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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섹칼럼] 영화 속의 강간

2004.9.10.금요일
딴섹칼럼












<리허설>


예전에 <리허설>이라는 한국 영화를 본 적이 있었다. 터프가이 최민수(정말이지 진부해 죽겠다) 와 모델 박영선(앙드레 김의 패션쇼 단골 모델로 한복 8겹 입고 차례로 벗어 던지기 쇼의 1인자였으나 지금은 뭘 하는지 통 보이질 않는다)이 나오는 영화인데 내용은 이러하다.


아침에 일어나자 마자 말보로를 피우며 잭다니엘을 병째로 벌컥벌컥 들이키는 마초 최민수는 연극 무대에서 박영선을 보고 첫눈에 반한다. 박영선은 오르가즘을 소재로 한 연극의 주인공인데 신음소리가 일품인 여자이다. 최민수는 마초답게 박영선에게 사귀기를 제안하는 구차한 과정을 거치지 않고 화장실에서 볼일 보는 그녀를 바로 덮친다. 일을 보다가 생각지도 못하게 당한 박영선은 처음에는 반항을 좀 했으나 이내 최민수와 하는 게 너무 좋음을 알게 되고 둘은 그때부터 서로를 탐닉하다가 결국 파국으로 치닫는다.


이 영화에서 두 남녀는 그야말로 눈만 마주치면 삐리리 해서는 서로를 안고 자빠진다. 내가 이 영화를 보면서 백 번을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하지 못하는 게 있다면 바로 강간한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다. 아무리 제정신이 아닌 여자라 하더라도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다가 남자한테 당하고 싶은 여자는 없다. 그러나 이 여자는 자신을 강간한 남자를 사랑씩이나 하게 된다. 이건 자칫하면 강간을 하던 뭘 하던 화려한 테크닉과 넘치는 힘으로 소위 홍콩만 보내주면 여자가 자기를 사랑하게 된다는 위험한 생각을 가지게 한다.


이상하게도 영화에서 강간을 당한 여성들은 하나같이 너무 멀쩡하다. 얼머전 칸에까지 갔다온 홍상수 감독의 영화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서 성현아 역시 강간을 당했으나 자기 남자친구에게 마치 나 친구들이랑 놀러 갔다 왔다 정도의 심드렁한 말투로 고백을 한 다음 남자친구와 섹스를 하면서 "나 정말 깨끗해 지는 거지?" 하고 반문한다(그 이전에 남자친구가 나와 섹스를 하면 강간을 당한 니 몸이 깨끗해진다고 말한다). 비록 미친년이라는 설정이 있기는 하지만 <꽃잎>에서의 이정현도 자신을 강간한 남자를 따라가서 지내며, <나쁜 남자>에서는 아예 강간을 가능토록 한 남자를 위해(자기가 강간한 것은 아니지만 멀쩡하던 여대생을 하루아침에 사창가에 묶어놓고 처음인 그녀가 손님에게 강제로 당하도록 한다) 기꺼이 창녀가 되기도 한다. 그러니까 영화에서 강간은 최소한 아무 일 없이 넘어가거나 아니면 강간을 당한 여성이 남성을 좋아하게 혹은 받아들이게 되어있다. 이러니 강간에 대한 판타지가 안 생기고 베기겠는가.


이래서인지 강간으로 고소를 당한 남자들이 하나같이 주장하는 것이 그녀도 좋아했었다(더욱 역겹게는 젖어 있었다 어쩌고 한다)이다. 하지만 그들의 역겨운 주장처럼 설사 몸의 반응이 그러하다 하더라도 강간은 엄연한 강간이다.


그런데 남자들을 강간한 영화들은 그렇지 않다. 영화 <슬리퍼즈>를 보면 강간을 당한 남자  아이들은 결국에는 복수를 하며 신부님도 강간한 자를 살해한 것을 눈감아 줄 정도이다. 이렇게 복수를 하는 타입이 있는가 하면 또 희대의 살인을 저지르는 잔혹한 악마가 되기도 한다(<더 셀>, <미스틱 리버>, <양들의 침묵>, <프라이멀 피어> 등의 영화를 보면 굳이 강간이 아닌 성적 학대만 받아도 남자는 충분히 살인마와 괴물이 된다). 즉 남자는 영화에서 강간을 당하면 절대로 멀쩡하지 않다. 복수를 하거나 아니면 괴물이 되어버린다. 좀 극단적으로 여자가 강간을 당하는 영화와 남자가 강간을 당하는 영화를 비교해 보자면 여자는 강간을 당해도 괜찮지만 남자가 강간을 당하면 큰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여자가 강간을 당하고 난 다음 선택하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은 삶. 아니면 창녀이다.


남자들은 가끔 강압적으로 하는 섹스가 자신을 남성답게 보이게 하리라는 착각을 하는 것 같다. 남자들은 어제도, 오늘도 싫다고 하는 여자를 덮치고 또 덮친다(배우자 사이에도 엄연히 강간이 존재하지만 내 여자 내가 데리고 하는데 왜 라는 오랜 악습은 좀처럼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과거 아동학대라는 개념이 희박했을 때 자기 자식을 개 패 듯 패면서도 내 새끼 내가 잡겠다는데 왜 라고 했던 것처럼 말이다). <리허설>처럼 쓰레기 같은 영화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여자는 은근히 남자가 강간해 주기를 바란다 라고 생각하는 인간들도 있다.







나는 영화에서 무조건 남녀가 평등하게 등장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하지만 조디 포스터가 나왔던 <피고인> 같은 영화가 강간당한 여자들이 강간한 남자를 사랑하거나 심지어 그를 위해 창녀가 되는 영화보다는 더 많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남자만 강간을 당한다고 해서 큰일이 나는 게 아니라 여자도 마찬가지다. 둘 다 인간이기 때문이다(만약 이걸 가지고 항문과 질의 차이라고 헛소리를 해댄다면 대체 질보다 항문이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그 발상은 어디서 나온 것인지 참으로 궁금하다).


얼마 전 대법원은 부부사이에도 강간이 있음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같은 여자 입장에서 무척 반가운 일이 아닌가 싶다. 결혼을 한 부부 사이에서도 여성이 원치 않으면 섹스를 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이 당연한 사실이 이제야 받아들여지는 세상. 아직도 그곳에 여전히 여자로 살고 있는 것이 나로 하여금 이런 글을 쓰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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