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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에도 희망은?-1-] 전영혁의 음악세계  

2001. 5.29 
딴따라딴지 전임 논설위원 파토

 









 


전영혁.


소시적부터 음악 좀 들었다는 사람 치고 이 이름을 모르는 넘은 없다. 


서양 대중음악이라면 차트 히트곡밖에 나오지 않던 80년대 중반의 울나라 방송에 전문 프로그램의 위상을 새로 세우며 혜성같이 등장했던 DJ 전영혁. 86년에 시작된 그의 프로그램 25시의 데이트는 당시 메탈이나 프로그레시브 록에 목말라 있던 음악팬들에게는 말 그대로 단비와 같은 것이었다.


지금처럼 어디서나 구할 수 있는 각종 쟝르의 수입 CD는 커녕, 많이 팔릴만한 음반만 극소수 선별되어 라이센스 발매되던 그 시절... 게다가 수두룩한 금지곡으로 - 퀸의 명곡 보헤미안 랩소디 조차 금지곡이었다는 거, 기억하시나 - 트랙이 텅텅 빈 편집앨범 아닌 편집앨범만을 손에 넣고 울부짖던 시절이 그때였다. 음질 조악하기 이를데 없는 600원짜리 빽판에 감지덕지하고 어쩌다 밀수된 원판을 구하면 때라도 탈세라 레코드장 구석에 고히 모셔두고 테잎에 녹음해서 듣던 15년전 그 시절 말이다.


그런 저간의 사정을 생각해보면 당시 전영혁의 25시의 데이트 같은 전문 프로그램을 공중파 라디오를 통해 시작할 수 있었다는 자체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게다가 우여곡절을 거치긴 했지만 십오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엄연히 매일 방송을 타고 있다는 사실은 더더욱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만큼 그 세월동안 그의 방송이 울나라의 진지한 음악팬들에게 미친 직간접적인 영향은 감히 추산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방대하다는 점,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본지가 특별기획 <방송에도 희망은?> 시리즈를 시작하면서 그 첫회로 그와 그의 프로그램을 다루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이를 시작으로, 본지는 적정한 라디오와 티비 프로그램을 찾아다니며 울나라 대중음악계 피폐에 큰 원인이기도 한 공중파 방송 속에서 희망과 개선의 싹을 찾아 독자제현께 소개하려 한다. 과연 제대로 다룰만한 양질의 프로그램이 얼마나 될지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가는데까지는 가 보련다.


많은 기대 바라며, 이제 그 첫 이야기에 본격적으로 들어가보자. 


참고로, 음악계의 대선배인 전영혁을 언급하며 이름 뒤에 씨자를 붙이고 싶은 개인적인 유혹에 많이 사로잡혔으나 본지의 방침상 그냥 생략할테니 열분들도 알아서 이해해 주길 바란다.





1. 전영혁은 누구인가


방금도 언급했듯이 그는 열악하기 그지 없는 울나라의 방송환경 속에서 전문 음악 프로그램을 15년이나 진행하고 있는 DJ다.


그동안 울나라를 둘러싼 대중음악 관련 여건들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최고 인기 가수가 조용필에서 서태지, 그리고 H.O.T 로 변해왔고 주된 인기 쟝르도 발라드에서 랩 댄스로 바뀌었다. 외국 대중음악, 이른바 팝송이 차지하고 있던 많은 영역이 국내 가요로 대치되기도 했다. 표절 문제가 점차 노골화되었고 립싱크라는 용어도 본격적으로 도입되었다. LP 가 사라지고 CD 로 대체되었으며 MP3가 개발되어 냅스터와 소리바다가 등장했다. 타워 레코드와 버진 메가스토어등 대형 음반 매장들이 생겨났다. 인디레이블 운동이 발흥했고, 일본음악이 개방 직전에 놓여있다. 물론, 최초의 비판적 음악정론인 딴따라딴지도 생겨났다.


이런 온갖 좋고 나쁜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그의 프로그램은 원래의 성격을 잃지 않은채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그가 여건의 변화에 굴하지 않고 이렇게 오랫동안 계속 양질의 방송을 해 낼 수 있었던 힘은 대체 무엇일까?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핵심적인 것은 그가 방송인이기에 앞서 각종 음악에 정통한 초고수 매니아라는 점일 것이다. 즉, 음악을 진정 사랑하고 음악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라는거고, 이 점이 바로 그의 내공의 정체다.








전영혁은 80년 초 황인용의 영팝스를 통해 방송에서의 지명도를 얻었다.


전영혁은 86년 자신의 프로그램을 시작하기 전부터 음악 매니아들에게는 이미 잘 알려진 사람이었다. 80년대 초 울나라의 최초이자 유일한 팝 전문 잡지인 월간팝송 의 편집장으로 일하기도 했으며, 이후 팝 컬럼니스트로 특히 음반 해설지를 통해 많은 글을 남겼기 때문이다. 


또한 25시의 데이트 이전에 가장 내용있는 팝 프로그램으로 찬사를 받았던 황인용의 영팝스 에 고정 게스트로 출연하여 새롭고 다양한 음악을 소개하기도 했었다.


이처럼 지난 20여년간 외국 대중음악이 깊이있게 소개되는 자리에는 언제나 그가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거다.


특히 그의 음반 해설지는 당시로서는 매우 참신한 스타일과 포맷으로 음악팬들의 많은 공감을 얻어냈었다. 특히 잉베이 맘스틴, 주다스 프리스트, 랜디 로즈, 게리무어 등 그가 국내에 본격적으로 소개한 유수의 뮤지션들은 그의 개성적인 해설지 문장으로 인해 더욱 멋진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기도 했다.


밤새 잉위의 축복받은 손가락을 질투했다 - 잉베이 맘스틴 1집 뒷면 해설 중


그는 죽은 것이 아니야. 무지개 너머에서 날 기다리고 있을 뿐 - 랜디   로즈 트리뷰트 라이브 앨범 속지 중


떨리는 손으로 앨범을 턴테이블에 올려놓는 순간 - 미상


스스로를 뮤지션및 음악과 동화시키는 그의 열정은 이같은 솔직한 감정 표현과 유려한 수사력을 통해  듣는 이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었고, 음악 듣기 어려웠던 시절에 많은 사람들에게 힘과 자부심을 불러넣었다. 위의 표현들은 필자가 아직까지도 외우고 있는 것을 즉흥적으로 소개한 것이라는 점... 이를 통해서도 당시 전영혁의 영향력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거다.








랜디 로즈등 많은 뮤지션들이 그를 통해 국내에 소개되고 사랑받았다.


그는 또한 면도날 기타리스트 전광석화 같은 핑거링 록 전도사 바늘같은 트윈 리드기타 등 이후 관례화 된 표현들을 앨범 해설지를 통해 만들어내고 정착시킨 인물이기도 하다.


물론 이런 표현들은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약간 과장되고 감상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 좋은 외국 음악을 찾아듣는 것이 일종의 전투와도 같았던 그 시절과 음악평론이라는 것이 전무했던 당시의 상황을 감안해 볼때 음악팬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감정적 구심점의 역할을 충분히 수행했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과 사랑이 외부의 간섭이 없는 15년에 걸친 방송 활동을 가능케 한 원동력이며, 많은 사람들이 그의 프로그램을 사랑하는 이유임은 더 설명할 필요도 없다.


 


2. 전문 프로그램으로서의 전영혁의 음악세계


현재 그는 86년 25시의 데이트를 시작했던 KBS 2FM을 통해 새벽 2시 전영혁의 음악세계를 진행하고 있다.


96년 10월 31일에 폐쇄되어 SBS로 옮겨 전영혁의 음악여행이란 이름으로 2년 반 정도 같은 성격의 프로그램을 진행한 후 99년 4월 친정이라고 할 KBS 2FM 으로 옮겨 온 것이다.


지난 15년간 그가 겪어온 발자취를 간략히 함 살펴보자.







 

1986. 4. 29               KBS 2FM 25시의 데이트로 출범 
1987. 2. 10               "한시의 데이트"로 개명 
1988. 11. 1               "FM 25시"로 개명 
1989. 1.25                1천회 특집 방송 
1990. 12.17-25           예쁜 엽서전 (동방 플라자) 
1991. 5.7                 "전영혁의 음악세계" 로 개명 
1991. 7.25                 BOOKLET VOL. 1 발행 
1991. 11.26                방송 2천회 
1991. 12.19-31           제 2회 예쁜 엽서전 (코아 뮤직 갤러리) 
1993. 4.29 방송         7주년 (2,520회) 
1993. 8                     BOOKLET VOL. 2 발행 
1994. 4.4                  2시간 연장방송(01:00-03:00) 
1994. 8.23 방송         3천회 
1994. 8.                    BOOKLET VOL. 3 발행 
1996. 4                     BOOKLET VOL. 4 발행 
1996. 10.31               KBS 마지막 방송 
1996. 11.14               SBS "FM1077" 출범 후에 "전영혁의
                              음악여행"으로 개명 
1999. 4.28 SBS          음악여행 마지막방송 
1999. 4.29 KBS 2FM   "전영혁의 음악세계" 부활                        
                               (방송시간24:00)
1999. 11.2                 02:00 개편
2001. 4.29                 방송 15주년 기념 행사 (건국대 새천년관)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간 방송 시간대가 바뀌고 길이가 바뀌고 이름이 바뀌고 심지어는 방송사가 바뀌는 등 많은 곡절이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그의 프로그램은 그 성격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 방송인 이전에 특화된 음악 전문가로서의 그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의 방송이 가진 가장 큰 특징은 PD 의 지시나 선곡에 대한 간섭이 없이, 그 스스로가 모든 진행과 선곡을 한다는거다. 그런만큼 원고도 없이 전영혁 스스로 대부분의 멘트를 즉석에서 한다. 물론 다른 프로그램들처럼 시시덕거리는 농담따먹기나 말장난 따위는 없다. 이처럼 음악에 대한 진중한 그의 접근은 분명 다른 어설픈 음악방송들과는 그 무게가 완전히 다른 것이다.








그는 자신의 역량을 무기로 전문 음악프로를 15년 이상 이끌고 있다.


특히 그는 선곡에 대해 남다른 원칙을 갖고 있다. 대중적으로 유명한 곡은 안튼다는 것이다. 다른 방송에서 다 들을 수 있고 빌보드 차트에 오르는 노래들은 틀지 않으며,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좋은 곡들을 소개하는 것이 사명이라고 여기고 있다. 


특히 주로 외국 곡을 국내에 소개하는 입장인 만큼 확실히 국산보다 좋은 음악이 아니라면 소개할 의미가 없다는 것이 그의 관점이다.


따라서 그의 선곡은 대부분 방송사에 있는 음반이 아니라 자신이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는 앨범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 자신의 안목과 취향, 관점을 통해 엄선한, 개인 돈을 주고 산 구하기 힘든 음반들을 골라 방송하는거다.








전영혁의 음악세계는 여건이 허락될때마다 부클렛을 발간하여 음악 정보 교류를 위해 노력해왔다.


그가 소장한 음반은 CD와 LP 합쳐 2만장을 상회한다. 그 대부분은 음악적으로 엄선된 희귀한 것들이고, 때 탈까봐 아끼는 수집용이 아니라 모두가 같이 듣기 위한 용도로 적극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방송에서 트는데 방해가 될까봐 특별히 아끼는 음반도 없다는 말에서 좋은 음악을 전하기 위한 그의 태도와 사명감이 어떤 것인지 명확히 알 수 있다.


이는 아무런 전문성도, 별다른 노력도 없이 대중적 인기스타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설익은 프로그램들을 진행하는 최근의 라디오 음악 프로그램 경향과는 사뭇 대비된다고 하겠다.


이같은 열성적이고도 진지한 태도가 그의 프로그램에 그대로 반영되고 있는 만큼 상업적인 요구나 청취율에 대한 압력등 각종 장애 요소에도 불구하고 계속 그 색깔을 유지하면서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진지한 음악프로의 자격을 충분히 갖춘 전영혁의 음악세계는 놀자판으로 변모해 버린 울나라 방송에서 음악적인 고집을 잃지 않는 독보적인 프로그램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라디오 음악 방송에서의 유일한 희망으로 의미지워지기에 충분하다.


 


3. 전영혁의 음악세계 12시 복원운동 


비록 오랜 세월 유지되고 있긴 하지만 방송사에서의 우선 순위에 밀려 전영혁의 프로그램은 많은 고초를 겪었다. 특히 심각했던 것이 96년 가을 십년간 방송했던 KBS 에서 프로그램을 폐지하는 바람에 SBS로 옮겨가게 되었던 일인데, 공영방송으로서의 본분을 망각한 채 유일한 전문 프로그램을 폐지해 버리는 KBS의 처사에 많은 팬들이 분노했던 사건이었다.


그러나 결국 2년 반만인 1999년 4월 29일 다시 KBS로 돌아오면서 최초로 밤 12시 방송시간을 차지하게 되는 쾌거를 이루어내게 된다. 이전까지 그의 프로그램은 언제나 모든 주요 프로그램이 끝난 후인 새벽 1시에나 방송될 수 있었던 데에 반해, 12시라는 시간은 실제적으로나 심리적으로도 직장인, 학생들이 조금만 노력하면 청취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분명 쾌거라고 말할 수 있는 경사였다.


버뜨... 아니나 다를까.


불과 6개월만에 전영혁의 음악세계 는 이전보다도 더 늦은 시간인 새벽 두시로그 편성이 미뤄지고 만다. 역시나 알량한 청취율 때문이다. 영국의 BBC 와 같은 교양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마땅할 KBS 에서 단순한 산술적인 청취율을 기준으로 십오년 장수 프로그램을 이처럼 푸대접하고 있는 것이다.


전영혁의 음악세계 는 단순히 몇명이 듣느냐는 식의 계산으로 판단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아니다. 연예인이 진행하는 오락 프로라면 그런 점이 중요하겠지만, 전영혁 프로의 경우는 그 성격상 청취자의 질과 애정의 깊이가 고려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의 프로그램을 듣는 사람들 중에는 십오년 세월을 계속 함께 해 온 청취자들이 많으므로 평균적인 연령층이 놓을 뿐더러 지적인 사람들이 많다. 그들이 음악세계를 사랑하는 마음은 여중생들이 오빠 가 진행하는 가요 프로그램을 사랑하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나름의 연륜과 깊이, 무게를 지닌 것이다.


이런 점들을 인정하지 않은 채 당장의 청취율만을 고려하여 인기없는 프로 로 음악세계를 폄하하는 발상은 기본조차 되어 있지 않은 방송사측의 무지와 무양식에 기인한 것이라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태도는 결국 자신들의 공신력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으로, 공영방송 KBS가 확보해 나가야 할 신뢰와 공익성의 방향에 역행하는 미련한 짓이다.


음악세계의 존재 의미와 무게는 전영혁의 음악세계 애청자 모임의 탄생과 활동을 통해서도 증명된다. 대부분 20대와 30대의 사회인들로 이루어진 애정차 모임은 2000년 초부터 활동을 시작하여 지금까지 매월 각 쟝르별로 십여회에 걸친 심도깊은 감상회를 개최하였고, 지난 4월 29일에는 음악세계 15주년 기념 행사를 전영혁씨를 직접 모시고 건국대 새천년관에서 개최하는 등 - 록 그룹 블랙홀 등도 참여 - 어떤 방송 프로그램 애청자 모임에서도 볼 수 없는 진지하고 열성적인 활동을 보여주고 있다.









           15주년 기념공연 티켓. 애청자들이 사비를 털어가며 개최한 행사였다.


지금껏 어떤 음악 프로그램이 이처럼 활발하게 활동하는 자발적 애청자 모임을 이끌어 낼 수 있었던가?


특히 애청자 모임은 지난 2000년 2월 27일 발족때 부터 전영혁의 음악세계 12시 복원운동 을 전개하고 있다. 그러나 1년 3개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방송국 측으로부터 가시적인 성과를 얻어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들의 12시 복원운동은 단순히 상징적인 의미만이 아니다. 대부분 사회인으로 구성된 이들이 좋아하는 프로그램을 부담없이 즐기기 위한 청취자로서의 실제적인 요구인 것이다.


다들 알다시피 늦어도 아침 일곱시면 일어나서 직장으로 향해야 하는 우리 현실을 생각해볼때 새벽 2시에 시작하는 현재의 음악셰계를 맘 편하게 매일 들을 수 있을리 만무하다. 십여년간 한 프로그램을 열성적으로 들어온 청취자들의 입장에서 방송사측에 이같은 문제의 개선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이며, 이에 대해 방송사측에도 어떤 형태의 노력이 있어야 마땅하다. 


복원운동은 현재 애청자 모임 홈페이지에서 지속적으로 진행하는 중이다.


이처럼 전영혁의 음악세계는 십오년간 계속된 울나라 전문 음악 프로그램의 기나긴 실험이자 꺼지지 않는 한밤중의 작은 희망이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다. 이런 프로그램은 반드시 계속되어야 할 뿐 아니라, 그간의 성과에 걸맞는 충분한 자리를 차지해야만 한다.





<방송에도 희망은?> 코너 그 첫회로 오늘은 전문 DJ 전영혁과 그의 방송에 대해 이야기해 보았다.


쟝르와 국적을 넘나드는 다양하고 깊이있는 선곡으로 오랜 세월 고정 청취자층을 확보하고 있는 전영혁과 그의 프로그램. 빤짝 인기스타를 디제이로 기용하여 아무런 음악적 의미도 갖지 못한 채 몇개월 사이로 단명하고 마는 지금의 싸구려 음악 프로그램들 사이에서 그 존재 가치는 더욱 빛나고 있다.


딴따라딴지는 앞으로도 전영혁의 음악세계에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임은 물론, 본 코너를 통해 라디오와 티비등 각종 프로그램에서의 음악적 가능성을 타진하고 그 의미를 되새겨 공유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그럼 담호에서 뵙자.




딴따라딴지 전임 논설위원 파토 (pato@ddanz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