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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도 토론회라는 것이 있었다. 

 

경기도지사 후보 토론회가 실시간 검색어를 이틀 동안 장악한 사이 모두의 무관심 속에 성대하게 끝났지만, 하여튼 있었다. 

 

전날 있었던 경기도지사 토론회에 묻혀 시작부터 큰 이슈가 되지 않았던 그 토론회, 궁금해서 본방사수했다. 그리고 이미 봐버린 거, 새벽의 돌려보기가 아까워 관전기를 쓴다. 혹시 누가 뒤늦게라도 볼까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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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들은 레드카펫 위에서 나름의 포부를 밝히면서 등장했다. 각자 생각한 이상적인 토론회를 그려보고 있었던 건지, 이때는 다들 행복해 보인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은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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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민주당 박원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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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 오늘은 토론회가 있다고 들었어요

현실 : 진상 민원인과의 조우

 

 

저는 우리 안철수 후보님 진짜 감사할 일이 많습니다. 그동안 2011년도에 저에게 서울시장 양보를 해주셨죠.

또 2014년 당 대표로서 저를 아주 세게 지지해주셨죠.

 

그리고 제가 듣기로는 광주에 윤장현 시장 지지하러 가서 “박 시장 봐라 저렇게 잘하고 있지 않냐" 이렇게 말씀도 하시고,

또 최근에도 박원순 서울시장은 혁신의 아이콘이다 이런 지지를 굉장히 많이 해주셨는데,

지금 이렇게 또 비판하시니까 좀 야박하시다, 서운하다 이런 생각까지 드는데요.

 

 

초선 때만 해도 듣보 변호사였던 박원순은 재선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가장 당선확률이 높은 후보다. 지난 대선 토론에서 4:1 다구리판이 벌어졌던 것을 생각하면, 이번에도 현재 1등 박원순 후보에게 공격이 집중될 것은 뻔했다.

 

그런데, 서울시장을 두 번 하더니 박원순이 달라졌다. 능글맞아졌다. 예전엔 잘해주더니 이제 와서 서울 다 망했다고 하는 안철수에게 감사하는 척 돌려 까는 부분은 어디서 배웠는지 모르지만 자연스러웠다. 모든 질문에 자세히 답변한 건 아니지만, 질문에 담긴 공격력이 무색하게 스무스하게 답해버렸다.

 

사실, 박원순이 말 잘 하는 사람처럼 보인 건 어제가 처음이다. 정책토론을 거의 하질 못했으니, 어제의 유일한 성과랄까. 아, 그건 같이 있는 사람들이 말을 너무 못해서일 수도 있으니 일단 박 후보는 다른 후보들에게 감사하는 게 좋겠다.

 

그렇지만 다음에는 정책에 관한 얘기를 좀 듣고 싶다. 이미 서울시장이었으니 해 온 정책과 할 것들에 관해 할 말이 많았을 텐데, 토론회장에 미세먼지 민원인이 등장했다. 박원순 시장이 가내수공업으로 미세먼지 만들어 뿌리는 줄.

 

 

 

자유한국당 김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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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 박원순 잡는 스나이퍼. 빵야빵야

현실 : 도르마무 도르마무 미세먼지 얘기를 하러 왔다

 

 

박원순 시장님. 미세먼지가 취임 이후에 계속 나빠지고 있는 건 아시죠?

그리고 시민들이 점점 마스크를 점점 많이 쓰고 있는 것도 알고 계시죠?

 

 

누가 조국의 미세먼지를 묻거든 고개를 들어 문수를 보게 하자.

 

인간의 언어는 사고를 반영한다는 전제하에 지금 김문수 후보의 뇌 구조 80% 이상을 미세먼지가 차지하고 있다. 앉으나 서나 미세먼지 걱정하는 걸 듣고 있자니 마치 시간에 갇힌 도르마무가 된 것 같았지만, 일개 시민이 김문수 후보의 서울 대기 사랑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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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세먼지 얘기 140,000,605번째 듣는 중...)

 

경기도지사일 때 넌 뭐했냐는 질문은 애써 쌩까셨지만, 미세먼지는 정말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에 이 부분 만큼은 박원순 시장이 김문수 후보의 말을 경청해줬으면 좋겠다. 무려 환경관리기사 자격증 있으신 분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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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이분한테 물 좀 뿌려주세요 빨리요

 

어제 토론은 김문수 후보의 하드캐리가 빛났다. 김 후보의 어록만 모아 따로 기사를 써도 될 정도다. 동반자관계 인증제에 대해 동성애가 인정되면 에이즈를 어떻게 감당하고, 출산율은 어쩔 거냐는 주옥같은 얘기를 쏟아냈지만, 이것은 정의당 김종민 후보의 “그렇기 때문에 올드보이 얘기를 들으시는 거다"라는 멘트로 평가를 대신하겠다. 

 

김문수 후보의 킬링파트는 후반부 자유토론이 시작된 직후였다. 후보들에게 각자 10분씩 주어졌다. 후보들은 10분이라는 시간을 알아서 질문하고 답하는 시간으로 나눠쓰면 된다. 어차피 지금 입 열고 얘기하고 있는 사람의 시간만 깎이고 있기 때문에 자기의 시간 분배는 자유롭게 하는 거다.

 

...는 사실을 김문수 후보는 이해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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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방청객이 되었다

 

뒤늦게 대화에 끼어보려고 서지 않는 택시 잡듯 손을 휘적거리는 김문수 후보의 모습은 조금 짠했다. 겨우 발언권 얻은 후에 10분이라는 시간 대부분을 박원순 후보 빚 걱정하는 사생팬의 모습은 더욱 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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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요?

 

자유와 토론이 없던 시절에 학생운동을 해서 그런 걸까. 갑자기 ‘자유’를 얻은 문수는 감동에 정신이 아득해지고 말았다.

 

무엇보다도 곧 있을 JTBC 토론에서는 미세먼지고 박원순 빚이고 간에, 토론 룰부터 이해하고 오셨으면 한다. 보좌진들 일 좀 하자. 제발 김문수 후보의 무식함을 멈추자.

 

 

바른미래당 안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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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 김정은도 그렇고 모두 날 두려워한다. 감히 내게 맞서지 못하고 모두 대답을 회피하고 있다. 

현실 : 철수 패싱

 

 

제가 사실 아까 지적한 부분들 답변을 안 하고 넘어가셨습니다만…

아까 제가 일일이 사례를 다 들어드렸는데,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가셨습니다만...

 

 

어제의 최대 피해자는 안철수 후보가 아닐까 싶다. 김문수 후보의 미세먼지론에 안철수 후보도 미세해져버져버려, 셀프로 붙인 야권 대표주자라는 타이틀이 민망하리만큼 존재감이 없었다.

 

그나마 엿볼 수 있었던 건 인간 안철수의 변하지 않은 캐릭터 정도가 아닐까 싶다. 당시 시종일관 바들바들 부들부들하시던 모습을 털어버리고 이젠 쿨하고 좋은 사람처럼 보이고 싶은 것 같은데, 여전히 연기력이 부족해 '영업용 미소'가 끊기는 순간 원래 얼굴이 돌아온다. 아유 무서워. 감출 수 없는 정색과 다른 후보를 향한 "산수도 못 하냐"는 핀잔은 '내 마음이 여전히 매우 좁습니다'를 적극적으로 보여줄 뿐이다. 

 

사람들이 왜 본인을 보고 작위적, 인위적, 진심 안 느껴짐, 소울리스 등의 수식을 붙이는지 곰곰이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세상엔 공부만으로 안 되는 것도 있다.

 

존재는 미세했으나 슬프게도 말은 많이 했다. 그게 딱히 세세히 답변해야 할 질문이 아니었거나, "그만 좀 개롭히십시오."처럼 의미 없는 말이었을 뿐. 실제로 상대방이 모두 대답했는데 본인이 잘 못 알아듣고 "내 말에 즉답을 피했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았다. 혹시 사람들이 대답을 피한다고 생각하고 싶거나, 그만큼 본인의 질문이 송곳같이 날카로웠다고 생각하고 싶은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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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느낌이다

 

그건 좀 알아줬으면 좋겠다. 사람들이 무서워서 피하는 게 아니라 가끔은... 아, 그만 좀 개롭히라는 말 듣기 전에 그만해야겠다.

 

 

정의당 김종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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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 “얘들아 조용히 해! 공부해야지!” 외로워도 슬퍼도 정책선거를 향해 달리는 우직한 들장미 소녀 캔디

현실 : 하지만 놀라울 만큼 그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규제하면 더 투기가 생긴다? 이건 삼척동자가 웃을 일이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재건축 재개발 규제 없애겠단 얘기는 투기꾼들하고 일부 강남 땅 부자들을 위한 정책이지. 이거는 이명박 대통령 그 전에 뉴타운 정책 쓰신 거랑 똑같습니다. 감옥 가신 정치를 왜 도대체 불러내려고 하시는지 이해가 안되구요. 토건은 구석기 정책이다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오로지 박원순 하나만 조지겠다는 자유한국당과 달리 정의당은 정책선거를 향해 달렸다. 지금껏 토론이 그러했듯, 정의당 후보가 마이크를 잡으면 그제야 토론이 조금은 토론답게 흘러가게 된다. 다만, 이것 역시 그 사람이 프로일 때 가능하다. 

 

김종민 후보는 프로의 무대에 서기는 좀 순진해 보였다.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는다면 자기가 설자리를 스스로 만들어야 하는데, 발언권을 가까스로 가져오더라도 금방 다른 후보의 발언에 묻히고 말았다. 아직 아마추어 같달까.

 

누가 조금만 헛소리를 해도 금방 흥분하거나 신경질적으로 받아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노회찬 대표가 그리워지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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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장 선거만큼 2등이 주목받는 선거가 있을까 싶다. 다들 서울시장 선거는 2등이 중요하다고들 한다. 

 

"두 분(안철수, 김문수)이 거의 생각이 같으시고 슬로건도 똑같으시던데

빨리 단일화하시는 게 맞지 않을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토론이 끝나갈 무렵 정의당 김종민 후보는 안철수 후보에게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런 무서운 말은 안 해줬음 좋겠다.

 

두 사람의 완주를 응원한다. 이번 선거에 2등이 중요하다지만, 정작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건 누가 3등을 해서 더 미세해지느냐, 더 망하느냐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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