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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대선이 한창 무르익을 무렵, 당시 한나라당 대선 후보 이회창은 서울의 한 여고를 찾아 대한민국 선거역사에 길이 남을 명연설을 남긴다.

 

"여러분들을 보니 명랑하고 빠순이 부대가 많은 것 같아요. 허허“

 

‘빠순이’는 원래 ‘빠(Bar)에 나가는 여자’라는 의미로 유흥업소 여종업원을 비하하는 단어로 쓰였다. 90년대 후반부터는 특정 운동선수나 가수, 배우를 좋아하는 여성 팬들의 극렬함을 비꼬는 말이기도 했다. 어떤 용례로든 ‘빠순이’는 초면인 사람에게 쓰기에 매우 부적절한 단어다. 공당의 대선후보가 여고생들에게 쓰기엔 더욱더.

 

당연히 이회창 후보는 그 단어에 배어 있는 부정적인 어감을 모르고 사용했을 것이다. 품격 있고 교양 있는 법관과 관료로 살아온 그가 ‘빠순이’같은 원색적인 어휘를 쓸 기회는 거의 없었을 것이므로. 

 

그는 단지 학생들과 친해지고 싶었다. 낙엽만 굴러도 웃는다는 어린 학생들인데, TV에서 보던 유명한 사람이 학교 강당에 나타났으니 그날 학생들이 얼마나 신이 나서 재잘거렸겠는가. 그 모습에 그저 흡족해진 이 후보는 비서실에서 일러준 ‘요즘 유행어’ 중 하나를 골라 썼던 것이다. 결과는 뻔했다. 갑분싸(갑자기 분위기 싸해짐). 

 

대중에게 끊임없이 인정받아야 하는 정치인들에게 특정 세대의 문화와 언어를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고 어려운 숙제다. 그것은 마치 외국어를 익히는 것과 같다. 배워서 쓸 수는 있지만, 모국어로 쓰는 사람의 맛깔남은 좀처럼 따라 하기 힘들다. 언어가 사용되는 문화적 맥락을 깊이 이해해야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때때로, 정치가 세대의 정서를 잘 읽지 못하고 그저 유행하는 것들만 쉽게 차용하려 할 때, 촌극이 벌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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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이준석 페이스북

 

지금은 젊은 표심이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촛불 세대’의 시대다. 뉴미디어 시대에 살며 손안에 항상 작은 터치스크린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하루에 수백 개의 콘텐츠를 접하고, 피드백을 하고, 스스로 크고 작은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전 방위적 소통에 능하다. 이런 때에 정치인들의 관성적이고 안일한 대중 스킨십은 도리어 역효과만 가져올 뿐이다. 그들이 배우고 익혀야 할 지금 세대의 소통 어법은 무엇일까.

 

 

정치 예능화 시대

 

JTBC<썰전>은 시사/교양으로 분류되지만, 이전에 없던 새로운 장르다. 시사와 정보를 익살스러운 자막과 효과가 가미된 예능의 어법으로 전달한다. <썰전>이 구축한 시사예능 이라는 장르는 곧 추세가 되었다. TV조선<강적들>, 채널A<내부자들>, MBN<판도라> 등 비슷한 포맷의 종편 프로그램들이 생겨났고, SBS<블랙하우스> 등 지상파까지 그 경쟁에 합류했다. 바야흐로 정치를 예능으로 배우고, 소비하는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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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능이 정치를 다루는 방법은 대상의 희화화다. 빈틈을 놓치지 않고 허를 찌르는 질문으로 출연자를 순식간에 궁지로 몬다. 대응방식에 따라 고고히 쌓아둔 이미지와 권위가 한방에 무너지기도 한다. 정제된 모습으로만 미디어에 등장하는 데에 익숙한 정치인들에게 예능의 이러한 독하고도 무례한 접근은 듣도 보도 못한 초식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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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하다고, 익숙지 않다고 대세를 마냥 거스를 순 없는 노릇이다. 대중은 이미 정치를 콘텐츠로 정치인을 캐릭터로 소비하고 있다. 이러한 정치 예능화의 흐름은 이번 지상파 지방선거 개표방송에도 유감없이 발현되었다. 

 

 

극한직업 배철수

 

이번 선거개표방송에서 MBC가 가장 다채로운 변화를 보여줬다. 5~10% 정도의 개표상황에서 도 자체 개발한 당선예측프로그램으로 후보의 당선 확률을 계산해 제공하는 등 차별화에 힘을 줬다. 백미는 역시 시사예능요소를 가미한 <배철수의 선거캠프> 꼭지였다. 패널은 시사예능의 원조 <썰전>의 출연자 유시민 작가와 전원책 변호사가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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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썰전>에서의 관성 때문인지 둘은 원래 아웅다웅하는 톰과 제리 캐릭터를 정확히 수행했다. 눈에 띄는 지점은 편집의 틀은 벗은 라이브방송에서 드러난 전원책 변호사의 폭주였다. 잦은 논점이탈과 감정적인 비평들을 쏟아내며 유시민 작가와의 대등한 입담대결을 스스로 무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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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의 거친 화법은 시사예능프로그램에서는 예능적으로 풀어내기에 좋은 편집점이 되어왔다. 편집을 거친 그의 거친 언변은 수위가 적절히 조절된 용인 가능한 수준의 유머로 만져져 재미를 더하는 요소로 활용되어 온 것이다. 그러나 자막도 효과도 편집도 없는 실시간 토론에서는 그의 모든 장점이 단점으로 치환되었다. 한쪽 축이 무너지자 진보 보수 양쪽의 논객이 실시간으로 개표상황을 분석해준다는 훌륭한 구성이 무색해졌다. 

 

그러나 온전한 시사 대담은 실패했을지라도, <배철수의 선거캠프>는 예능프로그램으로서는 성공했다. 전원책 변호사의 폭주를 통제하느라 쩔쩔매는 배철수의 진땀과 그의 감정적인 발언에 내뿜어지는 유시민 작가의 실소가 어우러진 장면은 잘 짜여진 완벽한 블랙코미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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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이것이 숨은 진짜 연출 의도였는지도 모른다. 라이브 방송에서 전원책 변호사의 모습은 작년 JTBC 신년토론에서 한차례 선보인 바 있다. 그 불안정한 캐릭터를 모를 리 없는 제작진이 여당의 압승이 예상되는 이번 지방선거를 두고 그에게 차분한 판세분석을 기대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선거캠프>를 예능으로 보자면, 전원책은 단연 원톱이었다. 모든 복지공약을 포퓰리즘으로 깎아내리고, 북미정상회담에 이유 없는 불만을 내비치며 ‘때려잡자 공산당!’을 말한다. 제작진은 전 변호사의 그런 캐릭터를 자극하면서 낡은 명분과 논리를 붙잡고 표류 중인 한국 보수진영의 남루함을 여실히 연출해내는 데 성공했다.

 

 

좀 무례해도 괜찮아

 

SBS는 개표방송에 <블랙하우스> 질문특보 캐릭터를 활용한 <강유미가 간다> 꼭지를 선보였다. 막바지 선거운동을 하고 있는 서울시장 후보들의 유세현장에 찾아가 짧은 피크닉 인터뷰를 한다는 설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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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선거방송 사이에 짧은 꼭지로 들어가는 만큼 독함은 순화되었으나 본래의 기질은 포기하지 않았다. 강유미가 곤란한 질문을 기습적으로 던진다든지, 후보가 삼각김밥 포장을 뜯지 못해 쩔쩔매는 장면 뒤에 청년 일자리 정책을 말하게 한다든지 하는 예능의 코드가 교묘히 배치되었다. 

 

엄정한 선거를 다루는 개표방송에서까지 이러한 유머가 사용되었다는 것은 큰 의미를 갖는다. 정치는 더 이상 예능이 다루지 못할 성역이 아니며, 정치인의 결점을 자연인의 그것보다 높은 수준으로 감시하고 조롱하는 것을 지금 사회가 허용하고 있는 것이다. 명망가로 대접받던 정치인은 이제 언제든지 희화화될 수 있는 공인이 되었다. 

 

출마자들은 흔히 머슴을 자청한다. 틀렸다. 오늘날 민주주의 사회에서 계급은 존재하지 않는다. 같은 이유로 사회지도층이라는 대접도 옳지 않다. 누구도 누구를 지도할 수 없다. 시민은 대표자에게 권력을 위임하고, 대표자는 위임받은 권한으로 맡겨진 일을 행할 뿐이다. 우리가 어제 뽑은 사람들은 머슴이 아니며, 보스는 더욱 아니다. 그저 우리 삶의 어느 부분에 대행자들일 뿐이다. 시사예능의 시대, 이제 정치인에게 요구되는 덕목은 점잔을 빼며 품위를 지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마음 놓고 일을 맡길 수 있도록 각자의 긍정적인 캐릭터를 시민들 앞에 구축해나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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