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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드링킹이라는 말이 한동안 화제였다. 의미 있는 네트워킹이 아니라 그저 술 마시고 잡담 나누는 비생산적인 모임이라는 비아냥으로 시작한 말이었다고 들었는데 나는 그 말이 무척 마음에 든다. 어느 모임이건 워킹은 되는 사람끼리 되는 것이고 드링킹도 충분히 인간 사이의 열림을 가져올 수 있다고 믿는 자로서 어찌 ‘넷드링킹’의 가치와 위력을 부정한단 말인가.

 

아내가 식탁에 칼을 꽂을 듯한 살기로 다이어트를 주문한 뒤 내가 먼저 “오늘 뭐해?”라는 전화나 카톡을 날리지는 않고 있고 점심을 제대로 먹은 날에는 가급적 술자리를 피하고 있으나 그래도 언제나 내 발걸음이 가장 가벼워질 때는 좋은 사람들과의 술자리에 가는 길이다.

 

술을 좋아한다기보다 술자리를 좋아하고 주량도 그렇게 세지 않고, 입이 그렇게 까다롭지는 않은 고로 맛있는 술을 찾아다닌 기억은 없다. 누가 발렌타인 30년을 사주면 까무라칠듯 오버하며 그 맛과 향을 극찬하겠지만 솔직히 그게 왕년의 캡틴큐와 얼마나 다른지는 잘 모른다(그런다고 사 줄 생각이 있는데 접지는 마시라. 나도 먹어 봐야 맛을 알 게 아닌가).

 

중국 빼갈도 왕년에 짬뽕 국물과 곁들여 먹던 박카스 병보다 조금 큰 대만 고량주나 요즘 먹는 옌타이나 마오타이 차이를 확연히 느끼지는 못한다. 그런데 요즘 맥주에 대해서는 생각이 달라졌다. 맛있는 맥주가 별안간 봇물 터지듯 출현하니 가히 드보르작의 신세계 교향곡이 마른 목젖으로부터 광광 울려대는 것이다.

 

하이트와 카스의 쇄국 정책에 갇혀 있던 보릿물 안 개구리였던 나는 다른 이들이 모두 개화의 문을 열고 신문물을 마음껏 들이킨 뒤에야 눈 비비며 황홀해하는, 강화도 조약 뒤의 조선 같은 아싸였다. 개항은 했으나 쏟아져 들어오는 서양 문물에 정신을 못 차렸던 조선 사람들처럼, 넘쳐나는 희한한 이름들에 어리버리하고 있는 내게 하나의 지도가 주어졌다. 맥주의 본고장 유럽, 그곳의 맥주들을 역사와 함께 유려한 문장과 함께 쏟아 부어주는 책 <수도원 맥주 유럽 역사를 빚다>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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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고스란히 최상의 품질로 빚어진 한 잔의 맥주다. 일단 맥주는 마시기에 앞서 거품과 색깔에 도취되는 것이니 드넓은 유럽 대륙의 동과 서를 누비며 맥주의 세계를 열어젖혀 종류별로 대령하는 이 책을 읽다 보면 금새 입에 침이 고이고 목이 바싹 마르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인내력 없는 분들은 일찌감치 좋아하는 맥주 두어 캔을 가져다 놓고 책장을 넘기기 바란다.

 

흔히들 맥주의 생명은 ‘목 넘김’이라는 말을 한다. 거기에 따르자면 이 책의 최대 장점은 ‘눈 넘김’일 것이다. 장담하거니와 이 책을 한 번 펴들면 결코 ‘꺾어 읽지’ 못하고 ‘원샷’으로 읽을 수밖에 없다. 한 치의 막힘도 없이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시원스레 꿀꺽꿀꺽 재미있게 읽히니 이렇게 ‘눈 넘김’이 부드러운 책도 드물다. 시원하다. 장쾌할 만큼 시원하다.

 

맥주를 들이키면서 우리는 맛과 향을 동시에 누린다. 코로 즐기고 혀 전체로 느낀다. 둘 중 하나가 없다면 어찌 맥주의 매력을 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 책 역시 향기롭고 맛있다. 유럽 각지의 맥주를 탐험하며 그 맛의 비밀과 마시는 요령을 소상하게 전하니 향기만으로 취기가 올라올 지경이지만, 더하여 맥주잔에 꼭 필요한 거품처럼, 저자는 맥주를 만든 사람들의 역사와 맥주 안에 담긴 내력을 얹어 읽는 사람들의 입맛을 돋운다.

 

두 번 장담하거니와 이 책을 읽다 보면 내 집 마루에서 책을 읽고 있는 것인지 프라하 까페에 앉아 필스너 한 잔을 기울이고 있는지 헷갈리게 될 것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이 책은 유럽의 맥주와 그 속에 담긴 사람들의 사연을 우리가 익히 아는 우리 주변의 사람과 역사에 연결하는 데에 매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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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례로 프랑스 중부 지역의 시토 수도회에서 출발한 트라피스트 계열 수도의 수도사들이 빚은 트라피스트 맥주를 살펴보자. 트라피스트 계열 수도원들은 프랑스 혁명과 전쟁 와중에 무참하게 파괴됐고 겨우 발을 붙인 플랑드르 지역은 양차 세계대전 와중에 혹심한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트라피스트 수도원의 수도사들은 자신들의 맥주 만들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고집스럽게 전통을 유지하려는 이들의 헌신적인 노력에 의해 폐허 속에서 새로운 희망의 싹이 돋아났고 마침내 오늘날 트라피스트는 세계적 명품으로 성장한다.

 

저자는 이 맥주 소개를 작년 슬프게 세상을 떠났던 노회찬으로부터 시작했다. 트라피스트 수도사들이 수백 년 동안 지속돼 온 악몽 같은 시련 속에서도 맥주를 포기하지 않았고 마침내 세상으로부터 인정받는 맥주를 만들었던 것처럼 아프게 꺾인 노회찬의 꿈이 이뤄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트라피스트의 사연에 실었던 것이다.

 

“급작스레 생을 마감한 그에 대한 황망함이 그를 기억하는 이들의 마음속엔 여전히, 그리고 오래도록 남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함께 꾸었던 꿈을 계속 여러 삶의 자리에서 조금씩 꾸어갔으면 한다. 계속된 어려움, 그 답 없는 상황 속에서도 자신들의 가치를 잃어버리지 않고 지켜갔던 수도사들에 의해 트라피스트 맥주가 최고 수준의 맥주로 평가받을 수 있게 되었듯 말이다.”

 

이쯤되면 마누라에게 혼나든 말든 트라피스트 맥주를 궤짝으로 주문해서 먹고 싶어지지 않는가.

 

바이에른 공국의 지배자들이 공표했던 ‘맥주 순수령’에 따르면 맥주에는 물과 보리와 홉 단 세 가지의 재료만 사용해야 한다. 이 책 또한 순수령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고 보인다. 우선 공짜로 유럽 맥주 여행을 시켜주니 이는 보리의 구수함이요, 맥주 만들어 팔아 남편의 종교 개혁을 도왔던 마틴 루터의 부인 카타리나, 맥주홀에서 폭동을 일으킨 히틀러, 체코의 민주화 투쟁의 지도자 하벨을 도왔던 체코 맥주 공장 노동조합 등등까지 ‘맥주에 대해 고상균이 알려주는 쓸모 있는 잡다한 사연’은 쌉싸름하면서도 결정적으로 맥주의 맛을 지배하는 홉일 것이다.

 

그럼 물은 무엇일까. 저자의 말을 빌어 본다.

 

“내게 맥주 한 잔이라도 사준 적이 있는 분들, 혹은 한 번이라도 나와 술 한 잔 기울인 적이 있는 분들이라면 모두 깊이 머리 숙여 전하는 감사의 인사를 받기에 충분할 것이다.”

 

바로 이 마음, 누군가와 함께 맥주잔 부딪치고, 기쁨과 슬픔을 나누며 한 잔 술을 사기도, 얻어먹기도 하며 익어가고 깊어가는 사람들과의 관계, 바로 그것이 우리 삶을 촉촉하게 만드는 ‘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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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로 장담한다. 이 책을 읽은 사람은 누구나 전화기를 들어 누군가에게 전화하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예를 들면 이렇게.

 

“뭐하냐? 맥주 한 잔 할까? 그래 그 녀석도 불러서. 내가 한 잔 살게. 심하게 맥주가 땡겨서.”

 

추가로 개인적으로 고마운 것 하나. 이 책을 읽으면서 간만에 책 읽는 재미를 회복했다. 그간의 책이 재미없었던 게 아니라 스마트폰이나 기타 영상 매체가 범람하는 요즘, 내 개인적 집중력이 와해된 상황이었는데 ‘한 번 들었다가 놓지 못하는’ 까마득한 기억을 다시 가지게 된 것이다. 그만큼 재미있다. 빈말이 아니다.

 

 

 

P.S

 

저자 고상균은 우리 교회 부목사님‘이었다.’ 과거형이다. 본인이 기분 나빠할지 좋아할지 알 수 없는데 저자 고상균은 목회자보다는 이런 책을 종종 쓰면서 더욱 공부해서 사람들의 마음의 양식, 마음의 맥주를 빚어내는 쪽이 더 바람직하다는 생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