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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전후의 혼란 속에서 야쿠자는 해방국민들의 폭력에서 사회를 수호하는 방패가 되기도 하고, 그들과 연대하는 집단이 되기도 했다. 일본 사회의 구조 내지는 모순을 비치는 거울 같은 존재였다. 그러한 야쿠자의 모습은 암시장을 무대로 한 제삼국인과의 투쟁에서 자주 볼 수 있었다. 재일조선인들에 의한 민족학교 수호 싸움에서의 야쿠자의 움직임도 그랬다. 거기서도 야쿠자는 조선인을 억압하는 최전선이자 동시에 보호자였다. 

 

한편 그 혼란 속에서 훗날 전국 조직으로 성장하는 3대 째 야마구치구미가 출범한다. 새 쿠미쵸(두목)로 취임한, 희대의 대(大)오야붕 타오카 카즈오. 그는 쇠퇴한 조직을 되세우기 위해 어떠한 방향을 잡았을까. 

 

 

1. 한신교육투쟁(阪神教育闘争)

 

제삼국인. 그것은 교전국인도 일본인도 아닌 "구 일본 통치∙점령 지역 출신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2차대전 후 그들은 일본 제국주의에 지배당한 원망을 발산시키듯, 거기서 벗어난 기쁨을 폭발시키듯, 온갖 폭력을 행사하며 약탈을 일삼았다. 주된 무대는 암시장으로, 대만성민(대만 출신자)이나 조선인 무장 집단과 야쿠자가 격렬한 충돌을 거듭했었다.

 

그 싸움 속에서 제삼국인과 야쿠자는 뒤섞여 갔다. 세상의 변두리를 살아가는 자들의 연대감에 가까운 심정인지, 고픈 배를 불리기 위한 생계형 연대인지,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 어쨌든 그들은 때로 싸우고 때로 손을 잡는 기묘한 연대를 이어갔다. 

 

그런 관계를 첨예하게 보여주는 사건이 바로 한신교육투쟁(阪神教育闘争)이다. 일명 '조선인학교 사건'이라고도 불리는 이 사건의 발단은 연합군 최고사령부(GHQ) 더글러스 맥아더가 일본 정부에 "조선인학교를 폐쇄하"도록 지령을 내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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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학교'란 2차대전 직후 재일조선인연맹(조련)을 중심으로 시작한 "국어강습소"가 일본 거주 조선인의 자녀를 대상으로 민족교육을 실시하는 학교로 발전한 것을 가리킨다(오늘날의 각급 조선학교).

 

맥아더는 "재일조선인에게 일본의 교육기본법, 학교교육법을 따르게 하도록" 일본 정부에 명했고, 일본 문부성은 각 지자체에 조선인학교를 폐쇄시키도록 "통달"한다. 통달은 법률상 강제력은 부여되지 않지만, 지자체가 거부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일본 정부에 의한 조선학교 폐쇄 방침을 알게 된 조련이 반대를 표명했으나 지자체가 그걸 들어줄 리 없다. 

 

전국에서 조선인학교 폐쇄 방침에 대한 반대 목소리가 커졌는데, 특히 재일조선인이 많이 거주하던 오사카와 효고에서 반대하는 움직임이 활발하였다. 그러던 4월 23일, 오사카에서 사건이 일어났다. 당초 폐쇄를 반대하는 재일조선인 대표와 오사카부 지사가 교섭의 자리에 앉았으나 결렬. 그러자 재일조선인과 일본공산당원이 오사카부 청사를 점거하러 돌입한다.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서 청사 안에 배치되었던 방위대의 주력은 당연히 야쿠자였다. 조선인 1명이 사망, 20명이 부상당했고 검거자는 무려 179명에 달했다.

 

익일에는 코베에서 사건이 벌어졌다. 조선인학교 폐쇄에 반대하는 군중 수천 명이 효고현 청사를 포위하는 한편 조선인 부대가 지사실을 향해 돌입하였다. 지사를 비롯 검찰관, 경찰관, 헌병대 대원(MP)까지 감금해버렸다. 결국 조선인학교 폐쇄 방침은 철회되었고 사태는 일단락되었다. 

 

일련의 혼란 속에서 청사에 근무하는 직원들 신변을 지킨 것은 야쿠자였다. 야쿠자가 조선인에 의한 공격에서 직원들을 보호할 수 있었던 데에는 그들이 평소부터 폭력을 행사하는 "폭력의 프로"임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인원수를 생각하면 물리적 힘만으로는 야쿠자가 청사 직원들을 지킬 수 없다.

 

그럼 어떻게 지킬 수 있었는가? 단순하다. 조선인들은 공격대상에서 야쿠자를 제외했던 것이다. 확실한 이유는 모르겠다. 조선인 집단의 리더격 인사가 야쿠자와 인연이 있었는지, 구체적 인연은 없어도 야쿠자의 형편을 알고 있어 일종의 동정심이 작용했는지. 어쨌든 야쿠자는 소란스러운 상황에서도 자유로이 청사를 드나들고 있었는데, 일부 경찰관은 아는 야쿠자한테 조직을 나타내는 배지를 빌려 탈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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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말이다. 24일 밤 11시. 점령군인 효고현 군정부가 효고현 전체를 대상으로 비상사태선언을 했고, 경찰은 미군 헌병대(MP)의 지휘 하에 놓여졌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미군과 일본 경찰에 의한 대대적 조선인 검거 작전이 시작됐다. 나흘동안 이어진 이 작전에서 무려 7,295명의 조선인이 검거되었다고 한다. 말 그대로 "조선인 사냥"의 양상. 흥미롭게도 이때 일부 조선인을 야쿠자가 숨겨주고 도망치게 해주었다. 물론 그 중에 야마구치구미도 있었다. 

 

원래 어느 정도 규모가 큰 재일조선인 단체로서는 2차대전 직후에 조직된 재일조선인연맹이 있었을 뿐이었는데, 얼마 안 돼서 재일본조선거류민단(현재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이 분리, 이후 대립적인 관계에 있어 왔다.

 

그런데 야쿠자 조직이라는 변수가 가해지면 그리 단순한 대립구도를 그릴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즉 한 야쿠자 조직에 조련 소속 조선인과 민단 소속 조선인(후일의 한국인)이 소속한다는 현상은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많은 독자 분들이 알고 있겠지만 민단 소속 한국인이 자녀를 조선학교로 보내는 사례도 종종 있었다). 바다를 건너야지 와닿는 남북 대립의 현실보다는 내가 당장 놓여 있는 환경을 우선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면이 있는 것인지, 한반도 내부의 지지 대상을 달리하는 조선인들이 한 야쿠자 조직에 동거하는 것은 일도 불가사이한 현상이 아니다. 

 

 

2. 야마구치구미 3대째 승계

 

그 무렵, 즉 제삼국인과 야쿠자가 암시장을 무대로 서로 싸우던 때, 야마구치구미가 새로운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한다. 2대째 쿠미쵸 야마구치 노보루가 카고토라구미 조직원한테 암살당한 뒤 야마구치구미는 새 쿠미쵸를 선출하지 못한 채 샤테이가시라(舎弟頭, 여러 꼬붕 중 필두)인 모리카와 모리노스케(森川盛之介)를 중심으로 집단지도 체제를 취하고 있었다.

 

전시 체제 하에서는 거의 모든 야쿠자 조직이 제대로 조직을 꾸릴 수 없는 지경이었는데 야마구치구미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야마구치구미는 어려운 시대를 살아남게 해 줄 새로운 리더를 절실히 필요로 했다.

 

그러던 1946년, 여러 설이 있으나 아마 초여름의 일이다. 야마구치구미 지도부가 한 젊은이를 지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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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오카 카즈오(田岡一雄).

 

1937년 2월, 원수를 갚기 위해 야마구치구미 사무소를 습격해 온 오오나가(일설에는 다이쵸) 하치로(大長八郎)를 일본도로 일도양단, 살인죄로 복역했다. 1943년 출소(그간 경위는 지난 기사 참조(링크)). 당시 코베 시내 미나토가와 공원(湊川公園) 근처에 야마구치구미 내부 조직인 타오카구미를 운영하고 있었다.

 

야마구치구미 지도부는 몇 년 동안 공석이었던 쿠미쵸 자리에 타오카 카즈오를 앉혔고, 또 오오나가 형제와의 대결로 타오카 카즈오와 같이 행동했던 야마다 히사이치(山田久一)를 조직 내 넘버투인 와카가시라(若頭)로 뽑았다. 

 

갑작스런 3대째 쿠미쵸 선출, 그것도 야마구치구미 내부에서 지위가 높지 않았던 타오카 카즈오. 이유는 분명치 않으나 우선 타오카구미가 제삼국인과의 투쟁에서 맹활약을 하며 두각을 나타내고 있던 점, 야마다 히사이치가 동시에 와카가시라로 뽑힌 점을 미루어 보면 수뇌부가 싸움을 지휘하여 수행하는 능력을 높이 산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당시 야마구치구미의 조직원수는 (다른 야쿠자 조직도 그랬듯이) 20명 안팎. 2차대전 전부터 야마구치구미에 소속하던 이들에다가 전후 제삼국인과의 투쟁을 계기로 합류한 몇 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오늘날 기준으로 따지면 조그마한 동네 조직 정도의 규모. 야마구치구미 수뇌부가 조직 운영력이나 통솔력보다 전투력 위주로 3대째 체제를 구상한 것도 이유가 있다 할 수 있겠다. 

 

그런데 훗날 야마구치구미의 성장을 상기하면 3대째 선출 시 수뇌부의 판단이 단순한 행운이었다고 넘어갈 수 없을 정도다. 타오카 카즈오는 괄목할 만한 통솔력과 선견성을 발휘하게 될 것은 이미 우리가 아는 바이니 말이다.

 

 

3. 타오카 카즈오가 내세운 새로운 방침 ~생업을 가져라~

 

새로 야마구치구미 쿠미쵸로 취임하게 된 타오카 카즈오는 조직을 운영함에 있어 세 가지 방침을 내세웠다. 

 

첫째, 조직원 각자가 생업을 가질 것. 합법적인 직업을 가짐으로써 먹고 살 길을 챙기란 말이다.

둘째, 신상필벌(信賞必罰, 공로가 있는 자에게는 반드시 상을 주고, 죄가 있는 자에게는 반드시 벌을 준다)을 단결의 바탕으로 할 것.

셋째, 타오카 본인이 쇼와(昭和, 당시 일본의 연호)의 반즈이인 쵸베에(幡随院長兵衛)가 될 것(반즈이인 쵸베에는 에도시대 전반기 서민으로 일본 협객의 원조로 종종 언급된다. 생업을 가지고, 의리와 정을 소중히 여기며 항상 서민 측에 선 인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조직원 각자가 일반인과 비슷하게 "생업"을 갖도록 한다는 방침은 당시 야쿠자 조직의 오야붕으로서 상당히 생소하고 기이한 것이다. 타오카 카즈오가 애초부터 도박꾼임을 특별시하거나 고집하는 편이 아니었으나 쿠미쵸 자리를 이어받자 "생선팔이라도 좋고, 다방이나 막과자집을 해도 좋다"고 권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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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일을 하는 이에게는 운이 스스로 따라오는 건가. 전쟁과 전후 혼란 속에서 침체되었던 각종 노름(갬블)이 되살아났다. 경마는 20세기 초부터 마권 판매를 수반하는 경마가 개최되었으나 2차대전으로 일시중단되었다 전쟁이 끝나자 바로 암경마, 진주군경마가 시작되었다.

 

1946년 가을에 일본경마회가 주최하는 경마가 시작되었는데 점령군에 의해 독점금지법을 어길 우려가 있다는 지적을 받아 중지되었다가, 1948년 9월에 농림수산성("성"은 한국의 "부"에 상응) 관리 하에 국영경마로 부활했다. 이와 함께 지방에서는 지방경마가 실시되었다. 효고(兵庫)현에는 국영경마장으로 한신(阪神)경마장이, 지방경마장으로 히메지(姫路)경마장이 생겼다. 

 

또 하나 인기였던 노름에 경륜이 있었다. 자전거로 경쟁하는 경기 자체는 19세기 말부터 있어 왔으나 차권도 판매하는 방식은 경마와 비슷한 시기인 1948년 8월부터 시작되었다. 효고에서는 코베(神戸), 코시엔(甲子園), 아카시(明石)에 경륜장이 개설되었다. 

 

경마나 경륜을 비롯한 노름이 대대적으로 부활했다고 해도 운영주체는 중앙정부나 지자체다. 야쿠자가 끼어들 여지가 어디 있나 하겠지만, 주체가 공공기관이라는 점에서 야쿠자가 올라탈 틈이 생긴다. 즉 경마든 경륜이든 그 운영자는 국가 혹은 지자체이고, 시설 직원은 그때까지 사무직 공무원을 하던 이들이다. 그들에게 노름판에서 일어나는 싸움을 처리하거나 경기 주최자에 시비를 걸어오는 이들을 억누르는 일은 어렵다. 

 

야쿠자가 이러한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칠 리 없다. 공공기관 입장에서도 "더러운 일"을 기꺼이 맡아주는 존재는 고맙기만 했을지도 모르겠다. 야마구치구미는 코베를 본거지로 하는 오시마구미(大島組), 혼다카이(本田会) 등 다른 조직과 함께 전쟁 후 본격적으로 가동하기 시작된 경마장이나 경륜장에 경비원으로 조직원을 파견한다. 예를 들어 코베경륜장에는 여섯 조직으로부터 모두 50명 정도가 파견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야쿠자는 경마장, 경륜장 등에 설치된 매점을 운영하거나 손님을 수송하는 일을 맡는 등 각종 이권을 쥔다. 새로 생긴 공공 노름판은 야쿠자에 있어서 새로운 수익원을 제공해주는 신천지이기도 하였다. 

 

 

4. 타오카 카즈오의 결단

 

그렇지만 말이다. 전쟁 후 혼란기에 있어 사회 상황이 불안정한 가운데 새로 생긴 수입원은 당장 증식하고 있는 야쿠자를 흡수하기에 역부족이었다.

 

전쟁 직후 시점 코베에는 나카야마구미(中山組), 오시마구미(大島組), 혼다카이(本多会), 고시마구미(五島組) 그리고 야마구치구미(山口組) 등이 있었고, 조직원 총수가 400명 정도였다. 그러던 것이 1947년, 효고현 전체에 75개 단체, 2,000명 가량의 야쿠자가 생긴다. 이들 대부분이 코베에 있었다. 새로운 일자리가 생기기는 했으나 그를 상회하는 야쿠자가 탄생하면서 과당경쟁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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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리를 둘러싼 야쿠자 조직 간의 싸움이 빈번해진다. 야마구치구미도 1949년 10월에 니시우미구미(西海組)와 치열한 나와바리 투쟁을 벌이는데 이때 경험이 3대째 쿠미쵸 타오카 카즈오로 하여금 결단을 하게 만든다.

 

코베라는 좁은 땅에서 한정된 테라센(寺銭, 노름판 자릿세)과 요진보(用心棒, 경호원) 값을 빼앗고 빼앗겨 봤자 발전을 기할 수 없다. 꼬붕들 개인에게 생업을 가지라고만 하지 말고 야마구치구미라는 조직 차원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없는 것인가. 

 

고민 끝에 그가 내린 결단은 어떻게 보면 “초대 야마구치구미로의 회귀”였다. 즉 타오카 카즈오는 초대 쿠미쵸 야마구치 하루키치가 심혈을 기울이던 두 가지 사업, 항만하역업 그리고 연예・흥행업을 피폐한 조직을 되세우는 “조직의 생업”으로 키우려고 마음을 먹은 것이다. 

 

다만 전쟁과 패전 후 미군에 의한 점령정책이 두 업계를 깡그리 변질시켜놓았다. '회귀'라는 표현이 어색할 정도 달라진 항만하역업과 연예・흥행업은 쿠미쵸 타오카 카즈오가 처음 직면하는 시험대가 된다.

 

 

 

【야쿠자 용어의 기초지식(9)~와카가시라(若頭)】

 

야쿠자 관련 이야기를 접하다 보면 '와카가시라(若頭)'라는 말이 종종 나오죠. 와카슈가시라(若衆頭), 와카모노가시라(若者頭) 등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와카슈/와카모노(젊은이들) 중 카시라(두목)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와카슈나 와카모노는 꼬붕을 뜻하므로 결국 와카가시라는 '여럿이 있는 꼬붕 중 필두'를 가리키는 것이죠. 때문에 일반적으로 '와카가시라'라고 하면 조직 내에서 오야붕(쿠미쵸) 바로 밑의 직위라 할 수 있습니다. 비록 와카슈, 와카모노의 사전적 의미는 "젊은이"지만 실제 연령이 젊을 필요는 없죠. 조직에 있어 공로가 컸다거나 오야붕과 함께 조직을 원활하게 운영∙관리하는 능력을 갖췄다 등 실력이 중요한 거죠.

 

이번 글에서 타오카 카즈오가 야마구치구미 3대째 쿠미쵸로 임명됐을 당시 상황을 언급하면서 타오카 카즈오가 "야마구치구미 내부 조직으로 타오카구미를 운영하고 있었다"고 이야기했지요. 이것은 한 오야붕-꼬붕 관계에서 꼬붕 입장에 있는 조직원이 독자적으로 꼬붕을 가지며 스스로 쿠미(조직)를 운영할 수 있다는 야쿠자계 관습을 반영한 것입니다. 마치 한 가정의 아들이 커서 본인이 새 가정을 꾸리며 가장이 되는 것과 비슷하죠.

 

당시 야마구치구미는 쿠미쵸가 부재였기에 타오카 카즈오에게는 아버지가 없었지만 만약 쿠미쵸가 있었으면 타오카 카즈오는 야마구치구미 쿠미쵸와의 관계에서 "와카슈"임과 동시에 야쿠자 조직인 타오카구미의 쿠미쵸이기도 한 겁니다. 그리고 타오카구미는 두목이 야마구치구미 쿠미쵸의 꼬붕이므로 "야마구치구미계 타오카구미"라고 불리기도 했을 겁니다(실제로는 야마구치구미는 쿠미쵸가 없었기에 타오카구미는 그냥 "야마구치구미 내부적 조직"이라는 애매한 설명이 된 겁니다). 

 

또한 현재 야마구치구미가 그렇듯이 본가 오야붕과 직접 사카즈키를 받아 꼬붕이 된 것이 아니라 본가 오야붕의 꼬붕한테 사카즈키를 받은 야쿠자가 또 독자적으로 조직을 꾸미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그럴 경우 본가−2차 단체−3차 단체라는 삼층구조가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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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야마구치구미의 경우 적어도 5차 단체까지는 있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언론 등에서 "현재 야마구치구미의 조직원수는 몇 명이다"라고 할 때에는 보통 2차 단체 이하 하부 단체의 구성원을 포함한 숫자이며, "야마구치구미계 ◯◯구미(組)"라는 표현은 해당 조직이 야마구치구미의 하부단체임을 나타내는 거죠.

 

3차 단체가 생기면 조직 내부적으로 2차 단체의 위상이 상대적으로 상승될 것 같죠. 아무래도 본가 오야붕과의 관계가 가까우니까요. 그래서 본가 쿠미쵸한테 직접 사카즈키를 받았고 2차 단체의 쿠미쵸로 있는 오야붕들은 "지키산(直参, 원래는 에도시대 토쿠가와(徳川) 씨 직속의 가신을 뜻함)"이나 "직계 쿠미쵸" 등으로 불리죠. 어쨌든 "●●구미계 ○○구미" 등의 표현은 위와 같은 야쿠자 조직의 다층적 구성에 유래한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