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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바이에른 주의 기업가들이 움직이고 얼마 뒤, 대기업들이 히틀러에게 손짓하기 시작했다.

 

이 대목에서 1979~1980년 한국 재벌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은 정세 변화 앞에서 누구에게 줄을 댈지(돈을 쥐어줘야 할지)를 고민했다. 실제로 당시 기업들은 누가 실세인지, 누가 권력을 쥘까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웠다.

 

즉, 

 

“누구에게 돈을 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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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화가 디에고 리베카의 그림. 

배경에 독일의 기업가와 은행가가 있다.

 

 

독일의 대기업들이 히틀러에게 관심을 보였다. 물론, 그렇다고 풀 베팅한 게 아니다. 이 당시 히틀러에게 지원하겠다고 나선 기업가들의 생각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눴다. 

 

“히틀러가 정권을 잡고, 독일을 안정시킬지 말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 보다는 나을 거야. 최소한 지금보다는 더 안정될 거야. 그렇다고 히틀러가 끝까지 정권을 유지한다고 보긴 어렵지. 다만, 그 얼마간이라도 안정되면 좋잖아?”

 

이렇게 비관적으로(히틀러가 얼마 못가겠지만, 그래도 그 동안은 안정적이다라고)접근하는 경우와 불안감에 의해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경우였다.

 

“이대로 독일 정치판을 내버려둔다면, 결국엔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날 수도 있다. 지금은 히틀러밖에 대안이 없다. 그를 지원해야 한다.”

 

2.

툭 까놓고 말해서 당시 독일 기업인들은 불만이 많았다. 마치 프랑스 대혁명 직전의 부르주아지 계층의 재림이라고 해야 할까? 제정 시절부터 독일은 기업인들에 대해서 ‘상대적인’ 홀대를 했었다. 독일의 전통적인 기득권층은 융커(Junker)였다. 쉽게 말하면 토지귀족이다. 농민들의 노동력을 착취해 대농장을 유지하던 계층. 이들이 기반이 돼 독일을 만들어 냈다고 할 수 있다.

 

이들 토지귀족들은 여타의 다른 유럽국가의 귀족들과 약간 결을 달리했다. 대표적인 게 ‘군인’에 대한 인식 차이였다. 이들은 군 복무를 영광으로 생각했고, 장교의 자리를 ‘꽤’ 높게 평가했다. 

 

(1차 대전과 2차 대전 사이. 독일이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10만 명으로 병력이 제한됐던 시절에도 독일군 장교에 대한 대우는 여타 연합국의 그것을 훨씬 압도했다. 독일군 중위의 봉급이면 자동차를 굴릴 정도였다. 영국이나 프랑스의 같은 계급 장교가 겨우겨우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는 걸 생각하면 엄청난 차이다.

 

독일군은 프로이센 시절부터 전통적으로 군대에 대한 투자와 지원, 그리고 사회적 인식이 높았다. 이 때문에 우수한 자원을 유인할 수 있었는데, 이 모든 것의 핵심은 융커로 대표되는 독일 기득권층의 문화 때문이다. 1차 대전 당시 독일제국군 장교는 독일인만이 할 수 있었다. 유태인이 독일군 장교가 되는 건 꿈도 못 꿨다. 유태인이 장교가 될 수 있는 길은 바이마르 공국에 입대해 바이마르 공국군으로 참전한 경우다. 히틀러의 상관이었던 유태인 장교는 바이마르 공국군으로 참전했기에 가능했던 거다.

 

보불전쟁 직후부터 독일군 장교들 중 비귀족... 그러니까 시민계층 장교들이 꾸준히 늘어났지만, 군 상층부는 이에 대해서 늘 걱정했다. 전간기 10만명의 독일군을 이끌었던 폰 젝트는 시민계층이 군 장교로 들어오는 걸 경계했고, 귀족 계층의 장교들을 확보하기 위해 애를 썼다. 훗날 이게 독일에게는 악재로 다가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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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엔 군복 디자인도 한 몫했더랬지...  

 

이 융커들은 독일 제2제정. 그러니까 프로이센이 독일을 통일한 뒤에 만들어진 독일 제국시절부터 영향력을 더 확대했다. 이들의 제일 목표는 민주화를 억제하는데 온 힘을 다 쏟았다. 당연히 이들 중에는 황제가 있었던 제정시절을 그리워하는 이들이 대다수였다(바이마르 공화국의 수장인 힌덴부르크 대통령이나 독일군을 책임졌던 폰 젝트 역시 과거 회귀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이들 융커세력은 누가 됐든지 간에 국내의 불온세력(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사회 불만세력)를 억누를 수 있는 강력한 카리스마를 원하고 있었다. 그 첫 번째 대안이 힌덴부르크였다. 그러나 힌덴부르크가 죽은 거다. 

 

대안으로 등장한 이가 바로 히틀러였다. 

 

“히틀러가 조금 이상해 보이지만, 나름 카리스마도 있고 공산당이나 유대인들은...거의 사람 취급 하지 않지.”

 

“병정놀이 하는 것 같지만, 좋게 보면 뭔가 절도 있고 강인해 보이잖아?”

 

융커들의 마음이 히틀러에게 쏠렸다. 처음엔 대안의 부재였지만, 나름 인정할 부분도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기업가들이 움직이고, 융커가 뒤따랐다. 나치에 정치자금이 흘러들어오기 시작했고, 기득권층과 히틀러의 회동이 잦아졌다. 

 

(이 당시 대기업, 융커 집단은 오판을 한 게 히틀러와 파펜의 연립정권의 실질적인 리더를 파펜으로 보고 있었다. 강력한 카리스마를 보여주는 히틀러는 얼굴마담이고, 정치를 하는 건 파펜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 연립정권의 얼굴마담은 파펜이었고, 정치는 히틀러가 하고 있었다. 권력을 잡기 전 히틀러가 보여준 이미지가 히틀러를 오판하게 만든 거였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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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펜, 일케 생겼다. 히틀러를 이용하려 했으나 오히려 이용당한 인물. 

 

툭 까놓고 말해보자. 히틀러란 괴물이 독일의 권력을 얻게 된 건 이 당시 독일 하층 중류층(한국적인 분류로 보자면 차상위 계층과 그 바로 위의 ‘서민’이라 불리는 계층)의 두려움. 그리고 이 두려움을 기반으로 한 ‘욕망’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대공황이 독일 경제에 심대한 영향을 끼친 것 맞다. 그러나 이게 직접적으로 중산층의 삶을 빈곤선 이하로 끌어내린 건 아니다. 이들의 가난은 ‘심리적 빈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심리적 빈곤의 핵심은 ‘쫓긴다’는 두려움이었다. 

 

부르주아지는 가지고 있는 지식과 인맥, 자본을 가지고 자신들의 욕망을 대변할 정치세력을 찾았고, 지원했다. 프롤레타리아의 위세는 더 컸다. 1차대전 패전 이후 제정이 무너지자 가장 왕성한 활동을 보여준 세력 중 하나가 바로 공산당이었다. 프롤레타리아는 자신들의 욕망을 대변할 정치세력을 가지게 됐고, 노동조합으로 조직됐으면, 투쟁으로 자신의 요구를 세상에 내놓았다. 

 

위에서 누르고, 아래에서 치고 올라온 거다. 이 사이에 끼인 ‘서민’들은 불안해 지기 시작했다. 주변에선 하나 둘 실업과 사업부진으로 중산층에서 탈락해 거리를 떠도는 이들이 보였고, 평소 자신보다 낮게 봤던 프롤레타리아는 목에 핏대를 높여 가며 자신들의 주장을 토해내 조직을 확장해 가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살기 위해선 왼쪽으로 달려가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안정과 위로의 상승(상승은 표면적인 거고, 현재 위치를 지킬 수 있기를 바라던 안정희구욕구)을 바라던 중산층은 오른쪽으로 달려가게 됐다. 그들이 달려간 골인 지점에서 만난 이가 바로 히틀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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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의 두려움. 그들의 욕망이 히틀러의 가장 큰 지지층이었다(이 시기가 나치당의 당세가 급격하게 올라가던 시기였다). 

 

이들의 지지를 판돈으로 히틀러는 권력에 도전했고, 그 결과 독일을 손아귀에 넣었다.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 하나의 총통(Ein Volk, ein Reich, ein Führer)”

 

12년 동안 독일은 환희의 눈물과 기쁨을, 절정에 오른 희열. 그리고 나락으로 떨어진 절망을 모두 맛보게 된다.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의 시작점에는 독일 국민의 ‘욕망’이 있었다.