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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현재 신장이 172cm인데 중학생 때의 키다. 지금은 우리나라 평균 신장이 높아져서 그다지 큰 키라고 말할 수 없지만, 필자가 중학생이었을 때 만해도 반에서 가장 큰 학생 중 한 명이었다. 한창 무술 수련에 전념하던 때인 데다 또래에 비해 체격도 좋았으니 중학생 시절 필자는 친구들 사이에서 제법 강한 편에 속했다. 

 

그 당시 필자의 꿈은 열심히 무예를 연마하여 최고의 고수가 되어 최영의(崔永宜, 1923~1994, 가라테로 세계를 제패한 무도인) 선생처럼 천하무적의 강자가 되는 것이었다. 도장에서 겨루기를 해봐도 또래 중엔 나를 당할 친구가 없어 필자의 꿈은 얼마든지 실현 가능할 것처럼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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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진가라데의 창시자 최영의 총재의 젊은 시절 모습

 

그런데 고등학생이 되면서부터 상황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필자의 체격은 그대로인데 친구들의 체격이 급격히 커진 것이다. 중학생 때만 해도 만만했던 친구들이 키가 커지고 체중이 불면서 체격이 커지자 상대하는 게 버거워지기 시작했다. 

 

무예에 있어서는 기술도 중요하지만, 체격이 받쳐주지 않으면 강자가 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대학생 때까지는 최강(最强)은 아니지만, 누구와 붙어도 쉽게 진다는 생각은 안 했었다. 아무리 강하고 큰 녀석이라 하더라도 선공(先攻)으로 먼저 눈을 공격하고, 상대가 정신을 못 차릴 때 강력한 니킥(Knee Kick)이나 팔꿈치 치기로 상대를 제압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최강이 될 수 없는 나를 깨닫다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학비를 충당하기 위해 필자가 재학 중이었던 인디애나 주립대학교(Indiana Univ.-Bloomington)의 무술클럽에서 학생들을 지도하는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다. 미국의 대학교 운동클럽은 일반인들에게 개방되어 있어서 여러 종류의 무술을 수련하는 무술인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 중엔 키가 거의 2m에, 체중이 100kg이 훨씬 넘는 사람들이 여러 명 있었다. 그들의 상완근(上腕筋, 어깨부터 팔꿈치까지의 부분)은 필자의 허벅지보다도 두꺼웠고, 팔의 길이는 필자의 다리만큼 길었다. 그런 친구들을 보고 있자면 싸워서 이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은커녕 한번 붙어봐야겠다는 엄두조차도 나질 않았다.  

 

미국에서 여러 문파의 무술인들과 수련을 마치고-앞줄 가운데 한복을 입고 있는 필자.jpg

▲미국 유학 시절, 여러 문파의 무술인들과 수련을 마치고 찍은 사진. 앞줄 가운데 한복을 입고 있는 필자의 모습이다.

 

동양 무예를 배우면서 예의범절도 잘 배운 그들은 필자를 마스터(Master)라고 부르며 깍듯이 대했다, 하지만 솔직한 마음으로 필자는 그들과 싸운다면 이길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같이 운동을 하면서 그들의 엄청난 위력에 두려움을 느낄 때도 여러 번 있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열심히 수련하면 누구나가 무예의 고수가 되고, 최강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현실은 너무 달랐고 조그마한 체격에 타고난 근력이 뛰어나지도 않은 필자는 기본적으로 체격 조건과 능력이 뒷받침해주지 않으면 결코 최강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기 시작했다. 

 

결국, 무예를 직업으로 하는 것은 나와 맞지 않는다는 생각에 무술인의 꿈을 완전히 접어버렸다. 

 

그런데 미국에서 대학원을 마치고 귀국 후 택견을 계속 계승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필자의 미국 유학 시절 작고하신 택견의 마지막 전승자, 송덕기(宋德基, 1893~1987)옹의 제자로서 그분의 택견을 계승해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이었다. 어찌어찌해서 택견을 계승할 수밖에 없었던 사연은 나중에 다시 말할 기회가 있을 것이라 본다.   

 

어찌 택견전수관의 관장이 되어 폼을 잡고 앉았지만, 최고가 될 수 없다는 중압감이 나를 짓눌렀다. 현대에는 그럴 일이 없겠지만 속칭 ‘도장깨기’를 한다면 무참하게 무너지는 관장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기분이 들어 한 편으로 늘 찜찜한 기분이었다.  

 

 

박 노사와의 만남, 깨달음을 얻다

 

필자가 30대 후반이었던 어느 날, 태권도계의 큰 어른이신 박철희 노사(朴哲熙 老師, 1933~2016)를 만나게 되었다. 박 노사는 태권도협회 창설의 주요 멤버이기도 했지만, 필자의 택견 스승이셨던 송덕기 옹의 공식적인 첫 번째 제자였던 인연으로 필자의 택견 전수관에 일주일에 서너 번은 방문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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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의 연세에도 필자에게 태권도를 지도해 주었던 박철희 노사

 

박 노사께서는 방문하실 때마다 초창기 태권도의 설립과정에서부터 송덕기 스승님과 있었던 에피소드 등 무예와 관련된 많은 말씀을 해주셨다. 하루는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중에 아무리 수련해도 최고가 될 수 없는 필자의 답답한 속내를 말씀드렸다. 그러자 박 노사께서는 웃으며 대답해주셨다. 

 

“원래 무도(武道)에 최고라는 것은 없어. 누가 어떻게 무엇을 기준으로 최고라고 단언할 수 있겠나?! 혹 최고라는 것이 있더라도 그건 찰나의 순간이고 허상일 뿐이지. 무도인이 무도를 수련하는 것은 최고가 되기 위해서 수련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능력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수련하는 거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어려웠다. 필자가 다시 여쭈었다. 

 

“자신의 극대화라니요?”

 

박 노사께서 다시 친절히 설명해 주셨다. 

 

“수련하지 않은 자네보다 지금의 자네는 훨씬 강해진 것이 중요해. 보잘 것 없을 수도 있는 자신을 끊임없는 수련을 통해 보다 강한 사람으로 만드는 과정이 무도 수련이야. 그래서 무도는 궁극적으로 최고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능력의 최대화를 지향해야 하는 것이지!” 

 

최고가 아닌 최대! 순간 필자의 머릿속이 환하게 밝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최고가 아니더라도 자신을 최대화할 수 있으면 된다는 말씀은 최고가 될 수 없다는 콤플렉스에 빠져있던 필자에게 어둠 속에 빛과 같은 가르침이었다. 그런 가르침을 들은 후 필자는 무예 수련이 훨씬 더 즐거워지고 무예를 지도하는 것이 행복해지기 시작했다. 

 

그렇다! 수영을 한다고 다 박태환이 될 수 없고, 피겨스케이팅을 탄다고 다 김연아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듯이 무예를 수련하다고 다 최고수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1등만 기억되는 비정한 현실이지만, 최고만이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타고난 자신의 바탕에서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끌어올리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에서 자신의 참된 가치를 찾아야 한다. 

 

필자는 50년 가까이 무예 수련을 해왔지만, 과거에도 지금도, 그리고 미래에도 최고수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그래도 실망하지 않을 수 있는 건, 지금, 이 순간도 필자의 무력(武力)을 최대한 끌어올리기 위해 열심히 수련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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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에도 꾸준히 수련하고 있는 필자의 모습이다.

 

훗날, 최고라는 말은 듣지 못하겠지만 열심히 수련한 결과로 자신의 능력을 극대화한 좋은 모습을 보인 무예가로 기억되고 싶다. 

 

 

다음 편 예고 : 전통무예가 깨지는 이유

 

요즘 들어 전통무예인들이 현대의 격투가들에게 계속 허물어지고 있다. 도대체 왜 그런 결과가 나오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