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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국민들로부터 엄청난 지지를 받았던 유럽의 왕실들이 있다. 그 중 현재의 결과가 극단적으로 달라진 두 왕실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려 한다. 두 왕실 모두 과거의 인기는 하늘을 치솟았다. 그러나 현재 한 왕실은 여전히 국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고, 다른 왕실은 과거의 날개가 추락했다. 덴마크와 스페인의 왕실 이야기다.  

 

 

국민 인기도 최강 덴마크 왕실

 

1. 덴마크 왕실 인기의 이유

 

벨기에의 레오폴드 2세가 콩고에서 사람 손목 자르던 시절(이전 편 참조 링크), 덴마크의 왕과 왕세자는 그 소식을 접하고 매우 빡쳤다. 덴마크라고 제국주의 착취를 완전히 안 한 것은 아니지만 영국, 프랑스, 벨기에 같은 나라들에 비하면 굉장히 양호한 수준이었다. 

 

일단 왕부터가 노예제를 혐오하는 사람이었고, 왕세자 크리스티안은 레오폴드 2세에 대해 “그놈이 인간이라면 내가 예수 그리스도다”라는 분노의 어록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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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안 10세

 

왕세자는 즉위하여 예수 그리스도 1세, 아니, 크리스티안 10세가 되었고, 말년에는 나치의 침공을 받아 어쩔 수 없이 독일의 보호령이 되는 것을 승낙했다. 하지만 왕궁에 걸린 나치 깃발을 내리라고 명령한다던가, 혼자서 말을 타고 코펜하겐 시내를 돌아다니며 독일군을 자극하고 국민들을 독려한다던가 하는 식으로 저항을 표했다. 

 

국민들과 덴마크 정부 역시 이에 호응하여 나치에 매우 비협조적으로 나왔다. 크리스티안 10세는 히틀러의 생일 축하 메시지를 받고도 ‘ㅇㅇ ㄱㅅ’ 정도의 무성의한 회신으로 퉁쳤다. 덴마크의 어깃장에 삐친 히틀러는 덴마크 영토인 그린란드가 자치 독립을 시도했을 때 지지를 보냈다.

 

이런 사람의 손녀가 현재의 왕인 마르그레테 2세다. 일러스트를 꽤 수준 높게 전공하여, 반지의 제왕과 호빗의 덴마크판에 들어가 있는 일러스트 원안이 여왕의 작품이다. 로열 덴마크 발레의 공연 의상도 디자인했다고 한다. 디자이너로서의 예명은 잉가힐드 그래스머(Ingahild Grathmer)다. 귀족을 경제 측면에서 정의한다면 ‘직업을 갖지 않는 계층’이 될 것이니, 직업적 전문성을 가진 여왕은 매우 특이한 경우다.

 

그래서인지 마르그레테 2세는 왕위 또한 직업으로서 인식한다고 한다. 직업란에 ‘왕’ 혹은 ‘세습직 정치인’이라고 적으면 멋질 거 같다. 이런 여왕에 대한 국민의 지지도는 2015년에 82%를 찍었다. 덴마크 왕실이 큰 잡음 없이 잘 돌아갔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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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덴마크 여왕 마르그레테 2세와 그녀의 작품 / 위 일러스트 작품은 호빗의 덴마크판 삽화 中 하나이다. 

 

그만큼 덴마크 왕실의 흥미로운 가십은 눈에 잘 안 띈다. 현 왕세자 프레데리크의 아내 메리 도날드슨 왕세자비도 평범하다. 호주 사람이고, 마케팅 업계의 평범한 회사원이었고, 시드니 올림픽 때 시내 펍에서 놀다가 프레데리크 왕세자를 만났고, 연락을 주고받다가 연인이 되었다. 기껏해야 아버지 존 도날드슨이 딸의 약혼 당시 카이스트에서 수학 교수로 있었다는 정도가 한국인의 눈에 띄는 일화다. 그래서 왕세자의 결혼 요청 서신에 대한 승낙의 답장을 최고급 한지에 써서 보냈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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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데리크 왕세자와 메리 도날드슨 왕세자비  

 

2. 덴마크 왕실의 최고 화제 인물, 알렉산드라 왕자비

 

메리 도날드슨 왕세자비는 덴마크 왕실의 눈에선 호주 촌티가 나긴 했지만, 심각한 과거사도 없으니 적당하고 무난한 세자비였다. 물론 약혼 직후부터 덴마크 황색 언론은 신분, 외모, 덴마크어 실력 등으로 트집을 잡긴 했다. 특히 덴마크어 실력의 경우, 비교 대상이 있었다.

 

덴마크 왕실의 진짜 가십 이슈인 알렉산드라 왕자비였다. 알렉산드라 왕자비는 메리 왕세자비가 약혼하던 당시, 둘째 왕자인 요아심의 아내였다. 현재는 이혼했는데, 알렉산드라 왕자비에게는 유럽 어느 왕가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보적인 특성이 있었다. 홍콩 출신의 중국 혼혈인 동아시아계이기 때문이다.

 

영국-중국계 혼혈인 아버지와 체코-오스트리아 혼혈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알렉산드라는 오스트리아와 일본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세계 여기저기서 근무하며 잘나가던 커리어우먼이었다. 모국어인 영어와 중국어 외에도 부모에게 배운 독일어와 프랑스어도 구사 가능했다.

 

세상에서 상위권으로 어려운 덴마크어 공부하느라 죽을 맛인 메리 왕세자비로선 슬프게도, 알렉산드라 왕자비는 6개월 만에 덴마크어를 마스터했다. 1995년에 결혼하자마자 국제 엘리트다운 빠른 속도로 왕족 생활에 적응하고, 모범적인 활동으로 인종차별적 시선을 응원의 시선으로 바꿔놓는 데에 성공했다. 공무 활동 또한 장애인, 미혼모, 에이즈 퇴치 등 무겁고 중요한 이슈여서 ‘북방의 다이애나’라는 별명도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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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아심 왕자와 알렉산드라 전 왕자비

 

그러나 철이 덜 든 남편 요아심 왕자는 결혼 초기부터 바람을 피워댔고 재정 관리도 엉망이었다. 아내가 공무 참석으로 바쁘게 지내는 내내 파티에서 놀기만 하면서 ‘파티 프린스’ 소리를 듣고 다녔다. 결국 두 사람은 결혼한 지 10년이 지난 2005년에 이혼했다. 왕세자 부부가 결혼한 다음 해이기도 했다. 이것이 덴마크 왕실 최초의 이혼이라고 한다.

 

결혼으로 들어온 왕족이 이혼해서 나간 경우엔 보통 칭호와 작위를 회수하고 적당한 귀족 작위만 유지시켜주는 것이 보통이다. 마르그레테 2세는 알렉산드라의 칭호를 회수한 후에 이례적으로 일반 귀족이 아닌 방계 공주에게 주는 호칭과 작위를 수여 했다. 

 

망나니 요아심의 아내이자 유럽 최초의 동아시아계 왕족으로서, 고생하면서도 성실하게 책무를 수행한 공로를 여왕이 인정한 것이라고 해석되고 있다. 국민들 또한 10년 동안의 고생과 성실을 지켜보았기에 오히려 알렉산드라의 이혼을 축복(!)해주는 편이었다. 우리 왕자님 때문에 고생 많아쓰요!

 

슬하의 왕자 둘 또한 알렉산드라가 양육하는 것으로 결정됐다. 방계 공주의 칭호는 알렉산드라 맨리가 2007년에 왕실 사진사와 재혼을 하면서 반납했다. 그녀는 2015년에 또 이혼을 했는데, 여전히 프레데릭스보르 백작위를 보유하고 있으며, 왕실 공식 행사에 간간이 참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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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데리크 8세

 

알렉산드라 맨리의 덴마크 왕실 편입은 유럽은 물론 전 세계 왕실에서 매우 이례적인 결혼 사례였다. 이혼 후의 예우는 더욱 독보적이다. 제국주의 시대 사람이면서도 노예제를 혐오하던 크리스티안 10세와 그 아버지 프레데리크 8세의 도덕적이고 진보적인 영혼이 떠오른다. 그리고 몇몇 늙은이들은 멋졌던 알렉산드라 왕자비를 오늘도 떠올리면서 메리 왕세자비와 비교를 하고 앉아 있다.

 

 

자랑스런 과거의 영광, 스페인 왕실

 

1. 스페인의 민주주의를 이룬 왕, 후안 카를로스 1세

 

스페인은 왕실이 내쫓겼다가 돌아왔다. 이 복권의 역사에는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큰 역할을 했다. 프랑코는 자신이 복권시킨 젊은 왕을 믿었으나, 왕께서 말씀하시니 스페인은 민주국가가 되었다.

 

알폰소 13세라는 스페인 왕이 있었다. 쿠데타 독재자를 승인하고, 의회를 없애고, 공화제를 없애려고 들었다. 그래서 왕이 쫓겨나고 좌우대립이 커지더니 스페인 내전이 발발했다. 왕족들 모두가 뿔뿔이 흩어져 해외로 망명했다. 내전의 승자는 프란시스코 프랑코였고 그가 스페인의 새로운 철권독재자가 되어 종신집권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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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폰소 13세

 

프랑코는 스페인 왕국의 섭정을 자처하는 사람이었다. 의회 따위는 허수아비로 만들어버렸으며 귀족제를 부활시켰다. 프랑코 정권 말기에는 왕정복고 준비도 완료했다. 왕만 세우면 되는 상태였다. 왕을 옹립하는 시점은 프랑코 사후로 결정됐다.

 

준비도 다 됐겠다, 죽음을 앞둔 프랑코는 후계자와 왕을 동시에 물색했다. 후계자는 해군 블랑코 원수로 정했는데, 하필 바스크 분리주의 세력에 의해 암살당해 버렸다. 그래서 프랑코는 아예 새로 만들 왕을 자기 후계자로 삼아서 스페인 왕국의 무궁한 영광을 맡기기로 했다.

 

프랑코가 고른 후보는 이탈리아에 망명 중이던 후안 카를로스 왕자였다. 후안 카를로스의 아버지는 바르셀로나 백작으로, 마지막 왕이었던 알폰소 13세의 3남이다. 따라서 백작이 차기 왕으로 더욱 어울렸으나, 백작의 이념은 자유주의였다. 프랑코와는 정반대에 서 있는 사람이다. 결국 낙점된 사람은 그 아들인 후안 카를로스.

 

자유주의 왕족의 아들 후안 카를로스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프랑코에게 갔다. 사실 긴 망명 생활 때문에 아버지와 친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프랑코와 사실상의 유사 부자 관계를 형성했다. 프랑코 입장에서는 미래의 왕이 자신의 정치적 후계자이기도 했으니 집권 준비를 열심히 도와줘야 하기도 했다. 지금까지도 후안 카를로스는 프랑코에 대한 개인적 차원의 존중과 호감을 숨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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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코

 

프랑코가 죽고 그의 안배대로 정국이 흘러갔다. 프랑코가 지명해뒀던 사람이 총리가 되고, 후안 카를로스가 즉위해 왕정복고가 완료되었다. 이제 왕은 프랑코 시스템을 돌리면 되었다. 그러나 후안 카를로스 1세는 프랑코를 완벽히 배신하고 민주주의를 추진했다. 자유주의자의 아들이 무릎을 꿇은 것은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후안 카를로스 1세는 먼저 프랑코가 만든 총리를 정치적으로 압박해 사퇴시켰다. 후임 총리는 다당제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아돌포 수아레스를 임명했다. 그리고 총선을 실시하겠다고 발표했다.

 

배신감에 치를 떠는 군대 내의 극우파들이 이럴 때면 늘 하던 일을 일으켰다. 쿠데타 말이다. 왕은 TV에 나와 사단장들에게 쿠데타에 동조하지 말 것을 명령했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군 인맥을 움직였다. 결국, 쿠데타는 동조자가 충분히 생겨나지 않아 실패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왕의 군 인맥은 프랑코가 만들어준 것이었다.

 

심지어 공산당까지도 왕을 찬양했던 1981년의 쿠데타 실패가 지나고, 총선이 무사히 실시되어 사회노동당 정권이 들어왔다. 의회와 내각이 꾸려졌다.

 

스페인과 같이 여러 세력이 정치력을 갖고 있는 데다 분리주의 운동도 강한 나라에선 급격한 정치적 격변은 내전으로 발전하기 쉽다. 스페인은 이미 그 상황을 실제로 겪어보았다. 하지만 이번엔 왕이 나서서 과정을 조율했다. 왕은 조금씩 정치 권력을 놓아가면서 현재의 스페인 체제를 견인해갔다. 그 결과 몸살을 겪지 않고 부드럽게 체제 전환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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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데타가 일어났을 당시, 후안 카를로스 1세

 

프랑코 독재 유산의 청산은 미흡했지만, 그건 좀 다른 문제다. 당면한 문제는 2차 내전 없이 정국 안정을 만들어내는 것이었으니까.

 

이 공적으로 인해 2007년에는 ‘가장 존경스러운 스페인인’ 조사에서 후안 카를로스 1세가 1위를 했다. 무리도 아니었다. 하지만 말년이 되면서는 체면을 많이 구겨서 왕정 철폐 여론이 강해졌다. 그러고 보니 잠시 잊고 있었지만 스페인은 왕을 내쫓고 내전을 벌였던 나라다.

 

2. 자랑스런 스페인 왕실의 추락

 

2010년대, 스페인 경제가 어려울 때였다. 그런데 왕이 보츠와나에 사냥 여행을 가기 위해 돈을 많이 쓴 것이 들통났다. 그 정도기만 했다면 국민들이 넘어갔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노령의 왕이 여행 중에 부상을 당해 스페인으로 실려 왔다는 거다. 알고 보니 사냥을 하다 다친 것도 아니었다. 화장실에 가려다가 넘어진 것이었다.

 

열정의 나라 스페인은 화낼 때도 열정적이다. 후안 카를로스 1세는 안 하려고 빼다가 결국, 대국민 사과를 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연애 스캔들까지 터졌다. 결국 왕은 퇴위를 선택하고, 아들 펠리페 6세에게 양위했다.

 

퇴위 후에도 수난은 끝나지 않았다. 혼외 자녀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친자 확인 소송을 걸었다. 왕으로서의 면책권을 이용해 간신히 넘어갔나 했더니, 2018년에는 내연녀에게 탈세와 돈세탁으로 고발당했다. 그 외에도 크고 작은 사건사고가 계속 이어졌다. 결국 금년 3월에는 왕실 배당금을 박탈당하는 데까지 왔다.

 

선대 왕 말고도 말썽쟁이 왕족이 하나 더 있다. 펠리페 6세의 둘째 누나인 크리스티나 공주와 그 남편 이나키 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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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나 공주와 남편 이나키 공

 

스페인은 벨기에보다도 계승법 개정이 늦어서, 아직 절대적 장자 계승이 아니라 남성 우선 계승이 원칙이다. 그래서 1남 2녀 중 막내인 펠리페가 왕위를 승계했다. 첫째 공주님은 이혼을 빼면 큰 문제가 없는데, 둘째 누나네 부부는 문제가 좀 컸다.

 

2016년, 억대의 횡령과 탈세 혐의로 크리스티나 공주와 그 남편이 형사재판을 받게 되었다. 왕족들이 줄줄이 증인과 피의자로 출석하는 진풍경이 이어졌다. 재판의 결과로 이나키 공은 대법원에서 징역 5년 10개월을 선고받았다. 크리스티나 공주는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그간 번 돈 중에서 범죄 관련 수익으로 보이는 일부는 몰수당했다. 펠리페 6세는 둘째 누나에게 많이 실망했나 보다. 크리스티나 공주는 작위도 뺏기고 왕궁 출입권도 제한당했다.

 

왕 주변에 구설수 많은 사람은 또 있었다. 펠리페 6세의 아내인 레티시아 왕비도 황색 언론의 동네북이었다. 그나마 이 경우는 양호한 편이다.

 

네덜란드의 막시마 왕비(이전 편 참조 링크)만큼은 안 되어도 상당한 엘리트 출신으로, 3대 언론인 가문의 딸이었다. 공영방송의 아침 뉴스 메인 앵커였고, 21세기 들어서는 미국 대선 특파원과 이라크 종군기자 경력을 쌓았다. 

 

2002년 스페인 갈리시아 해변의 원유 유출 사고를 취재하러 갔다가 현지 위문 나온 펠리페 왕세자와 만나 결혼까지 오게 되었는데, 가장 큰 문제는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에서 이혼 전력이 있다는 것이었다.

 

한 번 밉보이면 모든 것이 미운 법이다. 행사 자리와 묘하게 맞지 않는 패션 센스도 문제가 되었다. 그래도 그 정도는 왕족이 생산할 법한 적당한 가십이다. 대신 자기 말을 중간에 끊으려 드는 왕을 제지하고 자기 말을 끝맺는 당당한 모습은, 스페인의 답답한 보수적 가부장제에 지친 스페인 여성들에게 사이다가 되어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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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스페인 국왕 펠리페 6세와 레티시아 왕비

 

그나마 아버지와 둘째 누나 부부가 사고를 치고 다닌 덕에 왕 부부는 여론의 어부지리를 얻었다. 그래도 아직 왕정 폐지 여론은 무시하지 못할 30~40% 정도를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스페인 왕실은 오늘도 위태롭다.

 

후안 카를로스 1세로서는 위대한 스페인인 1위, 뭐 그런 거 다 소용없다고 한탄할 수는 있겠다. 그래도 그는 민주화를 이뤄낸 왕이라는 흔치 않은 이력을 역사에 남겼다. 비록 제국주의 성향도 좀 있고 말년에 심각한 스캔들을 여럿 만들었지만, 저 업적 하나로도 대왕 칭호가 아깝지는 않다.

 

그런데 바로 몇 달 전인 8월 2일, 후안 카를로스 선대왕은 스페인에서 야반도주해 외국으로 도망쳤다. 2008년에 사우디아라비아로 고속철도 건설을 수출하는 과정에 개입해 한탕 땡기신 것이 들켜버린 것이다. 그의 거처를 두고 이런저런 소문이 많았으나, 왕실은 추후에 그가 아랍에미리트(UAE)에 있다고 밝혔다. 그리고 스페인 검찰은 지금으로부터 이틀 전, 후안 카를로스의 또다른 비리 의혹을 발표했다. 대왕의 웃픈 말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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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서울경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