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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 영화로 본 전쟁이바구 <닥터 스트레인지러브>

2003.8.4.월요일
딴지 군사부


독자제위들이여, 그동안 안녕들 하셨는가? 본 우원 그동안 생업에 쫓기느라 글 안 쓴지 꽤 되었다. 뭐 살다보니 천성의 게으름이 이제 만성이 되어 골수 깊숙히 전이된 상황인지라 독자제위들께서 걍 이해해 주시라.


근데 전쟁이바구긴 전쟁이바구인데, 이게 뭐시냐고? 음...미드웨이 마지막편 어여 연재하라고 득달같이 멜질하셨던 많은 독자제위들 지금쯤 열받은 표정으로 모니터 째려보고 있을 거 같은데...미드웨이도 조만간 마무리 지을 터이니 이왕 기달린 거 쫌만 더 기둘려주시라~


대신에 요번에는 쪼끔 색다른 이바구 하나를 준비했다. 본 우원이 모처에서 연재 준비하던 거인데, 전쟁영화를 통해 전쟁을 썰하는 글되겠다. 걍 재미삼아 쓰다가, 본 우원이 보기에도 쬐끔 볼 만한 거 같기에 독자 니덜에게도 몇편 뵈줄까 통빡 굴리고 있는 중이니 열분들의 호응을 바란다.


오늘은 첫 빠따로, 유쾌한 지구 멸망극 한 편을 소개해 올리고자 한다.
 










 


제목 : Dr. Strangelove (국내 출시 제목 <닥터 스트레인지러브>)
감독 : 스탠리 큐브릭
주연 : 피터 셀러스, 조지 C 스콧, 스텔링 헤이든
제작년도 : 1964년
제작사 : 컬럼비아 픽쳐스
수상 : 특별한거 받은 기억 없음
러닝타임 : 95분


 
"영화 연출의 최고 거장, 우리는 모두 그의 영화를 모방하느라 허덕였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스탠리 큐브릭을 정의한 문장이다. 영화를 한다하는 이 치고 스탠리 큐브릭을 모르는 자 없을 것이고, 영화로 밥먹고 사는 이들이 지표로 삼는 영화감독을 꼽으라면 꼭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인물 역시 스탠리 큐브릭이다.


언제나 독창적인 영화기법과 새로운 시도로 개봉하는 작품마다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큐브릭은, 그의 전매특허인 완벽주의와 비밀주의로 무장한 채 영화의 제작에 있어서만은 전권을 다 휘둘러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요즘 케이블에서 심심하믄 틀어주는 커크 더글러스 주연의 1960년 작 <스파르타쿠스>를 감독하던 시절, 제작자이자 주연까지 맡았던 울 커크 형님의 간섭에 학을 띈 큐브릭 대형은...


"좆같아서 못 해먹겠네..."


...라는 한 마디와 함께 과감히 헐리우드를 떠나 런던 근교로 도피(?), 그의 전매특허인 비밀주의와 완벽주의로 그만의 작품세계를 창조해 나가기 시작했다는 스토리.


그렇다면 <닥터 스트레인지러브>는? 그렇다. 우리 큐브릭 형님이 런던으로 파천하신 뒤에 두 번째로 찍은 작품되시겄다. 울 큐브릭 대형은 작품을 만들어 낼 때마다 영화계에 충격과 공포(?)를 안겨 주시는 분이시기에 어떤 작품이든 다 나름의 뒷 이야기가 풍성한데 그 중에서도 본우원 감히 평하자면, 스탠리 큐브릭 대형의 작품 중 백미는 바로 이 <닥터 스트레인지러브>라고 단언할 수 있다.









<닥터 스트레인지러브> 촬영장에서의 스탠리 큐브릭


일반 독자제위들께서는 익숙한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나 <샤이닝>, 아니면 촛불 조명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베리 린든>, 혹은 좀 더 대중적(?)이라 볼 수 있는 <풀 메탈 자켓>같은 작품이 스탠리 큐브릭의 대표작이라 말씀하시겠지만, 역시 이 <닥터 스테레인지러브>만큼 스탠리 큐브릭 대형의 내공으로다가 소리 소문 없이 부지불식간에, 어떤 낌새도 채지 못하게 관객들을 스크린 안으로 끌고 들어가 그냥 영화 끝날 때까지 웃겨만 주다가 극장문 나서다 말고 허걱!! 하는 느낌을 안겨주는 작품도 없다.


그렇다. 궁극의 무인들이 보여주던 자연체의 자세...그 내공을 모자라지도 않고, 차고 넘치지도 않을 정도로 절제된 모습으로 보여준 역작 중의 역작이 바로 이 <닥터 스트레인지러브>라는 얘기다.
 


 <닥터 스트레인지러브> - 어떤 작품인가?


이 작품은 스탠리 큐브릭이 만든, 인류 미래에 관한 SF 3부작 시리즈(<시계태엽 오렌지(Clockwork Orange)>,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포함) 중 첫 작품이라는 데 의의를 둘 수 있겠는데, 이 작품을 또 단순히 SF 영화로도 한정 지울 수 없다는 게 이 작품의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반전 영화이면서 코미디 영화이고, 시사영화이면서 또한 SF 영화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를 더 놀라게 하는 것은 이 각각의 분류 모두에 충실하게 접근했다는 것일 게다.


이 영화에 대해 일반에게 알려진 것 중 가장 유명한 일화는 아마 주인공인 피터 셀레스의 1인 3역에 관한 이야기일 것이다. 잭 리퍼 장군의 음모를 분쇄하고 R작전의 취소 암호를 유추해서 인류를 멸망의 구렁텅이에서 잠시잠깐 구해낸 영국공군 장교 맨드레이크 역할과, 약간 얼빵한 대통령 머플리 역, 그리고 이 영화의 제목이 된 대통령 특별 고문인 무기 연구 개발 국장 닥터 스트레인지러브까지 세명의 역할을 멋지게 소화 해 낸 피터 셀레스의 연기력은 이 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 중 하나다.









맨드레이크(왼쪽)와 잭 리퍼(오른쪽)


원래 이 영화는 피터 조지의 <운명의 두 시간(Two Hours to Doom)>이란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작품인데,(큐브릭은 1962년 <로리타>를 찍기 전까지 "유명 소설 각색은 사양하겠다"라고 말했으나, <로리타>를 찍으면서부터 소설 원작을 들고 와 영화를 찍기 시작했다) 영화의 내용과 대충 비슷한 내용이었다.


다만 한 가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면 마지막 결말 부분인데, 큐브릭 대형은 원작이 지구의 구원으로 마무리되는 게 못내 아쉬웠던지, 지구 멸망으로 그 끝을 바꿔 버렸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나? 여기서 본 우원은 영화가 만들어졌던 1964년의 시대상황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내 봐야 할 것 같다.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와 같은 결말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기 위해서 말이다.
 


 1964년


1964년 - 케네디가 암살당했고, 비틀즈가 데뷔했으며, 베트남전 파병 결정과 함께 미국은 순수의 시대를 마감한 해였다. 하지만 이 시기가 더 중요한 것은 일련의 핵 관련 사건들이 불거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일단 2차 대전 무렵까지 거슬러 올라가 보자.


2차 세계 대전 당시 유럽전선에서 승리를 확인하고 나서 미 국방성은 태평양 전선에서 일본에게 항복을 받기 위해선 최소한 40만에서 50만의 미군 사상자를 감수해야 한다고 예상했다. 이런 병력의 피해를 감수한다 하더라도, 빠르면 1946년, 늦으면 47년이나 48년이 되어서야 일본 본토를 점령할 수 있다는 비관적인 관측이 일반적이었다.


이 상황에서 일본 본토엔 300만의 병력이 본토 옥쇄 작전으로 일전을 준비중이었다. 자, 이런 상황이라면 한번 핵을 쏴도 되지 않을까? 그러나 일본에 핵을 터뜨린 이유는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았다. 당시 트루먼 대통령은 스탈린에게 얕보이는 게 싫었고, 결정적으로 미국이 분명 소련을 압도할 수 있다는 분명한 경고를 보내고 싶었던 것이다.


핵 없이도 전쟁은 끝낼 수 있었지만, 트루먼은 전임자 루즈벨트에게 비교당하는 것이 싫었고 스탈린과 처칠같은 국제정치의 베테랑들에게 꿀리는 것도 싫었던 것이다.


그리고 결국 히로시마에 핵폭탄을 떨어뜨렸다. 21세기 지구인들 수준으로 보면 "딱총" 수준인 17킬로톤 짜리 핵폭탄을 떨어뜨렸지만, 24만 5천명의 인구를 자랑하던 히로시마의 총 인구중 11만명을 죽였고, 7만6천개의 건물 중 90%를 파괴시켜 버렸다.


명백한 힘의 과시였다. 이후 나가사키에 대한 2차 핵공격을 감행한 다음 미국은 일본에게 정중한 항복 권고를 날렸다.


"무조건 항복하지 않으면 일본을 쑥대밭으로 만들겠다."


이때 미국에 남아 있는 핵폭탄은 겨우 한발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뻥카는 멋지게 먹혔고, 일본은 미주리호 함상으로 끌려나가야했다.


자, 문제는 그 다음부터다. 1949년 9월 24일 소련이 핵무기를 개발하기 전까지, 그리고 그 이후에도 미국은 적성국가에 대해 툭하면 공공연하게 핵협박을 단행했다는 것이다.


1946년 봄, 미국은 먼저 소련에 대해 핵 위협을 보냈다. 2차 대전이 끝나고 나서도 이란땅에 뭉기적 거리며 엉덩이를 비비고 있던 소련, 원래 이란 남부 지역의 석유는 영국의 몫이었는데 소련은 여기에 군침을 흘리고 있었던 것이다. 트루먼은 당시 주미 소련대사였던 그로미코를 백악관으로 초대해 한마디 던졌다.


"48시간 안에 이란으로부터 소련군이 완전히 철수하지 않으면, 소련에 대해 핵공격을 명령하겠다."


뻥카는 또 먹혔다. 소련군은 24시간만에 이란에서 완전히 철수한 것이다.


이후 49년도에 소련이 핵무기를 개발하고 나서도 미국의 핵협박은 계속 되었다만 그때부터는 물론 소련에 대한 핵협박은 없었다. 같이 죽을 일 있겠냐?







이제 1954년이다. 베트남 정글에서 허우적거리던 프랑스군은 드디어 디엔 비엔 푸에서 아작이 나고, 미국은 프랑스를 지원하기로 결정한다. 그 지원의 내용이란 건 아주 간단한 거였다. 전술 핵폭탄 3개를 프랑스에게 제공하겠다는 거였다. 간단히 말해서 베트남에 핵을 떨어뜨리자는 것이었다.


이 의견은 국무장관 덜레스와 합참의장 렛포드 등의 지지를 얻었고, 결국 미국 정부는 프랑스 외무장관 조르쥬 비도에게 본격적인 제안을 했다. 그런데, 오히려 놀란 건 프랑스였다. 아무리 수세에 몰렸다곤 하더라도 핵을 떨어뜨리겠단 말을 하냐고....결국 프랑스는 미국의 제안을 거부하였다.


1960년대, 미국은 자신들이 베트남의 수렁에 빠졌을때에도 핵위협 카드를 꺼냈다. 1968년 테트 대공세로 위기에 몰렸을때, 그리고 1969년에서 72년 북베트남과의 종전협상을 할때도 미국은 어김없이 핵협박을 써먹었다.


지구의 제3세계 국가들이 핵무기를 어쨌든 개발해 보겠다고 난리치는 이유...어쩌면, 미국이란 나라가 보여준 핵에 대한 모순된 입장때문일 것이다. 핵확산을 억제하면서 자기네들의 지하 핵실험은 계속하고, 핵협박을 하면서 핵무장을 하려는 나라는 억누르는 이 이중적 행태에 대해서 화를 내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모습 아닌가?


각설하자. 어쨌든 미국의 호시절은 소련이 핵을 만들어내면서 끝나는 듯 했다. 미국의 핵 독점의 역사는 채 5년을 채우지 못하고 막을 내려야 했지만, 이때까지 미국 애들은 소련의 핵 위협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거나 걱정하지 않았다. 왜? 그럴 필요가 없었기에 말이다.


당시 미국은 핵무장에 대해선 소련에 비해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었기에 그들은 대량 보복전략을 그들의 군사 전략 노선으로 채택 하였다. 이게 뭐냐고? 간단히 말해서 미국이나 미국의 우방국가를 향해 공산국가 애들이 찝적거리면 지상군 파견같은 번거로운 짓은 생략하고, 바로 핵무기로 대응하자는 전략이었다.


그러나 1957년, 미국인들을 충격과 공포로 몰아가 버린 사건이 터지면서 일이 슬슬 꼬이기 시작한다. 바로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닉이 발사된 것이었다. 소련이 우주로 진출하게 됨으로써 미국은 패닉상태에 빠졌다.









Sputnic-I


인공위성을 발사할 정도의 기술력이면 대륙간 탄도탄을 만들어서 미 본토에 대한 직접 공격이 가능하다는 이야기가 성립되고, 그 이야기는 바로 미국도 안전하지 못하다는 스토리 아닌가? 결국, 57년서부터 64년까지 미국은 공포의 한가운데로 끌려가는 형상이 되어 버렸다.


소련은 스푸트닉을 날렸고, 이어서 쿠바에 핵 미사일을 배치하겠다며 설레발 치고...이 쿠바 핵 위기에 대해선 제대로 한번 살펴 볼 필요가 있는데, 아래의 내용을 참조하시라.






쿠바 핵 위기 사태 바로 알기


1962년 10월 14일, 미국의 U-2기가 쿠바에 건설 중인 소련의 미사일 기지를 촬영하면서 13일간의 인류 멸망 게임이 시작되었다. 케네디와 후르시쵸프 두 명 다 매파라기보다는 비둘기파였다. 그러나 그 두명의 공통점이라면, 역시 다른 강경파 정치인들과 군부에 둘러싸여 있었다는 점과 지금 상대방에게 밀리는 기색을 보인다면 그 자리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쿠바 미사일 위기는 미국이 일으켰다고 보는 것이 정답이다. 당시 쿠바에 배치하려던 42기의 SS-4 미사일이란 것을 가지고 전략적으로 소련이 어떤 커다란 군사적 이득을 본다거나 미국이 그렇게 큰 위협을 받는다거나 하는 상황은 만들지 못했다.


당시 미사일이나 핵공격 능력에 있어서 미국이 소련을 압도적으로 눌러버리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이 42기의 중거리 핵미사일의 배치가 미국에게 상당한 위협이 될 거라는 주장도 있었지만, 이미 ICBM과 SLBM 그리고 전략 핵폭격기란 3대 핵전력 체제가 가동 된 상황에서 전술 핵미사일의 의미는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 정답일 것이다. 만약 제3차 대전을 각오한 상황이 온다 해도 42기의 핵 미사일이란건, 그야말로 딱총수준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럼 소련은 어째서 이 42기의 핵미사일을 쿠바에 보냈던 것일까? 바로 쿠바의 보호와 "값싼 선물"이란 이미지가 강했다.


60년대, 케네디는 마피아에게 돈을 주고 카스트로를 죽이라고 사주하였고, 피그만 침공으로 개망신을 당한 바 있다. 쿠바는 가만히 앉아 있어도 미국의 공격을 받아야 했던 것이다. 이 상황에서 쿠바를 보호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어수단은 역시 핵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핵이란게 알고 보면 상당히 싼값이지만 효과는 만점인 무기였던 것이다.


쿠바 역시 그동안 미국때문에 불안에 떨던 생활을 접고, 미국 눈치를 안 봐도 되는 꽃길을 기대하며 이 미사일을 받아들였다. 경제제재에 이어진 카스트로 암살 작전, 그리고 피그만 침공 등으로 날카로워져 있던 쿠바에게 소련은 구원의 빛을 보낸 것이었다. 문제는 케네디와 후르시쵸프 두 명 다 꼴통은 아니었으며, 또한 약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했다. 누구에게? 바로 자기 옆의 매파들에게 말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미국은 핵전력면에서 소련을 압도하는 전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역시 케네디의 자제력과 후르시쵸프의 상식에 의해서 핵전쟁까지는 진행되지 않았다. 결국은 쿠바의 안전보장과 터키에서의 핵미사일 철수와 쿠바 핵미사일 기지 철거가 등가가치로 교환 되었고, 이 사건은 13일만에 종결이 났다. 명분이란걸로 따지면 분명 미국의 승리였지만, 이 쿠바 미사일 위기 덕분에 지구는 멸망의 시간을 더더욱 앞당겨야 했다.


소련은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소련이 굴복(!)한 이유가 미국보다 핵전력에서 뒤져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이후 가열차게 핵전력을 확충해 나갔고, 미국도 이를 따라가야 했다. 결정적으로 이 쿠바위기 덕분에 지구인들이 좀 힘들어졌는데, 미국 지도부는 이 쿠바 미사일 위기로 한 가지 심각한 착각을 하게 된 것이다.


바로 힘에의 의지였다. 강력한 군사력으로 밀어 부치면 어떤 문제에도 통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 최초의 실증적 사례로 이 쿠바 미사일 위기가 미국의 정치인들에게 인상 깊게 각인된 것이었다.


이 상황에서 미국은 냉전의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하나의 전략과 맞닥뜨리게 된다. 바로 MAD(Mutual Assured Destruction : 상호 확증 파괴) 전략, 일명 미친 전략이란 게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건 전략이라고 말하기에도 좀 뭐한 건데, 아주 간단한 논리되겠다. 이쪽에서 쏘면 저쪽에서도 쏜다. 결국 같이 부둥켜안고 죽는 수 밖에 없다. 말 그대로 미친(mad) 전략이었던 것이다.


결국 이런 상호 확증 파괴를 위해선 상대보다 한발이라도 더 많은 핵폭탄을 만들어야 하고, 적의 공격에서도 살아 남을 수 있게 다양한 채널의 핵무기를 보유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면서 미소 양국은 대륙간 탄도탄, 잠수함 발사 탄도탄, 대륙간 폭격기, 이 세 가지의 핵무기 체제를 유지하게 되는데, 이걸 TRIAD - 3각체제라 불렀다. 그 중에서 지구를 구한 핵무기가 바로 SLBM 바로 잠수함 발사 탄도탄이었는데, 이건 나중에 영화 <크림슨 타이드> 이야기할 때 하겠다.


어쨌든 60년대 미국애들이 소련 핵무기 공포에 벌벌 떨게 되었던 이유는 앞에서 설명한 소련의 스푸트닉 발사도 있었지만, 50년대부터 70년대까지 이어져 내려온 갭(Gap)논쟁 때문이 컸다. 이 갭 논쟁은 간단히 말해서 미국이 소련에 비해 핵전력이 뒤졌다는 공포를 일반 국민에게 확산시켜서 미국의 핵 전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논리로, 일종의 프로파갠다였다.


50년대 미국 공군은 Bomber gap 논란을 미국 사회에 불러 일으킨 바 있다. 간단히 말해서 대륙간 폭격기 전력에서 미국이 소련에게서 뒤져 있다는 공포를 확산시켰던 것이었다. 웃기는 것은 이게 새빨간 거짓말이란 거다. 당시 소련은 1955년이 되어서야 겨우 미국 본토로 날아갈 수 있는 폭격기를 개발할 수 있었는데, 반면 소련에 대해 직접 핵공격이 가능한 미국의 폭격기 숫자는 B-47이 1,600대, 그리고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의 주인공인 B-52가 50대쯤 되었고(막 생산 배치 되었던 시기였다) 이때 소련이 가지고 있던 폭격기 수는 겨우 200대가 될까말까였다. 그러나 이 속사정을 몰랐던 미국의 일반 국민들은 공포와 불안에 떨어야 했다.


60년대가 되자, 이번엔 케네디가 또다른 gab을 들고 나타났다. 대통령 후보로 나선 케네디가 선거전략 중 하나로 들고 나온 미사일 갭 논쟁은 당시 미국 사회에 또다른 공포의 확산을 불러 왔다. 당시 케네디 측의 주장은 1960년까지 미국은 불과 30개의 대륙간 탄도탄 밖에 확보하지 못할 것이지만, 소련은 1백여개의 미사일을 확보할 것이며 이 격차는 계속 늘어나 소련은 매년 5백기씩 미사일을 늘려 1964년이 되면 2천기의 대륙간 탄도탄을 배치해 미국을 위협할 것이 분명하다는 경고였다.







케네디는 이에 대비해 1천기의 대륙간 탄도탄과 6백기의 잠수함 발사 탄도탄을 확보하자는 계획을 들고 나왔고, 실제로 이를 실행에 옮겼다. 그러나 당시 소련측의 위협은 과장을 넘어서 범죄 수준으로 국민들을 협박했다는 것이 후에 드러났는데, 소련측은 1961년에 겨우 4발의 대륙간탄도탄을 확보했을 뿐이었고, 미국측의 계산대로라면 1천5백기의 대륙간 탄도탄을 확보했어야 했을 1963년에 소련측의 대륙간 탄도탄 보유량은 겨우 1백기를 보유하는데 불과 했었다.


문제는 이런 사실이 미국 정부의 철저한 정보 조작에 의해서 일반 국민들에겐 비밀로 부쳐졌고, 인류는 핵공포의 늪 속으로 서서히 빠져들어가게 되었던 것이었다. 60년대의 시대상은 바로 인류 멸망에 대한 공포의 일상화였다.


<닥터 스트레인지러브>는 바로 이런 60년대의 시대상을 고스란히 투영한 작품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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