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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면서

 

N번방 사태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비윤리적인 특성이 있다. 먼저 그것은 동의하지 않은 여성을 끌어들인다. 이는 취약한 여성에 대한 강압을 동반한다. 공감능력의 부재는 이런 강압을 더욱 용이하게 만든다.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타인의 고통에서 쾌락을 느끼기까지 한다면 이런 과정은 더 가혹해진다. 이런 모든 특징의 극단에는 사이코패스라는 개인이 있었다.

 

그러나 N 번방의 비윤리성이 꼭 강압과 잔혹성에서만 기인하는 것은 아니다. COPINE이라는 척도가 있다. 아동의 성적 이미지를 총 5단계의 분류하는 방식이다. 5단계는 아동에 대한 가학적인 이미지가 포함된 경우다. 이는 의심의 여지없이 비윤리적이다. 1단계는 단지 아동의 벗은 몸이나 에로틱한 포즈만을 포함한 경우다. 성관계에 대한 강압도, 잔혹한 폭력도 없다.

 

Wood는 1단계가 비록 가학성을 포함하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비인간화와 착취를 내포한다고 본다. 사실 아동 착취물의 근본 문제는 겉으로 드러난 강압성이나 잔혹성에 있는 것이 아니다. 아동을 성적 대상화하는 그 자체로 사회의 금기를 깨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런 금기는 근친상간처럼 모든 사회에 보편적이다. 법의 문제를 넘어 기본적인 인륜의 문제인 것이다. 미국에서 아동 착취물을 소지한 자는 최고 종신형이다.

 

사회에는 이러한 금기를 은밀히 위반하는 한 무리의 개인들이 있다. 이들은 선두에 나서 희생자들을 포획하는 사이코패스들의 그늘에 숨어 지낸다. 직접적인 가혹행위에 가담하지는 않지만, 이것을 멀찌감치 관람하면서 은밀한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이다. 이처럼 비정상적인 착취물로부터 성욕을 이끌어내는 사람들을 전문 용어로 성도착자 또는 변태성욕자라고 부른다. 욕망은 수요를 낳고, 수요는 착취를 낳는 법. 착취를 근절하기 위해서는 먼저 수요의 역동을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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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아성애란 무엇인가

 

DSM-5에는 ‘변태성욕장애’라는 진단 기준이 있다. 이는 크게 두 가지 범주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비정상적인 행위로부터 성적 흥분을 느끼는 경우다. 여기에는 관음장애, 노출장애, 마찰도착장애, 성적피학·가학장애가 포함된다.

 

둘째는 대상 자체가 비정상적인 경우다. 물품음란장애와 복장도착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사람이 아닌 대상’으로부터 성적 흥분을 느낀다. 그런데 그 대상이 비록 인간일지라도 ‘비정상적’이라고 여겨질 때가 있다. 성인이 아닌 아동을 대상으로 하는 경우가 그렇다.

 

소아성애장애자란 소아(일반적으로 13세 이하)를 상대로 반복적이고 강렬한 성적 흥분을 경험하는 자들을 말한다. 이들은 종종 아동을 대상으로 한 공상에 빠지거나, 또는 아동이 등장하는 외설물에 탐닉한다. 일반적인 성인이 흔히 비슷한 연령대의 성적 파트너에게 느끼는 감정을 아동들에게서 경험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몇몇 개인은 자신들의 취향이 성적 지남력(orientation_자신이 놓여 있는 상황을 올바로 인식하는 능력)의 문제에 불과하다고 변호하기도 한다. 게이나 레즈비언처럼 일반인과 성적 매력을 느끼는 대상이 다를 뿐이라는 것이다.

 

성적 취향의 문제는 결국 성적 대상의 문제와 결부된다. 동성애든 이성애든 거기에는 항상 어떤 ‘대상(object)’이 자리 잡는다. 아기가 어린 시절 엄마를 첫사랑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처럼, 우리는 일생 동안 누군가를 사랑의 대상으로 삼는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이런 것을 ‘대상-사랑’이라고 일컫는다. 그러나 Wood는 소아성애에서의 성욕이 이런 ‘대상-사랑’과 다르다고 주장한다. 그들이 성욕을 이끌어내는 메커니즘이 대상을 사랑하는 경우와 상당히 다른 경로를 밟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wood는 ‘소아성애’가 완전히 잘못된 명칭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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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아성애는 자기 사랑이다

 

흔히 자기애는 ‘대상-사랑’과 대비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대상을 사랑한다는 것은 나 아닌 타인을 사랑하는 것을 말한다. 이를 위해서는 타인의 욕구를 받아들이고 존중하는 과정이 포함된다. 그러나 자기애적인 사람들에게는 진정한 타인의 개념이 없다. 이들은 타인을 사랑할 때도 그 타인 안에서 자기 자신의 일부를 본다. 자기애적인 사람들은 흔히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자기 자신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분명 타인과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다만 그것이 정신역동의 관점에서 진정한 대상-관계를 형성하지 않을 뿐이다. 그래서 자기애적인 사람은 타인이 자기 자신과 동일하게 생각한다고 가정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타인들이 자신의 의도대로 행동하지 않을 경우 분노를 보이는 경향이 있다.

 

Glasser는 다양한 사례를 통해 소아성애자들의 대인관계가 자기애적 측면을 가진다고 지적한다. 그의 가정에 따르면 이들은 어려서부터 건강한 ‘자기(self)’를 발달시킬 기회를 박탈당했던 사람들이다(‘자기’ 개념에 대해서는 <싸이코다이나믹스 : 혐오의 메커니즘 下>참고). 많은 경우 이들에겐 학대받고 무시당했던 어린 시절이 있다. 그러다 보니 타인과의 관계를 두려워하고 타인에게 투여했던 관심과 에너지를 철수시키려는 경향을 보인다. 또한 이러한 철수와 함께 자신을 힘들게 만들었던 부모들, 그리고 수치스러운 자신의 모습에 대해 공격성을 보인다.

 

이들은 사이코패스처럼 애초에 인간에 대한 공감능력이 결여된 사람들은 아니다. 어린 시절 사랑을 갈구했지만, 그것이 충족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상당히 모순적인 태도를 보이게 된다. 한편으로는 상대와의 합일을 갈망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합일을 통해 자기 자신이 소멸되어 없어질까 봐 진정한 관계 맺기를 두려워한다. 자기가 소멸된다는 느낌은 주도권을 상실하는 느낌과 함께 강렬한 수치심을 야기한다. 타인과의 관계 맺음에서 이들이 느끼는 강렬한 소멸의 공포는 방어적인 공격성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타인과의 합일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이런 공격성을 어떻게든 해소할 필요가 있다. 누구도 공격적인 사람에게는 접근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다양한 무의식적 우회로를 통해 자신의 만족을 꾀한다. 한편으로 이들은 타자를 자기의 일부로 받아들임으로써 진정한 ‘대상-관계’를 우회한다. 타인과의 관계를 자기애적인 차원으로 흡수하는 것이다. 또 다른 한편으로 이들은 자신들의 공격성을 ‘성애화(sexualize)’한다. 성애화란, 성적인 의미가 전혀 담겨있지 않았던 본능의 측면에 성적인 뉘앙스를 덮어씌우는 일종의 무의식적 방어다. 가혹함과 잔인함을 섹슈얼한 맥락 안으로 포섭하는 경우 직접적인 노골성을 회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아성애자들이 소아와 맺는 관계 속에서는 이 모든 것이 충족되는 길이 열린다. 우선 소아는 대인관계 욕구를 만족시키기에 적당한 먹이가 된다. 길 가는 어른에게 “저를 좀 안아줄래요?”라고 말하는 것은 어렵지만 낯선 아이를 자신의 무릎에 앉히는 것은 덜 어렵기 때문이다. 소아성애자들이 소아와의 관계에서 보이는 가학·피학적인 모습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소아라는 ‘대상’과의 합일에서 오는 공격성을 성애화하여 우회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소아와 자기애적인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자기 안의 어린아이에게 성적 만족을 제공한다. 소아에게 무한한 애정과 성적 만족을 제공하면서 그 소아에게 투영된 자기 자신을 만족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런 관계를 통해 잊힌 어린 시절 속에 영원히 머무를 수 있게 됨은 물론이다. 마치 피터팬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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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사로서의 소아성애

 

이처럼 어린 시절의 자기 자신을 타인에게 투영하는 것은 투사(projection)라고 볼 수 있다. 싸이코다이나믹스 제1편은 이 투사라는 방어기제를 다룬 바 있다. 투사란 자신 안의 받아들이기 힘든 측면을 다른 타인에게 투영하거나 전가하여 마치 밖에서 기인하는 것처럼 다루는 것을 말한다. 많은 연구자들이 소아성애자들에게서 이 투사가 빈번하게 발생한다고 본다.

 

저자들은 소아성애자가 특정 아동을 선택하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다고 본다. 아동이 소아성애자의 ‘만족스럽지 않은 자기의 부분’을 가장 잘 대변할수록 적합한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소심하고 나약한 어린 시절을 겪었던 사람은 자신과 가장 비슷한 측면을 가진 아동에게 이끌림을 느끼기 쉽다. 동성이 아닌 이성의 아동을 선택할 때도 마찬가지다. 남성 소아성애자가 특정 여자 어린이를 그 대상으로 할 때는, 그가 그 어린이에게 (마치 성인 여성에게 그런 것처럼) 일종의 ‘대상-사랑’을 경험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는 그 여자아이 속에서 자신의 무시되고 억압받은 여성성의 측면을 발견함으로써 자기애적 관계를 형성한다.

 

서구사회의 남성들은 전통적으로 자신 안의 여성적 측면을 무시당하며 살아왔다. 남자란 무릇 책임감 있고 남자다워야 하며, 울어서는 안 된다는 압박을 받아온 것이다. 양육환경이 불안정한 경우 이런 측면은 더욱 심했을 가능성이 높다. Socarides는 이런 경우 아이들의 자신 안의 여성성을 ‘자기’의 개념 안에 통합시키지 못한다고 본다. 건강하지 못한 자기가 형성되고, 자기 안의 여성성은 폄하되며 수치스러운 것으로만 간주되는 것이다. 여기서 불안정한 개인은 이런 여성성을 여자아이에게 투사하고, 그 아동에 대해 가혹한 공격성을 보임과 동시에 성애화된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이런 갈등을 해소하고자 한다. Socarides는 이런 투사의 방어기제가 자기(self)를 “일시적으로 안정화”하는 기능을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Limentani와 Glasser는 이런 투사의 문제를 훨씬 더 보편적인 관점으로 이끌어간다. 이에 따르면 소아성애를 비롯한 다양한 변태성욕의 측면들은 ‘보편적이지만 불편한 진실’을 회피하기 위한 방어에서 비롯된다. 이 진실이란 ‘오이디푸스적 진실’을 말한다. <정신분석학으로 본 스타워즈 下>에서 다룬 것처럼, 우리 모두는 3-6세 경 오이디푸스기라는 시기를 경험한다. 이 시기에 아이들은 자신과 성이 다른 부모와 합일되고자 하는 욕망을 단념하고, 자신과 성이 같은 부모와 동일시하는 과제를 완수한다.

 

아동의 입장에서 오이디푸스적 갈등은 그 자체로 외상적인 경험이다. 그것이 아이로 하여금 ‘전능함의 환상’을 포기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Mahler에 따르면 태아는 초기에 이 세상이 모두 자신의 마음대로 움직인다는 환상을 가진다. 이 ‘마음대로’안에는 자신의 성적 대상을 원하는 대로 설정할 수 있다는 측면도 포함된다. 그러나 아이는 성장함에 따라 자신이 부모를 성적 대상화는 것이 금기라는 것을 배운다. 성욕의 차원에 ‘세대적 차이’가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이를 통해 아이는 성욕의 대상을 부모로부터 동년배의 사람들에게로 돌리게 된다.

 

아동성애자들은 이런 점에서 타협을 보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이 여전히 세대적 차이를 넘어 전지전능함을 지닌 아동이라고 생각하고 싶어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성인을 매혹시킬 수 있는 아동에게 자신을 투사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이를 통해 아동기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우위를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대상이 실제 아동이든 영상 속의 아동이든 마찬가지다. 소아는 성인(즉 소아성애자인 당사자)을 유혹하는데 성공함으로써 아동 섹슈얼리티의 전지전능함을 드러낸다. 그런데 이 아동의 이미지는 소아성애자 본인의 투영물이기 때문에 이는 소아성애자 그 자신의 승리이기도 하다. 진정한 나르시시즘적 승리에 도취되는 순간인 것이다.

 

나가면서

 

N번방에 가담한 사람들 모두가 소아성애자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들의 동기에서 성욕이 차지하는 분율이 조금씩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성적인 주제와 상관없이 단지 타인을 노예화하는 것에서 재미를 느꼈을 수도 있다. 또 누군가는 대상이 소아냐 성인이냐에 상관없이 착취물을 향유했을 수 있다. 반면 누군가는 배타적으로 소아가 등장하는 성착취물에서만 강렬한 흥분을 경험했을 수 있다.

 

본 글은 이 마지막 부류의 사람들을 분석해보고자 했다. 논의에 따르면 이들은 수치스러운 어린 시절과 함께 불안정한 ‘자기(self)’를 갖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들은 과거에 잊히고 무시당해온 전능한 자기의 모습을 아동에게 투사한다. 여기서 아동과의 성적인 관계는 자기애적인 만족과 승리감을 제공한다. 오이디푸스기의 해소되지 않은 갈등이 역전되고, 전능했던 과거로의 회귀와 함께 그 시기의 영속성이 보존되기에 이른다. 아동을 향한 가학·피학적인 성적 환상을 통해 무시되었던 자기의 어린 시절을 학대하고 공격함으로써 수치감을 극복할 수 있음을 물론이다.

 

여기서 질문이 따른다. 만약 프로이트의 말처럼 오이디푸스기가 보편적인 것이라면, 우리 모두 소아성애를 발달시킬 수 있는 소인을 갖고 있는 건 아닐까? 정도에 따라 누구에게나 수치스러운 자기(self)는 있기 때문이다. N번방 가담자의 대부분은 분명 극단적인 소아성애자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이들은 일상적인 사회생활을 영유하면서도, 특정한 측면에서 금기를 위반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그런 위반은 다양한 요인들로 인해 ‘촉발’되는 것처럼 보인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우리도 안전하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 다음 글에서는 정상적인 개인이 금기를 위반하는 상황으로 유도될 수 있는 메커니즘을 소개해보겠다.



REFERENCES

 

(1) Glasser M. Psychodynamic Aspects of Paedophilia. Psychoanalytic Psychotherapy 1987;3:121-135.

(2) Limentani A. Perversions: Treatable and Untreatable. Contemporary psychoanalysis 1987;23:415-437.

(3) Mahler MS. The Psychological Birth of the Human Infant: Symbiosis and Individuation. London: Hutchinson & Co;1975. 

(4) Meyer L. Paedophilia: Its Metapsychology and Place in Contemporary Culture. 43rd international Psychoanalytical Association Congress 2004;

(5) Socarides CW. Pedophilia. The Case of Jenkins. Socarides, Ch W(1988): The Preoedipal Origin and Psychoanalytic Therapy of Sexual Perversions Madison: IUP 1988;

(6) Wood H. Internet Pornography and Paedophilia. Psychoanalytic Psychotherapy 2013;27:319-338.

(7) 박용철. 미국의 아동포르노물 소지 범죄와 양형에 대한 소고. 미국헌법연구 2013;24:71-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