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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 우리들의 낙원

2002-09-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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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 우리들의 낙원

2002.9.16.월요일

딴따라딴지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어느 금요일 오전, 개인적인 일로 종로 거리를 거닐다 보니 낯익은 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촌스러운 글자체로 낙/원/시/장 그 이름이 박혀 있는 건물의 후줄근한 간판은, 인근에 위치한 벅어킹의 새끈한 간판과는 상당히 대조적인 모습으로 10여년 전과 하나도 달라진 모습 없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사거리를 중심으로 볼 때 벅어킹쪽의 건물들은 그간의 증축이나 개축 등을 통해 깔끔한 모습으로 변모했는데도 말이다.


헌혈차에서는 아줌마들이 호객행위(?)를 하고, 흔한 경우는 아니지만 멀쩡하게 생긴 젊은 여자가 탑골 공원 양지밭의 할아버지들을 상대로 몸값 흥정을 하는 광경도 목격할 수도 있었으며, 담벼락에 늘어선 작명소 텐트는 밤이 깊어도 촛불하나만 의지한 채 오지도 않는 손님들을 기다리곤 했었던 10년전의 그 장소.


인근의 모든 것이 자취도 없이 그렇게 변해갔을지언정, 낙원상가와 탑골 공원만은 본 우원이 뮤지션의 꿈을 키우던 10여년전 그 자리에 그렇게 우뚝 서 있었다







 



헬로윈의 화려한 테크닉과 그때만해도 치렁치렁했던 메탈리카의 긴 머리, 신데렐라 탐 키퍼가 뱉어 내던 허스키하면서도 걸걸한 보이스 칼라는 한창 사춘기 시절 본 우원의 피끓는 감수성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음악을 듣고, 당시에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감지덕지 센세이션하기만 했던 백스테이지라는 뮤직비디오 감상실을 들락거리던 당시 또래의 메탈키드들에게 남아 있던 다음 과정은 낙원상가에서 싸구려 악기를 구입하는 것이었다. 아마도 본 우원과 같은 연배에 있고 한때 뮤지션을 꿈꾸던 서울지역 거주자라면 위의 과정들을 꼭 거쳐 가야 하는 통과의례로 알고 있었을 거다.


더 나아가, 같이 음악하던 친구녀석이 낙원상가에 일자리를 구했다면서 싱글벙글하는 얼굴로 나타나기라도 한다면, 뮤지션이 되기를 바라는 모든 이들에게서 부러움과 동경의 눈빛 공세 및 영웅대접을 피할 수 없었던 시절이기도 했다.


낙원상가 2층의 계단을 올라가면 여기저기 사방팔방에서 출몰하던 호객행위꾼(이들에게 걸리면 바가지 쓰기 딱 좋았다)들을 지나, 같이 음악하던 친구들을 바리바리 이끌고 "여긴 내가 자주가는  집이야~"라며 단골 악기점 앞에 이르면 어께가 우쭐해 지기도 했다. 간혹 운이 좋으면 엄인호나 블랙신드롬 같은 당대 걸출한 뮤지션들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었다


 


 







낙원상가에서 싸구려 악기를 하나 사고 나면 그다음은 단계는 업그레이드였다. 고딩 시절, 처음엔 2만원을 주고 빨간색 일렉기타를 사서 한 3년간 주구장창 쓰다가 친구넘에게 3만5천원에 되판 자랑스런 기억이 있다.


넥스트 스텝으루다가 본 우원은, 카이 한센과 랜디로즈가 늘 쓰던 플라잉 브이의 기타를 사고 싶었지만 가격이 만만치 않음을 알고 곧바로 알바 전선에 뛰어 들었다. 그렇게 편의점에서 코피 흘려가며 모은 돈으로 장만한 다음 악기는 크레머의 랜디로즈 커스텀 이었다.


아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요 재미가 정말 쏠쏠하다. 악기가 업그레이드 됨에 따라 낙원상가내에 많은 사람들을(대개는 기타를 좀 치는 듯 보이는 악기상 알바들) 알게 되었고, 연주해 보고 싶던 곡의 악보라도 어렵사리 구하게 되면(당시에는 삼호 출판사와 작은 출판사 서너 군데에서 밴드 스코어라는 악보 집이 나왔는데 구색이 허접하기 그지 없었다. 명동의 중구 대사관 근처에 가면 비교적 다양한 종류의 밴드 스코어와 영기타나 롤링 스톤즈 같은 외국의 잡지를 구할 수있었으나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뮤지션으로 커 간다는 착각을 온몸으로 느끼곤 하던 시절이었다.


 



낙원상가 악기점의 직원들이나 알바생들과 친해지면 평소에 꿈에서만, 상상속에서만 후리고 다녔던 악기들을 직접 만져 볼 수 있는 기회도 가질 수 있었다. 본 우원, 크레머 사러 갔다가 우습게 보고 골라 든 악기가 당시 600만원을 호가 하던 톰 앤더슨이었는데 지금도 그 감촉을 잊을 수가 없다. 무거운 깁슨이며 다루기 힘들다는 펜더나 잭슨, ESP 같은 악기는 가난한 롹커들에게 항상 꿈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하지만, 피크 하나, 기타줄 한 세트를 사도 동네 레코드 가게가 아나라 낙원상가까지 왕림해서 사줘야 뮤지션으로서의 직성이 풀린다는 정체모를 자존심까지도 당시로서는 일반적이었다.


친하게 지내던 악기상 알바생이 갑자기 사라졌다가 어느날 홀연히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사라졌던 그 직원은 치러치렁한 머리를 짧게 깎고, 대개의 경우 촌스러운 야구 모자를 쓰고 나타나 희끄무레한 담배연기 속에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에게 다음 대사로 인사를 대신하곤 했다.


"군대 가서 첫 휴가 나왔어"


당시 이 말은 뮤지션으로의 꿈은 접어버렸다는 개인적인 선언과 다름 없었다. 간혹 제대 후에도 낙원상가에서 악기를 팔면서 뮤지션의 꿈을 키우던 사람들도 있었지만 결국은 주린 배를 참지 못해 떠나가곤 했다. 본 우원이 처음 악기를 살때부터 업그레이드를 할때까지 항상 조언을 해주던 T라는 형도 그랬고, 본 우원 역시도 병역이라는 벽 앞에서는 꼼짝없이 음악이라는 꿈을 접어야 했다


 



가공이 방금 끝난 듯한 나무가구의 냄새, 조그만 아크릴로 천정에 걸려 있던 각 가게의 상호, 유리관 너머 전시 되어 있던 고가의 악기들, 여기저기서 손님을 잡고 호객행위를 펼치던 불량한 이미지의 알바생들, 각 코너마다에서 시끄럽게 울려 퍼지는 악기소리들, 이 모든게 본우원에게는 아련한 추억으로만 남아 버렸다.


가끔은 악기상 직원의 이런 너스레가 그립기도 하다.


"이건 유명 뮤지션 아무개씨가 쓰는 건데 정말 끝내 준다니까요. 이거 사시면 절대 후회 안하시고 평생동안 쓰실 수 있어요.”


뮤지션으로 조금식 커감을 느낄때마다 이넘들 말이 죄다 구라라는 걸 간파하게끔 되었지만, 유명 뮤지션 아무개라는 말만으로 속아 넘어가던 그 시절이 아련히 떠오른다.







롹을 한답시고 레드 제플린이 누군지 몰라 반문하며 콩나물 대가리만 오남용하고 있는 문 모군....


10여년전 낙원상가를 드나들며 꿈을 키우던 뮤지션 지망생들의 노력과 열정을 아주 쬐끔이라도 공감할 수 있을까?....



 
난데없는 청승에 젖어삐린 관광청 애마사관학교 교관
 슈피겔 (spiegel@ddanz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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