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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련이 더 대단한 거 아냐? 

맥린 박사에 의해 최대한 단순하게 만들어진 열추적 공대공 미사일 <사이드 와인더>. 이 최신 미사일은 ‘기술유출’을 막는다는 이유로 엄격하게 수출 금지됐다. 그런데 덜컥 하나의 사건이 터진다. 바로 “스푸트니크 쇼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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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10월 4일, 소련의 인공위성이 우주로 날아오른 거였다. 이 작은 위성 하나가 전 세계와 미국을 뒤흔들어 놨다. 길거리 인터뷰에서 미국 여성은 이런 우주 발사체는 미국이 먼저 쐈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반문할 정도였다. 즉시, 미국의 공교육 체계에 대한 점검이 들어갔고, 미국은 자신들도 인공위성을 쏠 수 있다며 인공위성을 쏘아 올렸으나 실패했다. 

 

(미국의 로켓 발사체 개발은 V-2 로켓을 만든 폰 브라운을 개발자로 앉히면서부터 제대로 궤도에 올라갈 수 있었다. 폰 브라운이 만든 새턴 로켓 덕분에 닐 암스트롱이 고요의 바다에 발자국을 찍을 수 있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미국의 동맹들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미국보다 소련이 더 기술이 뛰어난 거 아냐?”

“우리 줄 잘못 선 거 아냐?”

 

동맹국들의 흔들림을 눈치 채 미국은 선물 보따리를 풀기로 작정한다. 

 

“야야, 소련애들 그거 어쩌다 운이 좋아서 그렇게 쏜 거야! 우리도 로켓 준비한다니까 그러네... 아, 그리고 기술력을 말하는 애들이 좀 있는데, 우리 기술력이 어떤 기술력인지 네들도 잘 알잖아? 이거 뭐... 열추적 미사일이라고... 네들 이런 거 쏴 봤어?”

 

조직원들 관리하는 조폭 보스가, 흔들리는 조직원들의 마음을 다독이라는 걸까? 소련의 기술력이 미국을 앞서는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 미국은 동맹국들에게 선물을 풀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사이드 와인더>였다. 이 당시에 미국은 2차대전 패전국인 독일, 일본에게까지 사이드와인더 미사일을 팔았다. 그야말로 대 바겐 세일이라고 해야 할까? 

 

이때까지만 해도 크게 문제가 없었으나... 

 

 

2. 대리전 

2차 대만해협 위기. 바로 금문도 포격전이 터진 거였다. 중국 본토가 코앞인 금문도(중국 본토에서 배로 10분 거리였다. 짧은 곳은 본토에서 10킬로미터 내외의 거리다)는 국공내전 막바지에 타이완으로 도피한 국민당 최후의 방어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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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1958년 8월 23일 일제히 포탄을 발사했다. 이날 이후 금문도에는 47만발이 넘는 포탄이 떨어졌다. 이로 인해 총 85명이 사망하고, 136명이 부상당했으며, 2,649채의 주택이 완전 파손, 반파된 가옥도 2,397채나 됐다. 이 당시 금문도에는 4만 명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모두 군인이었다.  

 

길이 20킬로미터 폭 5킬로미터 짜리 이 작은 섬(?)은 화강암 지질이어서 어지간한 포격은 다 받아낼 수 있었다. 대만군은 이 화강암 지반을 파 들어가 진지를 구축해서 반격했다. 이후 44일간 포격전에서 대만군은 버텨냈다. 

 

(금문도는 고량주로도 유명한데, 금문 고량주의 전신인 주룽장이 1952년 금문도에서 만들어진다. 이 역시 군대가 만든 거다. 양안 문제가 살기 등등했던 시절, 금문도에는 10만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이때 장제스 휘하의 후롄 장군이 금문도가 수수재배에 최적화 됐다고 판단했다. 병사들에게 먹일 고량주를 만들겠다고 수수를 재배했고, 이걸 가지고 고량주를 만든 거다)

 

금문도의 포격전이 끝난 뒤 섬의 고도가 2미터나 낮아졌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전투는 치열했다. 이 당시 미국은 타이완이 금문도에서 밀려나는 걸 원치 않았다. 그렇다고, 대만군을 직접 지원하는 것도 싫었던 미국은 <사이드 와인더>를 대만에 지원하기로 했다. 

 

당시에 중국은 소련에서 수입한 Mig 15, 17 전투기를 100대 이상 금문도 인근에 전개해둔 상황이었다. 당시 대만은 Mig 15와 성능이 비슷한 F-86F 세이버 32대 뿐이었기에 여차해서 공준전이 벌어지면 밀릴 게 뻔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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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F-86과 소려의 미그 15는 한국전 때 붙은 바 있다. 

둘의 대결구도는 밀리터리 사이트에서 큰 떡밥이기도 하다.

 

 

미국은 부랴부랴 기술자와 미사일을 세트로 묶어서 대만으로 보낸다. 이들은 9월 중순까지 세이버에 <사이드 와인더>를 장착하는 개조작업을 진행한다. 

 

그리고 운명의 1958년 9월 24일. 역사적인 대만과 중공의 공중전이 펼쳐진다. 

 

 

3. 역사를 바꾼 불발 

양쪽 전투기들이 맞붙었을 때 누가 봐도 대만군이 열세였다. 그런데, 대만군의 일방적인 학살이 이어졌다. 미그기들은 잘해봐야 기관포로 무장한 게 다였는데, 세이버에서 발사한 열추적 미사일에 최소 10대 이상의 미그기들이 격추된 거다. 

 

역사상 최초의 공대공 미사일이 동원된 공중전이었다. 

 

이 당시 중공군은 사이드와인더라는 무기의 존재도 몰랐고, 이들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덤벼들었다. 이 때문에 피해가 컸다. 여기까지만 보면 미국과 대만의 일방적인 승리며, 완벽한 결과였다고 말할 수 있었는데... 문제가 터져버린다. 

 

바로 불발된 2발의 <사이드 와인더>가 문제였다. 

 

한 발이 빗나가면서 한참을 날아가 중국 쪽 논에 떨어진다. 날아가다 떨어진 거라 이리저리 망가지긴 했지만 의외로 부품들 대부분이 멀쩡하게 남아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한 발은 황당한 게... 중국 전투기를 쫒아가다가 명중한 것까지는 좋은데, 터지지 않고 그대로 전투기에 꽂힌 거다. 전투기는 일단 살았으니 어찌어찌 기지로 돌아갔고 그대로 멀쩡한 <사이드 와인더>를 중국이 획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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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그야말로 로또 1000개를 동시에 맞은 셈. 

출처: 중국화가 웬민쥔

 

미국에 배치된 지 정확히 3년밖에 안 된 최신예 공대공 미사일이 적성국에 넘어간 순간이다. 한 발은 깔끔하게 원형 그대로, 다른 한발은 비교대조까지 가능한 상태로 넘어갔으니, 미국 입장에서는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중국에는 사이드와인더 같이 복잡한 무기를 분해하거나 복제할 기술력이 없었고, 결국 이 중에 멀쩡한 한 발은 ‘복제하면 중국에도 수출한다.’는 조건으로 소련 쪽으로 넘어가게 된다.  

 

이 당시 소련도 공대공 미사일 몇 종류를 개발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대표적인 예가 AA-1 알칼리라고 부르는 K5 로켓인데, 레이더로 표적을 지시해서 유도하는 방식이라 쓰기도 까다롭고 성능도 영 시원찮았다. 이런 상황에서 떡하니 완성된 미사일이 고스란히 떨어진 거다. 

 

(또 다른 가설 하나는 당시 스웨덴의 대령이었던... 그리고 소련의 스파이였던 스티그 베네슈트롬 대령이 미국에게 넘겨받은 사이드와인더 자료를 소련쪽에 빼돌렸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어쨌든 확실한 건 이 시기 소련은 미국의 사이드와인더 자료를 가지고 와 자국의 미사일을 만들었다는 거다)

 

이 당시 소련도 미국의 다른 연구소들처럼 적외선 유도기 체제를 연구했지만, 미국의 다른 연구소들처럼 다 실패했다. 물론, 대함미사일용 유도장치로 적외선 유도장치를 만들어 스틱스 대함미사일에 달긴 했지만, 이건 덩치가 커다란 대함미사일이었다. 공대공 미사일로 쓰기엔 너무 컸다. 

 

그런데 이들 앞에 <사이드 와인더>가 떡하니 등장한 거다. 이 당시 빔펠 설계국의 수석 설계자 제냐디 소콜로브스키가 이렇게 말했다. 

 

“<사이드 와인더> 미사일은 우리의 기술적 관점을 뒤엎고 미래에 만들 미사일의 방향성을 가르쳐준 공과대학 같은 존재였다.”

 

실제로 소련은 <사이드 와인더>를 철저히 분석해서 소련식 규격대로 복제했다(참조나 참고가 아니라 그대로 복제했다). 이렇게 해서 내놓은 게 K-13, 서구권에서 AA-2 아톨이었다. 이 당시 소련이 얼마나 철저히 베꼈는지 나중에 미국이 동구권 국가에서 아톨을 입수해 분석하니 사이드와인더 초기형과 부품을 서로 갈아 끼워도 작동할 정도로 똑같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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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복제품 K-13, 이렇게 생겼다.  

 

 

아무튼 소련은 단 1년 만에 <사이드 와인더>를 복제하고, 이후 1962년까지 생산라인을 꾸려서 일선에 배치한다. 그리고 약속대로 중국에 Mig-21 전투기와 함께 미사일을 판매한다.

 

 

4. 사이드 와인더 불발이 바꾼 역사 

아톨은 배치된 지 4년 후인 1966년 베트남전부터 본격적으로 활약하게 된다.  1966년에 베트남 공군이 격추시킨 미국 비행기가 57대 정도인데, 이 가운데 16대가 아톨에 격추당했다. 베트남전 중에만 아톨에 당한 미군기가 최소 76대 정도 되니 피해도 만만찮았지만, 더 골치 아픈 건 베트남전이 끝난 뒤였다. 소련 입장에선 어차피 복제품이고, 이걸 뿌릴수록 미국 입장이 곤란해졌기에 소련은 미친 듯이 아톨 미사일을 뿌렸다. 

 

사간 나라도 많았는데, 아프가니스탄, 알제리, 앙골라, 아제르바이잔, 방글라데시, 중국, 콩고, 유고슬라비아, 쿠바, 이집트, 에티오피아, 핀란드, 헝가리, 인도, 이라크, 북한, 리비아, 마다가스카르, 몽골, 모잠비크...

 

사갈 능력이 되는 소련 우방국은 다 가져간 거였다. 소련은 이후에도 아톨을 개량해서 적외선 유동장비를 개선하고, 사거리나 추적능력을 향상시켜가며 지속적으로 미사일을 업그레이드 했다. 그 결과, 미국은 두고두고 골치를 앓아야 했다. 

 

미그기에 꽂혔던 사이드와인더 한 발이 소련의 항공 역사와 이후 공대공 미사일의 계보도를 다시 그리게 만들었던 거다.

 

 

<불법 복제의 시대 편,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