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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사업가처럼 보이는 주인공이 자신의 자동차 앞에서 친구와 마주친다. 둘은 반갑게 악수하고 인사말을 주고 받는다. 두 사람의 시선이 주인공의 자동차로 옮겨가고, 카메라도 따라간다. 주인공이 자동차 리모콘의 잠금버튼을 눌렀는지 쌍깜박이가 깜박인다. 화면 위로 멋들어진 카피가 흐른다. 

 

‘어떻게 지내냐는 친구의 인사에 그랜다이져로 대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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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이 가슴을 울리는 한 마디다. 나도 이제 떨쳐나서야 하지 않겠는가, 성공 비스무리한 거라도 해서 최소한 그랜다이져 한 대 뽑아타고 멋지게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하지만 저 말, 믿지 마시라. 세상에는 믿어도 되는 말이 있고 믿으면 안되는 말이 있더라. 저것은 그냥 멋진 광고카피일 뿐이다. 일찌기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문장을 세상 이치를 꿰뚫어 담은 진실인 양 염불 외우듯 하다 주책없이 스타일만 구긴 경험, 다들 한 번씩은 있지 않은가.

 

다 똑같다. 혹시 지금, 저 광고카피처럼 더욱 멋진 인생을 위해 잘 다니던 회사 ‘때려치고’ '내' 사업 시작하고자 마음 먹고 계신 분 있으시다면 도시락 싸들고 쫓아다니며 말리고 싶다. 아무리 치사하고 힘들어도 회사에 있는 편이 훨씬 더 나은 삶의 질을 보장한다. 

 

적어도 필자의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그랬다. 

 

그렇다. 필자, 회사도 다녀봤고 창업도 해봤다. 아니, 필자의 경우에는 창업을 했다기보다는 ‘창업을 당했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한 표현인 듯하다.

 

부친의 처절한 사업실패를 온몸으로 체험하며 자란 탓에 필자, ‘내 인생에 사업이란 결코 없다’고 일찌감치 다짐하고 살았더랬다. 착실히 회사를 다녔(사장님, 믿어주시라. 필자는 정말 그랬다)지만 중년에 접어든 어느 날, 덜컥 회사가 없어져버렸다. 나를 담아주던 회사가 없어진다는 것은 허전하다 못해 칼싸움 도중 갑자기 갑옷이 벗겨진 것처럼 생명에 위협이 느껴지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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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밖에 나오니 내세울 기술도, 이렇다 할 경험도 없이 나이만 실컷 먹어버린, 그야말로 세상 쓸데없는 퇴물이 된 것 같더라. 이직하기엔 너무 많고 하직하기엔 너무 어린 어정쩡한 나이가 되어 ‘생계형 창업’에 나선지 올해로 7년 차 들어선다.

 

명확한 아이템을 가지고 큰 꿈을 위해 열정과 패기로 창업한 열 명 중에 열한 명은 맥없이 스러지는 것이 창업 생태계의 기본 룰일진데, 오로지 ‘먹고 살기 위해’ 뭣도 없이 창업에 나선 필자의 지난 7년이 어땠을지는 안봐도 비디오일 터. 도대체 창업부터 해버리는 패기는 어디서 샘솟았는지, 그날의 필자를 만나면 먼지날 때까지 패주고 싶은 심정이다.

 

회사 밖은 절대 녹록한 곳이 아니었다. 신세계였다. 단적인 예로, 회사다닐 땐 당연한 것으로 느꼈던 4대보험료 조차도 가능만 하다면 피하고 싶은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매출규모나 급여 수준에 따라 납부금액이 책정되긴 하지만, 자본없이 시작한 필자에게는 매출이 있든 없든 일단 납부가 개시되는 4대보험료는 꽤 어려운 숙제였다.

 

돈을 벌려면 매출을 내야 한다. 그러려면 누군가와 거래를 해야 하는데 사업자 등록증을 가지고 있어야 계산서를 발급할 수 있다. 그런데, 사업자 등록을 하려면 사업장이 필요하다. 무자본 창업자에게는 불가능에 가까운 조건이다. (개인 사업자는 자신의 집 주소를 사업장 주소로 쓴다거나 지원사업을 통해 비즈니스 센터에 입주하는 방법이 있긴 하지만 예외의 상황이니 논외로 하자) 

 

법인사업자를 내려면 사업장 임대계약서가 꼭 필요하다. 필자는 열심히 회사를 키워 투자를 받겠다는 야무진 꿈으로 덜컥 법인사업자를 세웠다. 지분을 나눠주고 투자금을 받을 수 있다고 들었기 때문이었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하고 있는데 쓸데없는데 많은 신경을 썼다.)

 

MF펀드(마더펀드, 파더펀드) 동원해서 어찌어찌 사무실 구했다 치고, 책상사고, 의자사고, 커피머신 사고, 집기 채우는 일은 아주 쉽다. 시간과 돈만 쓰면 되니 말이다. (그래도 그거 웬만하면 하지 마시라. 돈벌면 그때 좋은 거 하시고. 안그래도 총알 모자란다.) 

 

제품이건 서비스건 어떤 가치를 통해 누군가의 불편함이나 모자람을 채워주는 것이 사업의 필승조건인 것은 두 말 하면 숨찬 이야기. 그런데 그 '가치'는 뭘로 만들 수 있을까? 자본이 있다면 다른 사람의 노동과 시간을 사서 상품이나 서비스의 형태로 가치를 만들고 적정 이윤을 더해 팔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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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무자본의 창업자가 짜낼 수 있는 건? 개인의 노동과 시간 뿐이다. 

 

하루라도 빨리 매출을 만들어 쥐꼬리만큼이라도 생활비를 가져가고 싶었지만 그게 어디 쉬운가. 솟구치는 조바심을 잠재우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브레이크 스루’를 외치며 자신을 갈아넣는 일 뿐이었다. 나야말로 최선을 다하는 좋은 가장이자 좋은 창업자라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 기간만 잘 지나면 괜찮을까? 천만에 콩떡. 시장에는 나보다 수천만배 잘하는 수많은 경쟁자가 있다. 모두 기라성 같은 ‘선배’들이다. 이미 힘 다 뺐는데, 난 그라운드에 들어섰을 뿐이었고 이제부터 살아남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뛰어야 하는 것을 깨달았다. 

 

7년을 구르면서 버텼다. 살림살이가 넉넉해져서가 아니라 손절하고 도망갈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필자의 성적표는 후하게 쳐줘도 ‘양’이나 ‘가’ 쯤 될 것 같다. 능력없는 넘이 사업한다고 깝치다 가족들이랑 팀원들 개고생만 시킨다는 비판, 수없이 받았다. 얼굴 빨개지지만 겸허히 인정한다. 

 

물론 필자보다 훨씬 젊은 나이에 창업하여 이름만 들어도 다 아는 유니콘 기업을 일구신 초능력자들도 계신다. 그분들의 이야기는 인터뷰로, 강연으로, 책으로 수없이 회자되며 창업을 꿈꾸는 이들에게 멋진 롤모델로 우뚝 서있다(열라 부럽다).

 

하다하다 이렇게 생각해보았다. 그동안 필자가 헬멧없이 맨땅에 헤딩하던 이야기도 혹시 누군가에게 미립자만큼만이라도 팁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해답을 찾아 굴러다닌 필자의 경험담이 혹시 가시밭길과 낭떠러지를 표시하는 위험지역 표시 지도가 될 수 있지는 않을까?

 

초능력자들이 성공의 롤모델이 되었으니 필자는 삽질의 타산지석이 될까 부다. 누군가에게는 위험지역을 알려주는 가이드가 되고 누군가를 위로하는 다독임이 될 수 있다면 필자, 그래도 세상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었다고 자위할 수 있을 것 같다.

 

더 많은 도전자들이 성공 혹은 실패하더라도 충분히 일어설 수 있는 따뜻한 명랑사회를 소망하며 미립자스러운 창업 가이드를 드려보고자 한다. 기필코 독립하여 나만의 그랜다이져를 찾아야겠다고 결심하신 분들이 계시다면, 요즘 같은 때 출판사 차려서 책 껴안고 불길 속에 뛰어들겠다 마음먹은 분이 계시다면, 님아. 그 걸음 잠깐 멈추고 제 이야기 먼저 듣고 가셨으면 한다.

 

아, 서론이 길었다. 본격적인 이야기, 다음편부터 기대해주시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