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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하층 중산층, 중산층, 도시노동자, 농민들의 지지를 이끌어 낸 히틀러와 나치. 그들은 이제 본격적인 대권 도전에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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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여기까지 오기 위해 히틀러가 내뱉은 말들이었다.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은 그 뿌리부터가 ‘루저들의 연합체’였다. 기존 체제에서 변방으로 밀려났던 이들이 권력을 쟁취하겠다는 ‘망상’을 가지고 시작한 정당이었다.

 

(나치당이 권력을 잡는 과정을 보면, 이건 ‘하늘의 도움’이라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다. 히틀러는 어릿광대의 역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독일 국민들이 보고 싶고, 듣고 싶은 것들을 말해주는 광대. 어떤 대단한 신념이나 철학도 없었다. 히틀러가 말한 반유대주의, 독일 민족의 생활권이나 인종주의 등등은 이미 나와 있던 것들을 자기 멋대로 조합한 생각들이었다. 이 와중에 니체를 끌어와 합리화 시키는 모습은... 니체의 사상 중에서 필요한 것만 도려내와 자기 멋대로 해석해 버린 히틀러를 보면서 참...)

 

굳이 비교하자면, 아스팔트 보수라 불리는 ‘태극기 부대’와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그들의 사상이나 주장에 가치판단의 기준을 들이미는 게 아니라 그들의 조직 시발점과 행동양태를 보면 역사를 뒤적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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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대의 지지율을 보였던 나치당은 대공황을 거치며 18%, 이제는 대권을 노려볼 위치까지 올라섰다. 권력을 노려보게 되면서 이들은 막말을 자제하고, 돌격대를 자중시키고(은밀한 폭력은 계속 이어졌지만... 수권 정당이 되면서 돌격대는 애물단지가 됐다. 한때는 경찰 조력자로 인정 법적인 지위까지 줬지만, 합법적인 권력을 잡기 위해서는 군부의 지지와 기득권층의 지원이 필요했다. 결국 룀은 처단됐다. 바로 ‘장검의 밤’이다), 기득권층을 끌어안아야 했다.

 

이 대목에서 활약했던 게 괴링이었다. 까놓고 말해서 히틀러는 오스트리아 촌놈이었다. 나치당에 입당하기 전까지 만난 사람들의 수준이 그러했고, 555번 당원 번호(55번째 당원인데, 당원번호가 555번이다. 당원번호는 501번부터 시작된다. 나중에 이 당원번호 때문에 시비가 붙는다)를 받은 후에 만난 사람들도 사회의 루저들이었다. 히틀러가 독일 사회 상층부와 접촉할 수 있었고, 상류층 문화를 습득할 수 있었던 건 괴링의 덕이었다(기본적인 에티켓부터 상류층의 성향이나 문화 등등을 괴링이 코치해 줬다고 볼 수 있다. 괴링이 없었다면, 히틀러는 집권은커녕 정치가로 데뷔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2차대전 당시 괴링이 수많은 뻘짓을 했음에도 히틀러가 괴링을 용인했던 이유이기도 했다. 괴링은 나치 정권 내에서는 창업공신이며, 가장 큰 지분을 가진 인물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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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는 기본적으로 상류사회를 증오했다. 대외적인 모습이 그러했다. 나치의 지지기반을 생각하면, 초창기 나치당의 성격을 보면, 그리고 히틀러의 인생과 성격을 보면 사회 기득권층과 자본주의는 ‘악’이었다. 반자본주의의 모습으로 세를 불린 히틀러와 나치였기에 가진 자들과 손을 잡는 건 어려워 보였다.

 

실제로 독일 기득권층은 나치에 무관심했다. 이들이 지원했던 이는 힌덴부르크였다. 이때까지 히틀러는 어릿광대의 모습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독일 주재 영국 대사관에서는 히틀러가 집권을 했을 당시, 몇 개월 집권을 한 뒤 다시 뒤집혀질...스쳐지나가는 존재 정도로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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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히틀러의 인생은 ‘맥주홀 반란’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졌다고 본다(1차 세계대전 참전이 갈라놨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히틀러 인생의 가장 큰 변곡점은 맥주홀 반란이라고 본다).

 

비합법적인 방법이 아닌 합법적인 방법으로 정권을 잡겠다는 결심.

재판 과정에서 얻게 된 전국적 인지도.

 

이 두 개를 배경으로 히틀러는 새로운 인생을 설계하게 된다. 물론, 나치당의 당세는 확 꺾이긴 했다(당원 수가 확 줄어들었다. 나치당의 당원 수 증감 추이를 보면, 나치당 구성원들의 성향을 확인할 수 있다. 어떤 거창한 신념이 아니라 개인적인 욕망의 실현을 위한 정치 참여란 의미다. 실제로 나치가 정치적으로 유의미한 성과를 보이자 당원 수가 폭증하게 됐고, 연립정권으로 대권에 가까이 갈 때쯤 되면 나치는 신규 당원과 기존 당원의 차이를 구분하기 위한 방법들을 고민하게 된다).

 

합법적으로 정권을 잡기 위해선 우선 세를 규합하고, 이 지지기반을 가지고 기득권층과 손을 잡아야 했다. 문제는 지지기반을 얻기 위해 내뱉은 말들이었다.

 

1926~1927년을 기점으로 히틀러는 상류층 인사들과 본격적인 접촉을 시작했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가진 자’들은 히틀러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런데, 1927년부터 이야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먼저 움직인 건 기업가들이었다.

 

“지금 이대로 독일을 내버려 두면 어떻게 되겠는가?”

“지금 정권은 정치적으로 불안하다. 언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날지 몰라.”

“스파르타쿠스단이 봉기한 걸 생각해 봐.”

“독일 공산당이 다시 봉기하지 말란 법이 어디 있어?”

 

당시 기업가들에게 하나의 악몽이 있었는데, 바로 스파르타쿠스단의 봉기였다. 독일 공산당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스파르타쿠스단은 1919년 1월. 그러니까 패전 직후에 봉기를 일으킨다. 이때 활약했던 게 그 유명한 여류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이다.

 

패전 직후의 혼란기에 불거진 혁명의 분위기를 진압한 건 바이마르 공화국이 동원한 정규군과 우익세력... 아니, 준군사단체라 할 수 있는 자유군단(Freikorps)이다.

 

(오늘날 대한민국 아스팔트를 점령한 태극기 부대도 계기만 있다면, 직접 행동으로 옮길 수도 있다. 1차 대전 직후 퇴역 예비역들이 뭉쳐서 만들어진 자유군단은 스파르타쿠스단을 비합법적... 그러니까 폭력으로 진압했고, 뒤이은 동프로이센의 폴란드 민족주의도 힘으로 제압했다. 나중에 이들은 정부의 해산명령을 따르지 않고 ‘봉기’를 준비한다. 바로 카프 폭동이었다. 이들은 바이마르 공화국 자체를 뒤엎어 버리고 자신들의 세상을 만들려 했다가 실패한다. 이후 자유군단 멤버들은 이곳저곳의 정치세력에 붙어서 각자의 무장 세력이 된다. 그러다가 나치가 집권하면서 각자 흩어져있던 자유군단 멤버들은 돌격대로 모두 흡수한다. 이때쯤 되면 돌격대는 독일군을 위협하는 수준을 넘어서 나치당을 위협할 수준으로 커져버렸고, 결국 장검의 밤으로 해체 수순을 밟는다.)

 

까놓고 말하자. 가진 자들은 변화를 싫어한다. 이들이 가장 싫어하는 게 뭘까? 바로 공산주의 혁명이다. 자기들이 가진 걸 빼앗아가겠다는 거다. 당연히 공산주의에 대해서는 알레르기적인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다.

 

러시아의 11월 혁명 후 등장한 사회주의 정권을 보고, 서구사회는 경악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서구사회의 ‘가진 자’들이 경악했다. 무산자들이 혁명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다니... 이게 러시아만의 일일까? 이게 세계로 퍼져나가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이들은 시베리아에 포로로 잡혀간 체코슬로바키아 병사를 구출한다는 명분으로 러시아 혁명에 개입한다. 이때 참여한 국가가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등이었다. 이들은 러시아 내의 반혁명 세력을 지원했지만... 결국은 실패하고 만다. 이 기억은 자본주의 체제의 국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다.

 

소위 말하는 ‘붉은 30년대’의 도래는 자본주의 체제 국가의 기득권층에게는 악몽이었다. 러시아... 아니, 소련은 폐쇄된 상태에서도 압도적인 경제성장을 보여준다. 스탈린의 철권통치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는데, 농민들을 강제로 끌고 와 공장에 집어넣었다. 어느새 소련은 농업국가에서 중공업 국가로 변신했다. 이 와중에 수많은 인민이 희생됐지만, 서방세계는 이게 알려지지 않았다. 대공황과 겹쳐진 사회불안은 가지지 못한 자 들을 요동치게 했고, 그들의 롤 모델로 등장한 소련에 대한 증오가 퍼져나가던 때였다.

 

(트로츠키주의의 연속 혁명론의 생각과 비슷한... 아니, 당연한 연상작용이 등장했다. 소련이 했다면? 서방세계도 일어나지 말란 법이 없다. ‘두려움’이 자본주의 체제의 기득권층 사이에 똬리를 틀게 된다. 소련이 자본주의 국가들 내의 혁명세력을 도와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킨다면? 스탈린은 국제적인 혁명의 전파 이전에 소련의 안정이 우선이라 생각하고, 농민들을 갈아 넣어 소련을 중공업 국가로 탈바꿈 시켰다. 일국사회주의로 달려가는 와중이었지만, 이 놀라운 성장 앞에서 국제사회는 소련이란 나라를 두려워했다.)

 

나치 집권 시절(2차 대전 전쟁 직전까지) 서방세계(특히 미국의 기업가들)는 나치 독일을, '기업하기 좋은 나라' 라며 앞다투어 독일에 투자했고, 나치당과 히틀러에 줄을 대려고 노력했다.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거나 노동쟁의를 하면, 게슈타포가 달려와 노동자들을 두들겨 패고, 주모자들을 끌고 갔다. 파업은 1시간 안에 진압되는 게 기본이었다. 

 

소련에 대한 맹목적인 증오, 공산주의에 대한 무차별적인 배격! 자본가들에게 나치는 축복이었다. 아직 나치가 집권하기 전인 1927년 독일 기업가들은 히틀러와 나치에게서 하나의 희망을 발견한다.

 

“히틀러라면 이 허약한 바이마르 공화국에 중심을 잡아 줄 거야.”

 

먼저 움직인 건 바이에른 주의 지방 기업가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