고 가벼웠다.

 

NGO단체 사무실을 걸어 나올 가장 기억에 남았던 모두에게 왕따를 당하는, 연차가 기획실장이 입사할  필자 비롯한 신입생들에게 했던 환영사였다.

 

여러분들과 오래 일했으면 좋겠습니다.”

 

이곳도 얼마나 많은 이들이 스쳐 지나갔을까. 그리고 다시 현실적 문제 때문에 그나마도 아쉬워 돌아온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필자 또한 이곳을 지나쳐간 수많은 사람 사람이겠지만, 남아있는 이들의 기억에선 금새 지워질 것이고, 여기 있었다는 기록조차 남아있지 않으리란 사실이 그다지 섭섭하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주말이 지나고 바로 직장으로 출근했다. 직장이라고 것도 없이, 여의도에 있는 오피스텔 사무실이었다. 전국 지역인터넷신문에서 협회를 만들어, 중앙 뉴스를 담당하는 기자를 한 명 두기로 했고, 대체적으로 국회나 정치 뉴스를 작성해 전송해주는 일이었다. 총선과 대선이 연이어 치러지는 해여서 무엇보다 국회와 정치 뉴스가 중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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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생은 사람에게 더한 고생을 견디는 근육을 길러준다!

 

그래도 필자 고용한 사주는 경남 고성에서 지역인터넷뉴스를 운영하는 사장이었다. 사장과 면담도 제대로 못하고 급하게 고용된 참이었다. 사무실은 협회 설립에 함께 했고, 한나라당에서 -당시는 새누리당으로 당명을 바꾸기 전이었다- 보좌진을 지냈던 이모씨의 여의도 사무실을 함께 사용했다. 사장과 이모씨는 과거에는 친구였고, 지금은 필요에 의해서 일을 같이 벌이긴 했어도, 친하지는 않았다. 우선 사장은 정치적 아이덴티티가 진보였고, 이모씨는 얼마 후에 있을 총선에서 한나라당 간판을 달고 경북 구미에서 출마해, 박근혜 마케팅으로 국회의원 배지 달기를 희망하는 여의도 정치낭인 하나였다.

 

어쨌든 사무실 주인은 총선 때문에 지역구 다지느라 경북 구미에 머물렀고, 사무실에는 거의 나올 일이 없어 점은 좋았다. 그리고 협회 설립부터 실무 일을 담당하면서 이모씨의 선거일까지 도와주는 사무총장이(정식 직책은 아니었으나 편의상 그렇게 부르기로 하자) 있었다.

 

첫날은 그저 출근해서 썰렁한 사무실을 우두커니 지키고 있던 사무총장과 인사를 나누고, 기사를 집배신해야 홈페이지를 둘러보고, 회원 가입하고, 국회 출입기자 등록을 위한 서류를 만드는, 본격적인 일을 하기 위해 갖춰야 준비를 했다. 그러기를 시간, 얼마 있어, 고성에서 사장이 직접 올라왔다.

 

반갑다. 악수 한번 하자.”

 

사장은 후덕하고, 인상이 좋았다. 약간은 순박한 시골 아저씨 같기도 했다. 나름 시골지역에서 인터넷 신문 운영을 지역 특색에 맞게 잘해서 흑자를 내고 있었다. 그리고 과거 민주당의 강기정, 김현 의원 등과 같이 민주화 투쟁을 했다. 그래서인지 사장은 기자의 정치관부터 물었다. 보수라는 이름이 오염되고, 진보라는 개념부터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대한민국에서 진보냐, 보수냐를 묻는 의미 없었다. 그런데도 굳이 기자의 정치적 아이덴티티를 밝히자면 진보였다. 한나라당을 위시한 집권여당이 선점한 보수에는 동의할 수도 없었고, 지지하기는커녕 그들이 펼치는 정책과 철학에 누구보다 극렬한 반대자였기 때문이다.

 

나도 진본데, 반갑다.”

 

대답을 들은 사장은 미소를 환하게 지어보였다. 사장은 일식집에서 점심과 함께 낮술을 사주고는 내려갔다. 그리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하라고 해서, 4 보험 가입을 요구하자 당장 해주겠다고 하며, 자리에서 고성에서 사무 일을 봐주는 부인에게 전화로 지시했다. 만에 4 보험에 가입 되었다.

 

처해진 상황이나 조건, 모든 안정적이진 않았다. 그렇다고 넉넉한 상황도 아니었지만, 일단은 다시 기자다운 기자 일을 해볼 있다는 데서 만족했다. 다음 날부터는 회사 내부로부터 어떤 지시도 떨어지지 않았고, 국회 출입증도 나오지 않아서 국회 출입도 바로 없었지만, 이미 보도된 기사를 보고 2 취재를 통해 새로운 콘텐츠를 나름대로 생산해 게재했다.

 

기사를 써서 사장에게 메일로 보내고 전화로 알렸다. 기사를 사장은 매우 흡족해했다. 사실상 기자 일을 때도 괜찮은 시사주간지와 날의 정치, 사회 뉴스를 빠짐없이 챙겼던 습관이 빛을 발휘했다. 오랜 만에 풀기 위해 기사 빼놓고는, 취재하고, 기사 작성하는 그다지 많은 시간이 들지 않았다. 기사를 송고했을 되거나, 반려된 적도 없었다. 공백 시간 동안 오히려 많은 복기 해보면서 기사를 쓰는 능력이 눈에 띄 좋아졌다.

 

사무총장도 사무실로 출근하기 보다는, 선거에 출마하는 이모씨를 돕기 위해 구미에서 상주하는 날들이 많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첫날 빼고 이주일 동안은 사무실에 거의 혼자 있었다. 그러다 사무실 주인 이모씨가 만에 사무실에 나온 날은 기자를 보고 잔소리를 심하게 했다.

 

자신이 사무실에 들여 놓은 화분에서 마른 잎이 떨어진 조차도아가씨, 청소 안 하나봐?”라면서 비질과 사무실 방문 손님 커피 심부름을 시켰다. 기자를 경리 아가씨쯤으로 치부했다. 뿐만이 아니었다.

 

아가씨 심부름 하나 해. 우체국 가서 이걸 붙이고 .”

 

그러고는 오만 원짜리 장과 노란 서류 봉투 하나를 주었다. 사이 인생 경험이 쌓이고, 사회생활이 결코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익히 겸험을 통해 체득한 탓인지, 당시엔 약간 불쾌했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그리고 사무실에서 시간 동안만 불편함을 참으면 됐다. 이모씨는 선거 때문에 다시 구미로 내려갔기에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이모씨가 주인 텃새를 부리며 날궂이를 하고 다음 아침부터 고성에 있는 사장에게 전화가 왔다. 사장은 노발대발 난리였다.

 

김기자! 어제 이ㅇㅇ 와서 뭐라 했나? 힘들게 했어? 시키 먹었나?”

 

.”

 

알았다. 김기자! 니는 말만 듣고, 내가 시키는 일만 . 알았지? 부당한 일이나, 아무 심부름 시킨다고 하지 마라. 내한테 바로 알려줘

 

그래도 고마웠다. 그리고 이모씨가 아가씨라고 부르며 하대할 참길 잘했다 싶었다. 그리고는 며칠 사무실에서 혼자 근무하다 사무총장이 전화로 이모씨가 사무실 간다고 서울 올라갔다며 국회를 가든가, 어디 다른 곳에 있으라고 해서, 기자는 때부터 짐을 챙겨 국회 기자실로 출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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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찌질하고, 비열한, 아사리판

 

아직 출입증은 나오지 않았지만, 쓰던 노트북을 챙겨 당일 취재증을 끊어 국회 기자실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사이 국회 기자실도 많이 변해있었다. 퀴퀴하고 어둡던 휴게실이 테라스로 변해 있었고, 여기자, 남기자 수면실이 새로 생겼다. 정론관도 증축해 기자실이 많아졌다. 사이 종편이 생기면서 종편 기자들이 상주하는 기자실이 새로 만들어졌다.

 

국회 기자실에 처음 마주친 사람은 3 전에 함께 민주당을 출입했던 극우 매체 OOO I 기자와 필자 영업 압박에 시달려 퇴사한 매체에서 함께 일했던 남자 선배였다. 필자에게 영업을 하느니 차라리 퇴사하는  낫다고 조언해줬던 선배였다. 극우 매체에서 일했던 기자와 선배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직장에서 일하던 직장동료였다. E경제지에서 민주당을 담당했으나 선배가 사내에서 다른 여기자와 분쟁인지, 다툼인지 때문에 좋게 퇴사한 벌써 전이었다. 그리고 선배는 다시 케이블 채널과 인터넷 신문을 동시에 운영하는 T사에 입사해 필자 국회에서 재회한 그날이 출근 첫날이었던 것이다.

 

둘과 오랜만에 인사를 나누었다. I 기자와 필자 아주 반갑게 앉아 회포를 풀고 있던 모습을 지켜보던 선배가 물었다.

 

둘이 아는 사이가?”

 

. 저희 원래 알았어요.”

 

기자도 말했다.

 

ㅇㅇ언니 제가 정말 너무 좋아하고, 의지하는 언니에요.”

 

우리 둘이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는지, 아니면 년에 걸쳐 순차적으로 모두 다른 매체에서 후배로 두었던 우리 둘에게 자신이 비열한 짓이 있으니, 그게 걸렸는지, 기가 막히다는 , 어느 구석이 찜찜하다는 없는 웃음소리를 내가며 둘을 번갈아 가며 동안 쳐다보았다.

 

허허. 진짜… 세상 좁네.”

 

사람 사는 어디나 일어난다고 하지만, 언론사 안에서 나름 기자 사이에 벌어지는 일들은 괴랄하고, 찌질하기 짝이 없었다. 덩치 남자 선배가 자신의 반도 되는 여자 후배가 하는 짓이 싸가지가 없다며 뺨을 때렸다가, 고소당한 일이 있는가 하면, 가는 곳마다 여자 후배들을 성추행해 직장을 옮긴 남자 기자도 있었다.

 

탐욕에 비열한 개새끼들이 유독 많은 집단이었다. 적어도 필자 경험한 사회 집단 중에서는 언론계가 단연코 으뜸이었고, 중에서도 국회와 정당을 출입하는 정치부 기자들은 밀도가 최고로 높았다. 정당 공보실에서 매일 저녁을 당연한 얻어먹는 기자가 있는 하면, 공보실에 비치 놓은 과자 같은 간식을 박스채로 들고 자기 자리 밑에 짱박아 놓고는 자기네 회사 동료들끼리만 나눠 먹는 진상도 있었다.

 

명절 때마다 국회의원이 보내는 인삼, 생물고등어, 홍삼, 상자, 사과 상자를 너무나도 아무렇지 않게 받는 기자들은 , 둘이 아니었고, 당직자로부터 책갈피에 달러를 끼운 책을 받은 사실을 아무렇지 않게 떠들어대는 기자도 있었다.

 

필자도 출입하면서 의원에게 상자와 10 원짜리 롯데백화점 상품권을 받은 경험이 있다. 출입 기자로 등록할 적어 놓은 집주소로 상자가 배달되었다. 상품권은 의원실에 취재하러 기자의 수첩 사이에 끼워주었다. 극구 사양해도 찔러주는 그런 경험도 처음이라 세련되게 다시 돌려 주는 방법을 몰랐다. 다시 돌려주고 어찌해 도리가 없었다. 의원은 이후 의원직까지 사퇴하면서 다음 총선을 준비했으나, 공천조차 받지 못했다. 아니 지역구가 전략공천 되는 바람에 경선조차 해볼 기회가 없었다. 상자와 롯데백화점 10 짜리 상품권을 받았던 일은 지금도 두고두고 부끄러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롯데백화점 상품권은 돈으로 바꿔, 유기동물을 돌보는 단체에 후원금으로 송금해버렸다.

 

기자도 이전 직장에서 선배한테 뺨을 맞고, 고발한다고 경찰서까지 가는 난리법석을 끝에 가해자로부터 600만원의 합의금을 받고 직장을 퇴사했다. 그리곤 1 언론계를 떠나 있다, 다시 복귀한 되던 차였다. I 기자가 선배한테 맞고 경찰서에 사실관계 확인 출석할 부탁을 받고 필자 동행했었다. 법대를 졸업한 사람들은 온갖 송사에 본의 아니게 참견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다시 국회 기자실에 입성(?)하던 날은기자와 국회 컴백 기념으로 영등포 롯데백화점 7층에서 저녁을 먹고 헤어진 기억이 지금도 아련하게 남아있다.

 

이후기자와 인연은 좋지 않게 끝이 났지만 국회 기자생활하면서, 알게 모르게 서로 의지 하며 쌓은 정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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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얼마든지 유의미한, 정치 한복판에서 경험한 총선

 

어쨌든 일의 만족도는 높았다. 시스템이 완비된 곳에서 시작이 아닌, 하나부터 열까지 상황과 조건을 혼자서 만들어 가야 했고, 동료도 없이 때론 외로웠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했다. 오전 일찍 국회에 도착하면 아직 미디어담당관이 출근 전이라 국회 안으로 들어 갈  없었다. 그럴 국회 1 출입구 검색대 면회실에서 노트북을 꺼내 기사를 썼다.

 

어차피 혼자 담당했기에 한나라당과 민주당 오전 회의를 모두 들어갈 없어서 한나라당은 아예 포기하고 민주당만 들어갔다. 한나라당은 나중에 들어오는 회의 결과 메일과 브리핑을 듣고 후속 취재해서 관점을 달리 하거나, 심도 있게 꼭지만 기사로 다뤘다. 아주 현안 아니면 버렸다. 선택과 집중이 중요했다. 민주당을 메인으로 가져가면서 현안을 누구보다 열심히 쫓아갔고, 취재를 정말 다각도로, 자세하게 하려고 노력했다. 혼자 감당하는 기사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하루 평균 6꼭지에서 8꼭지를 썼고, 현안이 많은 날은 12꼭지를 썼다. 어떤 날은 20꼭지가 넘은 날도 있었다. 그야말로 정신 없이 사건이 뻥뻥 터지는데, 점심도 굶은 날이 많았다. 토요일만 겨우 하루 종일 휴식을 취할 있었고, 일요일은 국회로 출근하지 않아도 집에서라도 기사를 다뤄야 했다.

 

대통합민주신당이 새로운 지도부 선출을 위한 전당대회를 앞두고 정당사에서 전무후무한 모바일투표를 도입해, 대박을 치는 바람에 민주당발 기사는 다룰 수도 없었다. 당시 민주당 모바일선거인단으로 등록한 사람이 80 명을 넘어섰고, 민주당 지지율이 한나라당을 앞질렀다. 이명박 정부의 연이은 실정에 대한 심판 민심 기조도 꾸준해, 민주당에게 호의적인 선거분위기였다.

 

그리고 한나라당은 전 해 11월에 치러진 서울시장 보궐 선거에서 참패하는 바람에 홍준표 대표를 비롯한 지도부가 모두 사퇴하고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이 새누리당으로 당명까지 바꾸며 비대위 체제로 당을 이끌던 시기였다.

 

어차피 4 총선을 앞두고 정초부터 쏟아지는 현안을 쫓아가는 것만으로도 만만치 않았지만, 그렇게 초반 달을 고생해 놓으니, 업무하는 있어 나름 보이지 않는 시스템이라는 갖춰졌고, 하루 일상도 대체적으로 루틴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물론 국회 안에서 매일 매일 벌어지는 이슈는 단위로 폭풍이 수도 없이 몰아치는 같았지만, 그건 총선이라는 특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기자로서 누구보다 소용돌이의 복판에서 총선을 경험한 것은 이루 말할 없이 소중하고, 값진 경험이었다. 동안 기자 일을 하면서 겪은 마음고생과 비참한 세월들이 모두 기회비용이었다고 여겨질 만큼, 많은 배울 있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