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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월드컵. 폴란드와의 경기는 퀴퀴한 지하 카메라 보관실에서 순대 놓고 소주 놓고 달랑 네 명이서 봤습니다. 미국과의 경기는 낮이라, 근무 중에 근엄하게 사장님 모시고 프로젝션 티브이로 봤습니다(분위기가 근엄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사장님이 앞에 계시면 발광하기가 어렵죠).

 

마침내 포르투갈전. 팀 선배가 오늘은 호프집이다!를 외치고 자리를 예약했습니다. 거리 응원에 나갈 정성까지는 없고, 맥주 마시면서 건배나 실컷 하며 축구를 보자는 그 발상에 전 팀원과 전 출연진(당시 재연 프로그램을 하고 있었죠)과 전 스태프가 기립 박수를 보냈지요. 경기 시작은 오후 8시인가 그랬는데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선 4시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해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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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과의 경기를 알리는 휘슬 소리가 울리고 호프집 안은 떠나갈 듯한 환성으로 그득했습니다. 환성은 그 후 90분 동안 한 번도 끊기지 않았습니다. 히딩크가 화면에 나오면 히딩크 히딩크, 박지성이 비치면 박지성 박지성, 홍명보가 나오면 홍명보 홍명보, 그리고 아무도 안 나오면 '대~한민국'. 그러다 지치면 '오 필승 코레아~ 오 필승 코레아~'

 

몇 살이라도 젊다고 조연출들은 아예 난리가 났습니다. 붉은악마들이 하는 응원을 어떻게 배웠는지 '오~ 오~' 하면서 응원을 선도하면서 사방을 누볐습니다. 나중에는 좌중이 우리 좌석을 보면서 응원을 하는 통에 팔자에 없는 공식 응원단 노릇까지 하게 됐습니다. 덕분에 저도 많이 배웠죠.

 

예선 탈락이 확정된 폴란드가 미국에 의외의 완승을 거두고 있는 상황이 전해지자 승리의 느낌이 쓰나미처럼 호프집을 두어 바퀴 돌았습니다. 거대한(?) 파도타기가 적어도 열 번은 장내를 쓸고 지나갔고, 건배 소리는 천정을 무너뜨릴 듯 드높았지요.

 

후반전이 시작되고 얼마 안 되어서 폴란드가 또 한 골을 넣었던 것 같고 저 역시 펄쩍펄쩍 뛰며 만세를 불렀는데 그 직후 저는 뭔가에 걸려 나동그라졌습니다. 깜짝 놀라 제 발을 건 것을 보니 그건 새우처럼 몸을 꼰 채 엎어져 있던 후배였지요. 아까 붉은악마의 응원을 구사하며 좌중을 이끌던 그 후배였습니다.

 

어라? 얘가 왜 여기 누워 있어? 하면서 얼굴을 들여다본 순간 저는 화들짝 놀랐습니다. 입에 거품을 물고 있는 겁니다. 얼굴 표정은 엉덩이에 불화살 두어 대 꽂힌 듯,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습니다.

 

"야 왜 그래? 왜 그래?"

 

녀석은 계속 뽀글거리며 대답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주변을 둘러보면서 왜 이러냐고 물어봤지만 폭풍 속의 병아리 울음처럼 환호 속에 묻혀 버렸습니다. 조연출 한 녀석은 흘낏 돌아보면서 "몰라요" 라고 한 뒤에 다시 대~~~한민국! 응원을 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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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러진 녀석이 무슨 말을 하려고 안간힘을 쓰길래 아예 귓바퀴를 입에 갖다 댔습니다.

 

"거... 거시기... 모서리... 모서리..."

 

"뭐라는 거야? 임마. 왜 그래?"

 

"거시기를... 모서리에... 찧었어요..."

 

호프집 바닥이 꺼져라 방방 날뛰며 123 박수를 선도하더니 어깨를 내미는 동작을 과격하게 하다가 그만 다리 사이의 중요한 물건과 모서리가 심각하게 충돌하고 말았던 겁니다. 그리고는 그대로 엎어져서 서해 바다 대하 꼴로 몸을 접은 채 뽀글거리고 있었던 겁니다. 이런 미련한 것이...

 

얼굴이 완전히 하얘진 것이 보통 일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상태를 봐야겠는데 호프집에서 환부(?)를 봤다간 만장하신 여성분들로부터 호프잔 날아올 거 같고, 화장실로 가려는데 녀석 덩치가 좀 커야죠. 키부터 180이 넘는데. 만만한 조연출들을 좀 불러 보려는데 이 자식들 완전히 무아지경입니다.

 

"야 인범아!"

 

"오 필승 코레아~~~~"

 

"야 임마. 인범이 짜식아. 여기 좀 보라니까."

 

"오 오레 오레~~~ 왜요?"

 

"얘 좀 데리고 화장실 가자."

 

"혼자 갔다 오라 그래요. 오 필승 코레아~~~~"

 

콱 조연출 녀석 얼굴에 제 얼굴을 들이밀고 "따라 오란 말이야 짜식아..."를 부르짖을 판에 부상자(?) 녀석이 안간힘을 쓰면서 일어나길래 그냥 혼자 부축하고 화장실로 갔습니다. 어린애같이 서 있는 녀석의 혁대를 풀고 환부(?)를 살피니 적잖이 부어 있는 거 같긴 했지만 다행히 내시가 될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나 원 참. 짜식아 응원 좀 작작해라. 축구가 뭐길래."라고 훈계하는 순간...

 

호프집이 달나라로 옮겨질 듯한 괴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박지성이 골을 넣은 거죠. 그 소리를 들은 순간 그만 저도 이성을 잃고 말았습니다. 바지를 무릎까지 내리고 벽에 기대선 채 식은땀을 흘리고 있던 녀석을 팽개쳐 두고 "뭐야 뭐야"를 외치며 술자리로 달려갔던 게지요. 리플레이라도 보려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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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표 센터링 박지성 가슴으로 트래핑, 왕년의 펠레처럼 한 명 제치고 왼발 슛 골인~~~~~~~. 으아아아아 저도 그만 미치고 말았습니다. 포르투갈 집에 가! 가! 가란 말이야. 분주히 맥주로 목을 축이고 다시 윤기 넘치는 목으로 대한민국을 수백 번 외치는 동안 가엾은 나의 후배가 엉기적거리며 화장실에서 돌아오는 것도 보지 못했고, 녀석이 고통을 참으며 난리가 난 술자리의 주변부에 엉덩이 붙인 채 고개 숙이고 있는 것도 몰랐습니다.

 

경기가 거의 끝날 때쯤에야 저는 불현듯 놀라면서 후배의 행방을 찾았지요. 그나마 고통이 가라앉았는지 이 자식 또 일어섭니다. 고통이 채 가시지 않은 표정 위로 오 필승 코레아를 띄웁니다. 이를 악물고. 한 손은 프리킥 막는 축구 선수들처럼 거시기를 보호하면서 말입니다. 그렇게라도 그 즐거움에 동참해야겠다는 듯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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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2002년을 제대로 기억하는 세대에게 그 해는 여러모로 잊기 어려운 해일 듯합니다. 월드컵에서 노무현까지... 월드컵 하이라이트를 보다가 옛 추억 옮겨와 봤습니다. 월드컵은 재미있습니다. 언제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