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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트에 있는 팩 초밥을 비롯해 스시집을 가보면, 보통 초밥 10개가 1인분으로 정해져 있다. 왜 하필 초밥 10개가 1인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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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진법을 기반으로 해서 만들어진 게 아닐까?”

“10으로 딱 떨어져서?”

 

이런저런 추측이 나올 거다(아니면, 아예 왜 초밥이 10개 1인분인지 관심이 없거나 10개인지도 몰랐던 이도 있을 거다). 분명한 건 10개 1인분은 우연의 산물도 아니고, 규칙이 관습적으로 정해진 거였다. 질문을 다시 해 보겠다.

 

“한 접시에 초밥을 2개씩 올리는 이유는 아는가?”

 

이에 대해서도 궁금증이 없을 수도 있다. 분명한 건, 여기에도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초밥 1인분이 10개로 구성된 것과 같은 이유이다.

 

초밥이 왜 이렇게 구성됐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바로 ‘전쟁’ 때문이다. 1945년 8월 일본은 항복을 하게 된다. 일왕의 옥음방송이 나가면서 4년간 끌어왔던 전쟁은(중일전쟁기간부터 계산하면 8년간) 끝이 났다.

 

문제는 전쟁이 끝났다고, 일본인이 겪어야 할 고통이 끝나지는 않았다는 거다. 가장 먼저 찾아온 건 바로 ‘식량난’이다. 종전 직후 일본에는 해외에서 돌아온 150만 명 정도의 군인과 해외 거류민들이 들어왔다. 갑자기 인구는 늘어났는데, 식량 수입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전쟁 중 일본은 조선, 태국, 대만 등지에서 부족한 식량을 조달했다. 이렇게 부족한 식량을 식민지에서 수탈했고, 파병 군인들은 현지에서 식량을 확보하는 걸 기본으로 움직였다(이 때문에 현지약탈이 빈번하게 일어났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민사작전이 진행이 안됐고 해당 지역 경제를 초토화 시키게 된다). 그런데 식민지는 사라지게 됐고, 인구는 더 늘어나게 된 거다. 이러다 보니 식량 부족 상황이 벌어진 거다.

 

식민지 독립과 함께 일본 식량사정이 나빠졌다는 건 일제 강점기 시절 조선의 식량 수출(수탈) 통계만 봐도 알 수 있다. 1912년. 그러니까 경술국치 직후 조선에서 일본으로 수출된 쌀은 전체 생산량의 4.5%였다. 그러다 1918년 일본에서 쌀 폭동이 일어난 이후 급격하게 수출이 늘어나게 된다. 이후 일제는 산미증식 계획을 세우고 국내 쌀 생산량을 늘리고, 이걸 일본에 수출하게 된다. 이런 전차로 1924년이 되면 쌀의 총 생산량 중 31.3%가 일본으로 유출됐고, 1936년이 되면 전체의 53%가 일본으로 넘어가게 된다. 1936년 기준으로 조선에서 생산된 쌀은 총 1,788만 석이었는데 일본에 유출된 양이 951만 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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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당시 일본으로의 쌀 유출의 선봉이 됐던 곳이 군산이었다. 1933년 전체 미곡 생산량의 20.5%가 군산항에서 실려 나갔다. 당시 군산 시민 1만 3천 명 중 절반이 일본인이었고, 군산에 있는 정미소 10곳은 밤낮없이 돌아갔다. 그런데 이 식민지들이 다 사라지게 된 거다. 일본은 식민지 독립 직후 곡식의 1/3이 부족하게 됐다. 곡식이 부족하면 다른 음식물이라도 풍부해야 하는데, 다른 식량들도 여의치 않았다.

 

일본인들의 주요 단백질 공급원인 어류를 본다면 곡식보다 상황이 좋다고 할 수 없었다. 1945년 어획량을 보면, 태평양 전쟁 발발 전인 1939년 어획량의 65%(2/3 수준이었다) 정도로 줄어들었다. 이는 너무도 당연한 일인데, 태평양 전쟁 말기 미 해군 항공대를 비롯해, 잠수함 부대 등등은 일본으로 들어가거나 나오는 모든 배들을 공격했다. 나무로 만든 어선들까지도 일일이 다 격침시켰다. 배도 부족하고, 어부도 부족했다(징병됐기에). 전쟁이 끝났다고 마음대로 고기잡이를 할 상황도 아니었다. 주요 길목마다 촘촘히 설치한 기뢰 때문에 함부로 움직이는 것조차 힘겨웠다.

 

원래 종전 직후엔 사회적인 혼란이 극에 달하고, 점령군은 잠시 이걸 방치는 게 관례이다(사회적 혼란이 극에 달하면, 점령군이 통치를 하겠다고 해도 혼란보다는 적군의 점령이 낫다는 판단하에 순순히 점령군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미군이 점령한 다음의 상황이다.

 

“일본이 특정 수준의 생황을 유지하는 데 우리는(연합군은) 아무런 의무도 지지 않는다.”

 

1945년 11월 연합군 최고 사령관 맥아더가 발표한 내용이다. 일본의 점령과 관리에 있어서 기본적으로 지원을 하지 않겠다는 선언인 거였다. 전후 일본 총리였던 요시다 시게루(吉田 茂)가 GHQ를 찾아가 통사정해서 공장을 돌릴 중유를 수입했던 게 당시 일본의 상황이었다. 왜 그랬던 걸까? 간단하다. 이 당시 미국은 일본을 ‘농업국가’로 만들 생각이었다.

 

(만약 한국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일본은 농업 국가로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일본의 점령과 관리에 손을 놓고 있는 맥아더. 그 사이에 일본의 쌀값은 130배나 뛰어올랐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일본 내에서 굶어 죽는 사람이 생길 정도가 됐다. 그럼에도 이걸 해결할 방법이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 상황(가장 확실한 건 식량을 대량으로 수입하는 것이지만, 이게 말처럼 쉽지 않았다). 결국 이렇게 되자 1947년 7월 당시 일본의 총리였던 가타야마 데쓰(片山 哲 : 전후 평화 헌법으로 총리가 된 최초의 총리였다)가 특단의 대책을 내놓았다. 바로 음식점 영업 제한을 골자로 한 음식 영업 긴급조치령을 내린 거다.

 

내용은 아주 간단한데, 여관과 다방, 그리고 배급 허가권을 가진 식당 외에는 음식점 영업을 할 수 없다는 거다. 즉, 요식업을 할 수 없다는 거다.

 

이 긴급조치령의 핵심은,

 

“가뜩이나 식량이 부족한데, 일반인들이 밖에 나가 외식을 하면 식량 사정이 나빠진다. 외식을 최대한 자제하게 만들자.”

 

라는 거였다.

 

자 문제는 이때부터인데, 일본인의 소울 푸드라 할 수 있는 스시가 여기에 걸린 거다. 일본에서 외식하면 으레 떠오르는 스시. 그런데 이 스시를 만들 수 없다면 당장 생업을 포기해야 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결국 여기서 하나의 타협책이 나오게 된다.

 

“우리는 요식업을 하는 게 아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는... 손님들이 가져온 쌀을 가지고 밥을 짓고, 거기에 생선을 얹어서 손님에게 건네는 거다.”

 

“... 그래서 그게 어쨌다는 거야?”

 

“이건 요식업이 아니라 손님이 가져온 쌀을 가공하는... 그래, 위탁가공업이다.”

 

눈 가리고 아웅한다고 해야 할까? 그런데 이 논리가 먹혔다. 초밥을 만드는 자영업자들의 생계도 생각해야 하고, 밖에 나가서 밥을 사 먹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욕구도 생각한 타협책이 여기서 나오게 된다.

 

“좋아. 너희들의 위탁 가공업을 허락한다. 그러나 한 사람당 가져올 수 있는 쌀은 한 홉으로 한다.”

 

쌀 한 홉이면 대략 밥 한 긋이 나오고, 이걸로 초밥을 만들면 10개 정도가 나온다. 여기서 생각해 봐야 하는 게 바로 생선이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이 당시에 물고기도 부족했다. 스시의 생명인 생선도 풍족하게 구할 수 없었던 거다. 결국 초밥 하나하나를 다른 초밥으로 만드는 호사를 부릴 수 없게 된 거다.

 

“5종류의 재료로 10개의 초밥을 완성한다.”

 

물자의 부족 때문에 한 접시에 같은 재료의 초밥 2개를 올려놓고, 이걸 다섯 접시 내놔서 10개의 초밥이 나오면 ‘위탁가공업’으로서의 초밥의 서비스가 완성이 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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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gettty image>

 

 

재료부족, 식량부족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생긴 규칙이었지만 이게 계속 이어지다 보니 하나의 관습이 되고 불문율이 됐던 거다. 초밥 한 접시엔 2개가 올라가고, 10개면 1인분이 되는 기준. 그건 전쟁이 만든 아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