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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드] 너희가 SF를 아느냐
-로보트 킹 볼테면 제대로 보시라-

2002.9.16.월요일
딴지 만화살리기 우원회

요즈음 한국 만화계에선 전문적으로 SF 만화를 그리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이태행씨나 박무직씨, 김준범씨, 강경옥씨 등 90년대 SF만화 4인방이 작품 활동을 계속하고 있긴 하지만, 이들 역시 SF에 주력하고 있지는 않은 듯 하다. 그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SF 만화가 팔리지 않으니까…


하지만 70년대 말, 80년대 초만 하더라도 상황이 이렇게까지 나쁘지는 않았다. [심술천단 심똘이]로 유명한 이정문씨가 [캉타우] 등의 SF 만화를 발표하기도 했다. [칠삭동이] 등 한국고전을 만화화 하는데 능숙한 김삼 씨는 SF 감성이 물씬 녹아있는 [소년 007] 시리즈를 그렸다. 애니메이션 쪽에서는 김청기 감독이 [로보트 태권V]를 제작, 대히트를 치기도 했다.


그런데 당시 만화나 애니메이션의 대부분은 ‘거대 로봇물’에 집중되어 있었는데, 이는 두 말 할 나위도 없이 일본 애니메이션 [마징가 Z] 때문이었다.



한국 TV에서 방영한 [마징가 Z]의 대히트로 인하여 아동 만화계에서 거대 로봇물의 수요가 급증한 것이다.(주1)




  • (주 1 : 이세호라는 만화가는 독자적인 [마징가 Z], [그레이트 마징가] 만화를 그려내기도 했다.)

진지한 SF 독자 중에서는 ‘거대 로봇물’은 SF가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당시 한국 SF 만화의 호황을 평가절하할지도 모른다. 실제로 ‘거대 로봇물이 SF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은하영웅전설]이 SF냐 아니냐’ 하는 문제와 일맥상통하는 바 있다(주 2).



  • (주 2 : 이 문제는 한때 국내 SF 동호인들 사이에 상당한 논쟁거리였다. 좀 더 심도있는 고찰을 원한다면 SF 평론가 홍인기씨의 칼럼 은영전도 에스에프인감? 을 참고하기 바란다. 여기서는 SF가 게임이나 영화를 포함한 여러 매체에서 다른 쟝르와 혼합되어 복합적인 형태로 재구성되고 있으며, 이 때문에 순수한 의미에서 SF라는 쟝르를 정의하기란 매우 힘들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SF라는 쟝르의 정체성을 명확하게 정의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일각에선 “SF란 SF 작가가 쓴 것이다”라는 앞뒤가 뒤바뀐 농담 같은 이야기가 매우 진지하게 거론될 정도다. 이 말은 작가 자신이 SF라고 주장한다면 그 작품은 SF일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주 3).



  • (주 3 : 죠지 루카스는 자신의 영화 [스타 워즈]가 SF(Science Fiction)이 아닌 SF(Space Fantasy)라고 주장, SF의 정의를 작가에게만 의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말았다. Ces’t la Vie!)

좀 더 나아가 “이 세상에서 단 한사람이라도 SF라고 주장하는 작품은 SF다”라는 주장도 있으니, 이러한 의견들을 수렴한다면 ‘거대 로봇물’이란 쟝르는 SF의 하위 쟝르에 포함될 수 있는 정당성을 충분히 확보하고 있는 셈이다. 헌데 7,80년대 SF 만화계의 대표주자라면 고유성씨, 김형배씨, 박동파씨 등 80년대 SF 만화 3인방이 손가락에 꼽힌다.







김형배씨는 본인 스스로 매우 쪽팔려하는 [로보트 태권 V] 만화를 비롯하여 [황금날개 1,2,3]을 그렸으며, 밀리터리 SF의 효시라 할 수 있는 [20세기 기사단]과 [라스트 바탈리온]을 발표했다.


이후 조선 최초이자 최후의 본격적인 밀리터리 SF [고독한 레인져]를 완성, 이 분야에서 독보적인 지위에 올라섰다(밀리터리 SF를 그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다).


박동파씨는 [우주에서 온 파이 아저씨]를 시작으로 [X 30,000세] 등의 스페이스 오페라, [가나다라 특공대] 등의 슈퍼 히어로물 등을 발표했다(주 4).


그는 다른 작가들과는 달리 철저하게 미국식 화풍을 추구하는 작가였으며, 실제로 미국 만화계에 진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초기작 몇몇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수준 이하의 작품에 그쳤으며 지명도 면에서도 훨씬 떨어지는 작가였다.





  • (주 4 : [X 30,000세]는 캐릭터 설정에서 마블 코믹스의 [마이티 토르 Mighty Torr], [팬터스틱 포 Fantastic Four]를 그대로 베끼다시피 했다. 그러나 주요 설정이나 스토리 면에서는 자신만의 고유성과 독창성을 갖추고 있었다)

마지막 고유성씨는 3인방 중에서 대표 주자요, 가장 무게감 넘치는 작가라 하겠다. 1974년 [고박사의 탐정소동]으로 데뷔할 때만 하더라도 별 무게감이 없었지만, 77년의 [로보트 킹]이 대히트를 치면서 순식간에 대표적인 SF 만화가로 급부상한 것이다. 그리고 1978년에는 조선 최초의 SF 팬터지라 할 수 있는 [우주에서 온 왕자]를 발표하고, 79년에는 SF 추리만화 [우주탐정 고박사]를 발표했다(주 5).



  • (주 5 : [우주탐정 고박사]는 내용면에서 상당히 본격적인 추리물의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이 만화는 훗날 [번개기동대] 후반부에서 다시 리바이벌되었다)

그의 SF 만화가로써의 지위를 확고부동하게 만든 작품은 1981년의 [복제인간], 82년의 [우주의 늑대 혼(1부) / 혼(2부)]이었다. 전자는 냉전시대를 배경으로 한 순수한 SF 러브 스토리의 최고 걸작이요(주 6), 후자는 대하 마초(!) 스페이스 오페라의 최고 걸작이다. 그러나 [복제인간]이나 [혼] 연작은 대중적인 인기와는 거리가 멀었고, 실제로 그를 인기 작가로 만들어준 작품은 [로보트 킹]시리즈와 [번개기동대(주 7)]였다.





  • (주 6 : 80년대 후반, 고유성씨는 [복제인간]을 4권짜리 대본소용 만화로 개작해서 발표한다. 하지만 역시 원작의 작품성에는 미치지 못했다)


  • (주 7 : [번개기동대]는 80년부터 ‘어깨동무’에 연재된 SF 패로디 개그 만화였다. 이 만화는 말 그대로 최고의 인기를 누리면서 잡지가 폐간될 때까지 장기연재되었다. ‘우주해적 하록’,  ‘헬 박사’ 등 일본 SF 만화 캐릭터의 패로디는 지금 봐도 뒤집어질 정도다)

고유성씨는 90년대 들어서는 외국 SF영화나 소설의 번안 작품을 발표했으며, 현재는 자신의 홈페이지를 중심으로 [혼] 3부를 연재하는 등 꺾이지 않는 창작 의욕을 과시하고 있다. 햇수로만 따져도 25년 가까이 SF 만화를 그린 셈이니 가히 조선 SF 만화의 대부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리라.


헌데 그의 작품 중에서도 [로보트 킹]의 지명도와 인기는 초절하기 그지없다. 80년대에 이미 전 작품이 만화책으로 출판되었으며 만화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주 8), 90년대 들어서는 웹진에 연재되기도 하고 CD-ROM 작품집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여기 그치지 않고 오늘날에 와서는 아예 처음부터 새로이 복간될 예정이라 한다. 그렇다면 과연 [로보트 킹]의 쉼없는 인기는 어디서 비롯된 것이며, 오늘날의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 것일까?



  • (주 8 : 오늘날에 와선 잡지 연재 작품이 만화책으로 출판되는게 당연하겠지만, 80년대만 해도 그리 흔한 일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로보트 킹] 만화영화는 로보트 킹이 등장한다는 것 외에는 원작과의 공통점을 찾아볼 수 없는 전혀 별개의 작품이었다)

먼저 [로보트 킹]은 당대의 여타 ‘거대 로봇’ 만화와는 달리 상당히 본격적인 스페이스 오페라(주 9),라는 사실, 게다가 상당히 스케일이 크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한다.



  • 주 9 : Space Opera ?Soap Opera(드라마), Horse Opera(서부극)를 변용한 말로, ‘우주 활극’을 의미한다. 에드워드 스미스의 [렌즈맨]이나 에드먼드 해밀턴의 [캡틴 퓨쳐]가 이 쟝르의 대표작이다. 앞서 언급한 [은하영웅전설]도 여기 포함될 수 있다)

자신의 형 ‘소모사’의 우주 정복 계획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정체불명의 과학자는 몇천년 뒤에 일어날 소모사의 지구 침략을 예견, 자신의 과학력을 총동원한 ‘로보트 킹’을 제작해 지구에 보낸다. 그리고 언젠가 정의로운 지구인이 나타나 소모사의 야망을 분쇄시키길 기대한다…


비록 [렌즈맨]에 나오는 아리시안과 에도리안의 싸움(주 10)에는 미치지 못할지언정, 이전의 SF만화는 물론 오늘날의 만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만큼 스케일 큰 설정이다. 이 설정을 뒷받침이라도 하듯 로보트 킹의 파괴력 역시 상상을 초월한다. 킹의 에너지는 인공 심장에서 무한대로 공급되며 손가락 미사일을 비롯한 무기류 역시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제작된다. 이외에도 초전자 장력(손에서 발사되는 에너지파), 파괴 광선(눈에서 발사), 열광선(허리 벨트의 버클 부분에서 발사), 플라스마 광자파 발생장치(귀 부분과 어깨의 뿔이 늘어나면서 초고온의 플라스마를 발산) 등의 다양한 에너지 병기를 가지고 있다.



  • (주 10 : 우주의 평화를 지키고자 하는 아리시안은 수만년이란 세월에 걸쳐 지구인의 발전을 도모한다. 전우주를 폭력으로 물들이고자 하는 사악한 에도리안은 지구를 파멸시키기 위해 몇번에 걸친 대전쟁(1차, 2차대전 포함!)을 일으키지만, 지구인은 모든 시련을 이겨내고 아리시안의 의도대로 우주에 진출하는데 성공한다. 아리시안은 지구를 포함한 여러 행성의 선택받은 사람에게 텔레파시 장치 ‘렌즈’를 줘서 우주의 평화를 수호하는 ‘은하 패트롤’을 결성, 에도리안의 하수인 ‘보스콘’의 위협을 막으려 한다… 는 것이 [렌즈맨]의 기본 설정이다. 이렇게 엄청난 스케일과 서사적인 이야기 구조는 이후의 스페이스 오페라에 큰 영향을 미쳤다. 덧붙여 말해두는데, 일본 애니메이션 [SF신세기 렌즈맨]은 거창한 제목과는 달리 원작의 반의 반의 반의 반의 반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물건이다. 이 만화영화 하나만 가지고 원작까지 도매금으로 넘기는 우를 저질러선 안되리라)

그러나 거대 로봇의 백미는 역시 비밀무기에 있는 법. 킹의 비밀무기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반경 30광년 이내의 공간 자체를 소멸시키는 ‘파멸기계’다. 재미있는 건 이 ‘파멸기계’의 아이디어는 에드먼드 해밀턴의 [스타 킹 Star King]에서 가져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작가 자신이 ‘로보트 킹’ 시리즈의 실질적인 최종작이라 공언하는 [우주전사대] 편의 악역 ‘숄칸’은 [스타 킹]의 악역 이름을 그대로 쓰고 있다. 이쯤되면 4,50년대 미국산 B급 스페이스 오페라에 대한 거대한 오마쥬가 아닐 수 없다.




또 한가지 비밀병기는 머리의 부메랑을 날리는 ‘머리 부메랑’인데, 이것은 연작을 통틀어 단 두번밖에 사용되지 않는 희소성을 자랑한다. 마지막 비밀병기는 [우주 전사대] 편에서부터 등장하는 ‘기가톤 유도창’이다. 창이니만큼 휘두르고 찔러서 직접적인 타격을 줄 수도 있는데다, 원거리에서는 강력한 에너지를 발산해 적의 기계장치에 치명적인 손상을 주기도 한다.


로보트 킹이 활약하는 무대도 매우 다양하다. 지상에서 싸우는 것이야 기본이고 해저나 땅 밑은 물론 월면에서 싸울 때도 있고, 막판에는 은하계 저 너머로 날아가기도 하고 시간의 경계선을 넘나들기도 한다. 이 정도면 웬만한 SF에서 상상할 수 있는 영역은 다 다룬 셈이다.


두번째로 유념해 볼 점은 [로보트 킹]의 연출이다. [로보트 킹]의 각 에피소드는 잘 짜여진 스토리라인을 바탕으로 SF적인 설정과 치밀한 그림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로보트 킹은 [캉타우]나 [로보트 태권 V]등의 경쟁작이 따라올 수 없을 만큼 중량감 넘치는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등장하는 악역들 역시 조금도 뒤처짐 없다. [지저세계] 편에 등장하는 불꽃의 화신 ‘불톤’은 뜨거운 불꽃으로 모든 것을 녹여버린다.




[해저마녀] 편의 무우 신은 무시무시한 소용돌이로 모든 것을 삼켜버린다. [괴인제국]편에서는 가짜 로보트 킹이 등장해 백중세의 힘싸움을 펼치고, [우주전사대]의 카오스는 로보트 킹의 에너지를 남김없이 빨아들인다.




여기에 고유성씨 특유의 템포 빠른 전개와 호쾌한 액션, 유모어가 함께 하기에 더더욱 즐겁다. 한정된 지면에서 컷을 최대한으로 아껴 쓰면서 다양한 시점에서 거대 로봇의 움직임을 조명, 박진감 넘치는 묘사를 보여준다. 그리고 중간중간 실소를 흘리게 하는 개그를 삽입, 극의 진행을 보다 유쾌하게 한다.


그런데 로봇 만화의 중요 포인트는 역시 거대 로봇끼리의 격돌에 있으며, 주인공 로봇이 악당을 얼마나 멋지게 물리치느냐에 있다. 하지만 [로보트 킹]은 ‘정해진 필살기’로 악당을 물리치는 일본 로봇 애니메이션과는 달리, 의외의 결말을 준비하는 경우가 많다.


[우주 침입자] 편에서 로메로 인이 만들어낸 괴물은 로보트 킹의 힘으로는 어찌해 볼 수 없었지만 지구인의 텔레파시 공격에 의해 소멸해 버린다. 불톤 역시 마찬가지, 킹은 정면대결을 피해 불톤을 우주의 저편으로 날려버려야 했다. [해저마녀] 편의 무우 신은 ‘로보트 킹도 감당할 수 없다’라고 공언할 정도였지만 대지진의 여파로 어이없이 사라진다. 모든 에너지를 흡수하는 괴수 카오스는 로보트 킹이 만들어낸 막대한 에너지를 미처 다 소화하지 못하고 핵폭발을 일으킨다… 이렇게 종래의 ‘필살기’ 공식을 완전히 깨어버린 대결 구도는 엄청나게 파격적인 것이었다.




세번째로는 다양한 캐릭터와 그 인간관계를 보는 재미에 있다. [로보트 킹]에는 드넓은 시공간만큼이나 많은 등장인물이 나온다. 이 중에서도 로보트 킹의 조종사 ‘유탄’, 10만 마력의 사이보그 미소녀 ‘호연양’, 똘똘하기 그지없는 국제경찰 지부장 ‘고박사’ 등의 트리오는 시리즈 전체를 지탱하는 핵심인물이다.


유탄군은 상당한 무술실력을 갖춘데다 ‘로보트 킹’을 조종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다. 호연양은 엄청난 힘으로 소형 로봇을 격파하기도 하고 대형 로봇에 침투해 내부 설비를 파괴하는 등, 눈요기 내지는 겉치레에 불과한 여타 로봇 만화의 여성 캐릭터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고박사는 국제경찰의 조직력을 십분 활용해 유탄과 호연을 지원하는 한편 그들을 지휘하는 브레인 역할을 한다. 후반부에는 ‘지지’라는 로봇이 등장하여 약방의 감초 노릇을 하지만, 불행히도 [번개기동대]에 나오는 ‘바사기’의 카리스마(?)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런데 [로보트 태권 V]나 [캉타우], [마징가 Z] 등 당시 국내외 대부분의 로봇 만화의 주역들은, 지구를 지키겠다는 사명감 하나만으로 조종간을 움켜잡는 로봇 같은 인간에 불과했다. 이렇게 몰개성한 캐릭터는 이내 뇌리에서 잊혀져 버렸고, 시간이 흐르면서 오로지 거대 로봇의 이미지만 남게 되었다.


하지만 [로보트 킹]의 유탄, 호연양, 고박사는 살아있는 인간으로 묘사되고 있다. 울고 웃고 화내는 등 그 감정표현도 매우 솔직하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대사를 봐도 금방 확인된다.


호연 : “미… 미안해요. 용서해 줘요? 예?”
유탄 : “용서할 수 없어!”
호연 : “다… 다시는 그런 일이 없게 노력할께요.”
유탄 : “노력할 것도 없어!”




- [해저마녀] 편에서 발췌 ?


물론 오늘날에 와서 다시 보면 성격묘사가 좀 빈약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당시로서는 이 정도만으로도 대단히 새로운 시도였으며, 덕분에 ‘유탄’, ‘호연’, ‘고박사’의 캐릭터는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확실하게 살아남을 수 있었다.


유탄군과 호연양의 관계를 필두로 하는 애정 문제도 놓칠 수는 없다. 유탄과 호연의 관계는 처음에는 ‘좋은 동료’ 정도였지만, 연작이 계속되면서 미묘한 관계로 발전해 나간다. 그러니 각 에피소드마다 등장하는 여인들 때문에 별의별 일이 생기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해저마녀] 편에서는 유탄이 로레타 여왕의 딸 스잔에게 호감을 보이는 바람에 호연양의 질투를 사고, 그 때문에 온몸이 마비되는 처지에 몰리기도 한다. 그런 곤욕을 치뤘건만 스잔 양은 고박사를 사모하게 되니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이던가. [우주전사대]에서는 숄칸의 아들이지만 우주 정복에는 무관심한 ‘치통’과 이름모를 아가씨의 사랑 이야기가 잔잔하게 흐르면서 이야기의 한축을 지탱하기도 한다.


연작을 통틀어 간간히 이어지는 악역 계보 역시 볼거리다. [탄생편]에는 닥터 코크스라는 악당이 우주괴인 ‘소모사’ 의 하수인 노릇을 하는데, 그는 마지막 순간 개과천선해 소모사와 함께 자폭하는 길을 선택한다. 그런데 [해저 마녀] 편에는 닥터 코크스의 사촌 여동생 ‘구스타프 로레타’가 등장, 로보트 킹에 대한 복수를 벼른다. [우주 전사대] 편에서는 ‘소모사’의 부하였던 ‘숄칸’이 막강한 군사력으로 우주 정복에 착수하지만 [별나라 왕녀] 편에서 덧없는 종말을 맞이한다…


물론 [로보트 킹]은 완벽한 작품이 아니다. 고유성씨의 대중적인 출세작이란 사실은 분명하지만, 시리즈가 너무 장기화되면서 연속성과 작품성에 피할 수 없는 손상을 입은 경우도 있다.


처음 설정에선 로보트 킹이 하늘을 날 수 없다고 되어 있었다. 그 이유는 ‘킹은 방어용이지 공격용이 아니다’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연작이 진행되면서 어느 순간엔가 ‘킹은 지상용이 아니라 우주용이기 때문에’ 반중력장을 써서 하늘을 날 수 있다는 설정으로 바뀐다. 그리고 [우주의 침입자]나 [시간대전쟁]에서는 지나치리만큼 지구 중심적인 시각과 폭력적 논리를 앞세우는 탓에 은연중에 불쾌한 느낌이 든다. 게다가 [별나라 왕녀] 이후의 [로보트 킹] 시리즈는 작화의 퀄리티나 연출 등 종합적인 완성도 면에서 이전의 작품에 미치지 못하는 태작 수준에 그치고 있으니, 아쉽기만 하다.


하지만 그 정도는 사소한 결점일 뿐이다. 누가 뭐래도 [로보트 킹]의 가치는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SF 만화의 거장 고유성씨의 초기 대표작이자, 한국 만화사상 최고의 거대 로봇 만화라는 사실 말이다. 그런즉슨 이 만화를 보는데 있어서 감상 포인트를 미리 준비해 주는 정도는 거장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 하겠다.


가능하다면 한발 더 나아가 SF에 대한 관심을 고양시켜 신진 SF 만화가가 활약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아준다면 ? 그것이야말로 SF 만화 발전을 위해 헌신해 온 고유성씨를 비롯한 여러 만화가들에 대한 최고의 보답이 아닐까? 마음 속으로 오직 그렇게 되기만을 바랄 뿐이다.




p.s: 현재 필자가 [로보트 킹] 전질을 소장하지 못한 관계로 일부 기억에 착오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본문 중에는 잘못된 부분이 존재할 수도 있으며, 이러한 부분은 확인되는 즉시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SF만화 칼럼니스트 
DJ.HAN(djhan@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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